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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누가 금융세계화를 만들었나

 


누가 금융 세계화를 만들었나

저자
에릭 헬라이너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10-07-12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국가의 지원과 축복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개방적 금융 질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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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유로달라란 미국이외의 은행, 주로 유럽의 은행에 예입되어 있는 달러표시예금을 말함. 유러달러 거래의 기원은 냉전기로 거슬로 올라감. 50년대 초 미소간의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 은행에 달러 예금을 보유하고 있던 공산권 은행이 미국 정부가 이 예금을 동결내지 몰수할 것을 우려해 서유럽 은행으로 자금을 이전. 그후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로 대량의 달러가 유럽에 누적되었으며, 그 뒤로 유로달러시장은 급속히 발전해 투기자금의 거대한 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됨

- 31년 파운드 위기때부터 50년대까지 국제금융에서 영국의 지위는 런던 금융특구가 배타적 파운드 블록을 위한 금융특구로 기능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엄. 하지만 50년대의 파운드 블록의 장기적 생존력이 의문시 되자, 영국 금융당국은 런던 금융특구가 역외 달러 거래를 위한 금융특구로 기능한다면 런던의 국제적 지위가 더 잘 보존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깨닫게 됨. 이런 이유로 영국은 60년대에는 유로시장을, 70~80년대에는 지구화 과정을 지지함

- lagging hegemony : 과거의 헤게모니 국가가 이미 자신의 지배적 권력이 쇠퇴했음에도 계속해서 과거의 정책을 유지하는 경로의존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 영국이 2차대전 이후 미국에 금융패권국의 지위를 넘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금융세계화에 이해관계를 가졌던 이유를 지체된 헤게모니로 설명

1부. 브레턴우즈의 규제적 금융질서

2. 브레턴우즈와 자본통제 승인

- 금융시장의 지구화는 대체로 44년 브레턴우즈 협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간주됨. 전후 국제경제질서에 관한 규약으로서 이 협정은 국제무역과 금융 양자 모두에서 자유주의 질서를 촉진했다는 것임. 그러나 사실 이 협정은 자본통제를 용인했을 뿐만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하는 상당히 규제적인 금융질서를 수립했음. 브레턴우즈 협정은 최근에 이루어진 금융시장 지구화의 발판을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31년 이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자유주의 금융정책을 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음. 케인즈는 "이 계획은 단순환 전환기적 성격으로서가 아니라 상시적 제도로서, 모든 회원국 정부에 모든 자본이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부여한다. 과거 이단이었던 것이 이제는 정통으로 승인받았다."고 했음.

- 31년 국제적 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붕괴와 금본위제의 포기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문제에서 자유주의 전통과의 단절이 시작된 중요한 시점이기도 했음.

- 미국에서는 30년대 초 경제/금융위기가 정치 연합의 중대한 재배열을 불러온 기폭제였으며, 이는 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절정에 이름. 루즈벨트 행정부는 농민, 노동자 집단, 그리고 루즈벨트에 호의적이었던 산업가 동맹의 지지를 받으며 뉴욕 금융계, 특히 모건 금융제국에 당신 경제적 혼란의 많은 책임을 지움. 금융, 통화 정책을 더욱 엄격한 정부의 통제 아래 두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몇가지 중요한 시도가 이루어짐. 국내적으로는 경쟁을 완화하고, 투자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고, 모건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자본규제가 도입됨. 연방준비제도를 정치적으로 더욱 책임성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해 비-뉴욕 출신 은행가 매리너 에클스가 연준 수장으로 임명됨.

- 흔히 국제경제 질서는 2차대전을 전후로 고전적 자유주의와 연계된 자유주의로 구분. 고전적 자유주의는 자유무역과 금본위제에 기초한 국제통화질서의 안정만을 중시했고, 이를 위해 성장과 고용, 임금 등 국내 경제적 필요는 희생되는 질서였음. 특히 상품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을 방해하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 되지 못했고, 국내적 필요에 의한 국가의 개입이 배제되었음. 이런 고전적 자유주의는 선발 산업국가였던 영국의 일방적 주도로 19세기 전반에 걸쳐 성립되었으나, 1차대전으로 심각한 혼란에 빠진 뒤, 전간기에 일시적으로 복원되었다가 2차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돔. 이와는 대조적으로 2차대전 이후에 수립된 국제경제질서를 연계된 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는 제한적이고 관리되는 자유주의라 할 수 있음. 이런 연계된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성과 전후 각국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으로 국내경제적 필요에 따라 시장에 대한 개입과 같은 각국의 정책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질서였음.

- 자본통제에 관해 케인스와 화이트가 내놓은 초기제안은 뉴욕 금융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침. 그들은 국가의 자본통제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화이트의 협력 강제조항 아래서는 국가가 자본통제의 부과를 상대국에 요구할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음. 미국이 투기적 흐름을 통제할 의무를 지게 된다면, 유럽에서 도피한 자본을 유치하는 30년대 뉴욕은행들의 고수익 사업은 사라질수도 있었음.

