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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경제 2014. 10. 22. 21:53

 


부채 그 첫 5000년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출판사
부글북스 | 2011-11-2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모든 경제학 교과서들...
가격비교

- 갱단원이 당신에게 총을 들이대며 보호금으로 1천 달러를 요구하는 행위와, 똑같은 갱단원이 총을 들이대며 1천 달러의 융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행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점이 전혀 없음.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차이가 있음. 미국이 한국이나 일본에 진 부채의 경우처럼, 세력균형이 어느 시점에 이동하거나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게 되면, 융자는 아주 다르게 취급될 것임. 진짜로 갚아야 할 부담으로 바뀔 것임. 그러나 결정적 요소는 여전히 권총인 것처럼 보일 것임
- 역사적으로 볼 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오명을 떨치려고 노력하는 효과적 방법은 두가지 뿐이었음. 책임을 제3자에게 떠넘기든지 아니면 돈을 꾸는 사람이 더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음.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는 지주들이 첫번째 방법을 택하며 유태인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음
- 지주들은 자신의 영역안에서 유태인들이 고리대금업 외에 다른 활동으로는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는 정기적으로 유태인들을 나쁜 인간이라고 공격해 그들의 돈을 챙기곤 했음. 당연히 두번째 방법이 더 보편적이었음. 그러나 그 방법은 대체로 융자 당사자 모두가 똑같이 죄인이라는 결론을 낳음. 돈을 빌려주는 행위 자체가 비열한 거래이기 때문. 따라서 양 당사자 모두가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아주 큼.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은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함. 중세 힌두교 법전을 보면, 이자를 부과하는 대출이 용납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는 채권자 집안의 노예로 다시 태어난다고, 더 훗날의 법전에는 말이나 소로 다시 태어난다고 되어 있음
- 19세기 중반 루이스 헨리 모건이 북아메리카 이쿼로이 인디언 6개 종족을 묘사했는데, 이들의 주요 경제시설은 공동주택이었음. 그곳에 대부분의 재화를 비축해두고 여자들의 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재화를 할당했으며, 화살과 고기를 교환하는 행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 경제학자들은 이런 정보를 그냥 무시함
- 국부론이 등장하고 몇년 동안 학자들은 그 책에 거론된 예들의 대부분을 면밀히 조사한 결고 거의 모든 예에 등장한 사람들이 돈의 사용에 상당히 익숙해 있었고 실제로 회계단위로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돈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는 말린 대구의 예를 들어보자. 영국 외교관 앨프리드 미첼-인스는 거의 1세기 전에 스미스가 묘사한 내용은 하나의 착각이며 단순한 신용거래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음
- 뉴펀들랜드 어업이 시작된 초창기엔 거기에 상주하는 유럽인들이 한 사람도 없었음. 어부들은 고기잡이 철에만 그곳에 머뭄. 어부가 아닌 사람은 말린 어류를 구입하고 어부들에게 일용품을 팔았던 무역업자들이었음. 어부들은 잡은 어류를 파운드와 실링과 펜스로 계산한 시장가격으로 무역업자에게 넘기고 그 대금은 장부에 외상으로 남겨둠. 그 외상으로 어부들은 일용품을 구매. 남은 외상은 나중에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어음으로 지급됨
- 메소포타미아 도시에 나타난 시장에선 가격을 은으로 계산했으며, 신전과 궁전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물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동. 그러나 이곳에서조차도 대부분의 거래는 신용을 근거로 이루어짐. 상인들은 실제 거래에서 은을 사용하기도 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에 속했음. 그러나 그런 상인들까지도 대부분의 거래를 신용으로 했음. 양조장에서 맥주를 사는 보통사람들은 평소에 외상으로 했다가 나중에 추수기가 되면 그 빚을 보리나 다른 것으로 상환. 이쯤되면 돈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산산조각 부서지게 됨
