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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사회 2014. 11. 16. 15:57

 


거대한 전환

저자
칼 폴라니 지음
출판사
| 2009-06-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왜 지금, 철지난 책이 21세기 현재의 우리 사회에 주목받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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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매키버의 발문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발문

- 자기조정 시장의 추종자들은 암암리에 노동의 공급은 저절로 그 스스로의 수요를 창출하게 되어 있다는 일종의 세이의 법칙을 계속 신봉. 임금이 떨어지면 번영을 누리게 되는 자본가들로서는 실업률이 높으면 노동자들의 임금하락 압력이 작용하므로 그것이 혜택일 수 있음. 하지만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의 존재는 곧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오늘날 경제의 기능부전을 보여주는 이 실업이나 여타증거들을 너무나 많은 나라에서 감당못할 정도로 만나고 있음. 자기조정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들 중에는 이렇게 경제가 제대로 작동 못하는 책임을 부분적으로 정부 탓으로 돌리기도 암. 하지만 이런 주장이 옳건 그르건 중요한 점은 오늘날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신화가 실질적으로 사망했다는 점.

- 진실을 따져본다면 동아시아 위기는 오히려 자기조정 시장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예시임. 이 위기의 근원은 바로 가장 높은 수익을 찾아 전 세계를 쓸고 다니며 변덕이 죽 끓든 합리적, 비합리적 감정변화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단기 자본 흐름을 자유화한 때문임.
프레드 블록의 해제
루이 뒤몽의 프랑스어판 서문

제1부 국제 시스템
제1장 백년 평화

- 19세기 문명을 떠받친 네개의 제도

(1)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장기간의 파괴적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한세기 동안이나 방지한 세력균형 체제

(2) 세계경제라는 19세기의 독특한 조직체의 상징이었던 국제 금본위제

(3) 전대미문의 물질적 복지를 낳았던 자기조정 시장

(4) 자유주의적 국가

- 서양 문명은 19세기에 들어 내부적으로 전대미문의 단결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1815년에서 1914년에 걸친 백년 평화였음. 이 기간동안 크리미아 전쟁을 제외하면 영, 프, 러, 오, 이, 러의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기간은 18개월에 불과. 그 전의 2세기에 대해 마찬가지 계산을 해보면 각각 평균 60년에서 70년 동안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것을 볼 수 있음. 그런데 19세기의 가장 격렬한 교전이었던 1870~71년의 보불전쟁 조차도 1년도 지속되지 못했으며, 또 패전국이 비록 전대미문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관련국의 통화가치에 별 교란 없이 무사히 지불할 수 있었음.

- 오트 피낭스라는 이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는 19세기의 마지막 3분의 1과 처름 3분의 1 기간에만 고유하게 나타났던 것으로서,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 사회를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고리의 기능을 담당했음.

- 당시에는 한 나라의 정치가들과 국제적 투자가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 기관이 필요했고, 로스차일드가 누리던 독립성이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필요에서 나온 것. 즉 유럽 여러나라의 수도에 둥지를 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치외법권을 누리는 로스차일드 유대인 은행가들의 왕조야말로 그러한 절박한 필요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존재였음. 이들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음. 이들은 수많은 전쟁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산을 축정한 자들이었으며, 도덕적 고민 따위에는 전혀 무감각하고, 전쟁이 아무리 많이 벌어진다 하더라고 그 규모나 기간이 대단치 않고 또 국지적인 것이기만 하면 눈 하나 깜빡 않을 이들이었음. 하지만 만에 하나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이익은 큰 손상을 받을 것이었음. 바로 이러한 사실적 논리에 입각하여, 전 지구의 모든 민족들을 휘말아 넣은 혁명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적 평화를 유지한다는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업이 그들의 어깨 위에 떨어졌던 것임.

- 팍스 브리타니카, 즉 영국 패권의 아래에서의 세계 평화는 어느날 갑자기 거대한 함포를 탑재한 영국 함대가 해안에 불길한 모습을 드러내는 식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국제 통화 네트워크 안의 줄을 적절한 시점에 잡아당기는 방법으로 지배력을 발휘하는 때가 더 많았음. 또 세계지도의 광대한 부분을 차지한 반식민지 지역에서는 오트 피낭스가 아예 비공식적으로 그 나라 금융행정을 맡아보는 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일도 있었음. 당시 근동과 북부 아프리카 지역은 일촉즉발의 화약고와 같은 곳이었고 여기에서 거대한 이슬람 제국이 몰락해가고 있었음. 이곳의 여러나라에서는 국내 질서의 기초를 뒤흔들만한 사안들과 관련된 온작 미묘한 문제들을 금융가들이 일상적으로 맡아보고 있었으며, 평화가 가장 불안정한 분쟁지역에서는 아예 사실상의 행정업무까지 제공하고 있었음.

