- 뼈에 금이 갔다면 무조건 멈춰 서야 한다. 깁스를 하고 나을때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할 테다. 이는 당연한 '상식' 이다. 마음이 부서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이란 상처받음의 연속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멈춰 서서 다친 곳을 치료하려할까? 나아가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마음의 패인 곳이 아물고 후유증이 남지 않을 만큼 넉넉하게 휴식 시간을 가질까?
- 자주 철학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잘못을 저지른 자 역시 나와 같은 인간임을 명심하라. 그는 단지 무지한 탓에 일을 벌였을 뿐이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죽게 될 운명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깊은 애정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사랑을 베풀 것이다. 굳건하게 이성적으로 처신한다면, 그들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대를 더 나쁘게 만들지는 못한다."
- “끊임없이 파도가 부딪혀 와도 끄떡없이 버티며 물결을 달래는 갯바위처럼 살아라. 이런 일이 하필이면 왜 나한테 일어났냐며 한숨 쉬지 마라. (..) 너의 마음을 괴롭히는 일 때문에 불행하다 말하지 말고, 이를 슬기롭게 이겨 내는 것이 바로 행복의 지름길임을 기억하라.”
- 분노와 화는 언제든 나를 덮칠 수 있는 광기다. 여기에 휘둘리는 상황은 내 인생에 회복 못 할 재앙이 되곤 한다. 그대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에 맞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대는 마땅히 들어야 할 충고들을 자신에게 들려주며 마음을 다독이고 있는가? “자주 철학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길 일이다.
- 내가 바란다고 우주가 가던 길을 바꾸지 않는다. (바뤼흐 스피노자)
- 성인병에 시달리기에 체중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에게 배고픔은 당연히 견뎌야 하는 고통'이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학습량을 늘려야 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은 학생은 졸음을 기꺼이 참아 낸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나중에 얻을 더 좋은 결과의 '원인'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스피노자는 이런 자세를 인생 전체로 넓혀 보라고 말한다. 태풍이 부는 까닭은 내 인생을 결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일 상을 힘들게 하려고 경제 상황이 꼬여 버린 것도 아니다. 세상은 되어야 하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필연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자세”는 삶의 고통을 누그러뜨린다. 세상 모든 일들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인생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과 같다. 닥치는 상황들이 너무나 막막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억울하기만 하다. 반면, 파도가 왜 치는지를 아는 사람은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며 어려움을 차분히 이겨 나간다. 스피노자는 “신(神)에 대한 지적(知的) 사랑”을 강조한다. 우주는 거대한 섭리에 따라 흘러갈 따름이다. 내가 바란다고 우주가 가던 길을 바꾸지는 않는다. 행복은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 이 아니다. 훌륭한 삶이란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보람으로 바꾸 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대는 눈앞의 고난과 아픔에 전전긍긍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의 원인을 차분히 따지며 '어쩌지 못할 상황'에 담담히 맞서 는가?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이 나오는가에 따라 그대 인생의 행 복과 불행은 갈린다. 차분한 마음으로 『에티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 유치원생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높고 표정도 밝다. 저마다 칭찬받을 거리가 하나씩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 먹을수록 자신감은 점점 떨어지며 낯빛도 어두워진다. 세상의 인정을 받는 길 이 돈과 명예, 권력 등 몇 개로 단순화되는 탓이다. 월저는 다원적 평등'을 강조한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존경받지 못할 사람들도 다른 면에서는 명예롭게 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다 이기려 하지 마라.”는 충고는 좋은 사회를 가꾸는데에 있어 영원한 진리다. 저마다의 보석 같은 성과들이 묻히지 않도록 서로를 살피고 칭찬하는 문화 속에서 보상은 제대로 효과를 낸다. 나에게도 인 정받을 무엇인가가 있다면 상 받는 이에 대한 질투심도 수그러든다. 내가 속한 집단은 과연 구성원 하나하나의 노력을 보듬을만큼 다양한 평가 잣대를 갖고 있을까?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 질문을
"성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로 바꾸어 던지곤 한다.
- 인간은 모두 죽는다. 신이 아니기에 완전하지도 못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빈 부분을 채워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 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큐피디타스(cupiditas)와 카리타스(caritas)로 나눈다. 큐피디타스는 덧없는것들에 대한 집착이다. 명예와 권력, 돈에 대한 갈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카리타스, 즉 영원한 존재, 신에 대한 사랑을 하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의 성인(聖人)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꼭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 통찰은 게으름이 주는 선물이다. 워커홀릭들은 여가를 불편해한다. 이들은 자유인일까, 일상의 노예일까?