- 미첼-인스는 1913년과 1914년에 뉴욕의 뱅킹 로 저널에 두편의 에세이를 발표. 이 에세이들에서 인스는 기존의 경제사가 세워진 그 바탕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부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 상업과 관련한 오류들 중 하나는 신용이라 불리는, 돈을 저축하는 방법이 근대에 등장했으며, 이 방법이 알려지기 전까지 모든 구입에 대한 대금지급이 현금으로, 다시 말해 주화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세심하게 조사해보면 그와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옛날에는 주화가 오늘날에 비해 상업에서 훨씬 작은 역할을 맡았다. 정말로 주화의 양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중세 영국 왕실과 왕실소유지의 수요도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 왕실과 왕실소유지들은 작은 액수를 지급할 목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토큰을 사용했다. 주조 화폐의 양이 얼마나 하찮았던지 왕들이 수시로 다시 주조하거나 발행하기 위해 화폐들을 회수했다. 그래도 상업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 국부론은 새로 발견한 경제학이라는 학과를 하나의 과학으로 정착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옴. 이는 곧 경제학이 그 자체로 독특한 연구영역을,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영역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경제도 뉴턴이 그 직전에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확인한 것과 똑같은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 스미스의 시대만 해도 경제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는 사상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음. 당시 뉴턴은 신을 우주의 시계공으로, 우주의 물리적 장치들이 종국적으로 인간에게 이로운 쪽으로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든 시계공같은 존재로 보았음. 스미스도 뉴턴과 비슷한 주장을 펴려고 노력하고 있었음. 신 혹은 신의 섭리가 세상사에 작용하기 대문에 인간이 자기이익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보편적 복지를 증진하게 되어 있다는 주장이었음. 스미스가 말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그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하듯이, 신의 섭리의 대리인이었음. 다시 말해 그것은 신의 손이었음
- 미첼-인스는 신용화폐론으로 알려지게 된 이론의 대표자였음. 19세기에 그의 고국인 영국에서만 아니라 당시 경쟁을 벌이던 강대국인 미국과 독일에도 열렬한 옹호자를 두었던 입장이었음. 신용이론가들은 화폐는 물건이 아니고 회계도구라고 주장. 달리 말하면 화폐는 절대로 실물이 아니라는 것. 달러나 도이치 마르크를 만질수 없는 것은 시간이나 센티미터를 만질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임. 통화의 단위는 단지 추상적 측정의 단위에 지나지 않음. 신용이론가들이 정확히 지적하듯이,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추상적 회계시스템이 특정한 교환도구보다 훨씬 앞서 등장
- 여기에 당연히 따를 질문은 이것임. 만약 돈이란 것이 단순히 잣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측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대답은 간단함. 부채임. 하나의 주화는 사실상 하나의 차용증서임. 통념적으로 보면 은행권은 일정금액의 진짜 화폐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이고 약속이어야 함. 신용이론가들은 지폐는 금 1온스의 가치와 똑같은 무엇인가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일 뿐이라고 주장했음
- 시장들은 고대 군대 주변에 형성된 것이 거의 확실함. 인도의 사상가 카우틸리아의 실리론과 중국의 염철론만을 슬쩍 보아도 고대 통치자들 대부분이 광산과 군인, 세금, 식량의 관계를 놓고 오랫동안 부심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음.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이런 식으로 시장들을 창조하는 것이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유익하다고 결론을 내림. 이는 관리들이 필요한 것을 더 이상 국민들로부터 징발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왕실 소유지나 공방에서 그런 것들을 생산할 방도를 짜느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 달리 표현하면 국가와 시장의 존재는 다소 반대된다는, 애덤스미스의 유산에서 비롯된 자유주의자의 끈덕진 가설에도 불구하고, 역사기록은 정확히 그 반대가 진실이라는 점을 보여줌. 국가가 없는 사회들은 또한 시장을 갖지 않는 경향을 보임
- 모든 인도유럽어를 보면 부채를 뜻하는 단어는 죄와 죄의식을 뜻하는 단어와 동의어임. 이는 종교와 지불, 그리고 신성하고 세속적인 영역들이 돈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줌. 예를 들어 독일어의 돈(geld), 배상 또는 희생(옛 영어 geild), 세금(고트어 gild), 그리고 guilt사이에는 어떤 연결이 있음