-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거의 끊이지 않고 무역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걸핏하면 유럽차원의 전면전의 원천이 되곤 했지만, 이것은 19세기에 들어 갑자기 중지됨. 이는 경제영역에서의 두가지 사실과 관련이 있음. 첫째, 구식 식민제국의 소멸, 둘째 자유무역 시대의 도래임. 이는 다시 국제 금본위제 시대로 넘어감. 이 새로운 형태의 무역이 나타남에 따라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관계는 급격하게 줄어든 반면,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인 이해관계가 금본위제와 결부된 새로운 국제통화 및 신용체제의 결과로 생겨나게 됨. 모든 나라의 국민경제의 이익은 이제 자국 통화의 가치의 안정과 또 세계 시장이 순조롭게 작동해야 자국 모든 계층의 각종 소득과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지는 이상 그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기게 되었음. 최소한 1880년까지는 전통적 팽창주의 대신 반제국주의적 경향이 들어서서 거의 모든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보편적인 추세가 됨.
제2장 보수적인 1920년대, 혁명적인 1930년대
- 30년대 초가 되면 급작스럽게 변화가 찾아옴. 그 이정표가 되는 사건은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러시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뉴딜의 출범, 독일에서 나치즘 국가 사회주의 혁명, 국제연맹이 무너지고 폐쇄형 제국들이 나타난 것 등임. 1차대전이 끝났을 무렵 19세기 적인 여러 이상들은 여전히 지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그 영향력이 향후 10년간을 지배했지만, 40년경이 됨녀 예전의 국제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고립된 지역을 빼면 모든 나라들이 새로운 종류의 국제체제 안에서 살아가게 됨.

-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차이점은 명백함. 전자는 여전히 19세기 유형에 충실한 것으로서, 단순히 세력균형 체제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터져나온 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불과. 하지만 후자는 이미 전 지구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대격변의 한 부분임.
제2부 시장 경제의 흥망
Ⅰ. 사탄의 맷돌
제3장 삶의 터전이냐 경제 개발이냐

- 인간 역사의 모든 사회가 시장경제였다는 식의 가정은 시장경제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전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못됨. 우리가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장경제라는 제도 구조는 우리 시대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 시대에서조차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나타났던 것임. 이렇게 전체 경제가 시장경제체제라는 가정이 무너진다면 장기적 시간지평에선 결국 시장이 균형을 스스로 달성하게 된다는 사고의 틀도 아무 의미를 가질 수 없음

- 영국이 심각한 피해 없이 종획운동의 재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가 왕의 권력을 발동하여 경제개발의 속도를 사회가 견뎌낼 수 있을만큼 늦춘 덕분. 즉 당시 중앙정부의 권력을 사용하여 그러한 사회전환의 희생자들을 구제하고, 또 변화과정이 사회를 황폐화 시키는 것을 가급적 줄이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 때문.
제4장 사회와 경제 체제의 다양성

-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에 대한 욕망은 한계도 경계도 없으므로 이익을 위한 생산이라는 원리는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비난. 그러는 가운데 그는 사실상 결정적 논점을 겨냥했음. 즉 사람이 돈을 얼마만큼 가져야 하는가의 한계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관계에 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독자적 경제적 동기란 그러한 사회관계와 갈라선 상태에 있다는 것임.

- 넓게 보자면 우리에게 알려진 바의 서유럽 봉건제가 끝나는 시점까지 존재했던 모든 경제 체제들은 상호성 원리, 재분배 원리, 가정경제의 원리 혹은 이 세가지 원리의 조합을 통해 조직되었음. 이러한 원리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회조직의 도움을 받아 제도화될 수 있었음. 그 사회조직이란 특히 대칭성과 중심성, 자급자족 등의 패턴을 조직의 기초로 사용하는 것들이었음. 이러한 틀에 놓고 보면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질서는 그 구성원 개개인들을 추동하는 대단히 다양한 동기들을 통해 작동이 보장되는 것이며, 그 개인들은 자신의 행동동기를 일반적 행위원리들에 일치하도록 버릇으로 길들여 나감. 그런데 이러한 아주 다양한 동기들 가운데서 이익이라는 동기가 별나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님. 관습과 법, 마술과 종교 등이 이 모두 협력하여 개인들이 사회의 행동규칙들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유인하며, 이 행동규칙들은 그것을 따르는 개인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전체 경제에서 각각이 맡은 기능을 수행하도록 보장하는 것임.

