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업

경영 2023. 6. 9. 12:42

- 내가 이 책에서 한국 독자 여러분께 던지는 주된 메시지는 "기업은 경제의 주체이나, 문화적 이상으로 형성된다"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 의 경제 체제에서 사는 대부분 사람은 '경제'나 '경제 성장'이 삶에서 가 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성공하려면 오랜 전통이나 문화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경제 또한 문화적 이상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서 '문화적 이상'이 란 국가의 특정 행동이나 전통이 아닌 우리가 쉽게 의식하지 못하는 우 리안에 내재한 가치'를 말한다. 내가 보는 한국의 직장 문화에는 비경 제적 요소가 많다. 대다수 직장인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가정에서보 다 직장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 기업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 성해나가는 공간인 동시에 한 사회의 공정성과 형평성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장이다. 문화는 개인의 다양한 행동 조합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므 로, 어떤 종류의 가치나 이상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20세기 중반에 대규모 기업 조직의 안정성을 자본주의의 중요한 성과 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기업 조직은 지역 공동체 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개인 삶의 여정에서, 노동의 화합에서, 지역 사 회를 위한 투자에서, 장기적이면서 제도적인 궤를 함께했다. 1970년대 미국을 필두로 관료적 위계적 조직의 경직성과 고루함에 대한 비판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개인이 반드시 비효율적 관리 경로에 의존하거나 억압적 직장 규범에 묶일 필요 없는 시장과 금융 우위를 향 한 새로운 견해를 싹트게 했다.
사회학자 제럴드 데이비스Gerald Davis는 이 같은 변화를 '조직 사회'에서 '포트폴리오 사회'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조직 사회에서 "기업은 구성원의 일상을 형성하는 필수 요소"였지만, 포트폴리오 사회에서 "조직 구성원은 단기 투자자로 대체됐다. 미국의 경우 이 전환은 직장의 위계 구조 해체와 맞물렸다. 완곡하게는 '직계 간소화 delayering'라고 불렸지만, 사실 조직의 허리 기능을 담당했고 직장인들의 장기 생존을 위한 경로였던 중간 관리자의 말살을 의미했다. 실제로 투 자 은행과 헤지펀드를 비롯한 금융 기관이 미국과 서구 자본 및 노동 시장을 크게 재편할 통제와 구별 짓기의 새로운 제도적 행위자로 기업 조직을 수렴하면서 위계 구조 해체가 본격화했다.
대기업에서 일하며 중간 또는 고위 관리직에 오르는 것은 대기업과 그룹 체계와 대규모 관리직 채용 시스템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한국과 일본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일이며, 경제적·문화적으로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기에 그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는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학자들이 '샐러리맨salaryman'으로 상징되는 사무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일본의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전후 정상화에 대한 서사를 매개한 기업의 역할을 논의해왔다. 이 서사는 평생 고용의 꿈을 달성하기 더 어렵게 만드는 변화 속에서도 집요하게 이어졌다." 반면 한국 기업들의 출세 지향적 측면은 지난 50여 년 동안의 격동 과 경쟁의 정치와 경제, 특히 재벌 기업과 발전주의 국가의 역할에 가려 져 관심을 얻지 못했다. '재벌'이라는 용어는 창업주 집안이 기업을 대 대로 소유하고 경영하는 대기업을 지칭한다. 이들 재벌 기업은 1970년 대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 무대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고전적인 산업 재벌은 정계와 유착된 야심 찬 자본주의 리더들 을 결합했다. 이들은 정부 계획, 허가, 대출 및 그 밖의 수많은 유리한 대우를 받으면서 신규 산업 기업들을 이끌고 감독했다." 이처럼 국가 차원에서 대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국가기업 자본주의 state-corporate capitalism'는 한국이 산업 근대화를 공격적으로 가속하는 데 유용하다고 믿었던 발전주의 국가 대한민국 주식회사 Korea, Inc.의 주목 할 만한 특징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한국은 은행 및 자본 투자에 대한 주도적 역할에서 크게 물러났고 재벌들이 다양한 분 야로 산업을 확장하도록 내버려뒀다. 그 과정에서 재벌 기업들은 엄청 난 부채를 스스로 감수하게 됐다. 재벌들의 이런 과도한 확장이 초래한 경제적·사회적 상충관계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촉발한 부채 공황으로 절정에 달했다. 부채 비율이 감당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았고, 결국 국가와 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 이하 IMF의 개입과 산업 재편이 필요했다.