- 원초적 부채라는 사상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갖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 신화라고 말할 수도 있음. 한때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창조한 신들에게 빚졌고, 그 빚에 대한 이자로 동물을 제물로 바쳤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목숨으로 원금을 갚았음. 오늘날엔 우리는 생명을 자연에 빚지고 있으며, 그 빚에 대한 이자를 세금의 형식으로 내고 있으며, 적들에 맞서 국가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원금을 상환함
- 이것이 20세기의 위험한 함정이다. 한쪽에 시장의 논리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개인으로 출발한다고 상상하길 즐긴다.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논리가 있다. 그 논리 때문에 우리 모두는 상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빚을 안은 채 시작함. 우리는 시장과 국가는 정반대이며, 시장과 국가 사이 어딘가에 진정으로 인간적인 가능성들이 있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음.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이분법임. 국가가 시장을 창조했다. 시장은 국가를 필요로 한다. 둘 중 어느것도 다른 하나가 없는 가운데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적어도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형태로는 존재가 불가능함
- 감자와 여분의 구두를 교환하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측은할만큼 순진한 구석이 있음. 고대인들이 돈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을 때, 그들의 머리속에 처름 떠오른 것이 우호적 물물교환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음. 정말로 일부 고대인들은 선술집에 비치해두고 있던 외상쪽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음. 아니면 그 고대인들이 상인이거나 행정관이었다면, 창고나 회계장부, 외국산 물품에 대해 생각했을 수도 있음. 그래도 대부분의 고대인들의 마음에 떠올랐던 것은 노예를 파는 행위, 포로들의 몸값 책정, 부패한 세리, 정복군의 약탈, 저당과 이자, 절도와 강탈, 복수와 처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질 신부를 얻는데 필요한 돈이 가족을 파괴하는 힘을 지니는 그 모순이었을 것임.
- 인간의 삶이 매우 복잡한 이유 하나는 이 원칙들 중 많은 것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 도덕적 원칙들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음. 교환의 도덕적 논리, 교환에 따른 부채의 도덕적 논리는 많고 많은 원칙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 어떠한 상황에서든 거기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원칙들이 작용하고 있음. 이런 점에서 보면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도덕적 혼동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적 사고는 바로 이런 긴장 위에 구축되고 있음
-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당사자들이 그 관계의 틀로 우월이나 열등을 받아들이고 또 그 관계가 부드럽게 진행중이어서 거기에 독단적인 힘을 더 이상 가할 필요가 없을 때, 그 관계는 습관 또는 관습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보면 됨. 그런 상황이 간혹 정복 같은 국가 창설과 관련있는 행위에서 기원한 것으로 분석되기도 함. 아니면 설명의 필요가 전혀 없는 조상의 관습으로 여겨질수도 있음. 그러나 이는 왕 또는 우월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바치는 행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임. 거기엔 선물이 전례로 받아들여지고, 또 관습에 보태져 그 후론 의무가 될 위험이 상존함
-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 여기서 선물은 공짜로 주어지는 뭔가를 뜻하지는 않음. 인간존재들이 서로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상호부조가 아님. 누군가에세 감사를 표시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그 말엔 그런식으로 행동하기로 한 선택이 어떤 의무를, 부채감을, 그리하여 열등감을 조장했다는 암시가 담겨 있음
- 로스파베에 따르면, 티브족들은 세계 곳곳의 현상인 신부값의 바탕에 깔린 논리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음. 신부값을 전하는 구혼자는 결코 그 여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 아님. 심지어 그녀의 아이에 대한 권한을 갖는 대가도 아님. 만일 신부에 대한 대가라면, 그것은 놋쇠막대들이나 고래이빨, 별보배고둥껍질, 심지어 소까지도 어느정도는 인간 존재의 등가물이라는 것을 암시함. 이는 인간경제의 논리에 비춰보면 터무니 없는 말임. 한 인간은 오직 다른 인간의 등가물로만 여겨질 수 있을 뿐임. 결혼의 경우엔 한 인간의 삶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가 걸렸기 때문에 그만큼 더 터무니없는 말임.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임