- 우리는 신(神)이라는 감독이 연출하는 우주라는 무대에 선 배우들이다. 왜 이리 내 팔자가 배배 꼬였냐며 원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극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 인생도 다르지 않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신(神)이라는 감독이 연출하는 우주라는 무대에 선 배우들이다. 왜 이리 내 팔자가 배배 꼬였냐며 원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극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집안 좋고 머리 뛰어나고 외모 출중한 환경에 있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사건과 갈등 없는 각본은 없다. 처지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인생은 힘든 법이다.
-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음미하는 자세로 '지금 이 순간' (here and now)을 살아야 한다.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충고한다. “찬양이 아름다움의 본질은 아니다. 찬양받는다고 그 자체가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질 수 있는가? 에메랄드는 칭찬받지 못하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가?"
- 주변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루하루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삶을 에메랄드같이 가꾸어야 한다. 이럴 때 내 인생은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최선을 다한 삶은 아름답다. 설사 실패했다 해도 미련이 남지 않는다. 행운만 주어진 인생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헛헛하고 외롭고 공허하다. 삶을 튼실하게 만드는 것은 삶을 대하는 나의 자세다. 타고난 조건은 내가 어쩌지 못한다. 여기에 매달려 봐야 삶에 대한 원망만 늘 뿐이다. 행복한 삶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때 열린다. 청춘들에게는 미래가 안 보이고 노년들은 남은 인생이 두려운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더욱 빛나는 보석 같은 격언이다.
- 희망은 자기를 속일 때만 샘솟는다. 그러나 용기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생긴다.
- 호퍼는 사회의 밑바닥에 있었기에 세상을 냉정하게 볼 줄도 알았다. “희망은 자기를 속일 때만 샘솟는다. 그러나 용기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생긴다. 희망이 있을 때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기 쉽다. 반면, 일을 마무리 짓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최고의 인간은 희망이 사라졌을 때도 가슴에서 용기가 샘솟는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의 삶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활을 이어 가려면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있는 그 대로 바라보고 용기 있게 맞서야 한다. 이 점에서 호퍼의 주장 은 스토아 철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에게 인생은 연극 무대와도 같다. 만약 노예 역할을 맡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배우는 자신의 배역이 하찮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진짜 노예가 된 듯 무대에서 최선을 다할 테다.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부자 부모를 둔 덕에 떵떵거리는 이들도 있고, 지지리 궁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무거운 생계를 짊어진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가 더 좋은 삶을 가꾸었는지는 무엇을 가졌고 누렸는지로 판가름 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재산과 명예는 무대 소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 같던 호퍼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았다.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의 몸매는 노예나 검투사와 다르 지 않다. 근육 잡히고 군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하리라는 믿음은 불행한 까닭이 자신에게 있음을 잊게 만든다. 커다랗게 자라난 욕망은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억누른다.” 호퍼의 말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가진 것을 버릴 줄 안다. 인생은 치열하게 타오를 때 아름답고 살 만한 법이다. 내가 행복하려면, 그리고 생생하게 피어나는 삶을 살려면 어떤 욕망부터 버려야 할까?
- 4시 55분, 하인 람페가 '일어나실 시간입니다'라는 말로 칸트를 깨운다. 칸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어주지 말라고 명령하였기에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 람페는 절대 자리를 뜨지 않는다. 5시, 기상, 홍차 두 잔을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잠옷, 덧신, 수면용 모자를 쓴 채 강의준비를 한다. 7~9시, 정장을 입고 강의를 한다. 9시~12시45분,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집필을 한다. 12시 45분, 점심에 초대한 손님들을 작업실에서 맞는다. 다시 정장 차림. 오후 1시~3시 30분, 점심시간이자 하루 중 유일한 식사 시간. 오랜 시간 동안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오후 3시 30분, 산책을 간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변함이 없다. 저녁, 여행기 등 가벼운 책을 읽는다. 오후 10시, 절대적 안정 속에 잠자리에 든다.
칸트의 일상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이 없었다. 그는 무 척 안정적인 성품을 갖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이들은 급하게 식사량을 조절하거나 무리하게 운동 하지 않는다. 알맞은 식사와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꾸준히 할 뿐이다. 마음 다듬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건강한 일상을 가 꾸는 루틴(routine)을 꾸준히 끌고 가는 것. 단순하며 성실한 일과를 반복하는 수도사들의 눈빛이 맑은 데는 이유가 있다.
- 모두가 경쟁력을 외쳐 대는 시대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인자함과 의로움부터 챙기라는 맹자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그대의 조직에는 힘들어 떠나고 싶을 때, “우리 그런 사람들 아니잖아요!" 라는 말에 어깨를 돌려세우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가? 그대의 양심을 흔드는 말은 무엇인가?
