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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직업 잔혹사

역사 2014. 10. 12. 07:44

 


불량직업 잔혹사

저자
토니 로빈슨, 데이비드 윌콕 지음
출판사
한숲출판사 | 2005-10-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 저자는 영국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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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초상화 중에는 장정된 책에 글을 쓰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종종 등장. 하지만 단언컨대 이것은 예술적 허구임. 당시에는 각기 다른 고급 피지위에 글을 모두 적고 나서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음. 그들은 긴 의자에 앉아 작업했고, 동물의 뿔을 잉크병 대용으로 사용. 피지 위에 글자를 적는 것은 오히려 새기는 작업에 가까웠음. 일단 글을 곧게 쓸 수 있도록 자로 줄을 그은 다음엔 피지에 글자 모양대로 구멍을 냈음. 이렇게 구멍과 구멍을 연결시켜 글씨를 써나감. 그 모습은 만년필로 글을 쓴다기 보다 똑똑 두드린다는 느낌을 주었을 것임. 잉크로 쓴 글씨는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성가시긴 해도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이 방법을 선호했음.
- 상어고기를 안전하게 먹으려면 내장을 빼내고 연골과 대가리를 제거한 후 여름에는 6주간 겨울에는 세달간 땅속에 묻어야 함. 그래야 이 기간 동안 세균이 분해한 시안화물이 생기고 상어고기에서 빠져나옴. 역사가들 중에는 세균발효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상어고기를 오줌으로 적신 후 땅속에 묻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음. 이윽고 발효기간이 지난 상어고기를 땅속에서 꺼내보면 고기의 육질은 말랑말랑해지고 암모니아 냄새가 남. 다음으로 고기를 깨끗이 씻어 두달간 건조실에 넣어둠. 그렇게 말리고 나서야 고기를 감싸고 있는 갈색 외피를 벗겨내고 작은 조각으로 잘라 마음놓고 먹을 수 있음. 이즈음 상어고기는 부드러운 치즈같은 점성이 생김.
- 여자 마법사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직업이라서 그녀는 환자들만큼이나 궁핍하게 살며 치즈같은 현물이나 지붕수리 같은 노무의 형태로 치료비를 받기도 했음. 치료비를 받은 마법사는 그 대가로 후두염 환자에서부터 유방암 환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환자들에게 아주 불가사의한 치료제를 제공. 여자 마법사가 열악한 직업인것은 단지 돈을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음. 약재 마련의 어려움과 이 일이 지닌 위험한 성격이 이들을 최악의 직업종사자로 등극하게끔 만들었음. 수중에 돈이 없어 약제사에게 약을 살수 없었던 마법사는 주변의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며 천연재료를 공짜로 구해 약을 지음. 만일 그녀가 약초나 그것과 비슷한 효능을 가진 식물인 기침에 효과 있는 발삼을 분비하는 나무나 서양고추나물 따위만을 채취했다면 이것은 현대인의 감각에도 어느정도 맞았을 것임.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 치료약의 주성분은 선충과 벌레, 동물 시체 조각 그리고 똥이었음. 특히 조제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똥이 마법의 성분으로서 다량 첨가되었음. 다음과 같은 약을 짓기 위해 여자마법사는 광주리와 삽을 들고 온갖 가축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작업시간의 절반을 보내야 했을 것임.
