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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씽킹

인문 2014. 10. 3. 11:36

 


딥씽킹 Deep Thinking

저자
성열홍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4-05-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휴머니즘 상실의 시대,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최신 스마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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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 모바일 기술은 이미 차세대 혁신을 넘어 인류의 생물학적 특징마저 바꾸어 놓고 있음. 모바일 정보기기의 발전은 우리를 더 빨리 걷고 더 빨리 일하는 인류로 탈바꿈시켜 놓았음. 어느 연구결과에 따르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의 보행속도는 90년대를 거치면서 10% 이상 빨라졌다고 함. 더욱 놀라운 것은 극동아시아의 변화가 더 크다는 사실. 중국 광저우는 20%, 싱가포르는 30% 이상 더 빨라진 변화를 겪고 있음. 정보기술이 사회이 리듬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
- 디지털 시대 권력변동에 주목하고 있는 미래학자 니코 멜레는 거대권력의 종말에서 디지털 농노주의를 우려. "아마추어 창작자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투브 같은 사이트에 현혹되어 자신보다는 미디어 플랫폼에 이득을 가져다 주는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부음. 이들 창작자는 중세시대 농노처럼 정작 자신들이 농사짓고 거주하는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 그 땅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텀블러 등 다른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다." 라고 말함. 현대인들은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어야 안심이 되고 사이버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청중이 많을수록 뿌듯함을 느끼는 세상 속에 이음.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은 자신들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의 속성을 파악하여 비즈니스를 키워나감. 이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접속과 연결의 개념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가 되었음.
- 봉건주의는 뜻밖의 작은 물건으로부터 시작. 바로 등자의 개발로 부터 비롯됨. 안장만 가지고는 전쟁에서 개인이 혁혁한 공을 세우기가 어려워 기사계급이 생길 수 없었음. 그런데 등자가 발명된 후 비로소 말과 사람이 한 몸이 되어 높은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고 기사계급이 탄생할 수 있었음. 프랑크 왕국의 재상을 지낸 카를 마르텔은 교회의 영지를 몰수해서 전쟁에서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나눠 주었고, 이것이 봉건제도의 시작이 되었음.
- 동국대 황태현 교수는 세종때부터 이어온 조선의 발전은 18세기에 이르러 세계 최고의 경제부국이자 교육 및 문화복지국가를 일구었다고 주장. 1800년대까지 중국과 동아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영국과 유럽을 앞질렀다고 함. 경작 면적 기준으로 서기 1800년의 총요소생산성을 비교한 결과 잉글랜드가 100이라면 조선은 134였고 중국은 191이었음. 그러나 중국은 일부 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므로 중국 전체는 잉글랜드보다 높았으나 조선과는 대등한 수준이었음. 그리고 1820년 1인당 GDP를 비교해보면 중국과 조선이 각각 600달러로 분석되고 있음. 조선의 생활수준은 18세기 영/정조 시대 중국을 초월했으나 그후 하락하기 시작하여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함. 1983년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 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 세계 과학기술 주요 업적으로 올라온 기술건수가 중국 5건, 일본 0건, 동아시아 이외 전지역 28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국은 29건을 기록해 가장 많았음
- 인류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인은 5000년전 이미 문자를 발명하여 쓰고 있었고 세계 최초로 인쇄도 했음. 수메르인의 10대 발명품으로 바퀴, 무자, 범선, 달력, 족집게, 비누, 운하, 도시, 화폐, 농기구를 꼽고 있음. 그들은 바닥에 아스팔트를 깔아 어떤 수레도 지나갈 수 있게 했고 지금의 수도와 같은 배관시설을 각 가정에 갖추었음. 의사도 내과, 외과, 치과의사로 구분됨. 인류 4대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유역에 살던 수메르인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문명을 누림. 당시 수메르인들은 그림문자를 개량하여 만든 세계 최초의 문자를 점토판에 갈대로 찍어 썼는데 이것이 쐐기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설형문자라고 불림. 이 설형문자는 사람들의 힘과 지혜를 모으고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함. 문자를 통해 마을간 농업기술이 전파되면서 거대 농업혁명이 일어났고 건축기술, 공예가 발달하게 됨. 또한 신화, 종교, 역사, 법률, 교육 등 정신문명 역시 문자 덕분이었음. 그리고 이는 오늘날 서구문명의 뿌리가 됨