- 산업가, 노동자 집단, 케인즈주의적 국가관료들 가운데는 연계된 자유주의의 강력한 지지자들이었지만, 31년 이전까지 금융정치를 지배한 민간, 중앙은행가들은 이를 반대했음. 연계된 자유주의자들과 은행가들의 분열은 선진산업 세계 전반에 걸쳐 보편화된 현상이었음.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브레턴우즈 논쟁은 일정 정도 초국적 토대에서 이루어졌음. 케인즈와 화이트는 뉴욕 은행가들의 반대에 맞서 연합했음. 최종협정에서 자본통제가 강력하게 승인된 것은 30년대의 혼란과 전시의 경험에 힘입어 케인즈와 화이트로 대변되는 연계된 자유주의 세력이 정치적 우월성을 획득한 반면, 31년 이전에 존재했던 뉴욕과 런던 은행가들 사이의 동맹은 취약해지고 금이 갔기 때문이었음. 또한 규제적인 브레턴우즈 금융조항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자유주의 금융질서가 안정적 환율체제 및 좀더 자유주의적인 무역질서와 양립할 수 없으리라는 믿음을 은행가와 연계된 자유주의자들 모두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음. 이런 믿음은 전간기 경험에서 비롯되었음. 자유주의 금융을 자유주의 국제경제 질서에서 부차적인 구성요소로 생각해, 안정적 환율과 자유무역을 보존하는 대가로 금융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던 것. 뉴욕 은행가들은 자유주의 국제경제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들간의 이와 같은 불일치가 경제적, 정치적 안정이 회복되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 그러나 이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일로 드러남.

3. 자본이동에 대한 지속적 경계

- 산업가들은 뉴욕은행가들보다 케인즈주의적 계획과 대외 자본통제의 필요성에 더 공감하고 있었음. 이런 산업가들은 30년대와 전시를 거치면서 정부 내에서 점차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지만, 대외경제정책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마셜플랜 도입과 함께 최고조에 달함. 또한 냉전의 영향으로 미국 국무부 전략가들은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을 촉진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단으로 경제성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김.

2부. 전지구적 금융자본의 부활

4. 60년대 유로시장에 대한 견인

- 50년대 말 이후의 금융시장 지구화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기술과 시장압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가는 국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기에 이런 압력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 그러나 세계 금융이 재등장하는데 국가는 훨씬 더 중심적 역할을 해왔음. 국가는 통제를 완화해 시장 운용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 또한 국가는 케인즈와 화이트가 자본의 이동을 통제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브레턴우즈 초안에서 제안한 두가지 메커니즘인 포괄적 외환통제와 협력적 통제를 결정적 국면에서 선택하지 않았음. 이와 더불어 국가는 최종대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국제적 규제, 감독활동에 서로 협력함으로써 국제적 금융위기를 예방했음.

5. 70년대 초 실패한 협력

- 70년대초 미국의 새로운 금융자유의 등장 원인. 정부 관료들은 대내외적 적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좀더 개방적인 자유주의 금융질서가 미국의 정책자율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 단기적으로는, 경상계정 적자를 바로잡는데 필요한 조정부담을 다른 나라에 전가하려했던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투기적 자본이동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수단이었음. 미국은 시장 압력을 통해 직접 협상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목표, 즉 서유럽과 일본의 평가절상 및 경제팽창을 달성할 수 있었음.

- 불가능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 : 국제정치경제학에서는 이를 먼델-플레밍의 법칙이라고 함. 개별 국가는 자본유동성, 안정적 환욜, 통화정책의 자율성이라는 세가지 정책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고, 기껏해야 두가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뿐임

6.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네번의 반환점

- 많은 사람들이 변동환율체제의 이점으로 예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고정환율체제에서보다 국가가 대외적 시장압력으로부터 더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변동환율제는 각국 경제의 기초상태를 반영해 대외수지를 매끄럽게 조정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임. 하지만 73년 이후 환율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고, 대체로 경제기초와 연관없이 움직임. 문제의 근원은 경제적 기초 뿐만 아니라 외환거래자와 자산보유자의 대때로 변덕스럽고 비합리적 판단에 따라서도 움직이는 투기적 자본흐름이었음. 이런 흐름으로 말미암아 변동환율체제는 대외적 시장압력으로부터 국내경제를 보호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부분 국내경제를 새로운 국제적 제약에 종속시킴.

- 60년대와 70년대 초에 미국은 자신들의 구조적 권력때문에 새롭게 출현한 개방적 국제금융 질서가 자신의 정책자율성을 보존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음. 그러나 78~79년 달러 위기때 다른 나라 정부들과 민간 투자가들은 별안간 미국의 경제정책에 대외적 규율을 부과하려 했음. 이런 새로운 대외적 구속에 직면해, 미국은 정책 자율성과 금융개방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었음.