* 출혈상처인 경우 돼지가 방근 눈 따뜻한 똥을 바른다
* 황달인 경우 양의 똥을 맥주에 타서 하룻밤 묵혔다가 마신다
* 천연두 흉터를 없앨 경우, 양의 똥을 포도주에 타서 하룻밤 묵혔다가 마신다
* 통풍의 경우 비둘기똥으로 만든 고약을 붙인다
* 유방에 궤양이 생기거나 대머리 증세가 나타난 경우 거위똥을 쓴다
* 난청의 경우 잿빛 선충을 말똥에 버무려 썩힌 것을 양쪽 귀에 집어 넣는다
* 치통의 경우 고양이 귀를 빻아 사흘간 이빨에 붙여둔다
하지만 모든 민간요법이 이처럼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었음. 예를들어 가시투성이인 쐐기풀을 콧구멍에 넣어 코피를 멎게 한 것은 야만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쐐기풀 가시에는 수혐지혈제 성분이 들어 있으니 아주 터무니 없는 치료법은 아님. 마찬가지로 중세의 보양식이던 벌레 스튜도 효과가 있었을 것임. 당시 농부들은 축제일이나 휴일이 아니고서는 고기를 먹기 힘들었음. 평소 이들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부추, 양파, 완두콩 따위로 맛을 낸 귀리죽과 함께 치즈를 살짝 바른 보리빵이 주식이었음. 이런 상황에서 벌레스튜는 비용부담 없이 소량이나마 고기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게 해줌
- 중세 종교에 잔인한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님. 중세 종교는 영국 중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오래된 유산을 남겼음. 바로 고딕양식의 대성당들 이야기. 그러나 이들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이 또한 끔찍한 직업의 전당에 오를 만한 직업들을 남김. 중세시대 세워진 이들 대성당은 자신감과 안정감을 보여줌. 당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고대 로마시대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축조된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었음. 대성당 건축은 해당 도시의 지역적 자부심을 상징했을 뿐 아니라 지역 경기 활성화에도 엄청난 효과가 있었음. 오늘날 자동차 플랜트나 휴대폰 생산공장의 신축이 그러하듯 중세의 웅장한 교회단지 건립은 그 파급효과가 지역경제 전체에 미쳤음. 대성당 건축 초기 시절에 교회설계를 맡은 사람들은 열정적 아마추어들이었음. 박학다식한 이들 수도원장 혹은 주교는 건축기술과 공학기술의 전통적 원리들을 연구/조사하여 직접 공사를 설계하고 자금도 조달하였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건축기술이 복잡해지자 공사감독과 설계자의 역할은 유럽을 주유하던 명망있는 전문직업인 자유계약 건축가에게 넘어갔음. 이들은 대석조공으로 불리었음. 대석조공은 분명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최고의 직업에 속하지 않았을까?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음. 하지만 그들은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공사관리자로서 실로 방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운용을 체계화해야 했음. 건축부지는 물론, 돌을 캘 채석장과 대들보로 쓸 나무를 벨 숲, 그리고 그 건축자재들을 때때로 수백킬로나 떨어져 있는 공사장까지 실어나를 수송체계까지 이 모든 것이 대석조공의 공사관리 운용계획에 포함되었음. 프랑스에 세워진 오튕 대성당의 경비지출 내역은 대석조공의 일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 보여줌. 이 지출내역은 또한 한 도시에 대성당이 세워짐으로써 발생하는 적하효과의 혜택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렸는지도 나타냄.
-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제까지 수도원 쪽으로 쏠려 있던 돈의 흐름을 왕의 금고쪽으로 돌려 놓음. 게다가 무적의 영국 해군이 이끈 군사적인 승리는 상업의 번창과 국력의 증대를 가져왔고 이렇게 축적된 부는 추종자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됨. 유럽대륙으로부터는 인본주의 사상이 유입되었음. 미술분야에서는 독일 출신 화가 한스 홀바인이 영국으로 건너와 튜더 시대의 위대한 정치선수들을 그린 불멸의 대작을 내놓는가 하면, 음악분야에서는 토머스 텔리스와 윌리엄 버드, 존 다울런드같은 작곡가들이 독특한 영국적 소리를 만들어냈음. 그리고 영국 르네상스에 불을 당긴 에드먼드 스펜서와 영국 문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작가들은 영어의 위상을 끌어올림. 하지만 이러한 튜더시대의 변혁은 대부분 겉만 번지르르한 눈속임일뿐임. 16세기 영국인의 삶의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사뭇 다름. 당시 대다수 영국인들은 새로운 튜더왕조의 생활방식 보다는 과거 중세시대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따랐음. 이는 영국의 르네상스가 궁정과 도시를 중심으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따랐음. 이는 영국의 르네상스가 궁정과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당시 영국인의 6%만이 도시에 살았고 그중 절반을 런던사람들이 차지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시골에 거주. 그들의 삶은 영국 문화의 부흥보다는 잦은 흑사병 창궐과 1550년대와 1590년대에 있었던 두번의 대기근 사태에 더 영향을 받았음.
