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사망원인의 약 15%가 인간의 폭력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그 비율이 5%에 불과했고, 21세기 초에는 약 1%로 감소. 2012년 전 세계 사망자수는 약 5600만명이었느데, 이 가운데 62만명이 폭력으로 사망 (전쟁 12만, 범죄 50만). 반면 80만명이 자살했고, 150만명이 당뇨병으로 사망.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위험하다
- 지난 70년단 인류는 정글의 법칙뿐 아니라 체호프의 법칙도 깼다. 체호프는 "연극의 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고 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왕과 황제들은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면 곧바로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45년 이래 인류는 그런 유혹에 저항하는 법을 배움. 냉전의 1막에 등장한 총은 결코 발사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투하되지 않는 폭탄과 발사되지 않는 미사일로 가득한 세계에서 사는 데 익숙하고, 정글의 법칙뿐 아니라 체호프의 법칙을깨는 데도 능하다. 혹시 이런 법칙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일 것이다.
-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최고선으로 규정할 때 제자들에게 행복해지는 것은 힘든일이라고 경고. 물질적 성취만으로는 만족이 오래가지 않음. 돈, 명예,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면 비참해질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적당히 먹고 마실 것과 성욕을 억제할 것을 권함. 장기적으로 보면, 진탕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깊은 우정이 더 큰 만족을 준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으로 가는 고행길에 오른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한 행동수칙을 정리했다. 그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었다. 행복은 쉽게 오지 않는다. 지난 몇십년 동안 인류는 유례없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지금 사람들이 옛날 조상들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높은 수준의 부, 안락, 안전을 누리는 선진국의 자살률이 전통사회들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 생명과학에 따르면, 행복과 고통은 단지 그 순간에 어떤 신체감각이 우세한가의 문제다. 우리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반응할 뿐이다. 사람들은 실직해서, 이혼해서, 전쟁이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감각이다. 실직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지만, 우울증 자체는 일종의 불쾌한 신체감각이다. 우리는 수천가지 이유로 화를 내지만, 화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화는 항상 열이나 긴장 같은 감각을 통해 일어나고, 그런 감각이 화를 솟구치게 만든다. 우리가 열불난다고 표현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 거꾸로 과학에 따르면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승진하고, 복권에 당첨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 몸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감각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 약 2300년전 에피쿠로스는 제자들에게 무절제한 쾌락추구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보다 비참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 그보다 약 200년 전에 부처는 훨씬 급진적 주장을 했다. 그는 쾌감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간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침. 그런 감각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의미한 동요일 뿐이라는 것. 쾌감을 느껴도 우리는 만족하기는 커녕 더 많이 갈구한다. 그러니 행복하거나 흥분된 감각을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 만일 내가 찰나적 쾌감을 행복으로 느끼고 점점 더 많은 쾌감을 갈구한다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뒤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마침내 쾌감을 느낀다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쾌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 이런 식으로 수십년을 계속해도 만족은 지속되지 않음. 쾌감을 갈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은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쾌락을 빠르게 뒤쫓을 것이 아니라 놓아줄 필요가 있다. 행복에 대한 이런 불교적 시각은 생화학적 시각과 공통점이 많음. 쾌락은 생겨나자마자 사라지고, 쾌감을 갈구할 뿐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불안 상태가 계속된다는 데 양측은 동의함. 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양측이 꽤 다르다. 생화학적 해법은 한순간도 쾌감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쾌감을 제공하는 제품과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 부처의 가르침은 쾌감에 대한 갈구 자체를 줄여 쾌감이 우리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 부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마음수련을 통해 감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주의깊게 관찰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이 덧없고 무의미한 동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런 감각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게 된다. 생기자마자 사라지는 것을 뭐하러 뒤쫓는가?
-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폐기됨. 우리가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됨
-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서임
- 후대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파라오의 몰락과 신의 죽음을 모두 긍정적 변화로 생각. 어쩌면 인본주의의 붕괴도 결국 좋은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본래 두렵기 때문. 하지만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1.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 우리 종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을까?
* 호모 사피엔스는 우월한 생명체인가, 골목대장에 지나지 않는가?