- 인류학계에서는 신부값이 인구는 상대적으로 적고 땅은 특별히 귀하지 않은 곳에서, 그러니까 노동력 관리가 정치의 전부인 곳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 상식임. 인구가 많고 땅이 귀한 곳에선 그 대신 결혼지참금이 발견됨. 가족에 여자하나를 더하는 것은 먹여야 할 입을 하나 더하는 것임.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아버지는 돈을 받기는 커녕 딸이 새로운 가정에서 사는 것을 돕기 위해 뭔가를 기여해야 했음. 수메르시대엔 결혼할 때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것은 신랑의 아버지가 신부의 아버지에게 건네는 풍성한 음식선물이었음. 결혼식 잔치에 쓸 음식이었음.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것이 두가지 지출로 갈라진 것 같음. 하나는 결혼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는 은으로 계산해 여자의 아버지에게 지급된 것이었음.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지출이 단순히 구매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고 처녀의 가격으로 불리게도 됨
- 영웅이 중요시되던 사회체제에선 일대일 교환의 바탕에는 오직 명예의 부채만 있음. 선물에 보답하고, 보복을 하고, 포로로 잡힌 친구나 친족을 구조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는 뜻. 명예는 신용과 같은 것이었음. 명예는 약속을 지키는 능력임과 동시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능력이었음. 그런데 점진적으로 미묘하게, 또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도덕적 관계의 핵심을 이루었던 것들이 온갖 종류의 불성실한 술책의 수단으로 바뀌어 버림
- 우리는 권리를 갖는다는 관념에, 말하자면 권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엇이라는 관념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음. 사실, 중세의 법학자들이 잘 알고 있었듯이, 한 사람의 권리는 곧 다른 사람의 의무임.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사람의 권리는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말을 했다고 나를 처벌하지 않을 의무가 됨
- 인간경제 안에서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오던 환경에서 송두리째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났을 때, 대부분의 경우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음. 중요한 남자들은 간혹 먼 곳에서 전쟁포로를 잡곤 했음. 그러나 그것의 거의 언제나 장례식의 제물로 바쳐짐. 한 인간의 인격을 짓밟는 것은 곧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 본인의 평판과 사회적 존재감을 다소 높이는 것으로 여겨짐. 영웅의 사회들이라고 부른 곳에선 이런 식으로 명예와 망신을 더하고 빼는 것이 정치의 핵심을 이룸. 무수히 많은 서사시와 무용담이 증언하듯이, 영웅들은 다른 사람을 작게 만듦으로써 영웅이 되었음
-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음.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자유(오전9시~오후5시)를 양도할 수 있다는 사상은 적어도 현재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 실제로 보면 통상적으로 주말을 제외하곤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사상이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결정하고 있음. 폭력은 많이 사라졌음. 그러나 폭력의 감소도 우리가 테이저총(사람을 일시마비시키는 전기화살을 발사하는 총)과 감시카메라의 지속적 위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적 협상에 기초한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인지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게 된 까닭에 나타난 현상일 뿐
- 인류 역사의 상당기간 동안 금괴나 은괴가 정부의 보증여부와 관계없이 오늘날의 마약딜러의 돈가방과 같은 역할을 맡아왔음. 금괴와 은괴가 소중한 이유는 아무데나 가서 어떠한 물건과 교환해도 사람들이 그걸 받아주기 때문. 그 결과 신용시스템은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는 시기나 신뢰의 네트워크 사이에 통용되는 경향을 보임. 반면 전쟁과 약탈이 특징인 시기에는 신용시스템이 귀금속으로 대체됨. 게다가 시대를 불문하고 약탈적 대출이 지속되다 보면 부채위기가 나타나게 됨. 부채위기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안겨준 때는 바로 돈을 아주 쉽게 현급으로 바꿀 수 있는 때인 것 같음.