20세기 말은 한국 특유의 대기업 자본주의의 종언을 고하고 노동조 합의 역할, 가족의 기업 소유, 연공서열 중심의 승진 체계 같은 기존 조 직 문화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로 향하는 길을 닦는 것 처럼 보였다. 새 천 년이 시작되는 21세기를 맞아 특히 노동조합의 역 할 감소와 관련해 상당한 변화가 있긴 했지만, 대기업 중심 체제에서 완 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 역할 대부분이 규제와 홍보로 축소됐고, 외국 및 기관 투자자들이 한국 기업들의 더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됐어도, 대기업 조직은 여전히 경제 지형에서 중요한 고정물로 남아 있었다. 관리직으로 올라가는 전형적 코스인 정규직 고용 시스템도 직장 생활의 궁극적 목표이자 사회적 구별을 표시하기 위한 종착역으로서 여전히 건재했다. 대기업 직장 생활의 매력적인 이미지도 퇴색하지 않았다. 다만 양상이 바뀌었다. 산업화 시대의 대기업과는 다르나 조직 모델은 모사한 신규 기업 그룹들이 대두했다. 여기에는 네이버NAVER나 카카 오Kakao 같은 빅테크bigtech 기업, 넥슨NEXON 등의 게임 회사, 아모레퍼시픽Amore Pacific 등의 화장품 회사가 있다. 국영 기업에서 민영화한 통신 회사 한국통신KT과 철강 대기업 포스코Posco 역시 중산층이 취업하기를 희망하는 인기 기업들이었다.
- 나는 상도의 사례와 초기업 이상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크게 두 가지 줄기에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첫 번째 줄기는 기업의 구별 짓기 문제가 조직 형태의 양극단인 민주주의와 계급주의 또는 관료 주의라는 개념 사이에 불편하게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한국 등 일부 국가의 기업에서는 질서와 차이를 중요시하고 다른 곳들은 그렇 지 않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관리 위계 구조의 오랜 해체 과 정을 거쳤고 직장 민주주의와 유연 업무 가치관이 지배적인 서구 노동자들에게도 구별 짓기는 여전히 중요하다. 노동자들은 기업의 가치관 이 무엇인지, 그 가치관이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에 따라 자신을 구별한다. 정의와 이상 은 조금씩 다를 수 있으나 이 모두가 구별이 이뤄지는 지점이다. 그런 데 서구에서는 이런 사안이 노동자 자신의 결정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 지만, 한국에서는 직원을 어떻게 평가하고 수익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등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HR 담당자들로 구성된 전문 부서에서 관 리한다. 이들이 수많은 직원을 대상으로 이익과 위험을 주의 깊게 분석 한다. 그렇더라도 구별 짓기 체계는 특정 조직 형태와 무관한 오늘날 기 업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봐야 한다.
두 번째 줄기는 직장이 구별과 참여라는 이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현 장이 된 원인과 관련이 있다. 일상 업무의 복잡성은 직장이 커뮤니케이 션, 관리 기술, 상호작용 공간 이상으로 확장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매우 많은 기관과 외부 조직이 초기업 이상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명확 히 하는 데 관심을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지주회사, 투자자, 규제 기관, 금융기관, 노동조합 등이 인력을 구별하고 조직하 는 기업 조직의 방식에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는 구별 짓기와 참여 가 어떤 식으로 구현돼야 하는지에 관한 각기 다른 생각과 이념을 반영 한다. 외부 투자자나 경영 컨설턴트의 경우 구별 짓기는 인간관리자 이도 추적하고 목록화할 수 있는 사용 가치 또는 제품 품질 관리 측면 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경우 이익 정도, 계약 보장, 근속기간 기반 보상 등이 구별 짓기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기업 오너의 경우에는 구별 짓기가 다른 재벌 그룹과의 비교, 높고 멋진 빌딩, 다른 기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상징 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젊 은 직장인들의 경우 구별 짓기는 상사의 공정한 평가와 정시에 퇴근할 자유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구별 짓기를 둘러싼 사고방식은 이처럼 제 각각이지만, 기업을 구별과 참여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그 형태는 직장 생활 전반에 걸친 다양한 신호와 더불어 갖 가지 이상화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 중 일부는 재무적 또는 다른 방식으로 기업 공간을 정제해 일련의 집합 각각 다른 구별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이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루 는 상도그룹 지주회사 HR 담당자들처럼 일상적인 수준에서 구별 짓기 의 복잡성과 씨름하는 현장의 관리자들은 잘못된 구별 짓기가 초래하 는 위험 또한 관리와 억제의 대상으로 본다.
