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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실패

경영 2015. 1. 31. 15:21

 


사라진 실패

저자
신기주 지음
출판사
인물과사상사 | 2013-04-0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경영 전문 기자 신기주가 13개 대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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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G전자 : 지주회사 전환과 맞바꾼 혁신의 속도
- 스마트폰 기술은 기술적으로만 보면 하드웨어 중심의 휴대전화 시장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변모하는 것. 그러나 정치적으로도 볼 수 있음. 휴대전화 제조사들과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자사의 이익에 따라 합종연횡하면서 전선을 형성해가는 외교전이다. 처음엔 PC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대결처럼 그려졌음. 애플이 지나치게 빨리 성장하자 위기를 느낀 삼성전자나 노키아같은 하드웨어 기업들이 반애플 전선을 형성하면서 연대. 남용 LG전자 부회장과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 CEO가 악수를 나눈 것도 이 무렵. 그러나 전선은 또 달라졌음. 변수는 구글이었다. 구글이 자체개발하려던 휴대전화인 넥서스원을 포기하고 안드로이드 OS를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전선은 애플대 구글의 모양새가 됐음. 기대를 모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마땅한 대항마를 내놓지 못한 틈을 구글이 파고든 셈. 마이크로소프트가 부진한 것도 구글이 기꺼이 넥서스원을 포기하는 한가지 이유가 됐다. 애플에 대항하는 다른 하드웨어 기업들은 모두 구글의 안드로이드 깃발아래 뭉쳤다. 그러나 LG전자는 여전히 애플대 마이크로소프트의 구도로 시장을 바라봤다. 사실 애플대 구글의 구도로 휴대전화 시장이 전환되면 LG전자나 삼성전자처럼 하드웨어 품질이 뛰어난 기업은 오히려 유리함. 소프트웨어가 구글로 통일된다면 다시 하드웨어 경쟁으로 흐를테니 말이다. LG전자는 그걸 늦게 읽었고, 팬택계열은 빨리 읽었지만 재원이 부족해서 욕심껏 내달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LG전자를 위협할만큼 전세를 역전시켰다. 삼성전자는 빨리 읽은 데다 온갖 자원을 갖춘 탓에 순식간에 갤럭시 시리즈로 구글 진영의 가장 중요한 휴대폰 제조사가 됨
- 03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되자 LG전자는 더 이상 기술혁신 기업이기 어려워짐. 지주회사 체제는 자본을 통해 기업을 지배하는 형태이므로 대주주라 해도 결국 남보다 투자액이 큰 투자자에 가까움. 이런 식의 기업형태는 기술혁신이나 사업혁신보다 매출과 영업이익률 같은 단기성과에 집중하기 쉬움. 잭웰치가 이끌던 GE나 한때 전 세계 최강기업이었던 GM도 그랬다. 두 회사 모두 금융부문을 강화하고 기술혁신보다 주주이익을 우선하면서 혁신성을 잃어갔다. 주주들은 GE와 GM의 배당잔치에 환호했지만 두 회사 모두 미래르르 잃었다. 같은 기간 동안 애플은 단 한차례도 배당을 하지 않았다. 잡스가 배당을 극도로 반대했던 것도 주주자본주의의 한계와 모순이 기업에 미치는 해악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LG전자는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되면서 배당성향이 강해짐. LG전자의 배당성향은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던 03년에는 29.7%였지만 김쌍수 부회장이 퇴진한 06년에는 57.2%를 기록. 06년 부진 탓에 김부회장이 퇴진하고 남용 부회장이 경영을 책임지게 됨. LG전자의 약점은 단기성과 위주의 경영이다. LG전자의 연구개발비는 삼성전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음. 삼성은 09년에 이미 연구개발비로 7조원을 넘게 썼지만, LG는 그해 2.1조억원을 투자. 선행투자에 인색한 건 배당성향과 연관이 있음.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되면 대주주 역시 배당금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LG가문은 지주회사 체제전환과 계열분리를 위해서 지분을 매집하느라 상당한 자금을 지출했다. LG애드 같은 알짜 회사를 팔아야 할 정도였음. 지주회사로 전환된 뒤로 배당성향이 60%가까이 올라간 건 지주회사 체제전환 비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 90년대 LG전자가 디지털 기술혁신에 매달렸다면 2000년대 LG전자는 지주회사 체제 안정화와 당기순익을 통한 배당확대에 더 골몰. 구자홍 회장의 퇴임이 그 신호탄이었다.


