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어릴 때 배울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으며, 그들이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장이 더디더라도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다. 아기는 하루, 또 하루 계속 걸음마를 시도하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아기가 절망적인 기분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한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 오늘도 걷는 연습을 해야 하는구나. 언제쯤 배우는 게 끝날까?” (애니 페이슨 콜(Annie Payson Call))
- 자연은 더없이 친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야 할 길을 1할만 가면, 나머지 9할은 자연이 돕는다. 항상 자연은 어디 끼어들 틈이 없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우리를 지켜본다. 그러다가 아주 살짝이라도 우리가 자연을 향해 몸을 돌리면 곧바로 우리 손을 덥석 잡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의 단순한 법칙을 받아들여서 묵묵히 그 완벽한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 인위적인 수단을 써서 보다 빨리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려고 무리수를 둔다. 그러다가 도리어 자연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력을 되찾게 해주는 자연의 법칙에서 고집스럽게 벗어나 있으면서 약으로 힘을 얻는 게 무슨 소용인가. 습관이 끈질기게 우리 발목을 잡는데, 어떤 약인들 효과를 발휘하랴. 약에 기대다 보면, 결국에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크다. 안정제로 신경을 억누르고, 그 틈에 계속 신경을 오용한다면 약이 무슨 소용인가. 언젠가는 신경이 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다. 자연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이다. 우리가 바른 삶을 살도록 언제라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자연도 끝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 테니, 그 응징은 호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법칙은 고정 불변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법칙을 따르지 않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 잠을 잘 때, 혹은 이와 유사하게 휴식을 취할 때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건강한 어린아이의 잠을 유심히 살펴보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다. 완벽하게 쉴 수 있도록 몸이 자유롭게 풀어지면, 온갖 잡념과 근심을 고요히 잠재우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자연이 허락하는 꿀잠을 잘 수 있다. 또 몸이 가뿐해지 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아기 때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도 매일매일 이런 방식으로 기운이 채워졌다. 그리고 성장에 필요한 힘을 얻었다. 이런 잠을 자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근육에 힘을 풀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괴롭히는 잡념에서 벗어나기가 더 쉬워진다. 굳이 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레 잡념이 들지 않는다. 그 시 간만큼은 잡다한 근심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푹 쉴 수 있다. 덕분에 어떤 근심이 닥쳐와도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기운을 얻고 잠을 깬 다. 다만, 이러한 습관은 의식적으로 키워서 몸에 배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단번에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억할 것.
- 목에서 소리를 짜내는 것, 강한 근육인 횡격막을 써야 하는데도, 가장 연약한 근육들을 사용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한 사람에게 열 사람분의 일을 시키는 것과 같다. 결국엔 그 한 사람은 과로로 쓰러질 테고, 열 명의 사람은 일하지 않아서 근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목사들이 인후염에 시달리는 것도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평신도 중에 서도 늘 목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말할 때 근육을 잘못 사용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늙은 철학자가 말했어요. 영혼의 자리는 횡격막에 있다고, 그건 잘 모르겠지만 말(word)이 거기서 시작되는 건 맞아요. 영혼과 육체 모두. 그런데 목에서 말의 숨통을 쥐어짜면 당신의 말은 태어나 자마자 사망이지요!” 어느 유능한 음성 트레이너가 했던,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 신은 그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신은 위대한 법칙을 만들었으며, 그 법칙들은 온전하고 완벽하고 진실하다. 만 약 누군가 그 법칙들을 어기면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일 뿐!! 그런데도 머리를 돌에 세게 찧고서 신이 왜 나에게 두통을 주었 을까 고민한다. 어리석기로 따지면, 요즘 소위 말하는 기독교인의 체념이라는 것과 오십보백보이다. 물론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 로 물려받은 질병으로 아플 때도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오묘 하다. 우리가 통찰력을 갖고, 유전된 기질과 기타 여러 요인으로 생 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여 나름대로 힘을 쌓아나가면, 나머 지 모자라는 부분을 보상하면서 온전히 채워준다.