- 바빌론의 금융서판을 깨끗이 지우기 위해 마련된 행사는 봄에 여는 신년축제였음. 바빌론의 통치자들은 서판을 깨뜨리는 의식을, 즉 부채기록을 지우는 의식을 지켜보았음. 자연에 맞춰 사회를 소생시키려는 노력의 하나로 경제적 균형을 회복시키는 행사였음. 함무라비와 그의 동료 통치자들은 현명하고 공정한 통치자들의 길잡이로 여겨지던 정의의 태양신 사미쉬를 상징하는 횃불을 높이 들어 올려 행사의 시작을 알림. 그러면 부채의 담보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 가족의 품에 안김. 다른 채무자들은 땅을 담보로 빌린 돈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더라도 그 땅에 대한 경작권을 공짜로 돌려 받았음
- 최전성기의 로마제국은 귀금속을 갈취하여 그것을 주화로 만들어 병사들에게 분배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이해될 수 있음. 거기에 피정복민들의 일상의 거래에서 주화를 사용하도록 하는 세금정책이 결합되어 있음. 그렇다 하더라도 로마제국의 역사 대부분 동안 주화의 이용은 두 지역에 주로 집중됨. 이탈리아와 몇개의 주요 도시들, 그리고 군단이 실제로 주둔하던 국경지역에서 주화의 이용이 두드러졌던 것임. 광산이나 군사작전이 없던 지역에서 여전히 옛날의 신용시스템이 우세했음.
- 불교가 귀금속을 멀리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용거래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대한 입장을 보였음. 불교는 세계 종교들 중에서 고리대금을 공식저긍로 비난하지 않는 극소수 종교중 하나임. 그러나 당시 상황에 비춰보면, 거기에는 특별히 미스터리한 구석이 없음. 폭력과 군대를 거부했지만 상업에는 결코 반대하지 않은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고리대금도 이치에 벗어나지 않음. 아소카의 제국이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더 약하고 더 작은 국가들로 대체되는 사이에 불교는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림. 위대한 군대들의 쇠퇴는 주화가 거의 사라지는 결과를 낳은 한편으로 점점 더 세련된 형태의 신용의 융성을 부름
- 시장의 성장이 자유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신분의 족쇄나 공동체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또 투입과 산출을 합리적으로 계산하게 하고, 수단과 목표를 고려하는 습관을 키우게 했던 것은 사실임. 또 이 습관들 모두는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 나타나기 시작한 합리적 탐구라는 새로운 정신에도 불가피하게 반영됨. 합리적이라는 단어도 많은 것을 시사함. 그 단어는 ratio에서 나옴. a가 b의 몇 배인지를 따진다는 뜻인 비율에서 합리적이란 단어가 비롯된 것. 과거 건축가들과 엔지니어들이 주로 이용하던 수학적 계산이 시장의 등장으로 이젠 시장에서 속고 싶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것이 됨
- 시장과 국가, 전쟁, 종교 등이 지속적으로 분리되고 결합된 과정
(1) 시장은 근동에서 처음 등장. 정부통치제도의 부산물이었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의 논리가 군사문제에 개입됨. 여기서 시장의 논리는 축의 시대 전전쟁에서 용병의 논리와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됨. 마지막에는 시장의 논리가 정부자체를 정복하고, 정부의 목적을 규정하기에 이름
(2) 그 결과 군사-주화-노예 복합체가 보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물질주의 철학이 탄생. 그 철학은 사실 두가지 측면에서 물질주의임. 신성한 힘보다는 물질의 힘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계획하고 있고, 또 인간 존재의 종국적 목표를 물질적 부의 축적으로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러함. 도덕과 정의 같은 이상들은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게 됨
(3) 또 모든 곳에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성과 영혼을 탐구하는 철학자들이 나옴. 이들은 윤리와 도덕의 새로운 바탕을 발견하려고 노력
(4) 모든 곳에서 이 철학자들 중 일부는 새롭고 예외적일 만큼 폭력적이며 냉소적인 엘리트들에 맞서던 사회운동들과 공동전선을 폈음. 그 결과 인류역사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남. 지적 운동이기도한 대중운동이었음. 그것이 지적운동인 이유는 기존의 권력구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현실의 본질에 관한 어떤 이론의 이름으로 그런 노력을 편다고 주장했기 때문