* 주요 인용 근거

- 이익이라는 동기는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않음

-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 아님

- 회피할 수 없는 최소한으로 노동을 줄이려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이지 아님

- 사람으로 하여금 노동하게 만드는 보통의 유인은 이익이 아니라 상호성과 경쟁, 노동의 즐거움, 사회적 인정 등임

- 인간은 여러시대에 걸쳐 변하지 않음

- 여러 경제체제는 사회관계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 일반적임. 물질적 재화의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것은 여러 비경제적 동기들임

- 개인이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식량을 채취하는 것은 초기 인류의 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음

- 상호성과 재분배라는 경제행위 원리는 소규모 원시공동체 뿐만 아니라 큰 규모의 부유한 제국들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됨

제5장 시장 패턴의 진화

- 시장패턴이라는 것은 잠재적으로 오직 그것에만 따라오는 고유한 동기, 즉 물물교환과 교역이라는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종의 특별한 제도를 창출할 수 있으니, 그 특별한 제도가 시장임.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조직을 압도해버릴 만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임. 이것은 사회가 시장에 딸린 부수물로서 운영된다는 엄청난 사태를 뜻함. 경제가 여러 사회관계 안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사회관계가 경제체제 안에 묻어 들어가게 되는 것임.

- 역사속의 다양한 인간 공동체는 외부와의 무역을 결코 완전히 그만둔적이 없는 것으로 보임. 하지만 그러한 무역이 반드시 여러 시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님. 외부와의 무역이란 그 기원을 따져보면 물물교환 보다는 오히려 모험, 탐험, 수렵, 해적질, 전쟁 등의 성격을 띰. 무역이란 본래 쌍방향성이나 평화 어느쪽도 내포하지 않음. 또 내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쌍방향성이나 평화를 조직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것은 상호성의 원리이지 물물교환의 원리가 아님.

- 도시들과 소공국들은 격렬한 보호주의를 내걸고 전면적인 시장의 출현에 반대하여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었지만, 15세기와 16세기에 나타난 형태의 국가는 계획적 행동을 통하여 교묘하게 이들로 하여금 얼떨결에 중상주의 체제를 받아 안도록 만들었음. 중상주의는 이러한 두 유형의 비경쟁적 상업을 가로지르는 장벽을 무너뜨림으로써 시대적 수명이 다해버린 마을 장터 및 도시간 무역의 배타주의를 분쇄해버렸고, 그를 통해 도시와 농촌사이, 또 여러 도시와 지방사이의 교역이 예전에 부딪혔던 차별을 갈수록 무시해 버리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시장으로 가는 길을 닦았음.

- 현실적으로 중상주의 체제는 수많은 도전이 계기가 되어 하나로 합쳐져서 나온 대응이었음. 정치차원에서 보면, 당시의 상업혁명은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새로운 창조물을 요청하고 있었음. 서구 세계의 상업 중심지는 원래 지중해였지만 상업혁명과 함께 대서양 연안으로 옮겨가게 되었음. 이 대서양 연안을 지중해쪽과 비교해보면, 거기에 있는 나라들은 크기는 하지만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고 또 거기에 살던 민족들도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음. 그런데 이 대서양의 여러 낙후된 민족들이 교역과 상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해나가기 위해 스스로 조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임. 그리고 대외 정치의 차원에서 보면 주권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권력을 확립하는 것이 그 시대에 제기된 요구였음. 따라서 중상주의적인 국가경영술이란 전체 영토내의 모든 자원들을 외교적 권력이라느 목표에 언제든 동원할 수 있도록 잘 정렬시켜 놓는 것을 내용을 삼고 있었음.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지게 되면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는 봉건제와 자치도시의 배타주의로 인해 조각 나 있는 전 국토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결과가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음. 경제차원으로 보면 그러한 통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자본이었으니, 이는 축장된 화폐의 형태를 띤 사적자원이었으므로 상업발달에 특히 적합한 것이었음.
제6장 자기조정 시장 그리고 허구 상품 : 노동ㆍ토지ㆍ화폐

- 산업생산이 복잡해질수록 확실하게 공급을 보장해야할 산업요소들의 가짓수도 늘어남. 당연히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 토지, 화폐였음. 상업사회라는 틀에서 이 세요소의 공급을 조직하는 방법은 단 하나, 즉 구매로 얻는 것임. 따라서 이 세가니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조직되어야만 했으니, 즉 상품이 되어야만 했음. 시장 메커니즘을 노동, 토지, 화폐라는 산업요소들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상업사회라는 틀안에 공장제를 도입하면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음. 산업작동에 필요한 요소들이 판매되어야 했던 것임. 이는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요구가 나타났다는 것과 같은 말임. 잘 알다시피 이러한 체제에서는 독립적인 경쟁시장을 통해 자기조정이 지켜져야만 이윤을 얻을 수 있음. 이미 공장제의 발전이 구매와 판매라는 과정의 일부로 조직된 이상 생산이 계속 돌아가려면 노동, 토지, 화폐가 상품으로 변형되어야 했음. 물론 이것들은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된 게 아니므로 정말로 상품으로 변형될 수는 없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노동, 토지, 화폐가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처럼 여긴다는 허구가 사회의 조직원리가 되고 말았음.
제7장 1795년, 스피넘랜드