- 야외에서 산책해도 새롭게 얻은 활기가 잘못된 곳에 낭비되면 정작 건강에 도움은 안 된다. 바람직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 용할 활기가 부족하니 일은 시작도 못 해본다. 걸을 때는 근육만 사용하고, 무의미하게 신경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혹은 이와 동시에 자연의 섭리에 따르도록 근육에 지 시를 내려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예 간섭하지 말아야 할지도, 자연이 직접 우리 근육에 지시를 내리도록 맡겨두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서두르는 것은 근육이 하는 일이지, 신경이 하는 일이 아니다. 특히 기차를 타려고 서두를 때 기차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신경이 곤두서서 온갖 불필요한 긴장이 동반된다. 이러한 긴장 은 서둘러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될 뿐이다. 앞서 마차와 관련해 언급한 법칙이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마차를 타고 갈 때는 그냥 마차에 조용히 실려 가면 되듯이, 걸을때는 자기 몸에서 걷기를 수행하는 근육에 일을 맡겨두면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는 급하게 서둘러야 할 때 신경은 그저 전달 자 (차분하고, 균형 잡힌 전달자) 여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근육들이 더욱 효율성 있고, 유능하게 일을 처리한다. 달릴 때 역시 불필요한 부분까지 긴장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비단 달릴 때뿐 아니라 모든 신체 활동에서 그렇다. 목적에 꼭 필요한 신경, 꼭 필요한 근육만 사용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매번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 몸을 이완시켜야 더욱 편하게 통증을 견딜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상황이라면 치과 의자에 앉아 있을 때를 꼽을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팔걸이를 움켜쥐고, 두 발을 뻗대고 의자에 몸을 맡기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곧 닥칠 통증에 대비하느라 온몸의 신경이 모조리 생생하게 깨어있다. 치과에서 느끼는 이런 긴장이 한 시간 정도 계속되면 얼마나 피 곤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치과에서 느끼는 신경의 피로감은 대부분 실제로 느끼는 통증보다 통증을 예감하면서 신경에 불필요한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다. 의자에 온몸을 축 늘어뜨리도록 노력해보면, 비록 부분적으로만 성공해도 결과가 그 사실을 입증한다. 이런 자세는 치과 공포증을 없애는 사전 조치로 도 활용할 수 있다. 공포는 신경을 긴장시키고 근육을 수축시킨다. 만약 우리가 근육의 긴장을 풀고 신경도 편하게 쉬도록 두면, 다시 말해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공포를 유지할 신경도 근육도 없어진다. 적어도 신체적으로 보자면 공포가 머물 곳이 사라지는 셈이다. ‘적어도 신체적으로 보자면'이란 구절에 주목해야한다.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꾸로 되짚어 들어가다 보면 완전한 성취를 이루기 위한 근본 이치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인한 신경 긴장에서 벗어나려고 종일 몸을 이완시 켰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내 마음이 곧 죽어도 두려움을 놓지 않으려고 고집한다면, 신경과 근육을 기껏 풀어놓아봤자 제어 능력이 형편없는 불안정한 마음에 의해 더 쉽게 긴장한다.
- 참되고 건전한 신앙심은 거짓 믿음과 방식이 같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다음과 같은 면에선 서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종교는 누가 더 잘 해내는지 경쟁하여 얻어내는 성취이다. 반면, 참된 신앙심을 가진 자들에게 종교는 꾸준히 성장하는 건전한 힘이다. 고백하건대, 거짓 감정에 기인한 신경 긴장은 여성에게 더 흔하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위험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그러므로 거짓 감정을 억제하고 진짜 감정을 발달시키기 위해 모든 교사가 사려 깊은 자세로 묵묵히 노력해야 한다. 소녀들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섬세한 신경계가 비뚤어진 감정적 흥분 때문에 약해지면 얼마나 해로운지 깊이 공감할 것이다. 이런 감정은 소녀들에게 너무나 생생하고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전부 가짜이다. 진짜라고 느끼는 그 소녀의 마음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것이 가짜라고 본인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잘 이끌어야 한다. 일단 감정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려는 건강하고 진심 어린 욕구가 생겨난다. 강한 매력이 있고, 존경과 헌신을 받길 좋아하는 여성이 교사로 일하는 학교에서는 소녀들이 그 교사에게 푹 빠지기 쉽다. 그러 면 결국 온 학교가 만성적인 히스테리 상태에 빠지고 만다. 교사에게서 이 감정이 충족되지 못하면 같은 학교 학생으로 감정의 대상이 바뀌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지배적인 학교에서는 기질적으로 냉담하거나 둔한 학생을 제외하고는, 펑펑 운다든지 하는 히스테리 증상이 학생들 사이에 두루 나타난다. 계속 대상을 바꿔가며 병적인 집착을 이어가다가, 종국에는 올바르고 건강한 애정을 품을 힘을 아예 잃어버리는 소녀들도 적지 않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렇게 집착하는 과정이 계속될수록 심장 은 점점 무뎌진다. 여자든 남자든 똑같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애정 아닌 애정을 쏟다 보면 결국 지각이 무뎌지고 심신이 전부 약해진다. 술이나 커피 같은 자극 성분에 습 관적으로 노출되면 점점 둔해지는 것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치는 같다고 볼 수 있다.