- 한국 기업 사회에 잘 알려진 농담이 있는데,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뱀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그 기업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테면 현대그룹 직원은 일단 뱀을 때려잡은 뒤에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삼성그룹 직원은 뱀이 혹할 만한 무언인가를 줘서 내보내며, 한화그룹 직원은 회장에게 보고해 뱀 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묻는단다.
- 사회학자 알리 혹실드Arlie Hochschild는 기업 경영을 다룬 명저 <관리되는 마음 The Managed Heart》에서 고용 직원 또는 외주 노동자가 고객의 감정 상 태를 관리하는 일직업인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고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 여객기 승무원 업무 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얼핏 그와 반대되는 처지인 수금원들의 감정 노동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혹실드는 고객을 구슬리 거나 협박해서 채무를 갚게 하는 방식을 들어 수금원을 기업계의 '뒤축 heel'으로 비유한다.
"뒤축인 수금원은 고객채무자의 자존감을 고갈시켜서라도 돈을 뜯어 내야 한다."
- 수평 호칭 정책은 언어 변화와 조직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가정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노동의 역할이나 분업 문제는 전형적으로 직원을 구별하는 직함 문제와 연결되므로, 직함이나 호칭을 변경하면 직원과 조직 사이의 폭넓은 구별 짓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더욱이 이 프로세스가 효과를 내리라는 기대의 밑바탕에는 서로를 '매니저'라고 부르는 방식처럼 직원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하게 되면 다른 구별 짓기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 런데 어떤 언어 형태가 비즈니스 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언어 가 불균형을 만드는 방식, 직원들이 직장에서 구별 짓기를 경험하는 방 식, 구별 짓기를 드러나게 하는 또 다른 방식 등 다양한 기타 요인들도 차단돼야 한다. 하지만 수평 호칭 정책 개념 자체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 력을 행사하는 더 큰 구별, 즉 수직적인 동양과 수평적인 서양이라는 글로벌 차원의 구별 짓기가 내재해 있다. 내가 연구를 진행할 당시 한국 은 애플이나 구글 같은 미국 기업의 성공 요인 중 상사와 직원이 서로 이름을 부르는 수평적이고 위계 없는 직장 문화가 한몫했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민종그룹과 KT 등 일부 기업의 경우 이 매니저제 실험은 몇 년 뒤 직원들의 반발과 고객의 혼란 그리고 이전 직함 계속 사용 문제로 결국 폐 기됐다. KT는 그들 버전의 매니저제를 도입했으나 이전으로 돌아갔다. 당시 한 신문 기사 제목은 "수직 문화가 그리웠나... KT, 매니저제 폐지 '직급제로"였다." 전통적인 5단계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직급제로 회귀한 가 장 큰 이유는 직원들의 사기 진작 때문이었다수평 호칭 정책의 초기 목표는 직원 간 업무 공조였다. 예전처럼 차곡차곡 승진하는 일이 없다 보니 직원들의 동기 부여 가 잘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민종에 관한 기사도 마찬가지로 매니저 제는 현실과 거리가 멀었고 직원들 대부분이 이전 체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보도했다. 민종 노동조합 또한 직급이 명확하고 연간 평가 점 수가 아니라 근속연수에 따라 승진하는 호봉제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내가 2014년 수평 체계를 실험 중이던 민종의 최 팀장과 인터뷰할 때도 그의 관점에서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는 HR 담당자의 시각에서 여전히 직원 간 구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직원들을 구별하기 위한 G1에서 G9 까지의 등급이 있습니다. 따로 기록해 관리하고 있어요."
그가 말한 등급은 HR팀이 시스템 내에서 유지하고 있는 내부 직급 을 의미했다. 어떤 언어적 치장 없이 서수로 나타낸 등급을 사용하는 것 은 새로운 매니저제 체계 뒤에 숨은 눈에 덜 띄는 기술관료주의적 관리 형태가 있음을 암시한다. 매니저제로 민종그룹에 수평적이고 탈위계적 이미지를 투영해 직원들이 적절히 평가받는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 들려고 했으나, HR팀 그리고 아마도 그룹의 고위 임원들로서는 여전히 직원들을 추적하고 분류하는 차별화 등급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 이다.