- 근대과학과 산업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두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동식물을 침묵시키고, 애니미즘이라는 장대한 경극을 인간과 신의 대화로 바꿈. 그런데 인류는 과학혁명을 통해 신도 침묵시켰다. 세계는 1인극으로 바뀜. 인류는 텅 빈 무대위에 홀로 서서 혼자 말하고, 아무와도 협상하지 않고, 어떤 의무도 없는 막강한 권력을 획득. 물리, 화학, 생물의 무언의 법칙들을 해독한 인류는 이 법칙들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다. 원시시대 사냥꾼은 사바나에 나가면 야생 황소의 도움을 구했고, 황소는 사냥꾼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고대 농부는 자신이 키우는 젖소들이 젖을 많이 생산하기를 바라며 하늘에 계신 위대한 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신은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네슬레사 연구개발부서에서 일하는 흰 가운을 입은 직원들은 유제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유전학을 연구한다. 그리고 유전자들은 그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느다
-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 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킴. 유신론자들이 테오스를 경배하는 반면,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경배함.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이념은 호모사피엔스는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호모사피엔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선 또는 악이 된다.
- 영혼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하나의 설이다. 반면 의식의 흐름은 우리가 매순간 직접 목격하는 구체적 실제다. 의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 당신은 의식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심에 사로잡혀 '주관적 경험이 정말 존재할까?'라고 자문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의심을 경험하고 있음을 안다. 마음의 흐름을 구성하는 의식적 경험이란 정확히 무얼까? 모든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 특징 두가지가 있음. 바로 감각과 욕망이다. 로봇과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갈구하지 앟기 때문. 로봇에는 에너지 센서가 장착되어 있어서, 배터리가 다 되면 센서가 중앙처리장치로 신호를 보냄. 그러면 로봇이 콘센트로 이용해 플러그를 꽂아 배터리를 충전함.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봇은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음. 반면 인간은 에너지가 고갈되면 허기를 느끼고 그 불쾌한 감각이 멈추기를 바란다.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고 로봇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배가 고파 쓰러질 때까지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범죄인 반면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로봇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닌 이유도 여기 있다.
- 수백억개의 전기신호들이 뇌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때 '나, 화났어!'라고 느끼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걸까?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이 논의가 당신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신만 그런게 아니다. 최고의 과학자들도 마음과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과학의 멋진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자들이 어떤 것을 알지 못할 때 온갖 종류의 이론과 추측을 시도해볼 수 있고, 그러고도 결국에는 모른다고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과학자들은 뇌에서 발생하는 일군의 전기신호들이 주관적 경험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함.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그런 현상의 진화적 이점이 무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빈틈이다. 인간에게 발이 있는 이유는 그 덕에 우리 조상들이 수백만 세대 동안 토끼를 뒤쫓고 사자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 인간에게 눈이 있는 이유는 그 덕에 우리 조상들에 수백만년 동안 토끼가 어디로 가고 사자가 어디서 오는지 볼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왜 인간은 배고픔과 두려움 같은 주관적 경험을 할까?
-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생물학자들이 아주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생존하기 위해 주관적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배고픔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하지도, 사자를 보고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자를 보고 왜 도망쳤을까?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다. 주관적 경험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 신경세포들이 서로를 흥분시키거나 부신에 호르몬 펌프질을 하라고 명령하는 데 감정이 왜 필요한가? 실제로 근육운동과 호르몬 분비를 포함한 신체활동의 99%는 의식적 느낌 없이 일어남. 그렇다면 왜 나머지의 1%의 경우 뉴런, 근육, 내분비샘에 이런 의식적 느낌이 필요할까? 기억을 저장하고, 계획을 세우고,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와 개념을 자동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 마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은 단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자를 볼 때 그 포식자를 보고 자동으로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1년전 숙모가 사자에게 잡아먹힌 일을 기억한다. 사자가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한다. 그리고 고아가 될 자식을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도망치는 이유다. 실제로 많은 연쇄반응들은 당면한 외부자극에서 시작되기보다는 마음이 주도적으로 시작함. 사자가 공격했던 일이 사람의 마음속에 저절로 떠올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자의 위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듬. 그러면 그는 모든 부족민을 모으고, 그들은 사자를 쫓아낼 새로운 방법들을 궁리함. 그런데, 이 모든 기억, 상상, 생각들은 무얼까? 그것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오늘날의 생물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 상상, 생각은 고차원적이고 비물질적인 영역에 존재하지 않음. 그것들 역시 수백억개의 뉴런들이 발화하면서 밀려드는 전기신호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 상상, 생각을 고려한다해도, 수백억개의 뉴런을 통과해 부신과 다리근육을 활성화하는 일련의 전기화학적 반응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혹시 이 길고 구불구불한 여정에서 한 뉴런과 다음 뉴런 사이에 마음이 개입해 두번째 뉴런이 발화해야 할지 말지 결정하는 단계가 하나라도 있을까? 앞서 이동한 다른 전자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주관적 경험 때문에 움직인 전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방식으로 움직인 전자가 하나도 없다면, 모든 전자가 그 앞에 움직인 또 다른 전자 때문에 움직인다면, 우리는 왜 두려움을 경험해야 할까? 오리무중이다.