- 혁신이 꼭 참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잊고 있던 인류 고유의 가치와 덕목을 일깨우며 여기에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다. 톨스토이는 훌륭한 예술의 조건으로 전달력과 독창성, 그리고 성실성을 꼽는다. 전달력이란 “지극히 단순한 마음,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당연한 감정, 즉 남의 기쁨에 기뻐하고, 남의 슬픔에 슬퍼하는 등, 사람과 사람을 서로 결합시키는 공감”을 말한다. 나아가 톨스토이는 독창성에 앞서 성실성을 좋은 예술의 핵심으로 꼽는다, 성실성이란 예술가가 자신의 생각을 절절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망을 뜻한다. 이는 혁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내가 절실하게 말하고픈, 그래서 전달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참신한 아이템을 떠올리기에 앞서, 과연 이것으로 인류 보편의 덕목 중 무엇을 일깨우려 하는지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 우리 두뇌는 자극 중독자'다. 끊임없이 호기심거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쉬려고 앉아 있을 때도 쉼 없이 휴대폰을 만지거 나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게 되지 않던가. 중독자들은 언제나 더 짜릿한 자극을 바라기 마련이다. 호기심거리에 '중독' 된 우리 두뇌도 다르지 않다. 언제나 더 많은 정보,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고 또 찾는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휴식의 순간에도 결코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늘 정신이 산만하고 피로해 있으며, 강박적으로 세상 소식에 집착한다. 게다가 이런 상태에서는 남다른 생각과 통찰도 나오기 어렵 다. 기껏해야 쏟아지는 정보를 따라가기에 급급할 뿐이다. 인도의 현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unamurti, 1895~1986)는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중고품 인생' 이라고 깎아내린다. 기 껏해야 남들의 아이디어와 행동을 재탕할 뿐이라는 의미다. 독창적인 생각은 꾸준한 노력만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멈춰 서서 멍하니 휴식을 취할 때, 기발하 고 획기적인 생각이 불현듯 찾아들지 않던가. 이를 심리학자들은 세렌디피티 원리 (serendipity Principle)라 부른다. 키케로, 몽테뉴, 마크 트웨인, 윈스턴 처칠, 아인슈타인, 존 레넌 등은 창조적인 도전으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바쁜 일상속에서도 낮잠과 한가함을 찾아 누리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란 극복해야 할 존재다. 주변 눈치를 보며 주눅 드는 내 안의 나약함을 이겨 내라는 뜻이다. 니체는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신을 죽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신은 내 생각과 행동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한다. 신을 따르는 한, 나는 결코 주어진 질서와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창조자는 기존에 있던 익숙함과 당연함을 깨고 넘어서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창조자는 '악마' 와도 같다. 이제까지 옳고 정당하다고 여겼던 것을 뒤엎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제대로 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깊게 뿌리 내린 관습들을 거부하며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지 못한다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만약 변화를 포기하고 기존의 질서를 묵묵히 따르는 편안함을 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 삶에 도 결국 '가축이 되거나 가축을 부리는 자가 되거나 하는 선택 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평지를 걷는 편안함을 포기하고 산을 오르는 자가 되라.”고 충고한다. 도전과 혁신 을 위한 노력만이 삶을 의미와 보람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까닭이다.
-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을 보라. (아마르티아 센)
- 버크는 “어떻게 짓는지 알기 전까지는 울타리를 부수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정치에서 '신중' 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며, 혁신이 아닌 처방'이 사회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단칼에 모든 문제를 풀려 하지 말고, 사회의 균형과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상태에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찾으라는 뜻이다. 버크에 따르면 인간 사회는 생명체처럼 진화해 간다. 진화과정은 말도 안 되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인간만 해도 그렇다.
-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4)은 잔혹한 현실을 이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일러 준다. 그는 최악의 인생은 '팔자타령을 늘어놓는 것'이라 잘라 말한다. 일이 안 풀리는 까닭을 주변 상황에서 찾으려 할 때는 대책도 나오기 어렵다. 우리 삶은 난파선이 파도에 휩쓸리듯 속절없이 세상 흐름에 떠밀려 갈 뿐이다. 에머슨은 “인간은 강과 나무보다 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은 거친 산세를 따라 흘러가고, 그늘 속의 나무는 햇볕이 있는 곳으로 힘차게 가지를 뻗는다. 여건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그 속에서 가능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 정신 질환은 불면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면 마음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다. 영국의 정신의학자 앤서니 스토(Anthony Storr, 1920~2001)는 이를 '고독하지 못해 생기는 병' 이라 설명한다. 잠을 잘 때는 누구나 '혼자'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꿈까지 같이 꿀 수는 없다. 제아무리 나에게 집착하는 자라 해도 나의 잠 안으로까지 들어오지는 못한다. 더 나아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을 충분히 누려야 비로소 '나다운 나’가 된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