- 영어 직함은 구별 짓기의 작은 창으로서 상당한 무게를 갖 고 있다. 특정 임직원이 자신의 위치, 특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 위치 를 어떻게 보는지에 꽤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영어 직함은 대중의 선망 을 얻는 언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이면서, 그 사람 이 영어를 구사하거나 국제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영문 직함을 업데이트하는 일은 복잡한 사회적 절차가 필요했다. 이 런 맥락에서 직함의 영문 번역은 갖가지 낱말 사이에서 가장 정확한 단 어를 찾아내는 순수한 언어적 번역이 아니었다. 영어 직급과 직함 번역 은 그 속에 있는 일련의 암묵적 구별을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당면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한국의 직함 체계 자체가 더는 실제 직제와 관련이 없는 낡은 시스템을 반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부장'은 본래 부서 단위 중 하나 인 '부'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부는 '팀'의 등장으로 구식이 됐고 부의 관리자는 '팀장'으로 대체됐다. 경영학자 박 원우에 따르면 한국 기업에서 팀으로의 변화는 단순한 용어 변화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새로운 시대, 즉 톱다운 통제 방식이 유용하지 않은 평가지표와 정보의 시대를 반영한다. 직급은 승진과만 연결되는 게 아니 라 비즈니스에 필요한 것을 촉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기업에서 팀 장이 이끄는 팀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작업 단위가 함께 협력하도록 독 려하고 영업이나 생산 같은 팀 평가지표의 원천이 되는 데 필요한 동기 를 결합하기 위해서였다." 팀장은 개별 팀원들이 수행하는 업무를 지 원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는 묵시적으로 직계 간소화의 초기 형태 였다. 한국에서 연공서열이 책임과 분리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이후 팀장은 관리 직급과 별개로 선정됐다.
둘째,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은 완전히 다른 고용 시스템과 구 조를 갖고 있었다. 내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상도의 관리 자들은 미국 기업에 사원, 대리, 과장 같은 선형적 관리 궤도를 따르는 기본 직급이 없다는 데 놀라움을 표시했다. 한국 기업의 공식 직함은 벤치마크 대상으로 여기던 영어권 국가 기업들보다 훨씬 더 정교했다.
그때 장 팀장은 내게 상도, 더 넓게는 한국 기업들의 직함 인프라가 어떻게 관리되는지 가르쳐줬다. 그동안 나는 다양하지만 불완전한 신 호들로 이뤄진 추상적 체계로 이해했었는데, 그는 각각의 회사마다 고 유한 편성이 있다고 알려줬다. 기존 역할을 새로운 사람들로 채우는 미 국기업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조직이 사람, 특히 조직에 오래 머문 사람 들을 위해 역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개인이 5가지 기본 직급 너머까 지 승진해서 임원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들의 위상을 반영하는 특정 직위가 만들어진다. 대부분 한국 기업은 몇 년마다 한 번씩 극적인 구 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사업 단위 조직과 부서 이름을 바꾼다. 이는 효율 을 높이고자 사업 구조를 재정비하는 게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직위로 옮겨가면서 임원들 사이의 차별성을 재정비해야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상도의 계열사들이 같은 그룹에 속하고 심지어 같은 건물에 서 일하면서도 그 역할들이 다르게 보였던 이유다. 담당, 부본부장, 부 문장 같은 다소 드문 직함은 각 조직의 구체적 목적에 맞춘 독특한 호 칭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은 수직적 권위의 힘을 반영한다기보다 사회 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연출 의례presentational ritual '라고 부른 것 에 대한 지속적 필요를 반영한다." 이 같은 의례는 형식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향한 존중과 인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직 원들이 한 조직에서 계속 일하게 되면 HR팀과 같은 부서는 의미론적 으로 한 단계 높은 직함을 부여해 그들에게 상징적인 선물을 제공한다. 요컨대 한국 기업에서 성공한 직원이나 임원은 부장, 영업담당 팀장 등 의 직함을 동시에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자본주의 담론 변화와 세대 구분 사이에는 연관이 없지 않다. 1990년대 사회학자 뤽 볼탕스키 Luc Boltanski와 이브 시아펠로Eve Chiapello는 프랑 스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풍토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여주고자 서구 초기 자본주의 실천의 핵심 동인으로서 종교적 동기의 역할을 설명한 막스 베버 Max Wever의 '자본주의 정신' 개념을 빌려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볼탕스키와 시아펠로가 말한 새로운 자 본주의 정신은 긍정적 경영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자본주의 조직 변화 의 정당화로 작용한 '경영 영웅'과 같은 새로운 인물의 출현이 특징이다. '경영 영웅'은 완고하고 관료적인 '어제의 적'의 표본인 관청 간부나 소폭군pettytyrant 등 이전 시대의 반영웅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뤘다.