- 생명과학은 생명이 데이터 처리과정이며, 유기체는 계산하고 결정하는 기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물과 알고리즘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19세기 과학자들은 뇌와 마음이 마치 증기기관인 것처럼 기술했다. 왜 하필 증기기관인가? 그것이 기차, 배, 공장을 움직이는, 당대의 가장 앞선 기술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생명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때 생명도 틀림없이 유사한 원리에 따라 작동할 거라고 추정. 마음과 몸은 압력을 가두었다 빼는 방법으로 운동과 작용을 일으키는 파이프, 실린더, 밸브, 피스톤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런 사고방식은 프로이트 심리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리학 용어 가운데 많은 것들이 여전히 기계공학에서 차용한 개념들로 채워져 있는 것은 이 때문.
- 위협과 약속은, 그것이 인간의 변덕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법칙 또는 신의 신성한 명령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한, 흔들림 없는 위계질서와 대규모 협력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대개 성공함.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반.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력처럼 실재하고 어길 수 없다고 믿는 일군의 규칙들이다. "하느님이 황소 열마리를 희생제물로 바치면 비가 내릴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천국에 갈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는 지옥에 갈 것이다." 특정 장소에 사는 모든 사피엔스가 같은 이야기를 믿는 한 그들은 모두 똑같은 규칙을 따르고, 그럴 때 이방인의 행동을 예측하고 대규모 협력 네트워크를 조직하기가 쉬워짐. 사피엔스는 흔히 터번, 턱수염, 양복 같은 시각적 표식을 이용해 "나를 신뢰해도 된다. 나는 너와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다." 라는 신호를 보냄. 그런데 우리의 침팬지 사촌들을 그런 이야기를 짜내고 퍼뜨리지 못함. 그들이 대규모 협력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2.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 인간은 어떤 세계를 창조했나?
* 인간은 어떻게 자신이 세계를 지배할 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나?
* 인본주의의 인간숭배가 어떻게 가장 중요한 종교가 되었나?
- 문맹사회 사람들은 모든 계산과 결정을 머릿속으로 한다. 하지만 문자사회 사람들은 네트워크로 조직되어 있어서, 각 개인들은 거대한 알고리즘의 한 단계일 뿐이며 알고리즘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이것이 관료제의 본질이다
-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진다. 그들은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그리하여 관료의 환상과 일치하는 외적 실제가 생기지만, 그것은 강요된 실제일 뿐이다. 예컨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강줄기, 산맥, 무역로를 고려하지 않고, 역사적, 경제적으로 묶인 지역들을 불필요하게 쪼개고, 지역의 인종적, 종교적 정체서을 무시. 그 결과 같은 부족이 여러 나라로 쪼개지는 한편,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씨족들이 한나라로 묶이기도 함.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이런 종류의 문제로 골치를 앓지만 특히 아프리카에서 이런 현상이 심한데, 이는 오늘날 아프리카 국경선이 해당 국가의 바람과 갈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 아프리카 국경선을 그은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와본 적도 없는 유럽관료들이었다
- 인간의 협력 네트워크는 대개 자체적 잣대를 통해 자체평가를 내리고, 자체평가점수는 당연히 높다. 특히 신, 국가, 기업같은 상상의 실체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간 네트워크는 일반적으로 상상의 실체의 관점에서 성공을 평가함. 종교는 신의 계명을 글자 그대로 따르면 성공이고, 국가는 국익을 높이면 성공이고, 기업은 돈을 많이 벌면 성공이다. 그러므로 인간 네트워크의 역사를 검토할 때는, 이따금 멈춰서 실제하는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어떤 실체가 실제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 보면 된다. 제우스의 사원을 불태워도 제우스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유로화가 가치를 잃어도 유로화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은행이 파산해도 은행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한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나라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경우 고통은 단지 은유이다. 반면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면 그는 실제로 고통을 느낀다. 굶주린 농부는 먹을 것이 전혀 없을 때 고통을 느낌. 갓 태어난 송아지와 떼어 놓으면 어미소는 고통을 느낌. 이런 경우 고통은 실제다. 물론 허구에 대한 믿음도 고통을 초래할 것임. 국가적 신화나 종교적 시노하에 대한 믿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집과 신체의 일부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음. 전쟁의 원인은 허구지만 고통은 백퍼센트 실제함.