- 장약은 세가지 화합물이 혼합된 단순하면서도 치명적 물질임. 탄소 10%, 유황 15%, 질산칼륨, 즉 초석 75%가 혼합. 초석에 들어 있는 질산염은 연소시 팽창하며 산소를 발생시켜 탄소와 폭발반응을 일으킴. 머스킷으로 탄알 한개를 발사하려면 장약 25그램이 필요하며 포탄하나를 발사하는데는 400그램이 필요. 따라서 전시에 상당량의 초석이 요구되었음. 그 전부를 마련한 사람이 초석장이였음. 초석장이는 우유배달원과 토지관리인, 농장일꾼, 분뇨 수거인이 묘하게 결합된 사람이었음. 그가 하는 일은 간단함. 스튜어트 시대에 질산염의 주요 공급원은 토양속에 오랜 시간 묻혀 있는 동안 질산칼륨과 질산나트륨으로 분해된 우리의 익숙한 친구, 오줌과 똥이었음. 초석장이는 우선 거리에서 오줌으로 흠뻑 젖은 흙을 찾아낸 뒤, 부족한 양은 구식이지만 꽤 효과적인 중노동을 동원하여 충당. 그는 변소, 돼지우리, 거름더미, 비둘기장을 비롯해 구아노 한 그릇이 토양속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감. 분뇨 수거인이 단순히 배설물을 치우는 일을 했다면, 초석장이는 그것을 상품으로 바꾸는 역할을 함. 화학물질이 풍부한 흙 수톤을 옮겨야 했던 초석장이들은 종종 탈장 증세를 보이곤 했음. 그래서 이 고된 작업의 고통을 다소나마 덜어보려는 의도에서 우유배달원식 수거방식이 생겨남. 1652년 존 부룩 경과 토머스 러셀은 오줌에서 직접 질산염을 추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냄. 그로 인해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에서는 분뇨의 문전 수거방식이 장려되어, 각 가정은 여름엔 하루 한번, 겨울에는 이틀에 한번씩 실내 변기를 문밖에 내놓음. 그러면 초석장이가 거리를 돌면서 그 귀중한 액체를 통에 담음. 그것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끈적끈적하였을지는 몰라도 초석장이에게는 삽질하느라 허비했던 시간을 되찾아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기술이 비능률적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초석장이 세계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수거용 소변통은 2년 후 폐기됨. 결국 초석장이는 예전의 확실하고도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돌아감. 만약 초석장이에게 천진무구한 흙의 아들이란 인상을 받았다면 잊어버려라. 장약은 열성적 아마추어에게 맡겨두기엔 너무나 중요한 물자였다. 국가 방위는 영국의 지상과제였기 때문. 초석이 필요했던 국가에겐 그것의 출처따윈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음. 초석장이들은 아무 집에나 들어가 여기저기를 파헤칠 수 있는 특권을 국왕으로부터 부여받았음.
- 흑사병을 치유한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빵제조업자 그것도 부주의한 빵 제조업자였음. 1666년 9월, 빵집 푸딩 레인에서 시작된 불길은 런더 대화재로 이어짐. 스튜어트 시대 들어 두번째 천재지변인 이 화재는 첫번째 천재를 뿌리째 없애버림. 하지만 그 이유를 속 시원히 밝혀낸 사람은 없음. 사실 흑사병은 그 후로도 상당기간 산발적으로 조금씩 발생했지만 대화재는 런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쥐떼를 몰아냄으로써 대역병을 종식시키는데 기여
- 19세기에 성냥은 작은 나뭇개비들을 흰 인에 담그는 공정인 침지를 거쳐 만들어짐. 화학물질인 흰 인에서 피어오르는 증기는 성냥 제조공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인산괴사라는 무서운 병의 원인. 이 병의 최초증세는 이가 욱신거리면서 잇몸과 턱이 부어오르는 것임. 그리고 나서 종기가 생기고 더러운 배설물을 몸 밖으로 내어보냄. 썩어가는 환자의 턱뼈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섬뜩한 야광장난감처럼 희미한 불빛을 발했을 것임. 이 병은 외과적으로 턱뼈를 제거하는 고통스러운 수술이 유일한 치료법이었음. 스웨덴과 미국은 인의 사용을 금지했지만 영국정부는 그런 조치가 자유무역을 제한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이들 국가를 본받지 않았음.