볼탕스키와 시아펠로 두 사람의 연구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가 어 떻게 그 나름의 긍정적 언어, 역할, 행동, 조직 구조를 생성해 새로운 유 형의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거나 동기를 부여하는지 강조한다. 이들의 주장은 구체제를 현재에 필요한 것과 정반대, 즉 '수직적 대 수평적', '느림대 빠름', '완고 대 유연' 구도로 설정해 새로운 자본주의가 적절히 기 능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규정함으로써 낡은 체제를 부정해야 한 다는 관점을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은 낡은 것에 대한 거 부를 필요로 한다. 낡은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이 장에서는 한국 기업의 나이든 남성 관리자들의 적절치 못한 행동으로 대변되는 낡은 자본주의 정신이 어 떤 식으로 직장 생활이라는 지형에서 도덕적 논쟁을 일으키고 인식 가 능한 사회성 영역을 제공해 젊은 세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긍정적 업무 환경이 조정될 여지를 만들었는지 살필 것이다. 나이든 남성 관리자는 경제적 측면에서 현대 기업 사회의 비생산적 구성원으로 비치겠지만, 그런 인물 유형이 직장 생활과 기업 관행의 개혁에 강한 동기를 부 여하는 문화적 측면에서는 생산적이다. 나아가 이 인물 유형은 직원들 사이에 중립적이며 과학에 가까운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는 구별 짓 기 인프라가 이미 차별성을 보여준 넓은 문화적 범주의 인물들에게 의 존한다는 사실도 반영한다.
- 나이든 직원들은 노동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의 범위에 서 벗어나 다른 사회적 유형으로 재분류되면서 그들의 소외된 지위를 정당화한다. 일본의 경우 사회학자 오가사와라 유코小가 '오지상(아저씨)'이라는 인물 유형을 나이든 일본 남성 직장인의 전형으로 묘 사한 바 있다. 패션 스타일이 촌스럽고 천박한 습관을 지녔다고 평가받 는 그들은 젊은 여성 직장인들의 대화나 즐겨 보는 잡지에서 자주 풍자의 대상이 된다. 인류학자 앤 앨리슨Anne Alison도 승진에 실패해 창가 자리에 앉아 자리만 지키는 나이 많은 관리자들 '마도기와조, 창가족에 대해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같은 현상이 고루한 관리 방식에 관한 미국의 담론에서도 나타났다.
1990년대 미국의 비즈니스 담론은 기업 내 관리자를 행정 중심 역할에 서 다양한 지식 영역으로 조직 목표 달성에 힘을 보태는 '프리에이전트 free agent'로 전환하자는 '신경영new management' 개념을 주창했다." 미국에 서도 나이든 관리자들은 인류학자 캐런 호Karen Ho가 월스트리트의 나이 많은 직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시계만 쳐다보고, 정체돼 고, 뚱뚱하고, 게으르고, 가지치기가 필요한 죽어가는 나무"라는 혹평 을 받아왔다." 캐주얼한 복장, 수평적 구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커 뮤니케이션이 특징인 새로운 실리콘밸리 관리 스타일의 미학은 사회학 자 윌리엄 화이트William Whyte가 포착한 회색 양복 차림개성 거부 인물 유형과 곧바로 연결되는 수직적이고 형식적이며 진지한 과거 직장 문화 이미지와 정반대다.
-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낡은 정신또는 인물 및 유형은 단순히 무대 밖으 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기업 프로그램이 새로운 정신의 반대 성 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의 나이든 남성 직장인은 과 거 국가가 경험한 성장 유산이나 산업화 향수의 상징이 아닌 어빙 고프 먼이 표현한 '타자성 유형으로서 부상한 것이다. 타자성 유형은 매도되 거나 금기시되는 사회적 유형으로, 정상적이고 잘 드러나지 않는 다른 주체들에 반하는 일탈 모델로 언급된다." 이런 인물 유형이 반드시 인 구통계학적으로 존재해야만 숨겨진 힘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 매체 속 특정 유형의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대표 인물로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이든 남성 관리자들은 한국의 직장에서 불공정 한 구별 짓기나 원치 않는 참여와 관련한 갖가지 사회적 문제의 원인 또는 전형으로 쉽게 눈에 띄고 있다.