- 1832년의 개혁법안과 1834년의 구빈법 개정은 자애로운 지주와 그가 베풀어주는 수당 체제라는 것의 지배를 끌어내렸다는 것 때문에 근대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보통 받아들임. 노동시장이 없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시도는 끔찍한 재난으로 귀결되는 실패로 끝나고 맘. 자본주의적 질서를 통치하는 여러법칙은 스피넘랜드의 비극을 통해 스스로를 당당히 현실에 관철시켰고, 자신이 국가 가부장주의는 물론 그밖의 어던 온정주의의 원리와도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는 것을 천명했음. 이 법칙들의 작동이 얼마나 엄정한 것인지 명백해졌고, 또 그것이 불복하는 자들은 실로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됨.
제8장 스피넘랜드 법 이전의 것들, 스피넘랜드 법의 결과들

- 정주법이 폐지된 이유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임금만 많이 주면 일자리를 찾아 움직일 노동자들을 전국차원으로 불러모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서 나온 것임. 그런데 한편으로 스피넘랜드 법이 제정되어, 자신과 처자식 밥 굶을 걱정 따위는 없어졌으니 누구도 임금을 찾아 고향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선포해 버린 것임. 즉 이 두가지 산업정책들 사이에는 실로 황당한 모순이 버티고 있는 것. 이 두가지 조치가 만약 동시에 현실로 적용된다면 사회가 무법천지의 혼란상태에 빠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아닌가? 그런데 스피넘랜드 법 당시의 세대는 자기들이 무슨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음. 당시가 역사상 최대의 산업혁명이 벌어지려던 전야였지만, 앞으로 다가올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징조나 전조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음. 자본주의는 도둑처럼 임했던 것임. 누구도 기계제 산업이 나타날 것을 예견하지 못했고, 그것은 완전히 충격으로서 나타났음.
제9장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와 유토피아
제10장 정치경제학과 사회의 발견
- 스미스만큼은 부의 문제란 곧 거대한 인민전체집단의 물질적 복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보았기에, 결국 부의 문제란 오로지 일정한 정치적 틀안에서만 정확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고 여겼음.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해가 사회작동의 법칙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그의 저술 어디에도 암시조차 없음. 또 경제적 세계는 하나의 독자적 실체로서 신의 섭리에 의해 통치되는 곳이며, 그 섭리의 대변자들은 바로 자본가들이라는 생각도 암시조차 찾아볼 수 없음. 스미스까지만 해도 경제영역을 스스로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할 우리의 기준을 그 법칙에서 얻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음.

- 스피넘랜드법으로 시작된 인간과 사회의 퇴행과정은 농촌지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김. 스피넘랜드법은 농촌지역에서의 시골지주들의 지배체제를 40년이나 더 연장시켜주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 결과 일반 민중들의 강건한 정신이 희생당하는 사태를 대가로 치르게 됨. 소유계급들은 빈민구호 지방세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고 불평했지만, 그것이 사실상 혁명에 대비하는 보험금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 또 노동계급은 자신들에게 배급되는 알량한 수당을 받을 때 그 돈이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이 정당하게 벌어들인 소득에서 염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함. 왜냐하면 그 수당이라는 것을 주면 필연적으로 임금은 최악의 수준에 머물게 되어 결국 임금소득자가 줄일래야 줄일 수 없는 필요욕구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액수로 내려가게 되는 것. 농업경영자들이나 공장주들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낮음 임금으로 일꾼들을 고용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구에서 메워주는 데 의존한 것임.