- 무두장이들은 동네 푸줏간이나 도살장에서 생가죽을 직접 얻음. 도개 이집트때부터 암소와 송아지, 황소, 수소, 돼지, 말, 양, 개의 생가죽을 무두질함. 각 짐승의 생가죽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님. 송아지 생가죽을 무두질하면 린디스판 복음서의 송아지 피지처럼 가장 부드러운 유피가 얻어지는 데 반해, 황소, 수소의 생가죽은 장화를 비롯해 질긴 가죽제품에 적당한 튼튼한 유피를 제공했음. 사람의 피부에도 장점이 없지 않음. 앞서 우리는 결국엔 에든버러의 왕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포켓판 팩이 된 유명한 시체도둑 윌리엄 버크의 경우가 있음. 그리고 스코틀랜드 영웅 윌리엄 월레스도 적인 영국군의 피부를 벗겨 허리띠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음. 그렇지만 무두장이들은 친구와 친척을 소금물에 절이고 싶은 유혹을 억누르고 네발짐승의 생가죽에만 집중. 그들은 도살장에서 미리 손질하여 소금에 절인 다음 씻어 놓은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생가죽을 한꺼번에 수레로 실어 나름. 그런 다음 단내나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석회갱에 넣어 모근을 느슨하게 하고 지방조직을 연하게 함. 석회갱 속에 든 용액은 물에 소석회를 부어 만들었음. 중세 무두장이들은 오늘날 다목적 방청윤활세정제인 WD-40만큼이나 도처에 퍼져 있던 오줌을 추가했을 것임. 생가죽이 석회갱 속에서 부패와 연화작용을 수주간 거치고 나면, 무두장이는 적당하다고 판단될 때에 생가죽을 꺼내 플레싱 빔이라는 커다란 굽은 작업대에 올려 놓고 털을 뽑고 덜 부패된 살을 제거했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작업이 아님. 석회를 잔뜩 머금은 생가죽은 굉장히 무겁고 미끌거렸음. 석회의 역한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털무더기들은 무두장이가 잡기 무섭게 손에서 빠져나갔음. 게다가 용케 생가죽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더라도 자루가 둘 달린 굽은 칼로 털을 제거하는 지루한 작업이 기다림. 이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과 일의 단조로움을 결합시키면서도 강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정말 어려운 일. 이 단계에서는 아주 작은 털 한올까지 제거해야 했음. 일단 무두질이 끝나고 나면 털조각이 제거되지 않을테니 말이다. 털이 삐죽이 나 있는 신이나 핸드백을 원하는 사람은 없음. 털이 모두 제거된 생가죽은 뒤집어 오랫동안 석회수에 담가둔 후 팽윤된 지방조직을 날카로운 칼로 벗겨냈음. 벗겨낸 지방은 모아두었다가 비누를 만드는 곳에 보냄. 지금까지도 충분히 힘든 일이었으나 정말 고된 일은 지금부터임. 이 단계에서 개똥이 등장하기 때문. 탈모와 지방제거를 거친 생가죽은 베이팅갱에 넣어졌음. 생가죽을 알칼리액에 담가 석회를 제거하고 더욱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베이팅 작업. 현재 보건안전 규정상 인공대용품이 쓰이고 있지만 빅토리아 시대만 해도 베이팅용 알칼리액은 물에 개똥을 탄 구역질 나는 것으로서 탈모실 구석에서 계속해서 부패했음. 그런데 왜 하필 개똥이었을까? 개똥은 개의 위의 잔류성분을 함유하고 있음. 이들 성분 중에 강산과 효소는 본래 고기를 소화하는 기능을 수행. 개똥 물에 잠깐 담가두면 생가죽은 석회가 제거되고 세균과 효소가 침투하여 나긋나긋하고 유연해짐. 생가죽은 베이팅갱 속에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담가두지만 그 갱속의 똥은 수주간 묵혀둔 것이었음. 무두장이들은 오래 숙성한 개똥을 선호했음. 게다가 석회와 베이팅갱에서 자연적으로 풍기는 악취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듯 빅토리아 시대의 무두장이들은 특유의 반응증강법을 추가. 무두과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갱 아래에 설치한 증기관을 통해 다양한 액체를 가열했던 것. 그 개똥 침전물은 따뜻한 수프가 되어 배설물의 장막을 무두공장과 주변지역에 드리웠음. 무두장이의 기술은 생가죽을 적당한 기간 동안 베이팅갱에 넣어두었다 최종적으로 타닌액에 1년동안 담가두는 것이었음. 무두질엔 우리가 차를 통해 섭취하는 타닌과 같은 것이 필요. 단, 무두공장에서 찻잎은 손만한 오크나무껍질이었음. 생가죽을 점점 농도가 진해지는 이 차에 담근후 최종적으로 헹구고 지붕아래 천천히 조심스레 말림.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느라 피운 불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났음. 연기에 타닌갱의 냄새, 석회갱의 악취, 베이팅액의 고약한 냄새가 뒤범벅됨. 이런 연기와 세균, 화학약품의 결합은 무두장이들의 각종 건강 질환과 퇴행성 질환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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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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