- HR팀은 세 가지 다른 설문 방법을 개발했다. 첫 번째 방법은 "늘 그렇다"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까지 5단계 리커트 척도Likert scale를 이용 해 평가자응답자에게 임원이나 팀장에게서 특정 행동을 얼마나 자주 관 찰할 수 있었는지 답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는 평가자가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대조적이지만 긍정적인 역량 사이에서 양자택일하게 했 다. 세 번째는 평가자에게 평가 대상자의 비즈니스 지식, 분석 기술, 전 략 기획 역량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능숙함 정도를 등급으로 매기게 했다. 설문에는 "개방적 사고를 허용한다" 대 "규칙에 따른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강조한다" 대 "효율을 강조한다"처럼 중립적으로 보이는 다 른 유형들 사이의 구별 짓기가 포함돼 있다. 이런 범주는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주회사의 전문가 스타일지식근로자과 계열사 팀장 또는 임원들의 상반된 스타일관료적 규칙 추종자 사이의 기본적인 구별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 세 가지 방법은 직접적인 질문을 피하면서 직원들이 명확히 선호 하는 인물 유형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좋지 못한 관리자들의 고차적 특 성을 은폐해 점수 상승 경향을 방지한다. 설문 조사 결과가 나온 뒤라 야 응답이 상위 범주로 옮겨진다. 첫 번째 질문 세트는 팀장이나 임원 이 그룹의 이상에 부합하는지 행동 관찰을 통해 평가하므로 가치와 연 결된다. 두 번째 세트는 리더십 스타일과 관련이 있는데, 대조적인 특징 들을 기반으로 어떤 유형의 리더인지를 보여준다. 세 번째 세트는 업무 실행 영역으로, 관리와 관련한 일련의 표준 절차와 비교해 관리 역량을 판단한다. 이렇게 평가된 역량 각각은 관리 역량의 종합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다른 역량과도 연결된다. 관리 역량의 다양한 지표는 평 가 대상자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상대적 적합성을 나타낼 수 있다. 요컨 대 이런 역량들은 이상적 관리자의 포괄적 특징을 포착한다. 그러면서 도 이 방법은 단순 평가와 해고만큼 노골적이지는 않다. 상도 지주회사 HR팀은 재무 및 전략기획 등 업무 기능에 따른 이상적 관리자 유형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미래지향적 유형의 관리자를 필요로 하는 부서에 통제적 스타일의 관리자가 있다면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관 리자 직위에서 강등시키거나 다른 팀으로의 전출을 정당화할 수 있도 록 말이다.
NSDP도 360도 피드백의 한 형태로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의지해 관리자의 적합성을 여러 방면에서 효과적으로 가늠함으로써 HR팀이나 기업 오너를 평가주체에서 제외할 수 있다. 관찰 결과의 정확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문조사는 상사의 인사평가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장 치가 아닌 임원이나 팀장들이 자신의 관리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 을 주는 피드백 설문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중립성 유지를 위해 평가 자가 읽게 되는 설문 문항은 중립적 문장 표현으로 이뤄진다. 설문 조사 의 영향력은 그 궁극적 목적을 얼마나 숨길 수 있는지에 달렸는데, 나 는 위에서 언급한 그 목적을 장 팀장과 전략팀 소속의 지주회사 팀원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장 팀장에게 설문 의 요점이 무엇인지 물었으나 장 팀장은 관리 역량과 리더십 향상을 위 한 것이라고만 답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전략팀 직원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장 팀장은 나는 작은 회의실로 데려가 다른 젊은 동료
팀원들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면서 NSDP의 평가 목적을 설명해줬다. 그는 내게 재차 주의를 당부했는데, 동료나 후배들을 비롯한 설문 응답 자들이 자신의 의견이 상사에게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 을 알게 되면 거짓으로 응답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보복을 우려하거나 아첨을 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 30
360도 피드백이 첫 실행되고 결과와 분석이 나왔지만, 나는 NSDP 가 궁극적으로 상도그룹 내 특정 임원이나 팀장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 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개별 인사기록은 기밀로 분류되고 임원 결정 도 비공개로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계열사 다수 임원이 좋지 않은 결과로 해고됐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었다. 임원은 어디까지나 계약직으로, 지위는 높으나 일반 팀장들처럼 실적이 나쁘 다는 이유로는 쉽게 해고할 수 없는 정규직 관리자 같은 보호받는 범주 에 속하지는 않는다. 해고 사유가 매출실적인지 아니면 NSDP 평가 결 과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나는 해당 계열사 직원들이 그 해고 된 임원들 덕분에 직장 생활이 더 행복해졌는지 궁금했다. 한 가지 예 상치 못한 문제는 나쁜 결과를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전혀 올드보이가 아닌 본사의 한 임원이 그룹에서 가장 낮은 평가 점수를 받게 되자 팀 내에서 작은 동요가 일 어났다. 