- 1817년 오언은 우선 공장제 생산으로 인해 생겨날 엄청난 결과들을 지적. 만약 자연적 진보에 그대로 맡겨두면 공장제 생산이 온 나라에 속속들이 퍼지게 되고 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전혀 새로운 성격의 인간들로 다시 만들어낼 것임. 그런데 그렇게 새로이 생겨나는 성격은 개인의 행복이나 전체의 행복에나 아주 해로운 원리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입법의 개입과 지도가 없다면 가장 개탄스럽고 영구적인 여러 사회악을 낳을 것이다. 새로운 제도적 시스템이 가져온 가장 명백한 결과는 다음과 같음.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 내려온 성격이 파괴당하고 새로운 종류의 인간으로 변이를 일으키고 있으니,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며 자긍심도 없고 자신에 대해 엄격한 기율을 들일줄도 모르는 뜨내기로 바뀌고 있으며, 그러한 거칠고 무표정한 존재들의 산 예가 바로 지금의 자본가와 노동자들임. "그들은 현재 기계제 공장이 도입되기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상태에서 저질 인간이 되어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연명할 수 있는 생계는 또 기계제 공장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 임금법칙과 그와 연결된 임금기금설을 결합해보면 결국 임금수준이란 경제의 호황, 불황과 상관없이 생계수준에서 요지부동으로 고정되며, 이것이 노동자들의 번식을 제한하여 그 머릿수를 저절로 조절하는 철의 법칙이 된다는 것. 이 철칙이라는 이름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자 라살이 붙인 것이지만, 그 기본적 사상은 이미 고전파 경제학의 체계내에 전제로 깔려 있음. 마르크스는 어디에선가 이러한 고전파 경제학의 자연주의적 기초, 특히 그 초석이 되는 인구법칙을 인류에 대한 모독이라고 부른 적 있음. (옮긴이 해제)

-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곡물법이 지주들의 권력의 온상이요 폐해라고 폐지를 외치고 있었으나, 리카도는 전혀 다른 경제학적인 각도에서 이 법의 폐지를 주장. 인구가 늘어 열등지를 개속 개간하는 일이 영국안에서만 벌어진다면 이는 정상상태(사회 전체의 경제적 역동과 팽창이 멈추어버린 상태)의 도래를 한층 앞당기는 일이 될 것임. 또 지주들이 싼 외국곡물의 수입을 막고 계속 더 높은 수준의 지대를 챙겨간다면 이는 자본축적을 막고 경제전체의 역동성을 가로막는 일이 됨. 따라서 지금 당장의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을 위하여 또 장기적으로 오게될 운명의 그 날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전 세계에서 들여올 수 있는 가장 싼 곡물을 들여와서 지주들의 지대를 최대로 낮추는 것이 살 길이라고 주장. 이러한 주장이 결국 영국에서 곡물법을 철폐하고 완전한 자유무역을 시작하게 되는 중요한 초석이 됨. (옮긴이 해제)
Ⅱ. 사회의 자기 보호
제11장 인간, 자연, 생산 조직
제12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 19세기 시장체제의 확장이란 곧 자유무역, 경쟁적 노동시장, 금본위제가 서로 발맞추어 확장되어 나간 것과 동일한 의미. 이러한 대모험에 얼마나 큰 위험이 잠복하고 있는가가 일단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자 경제적 자유주의가 일종의 세속종교로 변질되었다는 점도,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임.

- 자유시장체제를 도입하게 되자 통제, 규제, 개입의 필요가 제거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범위만 엄청나게 확장되고 말았음. 행정가들은 이제 자유시장 체제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 그것을 감시해야만 했음. 그래서 국가가 모든 불필요한 임무에서 풀려나기를 가장 열정적인 목소리로 원했던 이들조차, 또 모든 철학의 중심주제로서 국가활동의 제한을 제기했던 이들조차, 자유방임을 확립하는 데에 필요한 새로운 권력들, 기관들, 기구들을 자신들이 그토록 축소시키려 애를 썼던 바로 그 국가에다가 위임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임. 이 기묘한 역설을 능가하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음. 자유방임 경제가 의도적인 국가활동의 산물이었다면, 그 뒤에 나타난 자유방임 제한조치들은 완전히 자생적으로 시작된 것들이었음.

- 사회조직의 세속종교윤리로서 온 문명세계를 품안에 넣었던 경제적 자유주의이므로 지난 단 10년간 여러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해서 즉시 물러날 리는 없음. 영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수백만개의 독립적 기업들이 자유방임의 원리를 자신들의 존재근거로 삼고 있었음. 그 원리가 비록 어떤 부분에서 실패를 겪게 되었고 또 그 실패가 제아무리 극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그 원리 자체가 권위의 파산을 겪는 것은 아님. 사실 그 원리가 부분적으로 빛을 잃어버리게 되면 오히려 그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이 더욱 강화되는 일이 벌어지곤 함.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항상 자유방임 원리의 신봉자들이 앞으로 나서서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자유방임 원리에 원인과 비난을 돌리는 모든 어려움들은 사실 자유방임의 여러 원리들을 완전하게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