- 진짜 감정은 괴로운 것이든, 기분 좋은 것이든 새로운 힘을 얻는 원천이 된다. 거짓 감정은 본인이 그것이 가짜임을 깨닫고 신경을 좀먹는 거짓 감정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한 예외 없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그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별다른 이유 없이, 여러 주 혹은 여러 달 동안 거짓 감정에 사로잡혀서 불필요한 신경 흥분에 시달린 것만으로 처절하게 무너져버린 어느 여성을 목격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다.어머니들과 교사들에게 어린 소녀의 감정이 건전하게 유지되는지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고 참 많이도 강조하고 싶다. 그래야만 그 아이들이 강인한 정신력과 올바른 공감 능력을 지니고, 건강한 감성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강하고 건강한 공감 능력과 감정이 결여된 이기적인 경우는 구별하기 쉽다. 거짓 공감과 진정한 공감도 쉽게 구별된다. 거짓 공감은 신경의 힘을 빼앗아가고, 진정한 공감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올바른 힘이 새로 생기도록 한다.
-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그저 근육들을 이완시키고 흥분한 신경들을 해방하면 후련한 느낌이 훨씬 강하게 오래 계속된다고 말하면 너무 맥없이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신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화를 확실하게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또 이런 방법 으로 성미를 다스리면 그 원천이 되는 정신과 능력, 그리고 기운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그리고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 으니 맥없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마구 성질을 부리다가 기운 을 소진하고 결국 신경의 힘이 빠져서 지치는 일도 없다. 과학적이진 않더라도 현시적으로 표현하자면, 화를 가만히 두라는 것이다. 화가 당신의 신경을 스쳐 지나서 멀리 가버리도록, 그럼 자기도 모 르게 화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일은 없다. 그게 어디 있는지 잘 알 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화를 억누르거나 표현하는 데 들어가는 신경의 힘을 아껴서 다른 나은 일에 사용할 수 있다.
-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큰 고통을 겪은 여성이 나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상처가 되는 말을 들으면 곧 바로 자신의 두 다리가 아주 무겁다고 상상하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하니 몸의 근육들이 이완되고 신경이 자유로워졌으며, 그녀 의 예민한 감정이 발단되어 생기는 긴장이 해소되었다. 그것은 그 녀에게 놀라운 치료법이었다. 탁자가 무겁다, 의자가 무겁다고 상상하거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에게 필요한 건 본인의 몸을 이완시켜서 얻는 효과였다. 그리고 두 다리가 무겁다고 열심히 생각하면서 그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걱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마라.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몇 배로 부풀기만 한다. 노력은 긴장을 부르니, 결국 걱정이 불러온 긴장에서 벗어나기가 더 힘들어진다. 걱정은 무시하고, 그저 가만히 근육을 이완시키며 신경을 고요히 잠재우면 놀랍게도 걱정이 사라진다. 이 순간이 바로 넓은 안목으로 사고력을 발휘할 때이다. 걱정이 얼마나 소용이 없는 건지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 고요히 있으라. 좋은 것들이 당신에게로 온다. 남을 위해 살아라. 당신 인생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그래야 자연이 준비해 둔 선물을 모두 받아서 자연의 뜻대로, 자연이 바라는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다. 자연이 추구하는 길이 가장 참된 길, 최선의 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살 수 있다. 다만, 조금 더 현명한 어린아이로
- 영국의 평론가, 러스킨은 특유의 표현력을 발휘하여 이런 말을 했다. “얼굴에 보이는 편안함이야말로 창조의 가장 위대한 산물이 아닌가?여기에 위대한 노력(effort)이 아니라 위대한 권능(power)이 작용했노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 동물들은 전부 완벽하게 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가만히 누워 있는 고양이를 들어 올려서 온몸의 근육이 얼마나 완벽하게 이완되어 있는지 한번 보라. 잠을 잘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쉴 때도 그렇다. 얼마나 심한 활동을 하건, 얼마나 빠르게 활동하건, 멈추는 즉시 모든 긴장을 푼다. 드물게 인간의 영향으로 진정한 삶의 질서가 깨져버린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동물도 그렇다.
- 자연이 허락하는 휴식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취하든지, 취하지 않든지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다. 그러나 이 휴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제대 로 쉬지 못하는 개인적인 성향을 고쳐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 은 여러 세대에 걸쳐 유전된 불안정한 습성들을 알아차리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휴식은 우리 안에 내재한 법칙이다. 우리가 간절히 필요로 하고, 매일 꾸준히 노력하는 열의를 보인다면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 뜻대로 운용할 수 있다. 필요를 깨달으려면 매일 잠깐씩이라도 자 연이 일하는 고요한 방식을 생각해보고, 또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생각해보는 게 가장 좋은 길이다.