-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님. 허구는 반드시 필요함. 돈, 국가, 기업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음.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들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함.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다른 근대 이념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믿음체계가 종교라고 말하면 싫어함.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를 미신이나 초자연적 힘과 동일시하기 때문. 만일 당신이 공산주의자나 자유주의자에게 신자 같다고 말하면, 그들은 뜬구룸 잡는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비난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인간이 창조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복종해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를 믿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한 모든 인간사회가 이런 도덕법 체계를 믿는다. 모든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초인적인 도덕법에 복종해야 하며 그 법을 어길 시 재앙이 닥칠 거라 말한다.
-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 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함.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타협없는 진리추구는 영적 여행이라서, 종교와 과학의 제도권 내에 머물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즉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함. 21세기에 인본주의 교의가 순수한 과학이론으로 대체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은 깨디고 그 자리에 매우 다른 종류의 계약이 들어설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어떤 새로운 포스트 인본주의 종교 사이의 계약일 것이다.
- 수천년간 과학의 성장경로가 막혀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 관한 모든 중요한 지식이 성경과 고대 전통에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 전 세계 유전들이 이미 다 발견되었다고 믿는 회사는 석유를 탐사하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새 지식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전근대 인류문명 대부분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과학혁명이 인류를 그런 순진한 확신에서 해방시킴.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매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 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 근대 계약은 우리에게 전례없는 힘을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졌다. 그렇다면 그 대가는 무얼까? 근대 계약은 우리가 힘을 얻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기를 기대. 인간이 이 서늘한 요구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 요구를 따랐다면 아마 우리는 윤리, 미학, 동정이 없는 암흑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 막강할 뿐만 아니라, 그 어느때보다 평화롭고 협력적이다. 인간은 어떻게 신, 천국, 지옥이 사라진 세계에서 도덕과 아름다움은 물론 동정까지도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었을까? 이번에도 자본주의자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공을 돌린다. 하지만 시장의 손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볼 수도 없어서, 혼자서는 절대 인간사회를 구할 수 없음. 실제로 시골 장터조차 신이나 왕 또는 교회의 도움 없이는 유지되지 않음. 법원가 경찰을 포함해 모든 것이 판매대상이라면, 신뢰를 증발하고 신용은 사라지고 사업은 망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근대사회를 붕괴에서 구했을까? 인류를 구원한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혁명적 종교인 인본주의였다.
3. 호모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세계를 운영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은 어떻게 인본주의를 위협할까?
* 누가 인류를 계승할까? 그리고 어떤 새로운 종교가 인본주의를 대체할까?