-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보상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해결함에서도 관련된 경제적 이해집단들의 구성이나 작동하고 있는 정치적 세력들의 이념적 성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제기된 문제의 성격을 점점 깨달을수록 그 해법은 개인주의적 형태에서 집단주의적 형태로, 자유주의적 형태에서 반자유주의적 형태로, 자유방임에서 개입주의적 형태로 옮겨감. 또한 일정한 산업발전 단계에 이르게 되면 자유방임에서 집단주의로의 변화라는 대단히 유사한 과정이 여러 다양한 나라에서 똑같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증명할 수 있음. 이러한 과정이 벌어진 원인을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분위기 변화나 몇몇 이익 집단들의 책동이라는 식으로 피상적인 것들에 돌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유사한 변화가 여러 다양한 나라에서 똑같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그 여러 원인들이 얼마나 근원적인 것이며 또 얼마나 서로 독자적인 것들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

- 디즈레일리의 두 민족과 유색인종 문제 :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오는 문화적 접촉이란 일차적으로 경제현상이 아님. 초기 자본주의에서 벌어진 노동계급의 비인간적 저질화는 사회적 파국의 결과이며 경제적 단위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님.
제13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ㆍ2: 계급적 이해와 사회 변화
제14장 시장과 인간

-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렇게 개인이 굶주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시사회는 시장경제보다 더 인간적이지만 경제성은 덜하다고 말 할 수 있음. 그런데 백인들이 흑인들의 세계에 가져다준 최초의 기여가 흑인들에게 바로 이 굶주림이라는 채찍의 사용법을 가르쳐준 것이라는 점은 실로 아이러니임.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식량부족 사태를 인위적으로 창출하기 위하여 빵열매 나무들을 베어넘어뜨리기도 하고, 또 원주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금으로 낼 화폐를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노동을 맞바꾸도록 강제하기도 했던 것임. 어느쪽의 경우이든 그 결과는 영국 튜어 왕조시대의 종획운동과 비슷하여, 살 곳을 잃은 부랑민 떼거리가 사방을 휩쓸고 다니게 된 것임.
제15장 시장과 자연

- 지구 표면을 산업사회의 필요에 존속시켜가는 장기적 과정의 여러 단계들. 첫번째 단계는 경작지의 상업화로서, 토지에서 발생하는 봉건적 형태의 각종 수입들을 유동화하는 단계. 두번째 단계는 급속히 증가하는 산업인구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전국 규모에서 식량과 유기물 원자재의 생산을 강요. 세번째 단계는 그러한 농산물 잉여 생산체제를 바다건너 식민지 지역으로까지 확장하는 것. 이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면서 비로소 토지와 그 생산물은 세계적 규모의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계획에 맞아들어가는 한 요소로서 다시 태어나게 됨.

- 경작지의 상품화란 봉건제 청산의 다른 이름일 뿐임. 이는 14세기 서유럽의 중심도시들과 영국에서 시작되어 약 500년 후에 전 유럽을 휩쓴 혁명속에서 농노적 토지보유의 잔재가 완전히 일소되면서 끝을 보게 됨. 인간을 경작지로부터 떼어낸다는 것은 곧 사회의 경제제도를 그 구성요소들로 해체한 뒤, 새로운 경제 체제의 적재적소에 알맞은 골로 만들어 다시 집어넣는다는 것을 뜻했음.

- 19세기 유럽대륙 정치사의 중심을 이루던 자유주의와 반동세력 사이의 투쟁은 이렇게 토지의 유동화에 대한 반대를 사회학적 배경으로 삼고 있었음. 시장경제가 농촌으로도 확산되면서 토지계급들은 이미 본래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맡고 있던 기능들을 거의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 있었음. 그래서 그들은 이 투쟁에서 군사세력과 고위 성직계층을 자신들의 동맹자로 삼음. 시장경제와 그 귀결인 자유주의적 정부는 사회전체를 모종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듯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바, 그러한 난국을 반동적 방식으로 타개할 해결책에는 항상 군사세력과 고위 성직계층이 효과적 이용가치가 있었음. 왜냐하면 이들은 전통에서나 이념에서나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적 정부가 내걸고 있는 공공의 자유니 의회주의의 원칙이니 하는 것들에 구애받는 세력들이 아니었기 때문. 요컨대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 국가와 일심동체로 묶여 있었지만 토지에 기반한 세력들의 이해는 거기에 묶여 있지 않았음. 이것이 유럽대륙에서 토지세력들이 항시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게 된 원천이었으니, 이로 인해 비스마르크 시대의 프러시아 정치에서 융커들에 의한 반시대적 반동의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성직 및 군사세력등릐 실지회복운동이 커져가게 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법원이 봉건 귀족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카톨릭 교회와 군대가 무너져 가고 있는 황제 권력의 수호자로 나서게 만들었음.