(5) 모든 곳에어 이 운동들은 처음에 평화운동이었음. 그 운동들이 정치를 바탕으로 폭력과 특히 새로운 개념의 공격전쟁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러함
(6) 어딜가나 도덕의 새로운 바탕을 찾아내기 위해 비인간적인 시장들이 제공한 새로운 도구들을 이용하려는 충동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예외없이 그런 노력이 실패했던 것 같다. 묵가가 사회적 이익이라는 관념을 내세우며 짧게 번창했지만 금방 붕괴하고 말았음. 그런 사상들을 노골적으로 부정한 유가가 그 자리를 대신함. 그리스와 인도에서 도덕적 책임을 부채로 다시 상상하는 작업이 일관되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 같.음 도덕적 책임을 부채로 다시 상상하려는 충동보다 부채가, 그리하여 세속적 연결 모두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려는 충동이 훨씬 더 강했음
(7) 세월이 흐르면서 통치자들의 태도가 변화. 우선 대부분의 통치자들이 개인적으로는 냉소적인 현실정치를 끌어안는 동시에 새로운 철학 및 종교운동들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보인 것 같음. 그러나 전쟁을 벌이던 국가들과 공국들이 큰 제국으로 대체되고 특히 그 제국들이 확장에 한계를 보이며 군사-주화-노예 복합체를 위기에 빠뜨리자, 모든 것이 갑자기 변했음. 인도에선 아소카가 불교를 바탕으로 왕국을 재건하려고 노력했음. 로마에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들에게 의지했으며, 중국에선 한나라의 무제가 비슷한 군사 및 재정위기를 맞아 유교를 국가의 철학으로 채택. 그 3명 중에서 무제만이 최종적으로 성공을 거둠. 중국제국은 그 후 이름을 달리하며 2000년 동안 이어짐. 거의 언제나 유교가 공식 이념이었음.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엔 서쪽 제국은 몰락했으나 로마교회는 계속 살아남음. 아소카의 계획이 가장 형편없는 결과를 낳았음. 제국도 붕괴되어 약한 작은 왕국들로 대체되었을 뿐 아니라 불교 자체가 그의 영역에서 밀려남. 그 후 불교는 중국, 네팔, 티벳, 스리랑카, 한국, 일본, 동남아의 여러 지역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림
(8) 최종적 결과는 인간활동 영역들을 놓고 일종의 이상적 구분이 이뤄지게 되었다는 점. 그 구분이 오늘까지도 내려옴. 한쪽에 시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 종교가 있음. 이를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이런 식이 됨. 만일 누군가가 어떤 사회적 공간을 물질적인 것들을 이기적으로 구매하는 곳이라고 강조하면, 곧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나서며 거기서는 종국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물질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기심은 망상이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고 설교함. 적어도 축의 시대의 모든 종교들이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함. 그 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었음. 절대적 탐욕과 절대적 관용은 서로 보완적 개념임. 어느 한쪽도 반대쪽 없이는 상상이 불가능함. 둘다 단순하고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는 제도적 환경에서만 생겨날 수 있음. 그리고 둘 다 비인간적이고 물질적인 현금화폐가 등장하는 곳에 함께 나타난 것 같음
- 축의 시대가 서로 보완적인 상품시장과 보편적인 세계 종교의 출현을 목격했다면 중세는 이 두가지 제도들이 융합한 시기였음. 모든 곳에서 중세는 제국의 붕괴로 시작. 새로운 국가들이 나타났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전쟁과 금은 통화주의, 노예제도 사이의 연합이 깨짐. 정복과 병합도 더 이상 정치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칭송받지 못함. 동시에 국제무역에서 국내시장들의 조직화까지, 경제생활도 점점 더 종교 권력의 규제를 받게 됨. 그 결과 약탈적인 대출을 규제하거나 아예 금지시키려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나타남. 또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신용화폐로 회귀하는 현상이 나타남.