- 만약 우리 몸이 자연의 방식을 따르도록 훈련되었다면, 자연의 섭리와 영적인 진리는 서로 바탕이 같으니 둘 다 따라야 한다.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은 위대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 사람의 삶은 그가 창조된 쓰임새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한 사람의 능력은 그의 쓰임새에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깃들어 있다. 이것은 걸을 때는 고개를 들고 걸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실용적인 진실이다.
- 어린아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이다. 모든 근육은 자유롭고, 모든 부담은 내려놓고,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노폐물이 실려 나가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기운, 그리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채운다.
- 많은 이들이, 특히 여성들이 신경이 흥분한 상태가 더 좋다고 고집하며 그 상태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늘 술에 취해 있는 게 낫다는 남성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비정상적 상태는 비정상적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이들을 다시 자연의 품으로 인도하려면 자연의 섭리를 조용히 따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신체보다 더 우월하다. 잘못된 견해에서 빠져나오도록 우리를 인도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
- 열심히 하지 마라. 무심하게 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이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틀리게 하는지도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가만히 내려놓고, 해야 하는 것을 그냥 하면 된다. 이완하려는 노력이 너무 절박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 몸을 해방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이런 게 특히 해롭다. 근육이 해방되어서 얻는 것이 무색해질 만큼 과도하게 신경의 흥분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필요 이상의 긴장이 있어야 일이 더 잘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 대다수가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는 편이 자신에게 자연스럽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자연의 섭리로 보자면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의 집중이란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대상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에 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주면서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정신을 집중하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목구멍을 조이고, 이를 앙다물고, 그 외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체 곳곳에 있는 근육들을 수축시켜서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수십, 수백 곳에서 에너지를 연소하여 낭비한다. 이것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필요한 곳에 힘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뇌에서 수학과 관련된 능력만 동원해야 하는 시점에, 몸의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근육이 불필요하게 노동하느라 힘이 분산된다. 그러면 정작 필요한 곳에 힘을 모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일하는 법을 아는 또 다른 사람에게 같은 문제를 풀 도록 하면 어떨까. 그는 본능적으로 그 즉시 근육과 신경에서 이전 인상들을 모두 지우고’, 불필요한 긴장으로 찡그린 얼굴이 아닌,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작업에 집중한다. 문제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의 결과가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를 풀고 나서 둘의 몸 상태는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 적당한 운동은 혈액 순환을 왕성하게 한다. 그리하여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신체 활동이 활발할수록 뇌는 일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걷는 동안 생각이 더 잘된다고 한다. 신경의 불필요한 운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당장은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신력을 강화하기는커녕 꾸준히 약하게 한다. 우리 몸이 불필요한 노력을 쏟는 것을 알아차리는 감각만 열려 있다면, 건강한 방식으로 뇌의 활동을 촉진하는 운동과 쓸데없는 긴장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이렇게 힘을 잘못된 곳에 사용하는 것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과로하는 숨겨진 이유이다. 그로 인해 결국 몸이 쇠약해지곤 하는데, 주로 여학생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법, 올바르게 집중하여 최소한의 노력으로 학습을 빠르고 확실하게 하는 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이런 학생들은 두뇌만 사용하면 될 때도 몸에 있는 온갖 근육을 다 써가면서 공부한다. 제대로 학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덤으로 따라다닌다. 이런 아이들을 공부 걱정에서 해방하는 훈련이 가능하며, 지금껏 실시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걱정 하나만으로 신경의 긴장이 극심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공부가 아니라, 그 걱정 때문 에 지치고 병드는 사례도 적지 않다. 걱정은 두뇌를 긴장시킨다. 학업이 최선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어렴풋하고 불확 실한 느낌 때문에 필요 이상의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걱정이 많은 학생은 차분히 공부하여 성과를 높이지 못하고, 갈수록 불안감에 짓눌린다. 엉클어진 줄 때문에 화가 난 아이를 보면, 조금만 인내심을 발휘해 쉽게 줄을 풀 수 있는데도 신경이 잔뜩 곤 두서 있다. 그렇게 짜증을 내면 매듭은 갈수록 단단하게 엉킨다. 공 부는 참으로 애매한 것이라서 공부하는 방법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 이전 인상들을 전부 지우기'를 배우지 못하면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되기 쉽다. 테니스도 좋고, 삼각함수도 좋다. 뭐든지 그 순간 자신이 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능력, 그리고 손에 잡은 것을 적절한 시점에 곧바로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 일이나 놀이에 전적으로 열중할 수 있는 능력은 평생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는 비결이다.
- 누구나 작은 약점은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런 약점보다 의지력을 더욱 심하게 손상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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