- 18세기 영국에서는 토리세력이 자유무역 지지자였고 또 농업을 혁신하는 개척자였다는 사실도, 또 튜더왕조 시절에는 토지 독점 농장주들이 전통사회를 파괴하는 주체였으며 또 토지로부터 돈버이를 만들어내는 혁명적 방법들을 시행했던 이들이라는 사실도 모두 잊혀져 버렸음. 프랑스와 독일의 중농주의를 신봉하던 지주들이 자유무역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던 이들이라는 것도 대중 담론의 기억에서 깨끗이 잊혀졌고, 대신 농촌은 언제나 후진적인 지역이라는 현대의 편견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음.
제16장 시장과 생산 조직

- 화폐의 부족은 17세기 상인 공동체 내에서 항시적이고도 심각한 불만사항이었음. 그래서 교역량이 늘어나는 시점에 정화로 사용되는 금화와 은화의 수량이 제한되어 있으면 강제적 디플레가 나타날 위헙이 있었고, 그래서 이로부터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 명목화폐가 일찍부터 발달되었던 것. 이러한 인공적 화폐의 매개가 없었다면 시장경제는 아예 성립자체가 불가능했음.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시기 무렵 영국 파운드화의 외환가치를 안정시키기는데 현실적 어려움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결과 금본위제가 도입됨. 안정된 환율을 유지하는 것은 영국 경제의 존속자체를 좌우할 수 있는 문제였음. 런던은 점증하고 있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됨. 그런데 그러한 파운드화의 환율안정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품화폐 제도를 들여오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음. 그 이유는 명백함. 명목화폐는 국가의 명령에 의해 발행된 것이건 개별은행이 발행한 것이건 외국 땅에서는 유통될 수 없으므로, 파운드화는 이러한 명목화폐와 절연하고 오로지 모든 나라에서 받아들여지는 금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뒷받침해야만 했던 것임. 따라서 금본위제(국제적 상품화폐체제의 공인된 명칭)가 전면에 나서게 됨.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국내경제의 활성하라는 목적에 관한한 금화와 같은 정화는 충분한 화폐가 될 수 없음. 금화는 기본적으로 금이라는 상품이며 그 수량도 임의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런데 실제 시장에서의 교역량 증가란 그렇게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요구되는 통화량도 그렇게 늘어날 수 있는 것임. 명목화폐가 없다면 영리활동은 그 양이 줄어들던가 아니면 아주 훨씬 더 낮은 가격수준에서 이루어지던가 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서 경기침체를 가져오고 실업을 빚어내게 됨.

- 국제 금본위제는 거기에 가입한 나라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막상 어떤 공동체이든 그것을 고수하게 되면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위험을 막아줄 보장이 없다면 어떤 나라도 국제 금본위제를 견뎌낼 수 없었음. 고정환율을 유지하려다 보면 급작스런 가격변화를 반드시 감내해야 하며 이는 완전히 화폐경제로 전환한 공동체들에게 파멸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독립적인 중앙은행 정책을 수단으로 하여 그 충격을 완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 이러한 상대적 안전성을 지켜줄 확실한 수호자가 바로 한 나라의 명목화폐였으니, 중앙은행은 이것을 매개로 하여 국내경제와 대외경제 사이의 완충장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임. 만약 유동성이 부족하여 국제수지가 위협을 받게 되면 쟁여둔 금 준비와 해외로부터의 대부로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음. 국내의 가격수준 하락가지 포함하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적 균형을 창출해야 할 경우엔 그로 인한 신용공급의 제한을 가장 합리적 방식으로 전경제에 고르게 확산시켜서 비효율적인 기업들을 제거하고 효율적 기업들로 하여금 경제난국의 부담을 걸머지도록 만들 수 있었음. 그러한 메커니즘 없이는 어떤 발전된 국가라도 금본위제를 고수할 경우 생산, 소득, 고용 어떤 형태로건 반드시 그 복지와 안녕에 파괴적 결과를 감내할 수 밖에 없음.
제17장 자기조정 기능, 망가지다

- 화폐는 사람이나 각종 재화와는 달리 그 이동을 가로막는 어떤 조처들에도 막히지 않고 어느 때 어디서건 사업거래를 성사시키는 능력을 계속 키워나갔음. 실제 사물들을 이동시키는 것이 어려워질수록 그 사물들에 대한 청구권들을 움직이는 일은 더 쉬워졌음. 상품과 서비스 교역의 속도가 느려지게 되면서 무역수지의 추이도 불안하게 춤추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도 세계 전체의 국제수지는 거의 자동적으로 유동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맞추었음. 이는 전 지구를 넘나드는 단기 대부자금, 그리고 가시적인 교역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 자금운영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진 일임. 재화의 교환에 관한 한 가로막는 장벽이 높아만 갔지만, 지불, 부채, 각종 청구권 등은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음. 이렇게 급속하게 증대되는 국제 통화 메커니즘의 가소성과 보편성은 계속 좁아들고 있는 세계무역의 채널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상하는 것이었음. 30년대 초 무렵이 되면 세계무역의 흐름은 거의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수준으로 쫄아들게 되지만, 국제적인 단기 대부자금의 흐름은 전대미문의 이동성을 획득하게 됨. 국제자본이동의 메커니즘과 단기 신용이 기능하는 한, 실제 교역에서의 불균형이 제아무리 크다해도 장부기입과 청산의 방법으로 극복못할 불균형 따위란 없었음. 이 국제적인 신용흐름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혼란도 회피할 수 있었고, 경제적 불균형도 금융수단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임.