이는 타성적 인물 유형 이외의 사람에게도 관리상의 나쁜 특성 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한국은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여러 새로운 변화가 서구로부터 새로 운 자본주의 정신을 가져왔다고 여겨지던 시기에 이른바 성과의 시대 로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 및 노동 사상이 부각한 새 천년 의 전환기에 한국 기업이 여전히 과거 직장 생활의 망령과 싸우고 있었 던 까닭은 무엇일까?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직장 생활의 전면적 변화 와 부정적 요소의 근절은 느리고 고르지 못한 과정이라는 점이다. 정규 직에 대한 노동력 보호가 상당히 높고 직장 생활 변화가 기업계 전체에 서 광범위하게 이뤄진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또 다른 대답은 낡은 인물 유형이 차별화의 근간으로서 반복적으로 표적이 되고, 과거로의 퇴행을 둘러싼 발전의 서사가 국가적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한국 같은 국가에서는 구식과 신식의 이분법이 변화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늘 주효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나이든 관리자라는 인물 유형이 한국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로 계속 남아 있는 한 '낡음'은 사회적, 경제적 비난을 받는 기호학적 다양성으로 지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 설문조사는 행동, 의견, 정치 등 여러 측면을 읽을 수 있는 공식화된 방법이다. 하지만 설문 조사가 인위적 전략 없이 순수하게 진행된다는 뜻은 아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론조사는 개인이 은밀히 고립된 의견을 표명하는 고립된 상황에 서 취합한 대중의 의견을 마치 개인 의견의 순수한 조합처럼 다룬다. 실 제 상황에서 의견은 힘이고 의견들의 관계는 힘의 충돌이다. 특정 문제 에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실제 집단들 사이에서의 선택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다수 여론의 이용은 기존 대중의 관점을 반영할 뿐만 아 니라 대중이 가진 종교와 유사한 정치적 힘으로 집단적 의지의 확실성 을 주장한다고 봤다. 설문조사나 여론조사는 정치를 체크 박스에 표시하는 단순한 문제로 격하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직과 기관이 서로를 되짚는 방법을 매개한다. 설문 조사는 집단적 사실 주장의 객관적이고 정당한 요소로 여겨지면서 기술관료주의적 참여를 제공하는 가치 있는 도구가 됐다. 달리 말해 설문 조사는 숫자를 통해 의견을 구별하고 서열을 매기는 도구이자 숫자의 합에서 다수의 의견을 끌어낼 수 있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사람들의 집단적 정서를 대변함으로써 제도 내에서 진실을 주장할 사람을 결정하는 강력한 채널이 됐다. 직장 만족도나 참여도 설문 조사와 같은 것들은 소비자 행태 및 소비 활동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것과 유사하기에 새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강력한 제도적 기법이다. 의견과 수치를 충실히 모을뿐더러 인위적 개입 없이도 어떤 것이 다른 것으 로 전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 직원 대상 설문 조사는 계열사로부터 정보를 빼내 해당 자회사 경영 진에 불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간접적이고 은밀한 수단이었다. 요청의 중립성, 데이터 분석의 객관성, 일대일 대면 회의가 전제하는 평등성, 후속 조치로 함께 수행하는 문서 조율은 이 프로젝트가 내포한 구별 짓기 특성을 완화해줬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직원들의 목소리, 특히 직장 생활에 불만이 있는 직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수치와 데이터 안 정성에 의존했다. 원래 인과성을 과학에 따르는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 던 상황에서 지주회사 HR팀은 결국 여러 가지 다른 전문 기법을 활용 해 자신들의 접근 방식을 다른 것들과 차별화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 당화할 적절한 배후지를 개발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다양한 기법, 방법, 전략들은 그와 같은 전문성의 강점이 아니라 취약성을 반영하고 말았 다. 경쟁관계에 있는 전문가들과 2차적 구별 짓기 형태가 존재하는 상 황에서는 특히 그랬다."
- 골프존의 한 광고는 직장인들이 책상에서 문서를 작성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몰래 골프 동영상을 보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스윙과 힙 트러스트hip thrust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골프는 개인의 사회적 역량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 과 비교하는 동시에 참여하고 소비하는 다양한 방법을 제공하는 새로 운 위계 구별 수단이 됐다. 이런 맥락에서 스크린 골프는 첨단 기술과 자기 관리의 부르주아적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골프 모임 참여가 곧 위계가 표시되는 경험에 참여하는 셈이다. 소주로 술 실력을 평가하고 노래방 발라드로 노래 실력을 평가하는 회식과 마찬가지로, 동료를 포 함한 회사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비하고 평가하는 일련의 활동인 것이다.