- 페르낭 부로젤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와 시장은 정반대로 인식될 수도 있음. 시장은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재화를 교환하는 방법들임. 역사적으로 보면 잉여곡식을 가진 사람이 초를 구하거나 그 반대로 잉여의 초를 가진 사람이 곡식을 구하는 방법이었음. 반면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돈을 이용하는 기술임.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돈으로 돈을 버는 손쉬운 방법은 일종의 공식적 독점이나 사실상의 독점을 구축하는 것임. 자본가들이 상인이든 금융가든 아니면 산업가를 불문하고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가까워지려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역사 대부분 동안 반 자본주의 시장국가였음. 그 후의 유럽군주들과 달리, 중국 통치자들은 자칭 중국 자본가들과 결합되는 것을 체계적으로 피했음. 중국의 관리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통치자들도 자본가들은 파괴적인 기생충으로 보았음.
- 즉시적인 현금이동이 이뤄지지 않은 교환은 부채를 창조. 부채는 시간을 두고 남기 마련. 만일 모든 인간관계들을 교환으로 상상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한, 그들의 관계에는 부채와 죄의식이 걸리게 되어 있음. 거기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부채를 무효로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사회적 관계들 역시 사라져버림. 이것이 불교와 상당히 조화를 이룸. 불교의 최종목적은 공, 즉 절대적 해탈을 이루는 것. 말하자면 모든 인간적 및 물질적 애착의 끈을 끊는 것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런 애착의 끈들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
- 중세의 한 특징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추상적 관념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 진짜 금과 은은 대부분 교회와 수도원, 사원 등에 보관되었고, 화폐는 다시 신용화폐가 됨. 동시에 그 과정을 규제할 도덕적 제도를 세우고, 특히 채무자들을 보호할 장치들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모든 지역에서 일어남
- 현대인이 떠올리는 중세의 이미지의 핵심에도 용감한 기사, 탐구여행, 마상 창시합, 로맨스와 모헙이 자리잡고 있음. 신기한 것은 그 이미지가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점. 떠돌이 기사와 비슷한 것조차도 존재한 적이 없었음. 떠돌이 기사라는 표현은 원래 급이 낮은 귀족의 젊은 자녀나 서자들 중에서 선발된 프리랜스 전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음. 이 전사들은 물려받을 게 없었던 터라 큰 부를 노려 서로 무리지을 수 밖에 없었음. 그러다 보니 많은 기사들은 떠돌이 자격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약탈을 노리고 있었음. 상인들의 생명을 아주 위험하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음. 이 떠돌이 자객들이 12세기에 들어 극성을 부리자, 위험한 그들을 민간 권위의 통제아래 두려는 노력이 체계적으로 전개됨. 기사도 규범 뿐만 아니라 마상 창시합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나온 것. 거기엔 그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만드는 그 이상의 의도가 숨어 있음. 기사들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또 그들의 존재를 일종의 의례로 바꿔놓기 위한 것.
- 부절에 관한 것 중에서 놀라운 점 하나는 비록 그것이 우정과 유대의 증표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거의 모든 예들에서 양 당사자가 실제로 창조하기로 동의한 것은 불평등의 관계라는 점. 부절을 통해 부채나 의무, 또는 또 다른 존재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관계가 형성된 것.