제18장 체제 붕괴의 긴장들
제3부 진행 중인 전환
제19장 인민 정부와 시장경제

- 32년 국제연맹의 금위원회 보고서는 외환가치의 불안정성이 다시 돌아오는 가운데 그 이전 10년간의 통화분야에서 이룩된 주된 성과가 사라졌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보고서가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도 있음. 디플레이션으로 통화가치를 안정시킨다는 그 10년간의 헛된 노력의 와중에서 자유시장은 회복되지 않았고 되려 자유정부만 희생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음.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비록 이론상으로는 개입주의와 인플레이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안정된 통화의 이상을 비개입주의의 이상보다 위에 올려놓은 것임. 이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기조정 시장에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음. 하지만 이러한 행동 방향은 위기를 확산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금융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경제적 혼란을 부담지웠고, 여러 다양한 나라들의 경제를 국제수지 적자의 빚더미에 올라않게 만들어, 마침내 그나마 남아있던 국제적 노동분업의 잔재마저도 사라져버릴 수 밖에 없는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음. 이 결정적인 10년 동안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오로지 디플레를 이루기 위한 정책들만 완고히 고집하여 권위주의적인 정부개입주의까지 지지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결과 민주세력들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고, 이렇게 민주세력이 극적으로 약화되는 바람에 막을수도 있었을 파시즘적 파국이 현실화되는 것에 일조했던 것임. 이러한 화가 미치게 되자 영국과 미국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잽싸게 금본위제를 탈퇴함.
제20장 사회 변혁과 역사가 맞물려 진행되다

-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마침내 산업과 정치제도가 충돌하여 사회전체가 마비될 때까지 이르고야 말았음.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 대한 파시즘의 해결책은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음. 산업영역과 정치영역을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깡그리 뿌리뽑아버릴 것이며, 그것을 대가로 삼아 시장겨제를 개혁한다는 것. 이렇게 하여 붕괴의 위험에 처한 경제제도를 소생시킬 것이며, 그런 가운데 재교육 과정을 밟게 될 것이었음. 이 재교육 과정의 내용은 하나의 정치적 종교였고, 그 교리는 인간들 사이의 형제애라는 생각을 어떤 형태이든 철저히 부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음. 동시대인들은 파시즘의 출현을 한사코 해당 국가의 지역적 원인들, 민족성 또는 역사적 배경 같은 것들로 설명하려 했음. 하지만 이렇게 전 지구에 걸쳐서 산업화된 국가들, 심지어 산업화의 초입 단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운동을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일임. 어떤 나라에서든 일단 파시즘이 출현할만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적이건 문화적이건 민족적 전통이건 그것의 출현을 막아주는 종류의 배경이란 사실상 있을 수 없었음.
제21장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
-19세기 문명은 외부 혹은 내부의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었음. 그 문명의 생명력을 잠식했던 것은 1차대전으로 인한 황폐화도 아니었고,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나 파시스트 하류 중산계급의 반란도 아니었음. 그것이 붕괴한 것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던가 과소소비 혹은 과잉생산과 같은 이른바 경제법칙 같은 것들의 결과도 아니었음. 그것이 해체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원인이었으니, 그것은 자기조정 시장의 활동으로 사회가 절멸당하지 않기 위해 취해진 여러조치들이었음. 아직 서부 개척지가 남아 있던 시기의 북아메리카에서 존재했던 것과 같은 예외적 상황을 뺀다면, 19세기의 사회적 역동성을 제공하고 19세기의 사회를 결국 파괴해버렸던 전형적인 긴장과 갈등을 낳았던 것은 조직된 사회적 삶의 기본요건들과 시장 사이의 갈등이었음. 대외적 전쟁들은 그저 그 파괴의 속도를 앞당겼을 뿐임. 한세기에 걸친 맹목적인 발전의 시대를 거치고 이제 인류는 삶의 터전을 회복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음. 산업문명이 인류를 절멸시키지 않으려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요구에 종속되어야 함. 시장 사회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그것이 경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경제가 개인의 자기이익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경제생활을 그런 식으로 조직하는 것은 전혀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엄격한 경험적 의미에서 예외적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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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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