- 언어인류학자 박성열은 현대 한국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은 높게 평가받지만, 교육 과정을 드러내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 현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의 기술이 갖는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언어 구사는 자연스러운 기술이어야 하므로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즉 원어민에 최대한 가깝게 보이도록 애쓴다. 달리 말해 영어를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 분치 않은 것이다. 영어는 계층 이동성이 충분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역량으로 인식되기에, 교육 과정 언급은 애초에 그럴 만한 계층이 아님 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에서 영어가 사회 생활 경력 초기에 자신의 계 층 배경과 관련한 요소들을 지표화한 역량이라면, 골프나 그 밖의 지표 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기술이 됐다. 언젠 가장 팀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말처럼, 은퇴 후 골프를 하기 위 해 오랫동안 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 직장 생활에 서의 지위를 개선하고자 골프를 하는 것 같았다.- 인류학자 캐런 호Karen Ho는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민족지학적 연구에서 퇴근 후 골프가 오랜 사회적 위계를 강화하는 요 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직장 생활의 능력주의 담론에서 그 토록 의식적으로 배척했던 인종, 성별, 계층 구분이 여가에 관한 한 '올 드보이 클럽oldboy's club, 비슷한 사회적 배경과 학벌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끼리 서로 사업이나 개인적 문제를 돕 는 모임을 총칭하는 말_옮긴이’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미국의 경우 이런 형태의 여 가는 운동 가방을 직장에 가져가는 식의 캐주얼함을 반영하는데, 이는 유복한 사람들의 타고난 성향이자 배타적 특권으로 여겨진다. 즉, 후천 적으로 배워서 습득해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성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골프를 즐기는 데에도 진지함이 간여한다. 개인 레 슨을 받고, 값비싼 장비와 의류에 투자하고, 핸디캡을 줄여나간다." 이 는 인류학자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가 일본 직장인들의 가라오케 연습을 언급하며 여가의 엄숙성'이라고 표현한 진지함과 같다.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를 때면 가사를 외우고,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살피고, 최선을 다해 열창한다. 이들에게 회식 때 가라오케 에서 노래를 부르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재미를 망칠 수 있다. 켈리는 가라오케와 관 련해 만연한 노래 레슨, 교실, 클럽, 지침서 등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와 문화를 분석했다. 일본 직장인들에게 여가는 현재를 즐기는 일만이 아 니라 미래에 있을 상황을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 '구별', '위계', '참여'는 한국의 최근 발전 궤적의 시차를 정의하는 세 가지 개념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현대 한국의 발전은 1960년대에 시 작해 오늘날까지 '경제 성장이라는 거대한 서사 일부로 계속되고 있는 연간 GDP 성장률 속의 측정 가능하고 가시적인 '별'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같은 구별의 역사는 수출 성과, 국제 인증 및 표준, 1인당 국민 소득, 글로벌 수상 이력, 그리고 아마도 가장 최근에는 벤처 캐피털 기업 들의 부상 등 국가 안팎에서 읽히는 뚜렷한 성취에서 다양한 지표로 나 타났다. 그렇지만 이런 국가 차원의 구별 짓기는 그 분위기와 질에서만 큼은 변화를 보이나, 한국이라는 국가의 발전 과정을 인식하는 방법으 로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변화 조짐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 같은 역사를 '위계'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경제 성장과 궤를 함께 하는 일련의 사실을 살펴보면 노동탄압, 정부 부패, 부의 재벌 집중화,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배, 나아가 최근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문 제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 각각의 문제, 그리고 분명히 많을 다른 문제들은 남성과 여성, 국가와 시민, 재벌과 노동자, 대규모 노조와 비 노조 노동자,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사이 의 다양한 관계에 퍼져 있는 위계를 가리킨다.
- '참여'도 마찬가지다. 참여, 연대, 팀워크, 민주주의 등의 개념은 한국 인들이 권력자의 권위, 정확히는 강자들의 구별 짓기 행태를 거부하는 도심에서의 대규모 시위 같은 사회 및 노동 운동을 함축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처럼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한국은 '별'이 강화하는 과정으로도, '위계'가 심화하는 과정으로도, '참여'가 보편화하는 과정으로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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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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