- 고대 로마 이래로 유럽은 금과 은을 동양으로 수출해 왔음. 문제는 유럽이 아시아인들을 사로잡을 물건들을 많이 생산해내지 못했다는 점. 그랬기 때문에 유럽으로서는 비단과 향료, 강철 등 수입품에 대한 대금으로 경화를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음. 초기 유럽의 팽창정책은 주로 동양의 사치품을 구입할 대가로 지급할 금과 은의 새로운 출처를 찾으려는 노력이었음. 초반에는 대서양의 유럽이 이슬람 경쟁자들보다 중요한 이점을 한가지 누릴 수 있었음. 지중해에서 수세기 동안 투쟁을 벌이며 갈고 닦아온 해상전투의 전통이었음.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 인도양에 들어서는 순간, 인도양은 평화의 무역지대여야 한다는 원칙이 깨어짐. 포르투갈 함대는 항구도시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약탈하기 시작. 이어 전략적 요충지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인도양의 비무장 상인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사업할 권리를 주는 대가로 돈을 뜯어냄.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까지 가는 지름길을 찾아나선 제노바의 지도제작자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도착. 그 결과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횡재를 누릴 수 있었음.
- 자본주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전통적 공동체가 시장의 비인간적 힘에 의해 점진적으로 파괴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 그보다는 신용경제가 이자의 경제로 바뀌는 것에 관한 이야기임. 말하자면 도더거 네트워크가 국가의 비인간적인 힘의 침추로 인해 변절되어 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됨. 엘리자베스 여왕시대는 스튜어트 왕가시대의 영국의 마을 사람들은 사법제도에 호소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음.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 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았음. 부분적인 이유는 이웃들은 서로 도와가며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지만 주된 이유는 법이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여왕시절에 방랑(실업)에 대한 처벌은 초범일 경우 그 사람의 귀를 형틀에 박는 것이었고, 재범일 경우 사형이었음.
-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을 쓰던 시점에는 영국 가게 대부분은 여전히 사업의 큰 부분을 신용으로 처리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 고객들이 언제나 가게주인의 선행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임. 스미스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리는 없음. 그보다는 그는 유토피아적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 그는 모든 사람이 현금을 사용하는 사회를 상상하길 원했음. 부분적 이유는 그가 모든 사람이 현금을 사용하면 혼란을 피할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당시 중산층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 그런 사회에선 사람들이 모두 돈을 정확히 계산한뒤 please와 thank you라고 말하며 가게를 떠나야 할 것임. 그는 이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더욱 확대.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좇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 허영심과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지닌 부자들의 타고난 이기주의와 탐욕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것이라고 함.
-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이미. 반면 대부분의 근로자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노동을 의미.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임금노동이 어떤 의미로든 종국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음. 자기 몸밖에 팔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도 순수하게 자유로운 행위자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 그런데도 자유로운 임금노동이 여전히 자본주의의 바탕으로 여겨지고 있음
- 근대의 돈은 정부부채에서 비롯되었고, 정부는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빌림. 이것은 펠리페 2세 스페인 국왕시대 못지 않게 지금도 진실임. 중앙은행의 창설은 전사들의 이해와 금융가들의 이해의 결합을 영구히 제도화한 것이었으며, 이 제도화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 등장해 마침내 금융자본주의의 바탕이 됨. 닉승느 70년에서72년 사이에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도시들과 마을들에 400만톤의 폭탄과 소이탄을 쏟아부은 전쟁의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달러를 변동환율제로 만듬.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공습을 비난하며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은 닉슨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폭격기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함. 부채위기는 폭탄대금의 직접적 결과였음. 더 구체적으로 좁히면, 폭타을 떨어뜨리기 까지 필요한 거대한 군사적 인프라에 대한 지출의 직접적 결과였음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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