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1

인문 2014. 10. 2. 17:18

 


이미지 인문학. 1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천년의상상 | 2014-06-0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진중권의 이미지 인문학 프로젝트디지털 이미지 속에 감추어진 섬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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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철학은 진지를 정신과 실재의 일치로 규정. 하지만 일치해야 할 정신과 실재는 성격이 다름. 즉 자연은 연속적이나 숫자는 단절적임. 따라서 수를 자연에 들이대면 자연은 수와 수 사이의 빈틈으로 빠져나오게 됨. 17세기의 과학자들이 자연의 수학화를 시도했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가 바로 이것임. 자연을 인식하려면 먼저 이 연속과 불연속의 모순부터 극복해야 함. 이 '근대의 패러독스'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손으로 해결된다. 그들은 미적분으로 숫자들 사이의 간극을 채움으로써 자연의 모든 것을 형식화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전지하고 전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이론적 가능성일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미분방정식은 곧 현실에는 응용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실생활에서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너무 복잡하여 인간의 계산능력으로는 풀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아직 지식을 권력으로 전화할 수 없었다. 전지하나 전능하지는 못한 이 답답한 상태가 해결되려면 계산기가 필요했다. 17세기에 계산기 제작붐이 일어난 것은 이와 관련되리라. 라이프니츠 자신도 1670년경부터 모두 다섯개의 모델을 고안한 바 있다. 적어도 계산이라는 면에서 기계는 인간보다 우월하다. 17세기의 계산기들은 모두 십진법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당시 라이프니츠는 기계적 계산에 적합한 언어는 이진코드라는 인식을 이미 갖고 있었음. 하지만 이진법에 기초한 계산이라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까지는 23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음. 38년 독일의 공학자 콘라드 추제는 디지털 원리로 작동하는 계산기 Z1을 인류 최초로 제작함. 이진코드로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와 더불어 17세기 이후 그저 이론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자연의 정복이 비로소 실천적 가능성으로 전화됨
- 고대인의 상상력이 주술적 상상력이라면 현대인의 상상력은 기술적 상상력임. 인간이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형식의 변화를 플루서는 이렇게 요약함. "먼저 인간은 생활세계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상상한다. 이어서 그는 상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기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선형적 문자로 쓰인 비판으로부터 물러나 그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상상력에 힘입어 그 분석을 통해 얻은 합성 이미지를 투사한다."
-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미디어를 통해 매개된 것.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남이 본 것을 보고, 남이 들은 것을 듣는다. 반면 미디어에 매개되지 않은 체험은 대부분 사회적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귄터 안더스는 이 매개된 체험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실이라 부르는 것의 어원은 만들어진 것(faktum)이라는 라틴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이 실은 이미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세계를 그대로 베끼는 것은 적어도 한가지 장점을 갖는다. 인터페이스에 관한 별도 학습 없이도 대중이 운영체계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디지털 기기의 인터페이스는 아날로그 현실과 디지털 가상이 봉합선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임. 디지털 대중도 전자책의 책장을 넘길 때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고 싶어함. 그래서 디지털 문화는 탈육체화에서 재육체화로, 비물질화에서 재물질화로 나아가고 있음. 산업혁명의 인터페이스는 기계를 상수로 놓고 인간을 변수로 간주해 인간을 기계에 꿰맞추려는 경향이 있었음. 그때 인간은 기계를 지향했음.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을 지배했던 무기물의 미학, 즉 추상과 몽타주는 그런 기계화의 예술적 반영이리라. 반면 정보혁명의 인터페이스는 인간을 상수로 놓고 기계를 변수로 놓는다. 여기서 디지털 가상마저도 아날로그 현실과 똑같이 디자인하려는, 이른바 디지로그의 복고적 경향이 발생한다. 오늘날 예술에서 유기체의 미학이 부활하는 것은 이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의 의식에 일어나는 변화다. 그것이 가상현실이든 증강현실이든, 오늘날의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가상과 현실을 봉합선 없이 중첩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인터페이스에 이미 익숙한 대중은 가짜마저 진짜처럼 대하는 파타피지컬한 태도를 자연스레 갖게 된다. 디지털 대중은 가상과 현실, 관념과 실재의 구별을 괄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현상학적 판단중지, 즉 존재론적 중립의 태도를 취하려 한다. 이것이 디지털 대중의 새로운 세계감정이다.
-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에 따르면 미디어의 발전은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가 공존하면서 상대의 전략을 차용하는 식으로 이루어짐. 이를 재매개라 부름. 이를테면 윈도우가 아날로그의 은유(오피스, 폴더, 파일, 휴지통)를 사용하는 것은 과도기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미디어의 발전에서 쉽게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이라는 것. 칼라TV의 중계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생한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방송이라는 올드미디어가 게임이라는 뉴미디어 전략을 차용한 재매개 현상이라는 것. 중계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채팅창 혹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시청자 견해가 올라왔음. 네티즌들은 방송으로 지켜본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팀에게 전달되었음. 이를테면 광화문에서 시민들을 인터뷰하다가 "시위대가 사직터너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 한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방송팀은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감. 카메라로 비친 영상을 보고, 지금 도로에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는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봐달라고 구체적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음.
