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예습

인문 2020. 9. 23. 12:19

- 나는 일찍부터 병약하게 자랐기 때문에 건강에는 절대로 무리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 렇다. 피곤하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휴식을 취 한다. 정신적 일도 그렇다. 부담스럽거나 내가 감당하기 어렵 게 느껴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안 한다기보다 못 한다. 건강 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조심스레 살아 왔다. 그것이 오히려 지금은 노후의 건강과 자신감 비슷한 상 태를 유지해주는 것 같다. 나는 건강의 표준을 '누가 같은 나 이에 더 많은 일을 하느냐'로 삼고 있다.
- 행복은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과는 다르 다. 산 밑에서 등산하는 등산객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는 과정이 행복의 장소다. 바위를 넘고 계곡을 건너는 일 자체가 등산이다. 그렇다고 등산을 중단하거나 무의미하 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감동적인 희열 을 위해서는 과정으로서의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해야 하며 그 극복 자체가 또 하나의 행복이다. 새로운 사건이나 상황이 행복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마음의 자세에 행복이 머문다.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은 타당하지 않다. 공간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어느 시간에 머무는지 물어 야 한다. 행복은 의식의 내용이며, 의식은 시간과 더불어 머 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머무는 곳이 시간적으 로 현재라고 생각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행복도 함께하지 못하고, 미래는 아직 주어진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과는 상관이 없다. 행복이 있다면 현재의 의식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 일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의무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자신의 삶의 가치와 행복을 놓친다면 그것도 지혜로운 선택이 못 된다. 우리는 도시생활에서 자연을 상실한 불행을 얘기했다.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문제로 삶의 자아성을 상실하는 사회적 문제를 제시해보기도 했다. 자연 상실에서 오는 불행은 자연을 찾아 누리면 된다. 그 방법은 누구에게나 가능하 다. 도심지에서 일하고 집은 교외에 장만하는 것도 하나의 방 법이다. 인간관계의 번잡함이나 지켜야 하는 약속은 줄이면 된다. 서로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되는 인간관계는 생활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중용과 적절한 조화에서 해결할 수 있다.
- 내가 어렸을 때 익숙히 들어온 동화나 이야기들의 대부분이 복은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흥부와 놀부의 얘기도 그렇다. 흥부가 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다. 제비 다 리가 상한 것을 보살펴준 것뿐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주어진 보은은 금박이 주렁주렁 달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줄거리는 기억하지 못하나 도깨비가 나타나 보답하듯 “금 나와라 뚝 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은보화가 쏟아졌다는 얘기로 감 탄한 일이 있었다. 이처럼 복은 주어지는 것이지, 찾거나 노력해서 얻는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랐다. 주어지는 것은 공짜라는 뜻 이다. 노력의 값이 아니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것은 복 중의 복이다. 그러니까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는 행운이 찾아들라는 축원이다. 선택과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행복보다는 복의 개념이 더 컸던 것 같다.
- 『해피니스 트랙』에서 저자가 취급한 행복한 삶의 대상은 주 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을 지향하는 일꾼들이다. 미국의 현대 사회 모습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용이 지나치게 과학적인 방법에 치 우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적 추구는 정확하고 타당 성이 있어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과학적 논증과 통계를 넘어 뇌과학적 논증에까지 도달하게 되면, 행복의 과학적 측면에 편중한 나머지 현실적인 삶에서의 행복과는 차이가 있지 않 은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우리는 물을 마시며 맛있는 음식 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 굳이 HO를 논하며 비타민C를 언급 하며 산다면, 행복한 삶의 맛을 잃어버리는 감이 없지 않다.
- 많은 철학자들이 행복론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 학설을 읽었거나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 다. 종교계의 지도자들은 항상 행복을 가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교자나 강론자가 누구보다도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 는 1950년대에 신과대학에서 기독교 윤리를 강의하면서 미 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람제이 교수의 책을 참고한 일이 있었다. 몇 해가 지난 후 미국에 머물면서 그 교수의 근황을 물었 다. 내 얘기를 들은 상대방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 교수가 얼마 전 자살을 했다는 유감스러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의 인간적 불행에 깊이 공감은 하면서도 뜻밖이라는 상념을 억 제할 수가 없었다. 종교는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알려주지만 신앙인 자신이 꼭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철학적 타 당성이 요청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철학이 행복을 창출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철학자가 다 행복했던 것도 아니다.
- 산업화 초창기에 나도 기업체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동기 부여보다 목적의식, 즉 목적 부여가 더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일의 목적에 따라서 일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일을 성취하면 더 높은 행복감을 갖게 해주 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일에는 그에 해당하는 목적이 있다. 귀한 목적이 내 인생의 목적과 합치될 때는 동기 부여보다 높은 차원의 인생을 맞이할 수 있다.
- 20대가 되면서 내가 50대가 되었을 때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를 질문했듯이, 50대를 맞이하면서는 내가 80대가 되었을 때 어 떤 인생의 모습으로 변하여 어떤 사회적 의미를 남기게 될까를 물어야 한다. 50대 중반이 되면 나의 개인과 가정을 위한 삶은 정 리되고, 사회적 평가를 받는 나이가 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관한 평가를 사회가 내려주는 시기다. 자기 평가의 물음을 갖고 사는 사람과 50대까지의 생활을 그대로 연장만 하는 사람 사이 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른다운 사회인 으로서 크고 작은 각자의 분야에서 지도자의 능력과 품격을 갖 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그 사람이 담당한 일의 사회적 가치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판단하게 된다.
- 90이 넘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그것은 개인 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90고개를 넘으면 인생의 환 경은 달라지며 한계의식이 찾아든다. 신체적 건강과 체력의 한계를 이겨내는 일이 부담이 된다. 부부 중 한쪽은 떠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친구들도 언제인지 모르게 주변에서 사라져간다. 내 주변에서도 90이 될 때까지 대화를 하거나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은 모두 먼저 갔다. 그때 찾아드는 어려움은 고독감이다. 여자들은 가족적 사랑과 유대가 강하기 때문에 자녀들과 같이 머물 수 있어도 남자 혼자 90을 넘긴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때보다도 힘들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부담스 럽고, 밤에 잠드는 것이 언젠가 찾아올 영구한 안식으로 가는 연습인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세를 맞을 때까지 어려움 없이 인생 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욕심이 적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서둘지 않고 여유롭게 사는 이들 이다. 마음이 평온하고 너그러움을 지닌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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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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