- 오늘날 우리는 뇌 영상을 이용해 사람의 욕망과 결정을 본인이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예측 가능.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을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게 했다. 그리고 내킬 때마다 두 스위치 중 하나를 누르라고 했다. 피실험자가 실제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심지어 자신의 의향을 자각하기도 전에 과학자들은 피실험자의 뇌 신경활성을 보고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예측 가능했음. 피실험자가 자신의 선택을 인지하기 영 점 몇 초 내지 몇 초 전에 피실험자의 결정을 알려주는 뇌신경 활성이 시작되기 때문. 오른쪽 스위치나 왼쪽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피실험자의 선택을 반영함.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님. 사실 우리가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잘못된 논리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생화학적 연쇄반응이 오른쪽 스위치를 누르고 싶게 만들 때 나는 실제로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싶다고 느낌.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그 버튼을 누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그 스위치를 누르고 싶다면 그 소망은 내 선택'이라는 결론으로 논리적 비약을 감행.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과학자들 중에서조차 낡은 신학적 개념들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학자들은 수백년 동안 영혼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 논쟁했음. 그들은 모든 사람이 영혼이라 불리는 내적 본질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추정. 또한 그들은 내 자아가 옷, 자동차, 집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욕망을 소유한다고 주장. 나는 옷을 선택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욕망을 선택하고, 내 운명은 그런 선택들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선한 욕망을 선택하면 천국에 가고, 악한 욕망을 선택하면 지옥에 간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나는 정확히 어떻게 내 욕망을 선택하는가?
-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에겐 자아라고 불리는 내적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아가 어떻게 욕망을 선택하는가?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 그것은 미혼 남성에게 '당신의 아내는 어떻게 옷을 고르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현실에는 의식의 흐름만 존재하고, 욕망은 그 흐름 안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 욕망을 소유하는 불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내 욕망을 결정론적으로 선택하는지, 무작위로 선택하는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 당신이 경험하는 자아에게 묻는다면 짧은 검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묻는다면 긴 검사를 선호할텐데, 이야기하는 자아는 최악의 순간과 최종순간의 평균만을 기억하기 때문. 실제로 의사는 이야기하는 자아의 관점에서 검사 막바지에 불필요한 몇 분간의 둔한 통증을 추가해야 함. 그러면 기억 전체가 덜 고통스러워지기 때문. 소아과 의사들은 이 요령을 잘 안핟. 수의사들도 마찬가지. 많은 의사들이 진료실에 과자 항아리를 두고, 아픈 주사를 놓거나 불쾌한 검사를 실시한 뒤 아이들에게 몇개를 건넨다. 이야기하는 자아가 병원에 갔던 일을 떠올릴 때, 마지막 10초간의 즐거움이 수분 동안 지속된 불안과 통증의 기억을 지워줄 것이다.
-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아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재료로 이용함.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시 경험하는 자아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 영향을 미침. 우리는 라마단 때의 금식과 건강검진을 위한 금식,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배고픔을 다르게 경험한다. 이야기하는 자아가 배고픔에 부여하는 각기 다른 의미들은 매우 다른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때때로 경험하는 자아는 이야기하는 자아가 세운 최고의 계획마저 방해할 정도로 강력함. 예컨대 나는 새해를 맞아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매일 운동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중대한 결정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하지만 막상 운동할 시간이 되면 경험하는 자아가 우세해진다. 나는 운동하러 가고 싶지 않아서 피자를 주문한 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켠다.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이야기하는 자아와 동일시한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경험의 세찬 흐름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의 이야기다. 우리는 경험하는 자아가 겪은 무질서한 인생을 가지고 논리적이고 일관된 이야기를 자아내는 내부 시스템과 우리를 동일시한다. 이야기의 줄거리에 거짓과 누락이 허다하고 여러번 고쳐쓴 바람에 오늘의 이야기가 어제의 이야기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불변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는 것이다. 이 느낌은 내가 나눌 수 없는 개인이며, 우주 전체의 의미를 제공하는 분명하고 일관된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미심쩍은 자유주의를 야기한다.
- 신이나 국가 같은 상상의 실체를 믿게 하려면, 사람들이 가치 있는 뭔가를 희생하게 해야 한다. 희생이 고통스러울수록 그 희생을 바치는 대상의 존재를 더 확실히 믿게 된다. 값비싼 황소를 제우스에게 바치는 가난한 농부는 제우스가 실존한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 농부는 과거에 황소들을 바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 거듭해서 황소를 바칠 것이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만일 내가 조국 이탈리아의 영광을 위해 자식을 바쳤거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내 다리를 바쳤다면, 나는 그 일만으로도 열렬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또는 열정적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탈리아 민족신화나 공산당 선전이 거짓이라면, 내 자식의 죽음이나 내 부상이 헛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 그것을 인정할 만큼 용기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를 지지하는 이유는 모든 개인이 저마다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권력의 궁극적 원천이라 믿기 때문. 하지만 21세기에 전개될 세가지 실질적 상황이 이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다.