7. 80년대 자유화 흐름

- 80년대 자유화 흐름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정치적 동기로 설명. (1) 각각 현존, 쇠퇴, 부상하는 금융권력이었던 미, 영, 일 특유의 헤게모니적 이해관계 (2) 신자유주의적 운동의 성장하는 힘 (3) 경쟁적 탈규제 전략

- 70~80년대에 걸쳐 금융은 세계 경제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였음. 서유럽 정부들은 금융부문에서의 비교우위를 가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민간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더욱더 경쟁적인 금융시장을 만들어 내고자 했음. 레이건 시절의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누리는 금융 권력이 상당부분 국제유동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시장의 흡인력에 달려 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음. 서유럽 정부들은 미국 금융시장의 유동성, 개방성, 복잡성을 모방해야만 재정과 경상계정 적자를 충당할 국제자본을 끌어들이는데서 미국과 경쟁할 수 있었음.

- 60~70년대와 마찬가지로, 80년대 초 미국 관료들은 미국이 누리는 지배적인 구조적 권력 때문에 개방적 자유주의 금융질서가 대내외적인 적자를 충당할 외국의 지원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 영국은 부분적으로는 국제금융 중심지로서 영국이 가진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체된 전략 때문에 자유화를 지지. 일본의 금융자유화는 부상하는 금융권력의 선도적 행동을 반영한 것. 일본이 갑자기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 그리고 금융 탈규제화, 혁신, 경쟁이라는 국내순환이 이런 선도적 행동을 고무.

- 한 국가가 금융시장을 탈규제화, 자유화하기 시작하면 다른 국가들은 자유롭게 이동하는 자금과 금융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이런 선도를 따를 수 밖에 없었음. 미, 영은 경쟁적 탈규제화 운동의 선도자였음. 유로시장을 지원한 양국의 일방적 움직임과 70~80년대 내린 자유화, 탈규제화 결정에 대해, 다른 국가들은 80년대에 들어 이와 유사한 탈규제 결정으로 응수하려 했음. 이는 규제적 브레턴우즈 금융질서의 해체를 불러옴.

8. 국제적 금융위기 극복과 국가의 역할

3부. 결론

9. 무역과 금융에서 국가는 왜 다르게 행동하는가

- 무역에서는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경쟁이 개입주의 정책을 부추긴 반면, 금융영역에서 그와 같은 경쟁이 금융 자유화를 조장했음. 왜냐하면 국가는 금융 중심지 사이의 규제격차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 운용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 이런 경쟁적 탈규제 다이내믹은 실제로 규제적인 브레턴우즈 금융질서를 점차로 해체시켜 자감. 만약 한 주요한 국가나 국가집단이 일방적을 이 질서로부터 이탈해 자유화와 탈규제 과정을 시작한다면, 달느 국가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고 느낄 것임. 전후에 미국과 영국은 이런 일방적인 행동이 가진 힘을 증명했음.

- 미국은 세계 무역에서는 그 지위가 쇠퇴하고 있었지만, 새롭게 등장한 개방된 세계 금융질서에서는 구조적 권력 덕분에 80년애에도 중심적 지위를 유지. 이 구조적 권력은 경제규모, 상대적으로 매력적인 금융시장, 이 질서 안에서 미국 금융기관들과 달러가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 지위에서 비롯된 것임. 이 지배적 지위때문에 미국은 개방적인 자유주의 국제금융질서를 추진할 능력뿐만 아니라 욕구도 가지고 있었음. 그러나 금융지도국으로 행동하려는 욕구는 국제 공공재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갈수록 커지는 대내외적 구속들에 직면해 자신의 정책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개방된 금융질서를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최근 몇년동안 미국이 무역보다 금융에서 개방적 자유주의 질서를 추진하려는 의향을 더 강하게 보였던 것은 미국의 헤게모니적 지위가 무역보다 금융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음. 실제로 금융영역에서의 헤게모니적 지위는 무역영역에서의 지위가 쇠퇴하면서 생기는 어려움을 상홰하는 데 활용되었음.

- 정책 자율성의 상실이나 금융 불안정성의 증가와 같은 금융개방 비용은 집단적이며, 그 영향력의 측면에서 볼때 잘 알려지지 않는 반면에, 이익은 특정한 경제적 행위자들(특히 국제금융과 비금융 기업들 및 금리생활자들)에게 돌아감. 그러므로 후자가 만들어내는 금융 개방에 대한 정치적 압력은 심각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음. 이와 대조적으로, 무역분야에서는 규제의 비용을 집단적으로 부담해야 하며, 규제의 이익은 특정집단에게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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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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