- 방송이 게임의 포맷을 차용했따는 사실의 바탕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음. 기실 방송의 보도는 진지한 현실에 관한 것이고 게임은 허구속에서 이루어지는 놀이일 뿐이다. 하지만 촛불집회 현장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정치와 오락을 가르던 뚜렷한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 현장에서는 불과 100미터 거리를 두고 치열한 투쟁과 즐거운 놀이가 공존했다. 촛불시위 속에서 저개발의 정치, 즉 투쟁의 정치는 과개발의 정치, 즉 놀이의 정치와 하나가 되었다. 서사학과 유희학은 앞으로 정치학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분야가 될 것이다. 저개발의 정치에서 과개발의 정치로 이행하는 데는 당연히 물질적 근거가 바탕에 깔려 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오면서 노동과 오락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정보사회에서는 생산의 수단과 여가의 수단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은 컴퓨터로 노동하고 컴퓨터로 놀이한다. 노동과 여가가 시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것이 종종 노동을 감시해야 할 자본에는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노동자들이 클릭 한번에 근무모드에서 오락모드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종종 외부로 연결되는 인터넷을 제한하거나 아예 차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구술문화에서는 로고스보다는 뮈토스가 중요. 거기에는 객관적 기술보다는 주관적 상상이, 논증의 정합성보다는 플롯의 개연성이, 이성적 비판보다는 정서적 공감이 더 잘 어울림. 구술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제공하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의 복잡한 사태를 영웅적 스토리로 압축, 변환하는 능력임. 토론토 학파 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전자매체는 문자문화가 무너뜨린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는 경향이 있음. 실제로 나꼼수 청취자들은 버스나 전철에서 독특한 손동작으로 같은 상상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무언의 교감을 낯선 이들과 나누곤 했음.
- 인쇄술로 무장한 문자문화는 한때 구술문화의 비논리를 비웃었음. 새로운 구술문화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장하고 나타나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문자문화의 논리를 비웃음. 서구사회가 오랜시간에 걸쳐 비교적 탄탄한 문자문화를 형성해왔다면 한국에서는 문자문화의 역사가 매우 짧았음. 공동체적 구술문화의 전통이 강고하다는 점은 인터넷이나 SNS위에 가상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되어줌. 하지만 그것이 문자문화의 비판적 이성으로 뒷받침되지 못할 때 그 발달한 테크놀러지를 들고 1차 구술문화로 함몰하기 쉽다.
- 나꼼수는 탈정치화한 디지털 세계에서 내면에 숨은 정치적 욕망을 발견하고 끌어냈으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의 연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디지털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도 보여주었음. 나아가 유저가 제작하는 콘텐츠가 신뢰도와 영향력에서 기존 언론을 능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기능전환으로 테크놀러지를 정치적 목적에 전유하는 탁월한 예를 제시하며 정치의식에 유희정신을 결합한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주체들을 낳았음. 나꼼수의 한계는 우리 사회의 의식이 아직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진보적 잠재성을 올바로 활용할만큼 성숙하지 못했음을 의미함
- 차별을 당하는 자들이 왜 타인을 차별하려고 할까? 이유가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서 신분체 철폐에 가장 반대한 것은 외려 상민들이었음. 신분제가 철폐되면 천민을 차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 사무라이로부터 받는 차별의 수모를 견디게 해준 것은 그들이 마음놓고 차별할 수 있는 천민계층의 존재였음. 일베의 심리도 다르지 않음. 현실에서는 차별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일베에서 그들은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음. 일베의 고학력 인증 사태도 이와 관련됨. 그것은 학력으로 차별받는 이들이 차별에 항의하는 대신 타인의 고학력을 내세워 차별하는 위치에 서보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회원들이 굳이 학력을 인증할 필요를 못느낄 것이다. 일베에서는 다르다. 거기서 그것은 실재계를 가리는 스크린 역할을 한다. 즉 자신을 소수 고학력 회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가 학벌사회의 루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차별받는 현실을 잊으려고 차별하는 권력에 동승할 때 병신게임의 무정부주의적 해학은 곧바로 파시스트적 공격으로 전화하게 됨. 자신을 병신이라 부르려면 보통은 존재의 여유가 필요하다. 자신이 병신이 아니라 믿는 이들만이 자신을 병신이라 부르는 놀이를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베회원들은 다르다. 그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을 병신으로 여긴다. 그들이 자신을 병신이라 부를 때 거기에는 놀이의 여유가 아니라 실존의 절박함이 묻어 있다. 이것이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실재계다. 이를 공격적으로 망각하려고 억지로 차별대상을 만들어보지만 그런다고 실재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반복적으로 표출되기 마련, 그래서 혐오발언을 마치 오토마톤처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기억은 항상적이지 않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주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역사라는 이름의 집단적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은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아니다. 집단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조직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이 할 일이고, 또 이제까지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집단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과거의 기억을 다시 조직하는 것은 그리 신기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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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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