(1) 인간은 경제적, 군사적 쓸모를 잃을 것이고,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은 그들에게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2) 시스템은 인간에게서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발견할테지만, 개인으로서의 가치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3) 시스템은 일부 특별한 개인들에게서 가치를 발견할 테지만, 그런 개인들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초인간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엘리트 집단일 것이다.
- 우리는 산업혁명 때 말들이 맞이했던 운명을 기억해야 한다. 농장에 사는 평범한 말은 냄새를 맡고, 사랑하고, 얼굴을 알아보고, 울타리를 넘는 등 천가지 일을 포드의 모델T나 100만불짜리 람보르기니보다 훨씬 잘할 수 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동차가 말을 대체한 것은 시스템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일에서 더 뛰어났기 때문
- 인간이 언제까지나 비의식적 알고리즘 능력을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질거라는 생각은 희망적 사고에 불과함. 이런 몽상에 대한 현시점의 과학적 답변을 세가지 간단한 원리로 요약 가능
(1)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한 모든 동물은 수백만년의 진화를 거치며 자연선택된 유기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다
(2) 알고리즘의 계산은 계산기를 어떤 물질로 만들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주판을 나무로 만들든, 철로 만들든, 플라스틱으로 만들든, 두알 더하기 두알은 네 알이다.
(3) 따라서 유기적 알고리즘이 비유기적 알고리즘이 절대 하지 못하거나 그보다 뛰어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계산만 정확하다면, 알고리즘이 탄소로 이루어지든 실리콘으로 이루어지든 무슨 상관인가?
- 시간이 갈수록 인간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기가 점점 더 쉬워지는데, 알고리즘이 더 영리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함.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생존하려면 다양한 종류의 기술을 다룰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로봇 수렵채집인을 설계하기는 엄청나게 어려울 것임. 로봇 수렵채집인은 부싯돌로 창촉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숲에서 먹어도 되는 버섯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약초로 상처부위를 감쌀 줄 알아야 하고, 매머드를 추적할 줄 알아야 하며, 10여명의 다른 사냥꾼들과 협동할 줄도 알아야 함. 하지만 지난 몇천 년 동안 인간은 점점 전문가가 되었다. 택시 기사나 심장 전문의는 수렵 채집인에 비해 훨씬 좁은 분야의 전문가라서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 더 쉽다. 이 모든 활동을 책임지는 관리자조차 대체가능하다. 고성능 알고리즘 덕에 우버는 단 몇 명의 사람으로 수백만명의 택시 기사들을 관리할 수 있다. 명령의 대부분이 인간의 감독 없이 알고리즘에 의해 처리된다.
- 19세기 산업혁명은 도시 프롤레타리아라는 거대한 신흥 계급을 탄생시켰고, 이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전례 없는 필요, 희망, 두려움에 달리 응답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자유주의가 결국 사회주의에 승리를 거둔 것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의 가장 좋은 부분들을 채용했기 때문이었다. 21세기에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계급이 탄생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으며, 사회의 번영, 힘과 영광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쓸모없는 계급은 그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잘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 자유주의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신성시하고, 투표소, 슈퍼, 결혼시장에서 선택할 권한을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준다. 수백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가 온갖 종류의 허구와 판타지를 믿는다 해도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제 나를 더 잘아는 시스템이 생겼는데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계속 권한을 맡기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이다. 민주적 투표 같은 자유주의적 관행들은 머지 않아 낡은 것이 될 것이다.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일조차 구글이 나보다 더 잘할 것이기 때문. 내가 기표소 안에 서 있을 때 자유주의는 진정한 자아와 의논해서 내 진정한 욕망을 반영하는 당 또는 후보를 선택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기표소 안에 있는 나는 지난 선거 이래로 수년 동안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선거유세, 그럴듯한 해석, 무작위적인 기억들의 공세 속에서 내 선택은 왜곡된 가능성이 크다. 카너먼의 냉수 실험에서처럼, 이야기하는 자아는 정치에서도 정점-결말 법칙을 따른다. 즉 대다수의 사건들은 잊고 극단적인 몇가지 사건만으로 기억하며, 최근에 발생한 일들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다.