-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근처인 그란체스터에 오차드 티 가든이 있음. 사과나무 가든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900년대 초반 시인 루퍼트 브룩과 함께 영국의 지식인들이 차를 마시며 지적 교류를 하는 공간이었음. 거기에서 경제학자 케인즈, 작가 버지니아 울프,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 비트겐슈타인, 시인 바이런 등이 그란체스터 그룹을 이루고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음. 오차드 티 가든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70명 가까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더 나아가 영국이 경제강국에서 문화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지적 터전이었음. 서로 다른 장르와 문화가 섞이고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교류하고 놀게 하는 것이야말로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는 길임. 오차드 티 가든은 그런 경계이자 혁신의 공간이었음.
- 킴 비센티는 호모파베르의 불행한 진화에서 첨단기술이 오히려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는 마법사 같은 개발자들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이 평소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잊어버린 탓이라고 날카롭게 지적. 그는 03년 출시된 BMW시리즈를 예로 들고 있음. 전자계기판에는 각종 수치를 알려주는 기능들이 무려 700~800개나 됨. 각종 제어기능과 성능은 대단히 뛰어나지만, 소비자들이 느끼는 조작의 복잡성 또한 대단함. 자동차 전문잡지의 편집자들조차 이 자동차의 시동거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10분이 걸렸다는 비난을 들어야 할 정도임
- 과거 시대로부터 기술결정론에 의해 사회가 발전했다는 증거는 많음. 먼저 등자에 의한 봉건제 발전을 들 수 있음. 쟁기에 의한 장원제와 도시의 발전도 그 사례. 무거운 쟁기 발명 덕분에 충적토를 개간할 수 있게 됨. 쟁기 덕에 농업 생산력이 높아져 잉여생상물이 생겼고, 이를 통해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이 발전. 상업이 성행하다 보니 도시가 형성됨. 기술결정론에 대해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님. 기술이 진보의 중심일 수 있는 경우는 사회적 진보와 맥락을 같이 할 때라는 반론도 있음. 예를 들어 등자는 유럽에서만 도입된 게 아니기 때문에 등자의 조입이 중세 봉건제를 낳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 특히 프랑크 왕국과 비슷한 시기에 등자를 도입한 나라 중 앵글로 색슨 족은 봉건제가 확립되지 않았음을 예로 들고 있음.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도 봉건제가 존재했음. 특히 중국의 주나라때 봉건제는 등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음. 등자는 주나라 후에 등장했기 때문. 서양에서의 인쇄술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일으켰지만, 동양에서의 인쇄술은 서양과 같은 혁명을 가져오지 않았음.
- 디지털 치매와 같은 폐해 중 하나로 팝콘 브레인 현상이 있음. 이 말은 팝콘 처럼 톡톡 튀는 상상력이나 창의성을 의미하는 것이면 좋겠지만 그와는 정반대임.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것에는 반응하지만 느리게 변화하는 실제 현실에는 무감각해진 뇌를 의미함.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활용한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지면, 뇌의 생각중추인 회백질의 크기가 줄어들어 팝콘 브레인과 같은 뇌로 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음. 즉, 사람의 뇌가 눈앞의 자극적인 영상에는 반응하지만, 현실의 돌발상황에는 반응하지 않는 증세를 말함.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과 같이 빨리빨리 변화하는 영상에만 길든 뇌는 차분하게 책을 읽고 대화하거나 무엇인가를 기다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 특히 스마트폰에 많이 노출된 어린이들의 뇌가 감정과 표현을 잃은 팝콘 브레인으로 쉽게 변할 수 잇음. 그들은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지지 않으면 집중하지 못함.
- 감자가 유럽의 시각에 오르는 역사의 과정에서도 고정관념의 타성을 살펴볼 수 있음. 보통 새로운 작물이 사람들에게 맛을 보인 뒤 200~30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주식으로 식탁에 오름. 감자의 경우 더욱 그러했음. 1539년 스페인사람들이 감자를 페루에서 처음 보앗고, 스페인으로 들여옴. 그러나 이상한 생김새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식품이었음. 감자는 주로 말 사료료 쓰였고 아주 허기질때만 식용으로 사용되었음. 또한 감자를 먹으면 한센병에 걸린다는 헛소문도 감자가 식용으로 대중화되는 것을 가로막음.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전쟁의 기아 속에서도 감자를 잘 먹지 않았던 이유가 식사는 반드시 빵으로 해야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음. 글루텐 성분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는 감자이므로 감자는 밀가루를 대체하여 식탁에 오를 수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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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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