- 유럽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스페인 정복자들과 상인들은 색깔 있는 구슬들을 주고 섬과 나라를 통째로 샀다. 21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값진 자료는 아마 개인적 데이터베이스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이메일 서비스와 웃긴 동영상을 제공받는 대가로 첨단 기술기업에게 그 데이터를 넘기고 있다.
- 20세기 인간의 거대한 프로젝트(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는 것)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풍요, 건강, 평화의 보편적 표준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새로운 프로젝트(불멸, 행복, 신성을 얻는 것) 역시 포부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는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능가하는 것이라서, 새로운 초인간 계급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초인간들은 자유주의의 근본 바탕을 포기하고 보통 인간을 19세기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을 대한 것처럼 대할 것이다.
- 집중력 헬멧은 인내심 없는 친구처럼 작동함. 물론 때로는 재빨리 확실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만약 우리가 점점 더 많은 상황에서 집중력 헬멧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냄새 맡고 꿈꾸고 집중하는 능력을 잃었듯이 결국 혼란, 의심, 모순을 참아내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시스템은 그런 방향으로 우리를 떠밀 것이다. 왜냐하면 시스템은 대개 우리가 의심할 때가 아니라 결정할 때 보상을 내리기 때문. 하지만 확고한 결정과 빠른 해법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의심과 모순으로 가득한 인생보다 더 빈곤하고 얄팍할 것이다. 마음을 조작하는 기술과 마음의 스펙트럼에 대한 우리의 무지 그리고 정부, 군대, 기업의 편협한 관심이 합쳐질 때, 우리는 틀림없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몸과 뇌를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할 것이다. 시스템은 다운그레이드된 사람들을 선호할 텐데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게 될 초인간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시스템을 발해하고 속도를 떨어뜨리는 성가신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모든 농부들이 알고 있듯이, 염소 무리에서 가장 골치아픈 존재는 대개 가장 똑똑한 염소다. 농업혁명 과정에서 동물의 마음 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기술 인본주의자들이 꿈꾸는 두번째 인지혁명은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할 것이다. 즉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할 수 있지만,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를 생산할 것이다. 수백만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 자본주의가 이기고 공산주의가 패한 것은 자본주의가 더 윤리적이어서도, 개인의 자유가 신성해서도, 신이 이교도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 데이터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종은 단일한 데이터처리 시스템이고, 개인은 시스템을 이루는 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전체를 이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는 과정으로 이해할수도 있다. 이 과정은 기본적으로 네가지 방법으로 진행된다.
(1) 프로세서의 수를 늘린다. 10만명이 사는 도시가 100명이 사는 시골마을보다 연산능력이 더 크다
(2) 프로세서의 다양성을 늘린다. 각기 다른 프로세서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데이터를 계산하고 분석할 것이다. 따라서 한 시스템 안에서 여러 종류의 프로세서들을 사용한다면 시스템의 역동성과 창의성이 높아질 것이다. 농부, 성직자, 의사 사이의 대화는 세명의 수렵채집인들 사이의 대화에서는 결코 나오지 못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할 것이다.
(3) 프로세스들 간의 연결을 늘린다.
(4) 현존하는 연결을 따라 이동할 자유를 늘린다.
- 데이터교 혁명은 100~200년까지는 아니라도 몇십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인본주의 혁명도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계속 신을 믿었고, 인간이 신성한 이유는 신이 어떤 신성한 목적을 위해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 한참 나중에야 몇몇 사람들이 용기를 내, 인간은 그 자체로 신성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부분의 데이터교도들은 만물 인터넷이 신성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필요를 위해 그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만물인터넷은 그 자체로 신성해질 것이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이동은 그저 철학적 혁명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용적 혁명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혁명은 모두 실용적이다. 인간이 신을 지어냈다는 인본주의 사상이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실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 마찬가지로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데이터교의 교의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 사상은 행동을 바꿀 때 비로소 세계를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