(2) 르노삼성 : 자동차 회사에서 자동차 공장으로
- 르노삼성의 모태가 된 삼성자동차는 야심찬 기획이었음. 현대차와 기아차, 대우차를 넘어서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92년 삼성이 처음 삼성자동차TFT를 꾸렸을 때만 해도 논란이 컸음. 이건희 회장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직에 오른지 5년 남짓밖에 안 된 때였음. 젊고 패기만만했다. 맨 먼저 들고 나온 신규사업안이 삼성자동차였다. 자동차는 산업의 꽃이며 전후방 산업 영향력이 크다.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에선 예외없이 자동차 회사가 간판이다. 미국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은 GM이다. 일본은 도요타이고 독일은 BMW와 폭스바겐이다. 영국 역시 전성기때눈 내노라하는 자동차 기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등주의 삼성이 1등 제조업에서 소외돼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동차를 지배하는 자가 산업을 지배한다. 이건희 회장이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삼성자동차를 밀어붙인 건 그래서였다. 자동차 수집광인 개인취향 탓만도 아니었다. 반도체와 가전을 다 장악해도 자동차를 갖지 못하면 영원히 1등이긴 어렵다. 이회장과 삼성이 무리하게 삼성자동차 설립을 추진한 배경이다. 당시만 해도 삼성은 한국 1등도 아니고 세계 1등도 아니었다. 재계 선두엔 정주영 회장과 현대그룹이 있었다. 중후장대형 산업을 두루 가진 현대그룹은 삼성보다 한국경제에 대한 영향력도 컸음. 삼성이 현대그룹을 역전하려면 자동차가 꼭 필요했음. 정치적 역학도 작용. 삼성자동차는 김영삼 정부가 부산사람들에게 준 선물이었다. 부산은 한때 제조업 중심지였지만 어느새 생산은 없고 소비만 있는 비만도시가 돼가고 있었음. 핵심미래산업은 서울에서 빼앗겼고 기계금속 기업들도 부산의 비싼 땅값을 견디다 못해서 이전해버렸다. 부산은 서울처럼 중심지는 아니면서 서울만큼 비싼 도시였다. 제조업 공동화가 부산의 가장 큰 과제였다. 삼성이 자동차 산업에 무리하게 뛰어들겠다고 선언했을 때 김영삼 정부는 공장을 부산에 짓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줌. 삼성의 욕심과 정부의 계산과 부산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
- 일단 생겨난 자동차 공장은 함부로 닫지 못한다. 광산 폐쇄가 지역경제를 초토화하듯이 자동차 공장 폐쇄도 핵폭탄 같은 악영향을 미침. 만들기보다 없애기가 더 어려움. 토요타가 09년 렉서스 사태에 직면한 것도 미국 누미공장을 폐쇄했기 때문. 토요타와 GM의 합작 공장인 누미공장은 미일 경제교류의 상징이었다. 토요타가 미국에서 고용을 늘려준다는 우의의 표상이었다. 미국 언론은 배신자 토요타를 응징. 정작 삼성은 금세 삼성차를 버렸다. 당장 외환위기로 그룹의 존폐가 위태한 상황이니 애물단지는 꼬리자르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대우그룹과 삼성그룹의 자동차 빅딜을 주선. 대우차와 삼성차를 묶는다는 이 계획은 삼성자동차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삼성은 마지막 순간에 빅딜을 거부. 앞서가던 현대와 대우가 제풀에 고꾸라지고 있으니 구태여 자동차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동차의 전략적 효용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야기. 삼성한테는 부산경제나 한국 자동차산업의 미래보다는 삼성의 생사가 더 중요했기 때문.
- 어차피 한국 내수시장은 현대기아차와 수입차의 경쟁체제로 흘러갈 수 밖에 없으므로 르노삼성이 아무리 신차를 내놓는다고 해도 2000년대 초반처럼 소비자들을 불러모을 가능성은 높지 않음. 르노는 르노삼성을 전략적 교두보로 인수. 상하이차가 쌍용차의 앞선 SUV기술력이 필요했던 거라면 르노는 르노삼성한테 기술력을 요구하지 않음. 어차피 르노삼성의 기술력은 닛산에서 왔고 닛산은 르노와 얼라이언스 관계였음.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자동차 시장에선 르노삼성은 이미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음. 르노는 10년 동안 90년대 삼성자동차 시절부터 축적된 제품력을 소진시킴. 어차피 르노가 투자한 결과물도 아니었음. 그 영양분이 다 달았을 때 르노는 추가투자를 중단. SM시리즈에 대해 투자를 더 하기보단 생산공장 역할을 강조하기로 함. 애당초 2000년에 부산 신호동 공장을 인수하면서 세운 계획이었다.
- 삼성자동차 시절부터 르노삼성은 끊임없이 위기를 맞음. 태생적으로 과잉설비투자라는 비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좁은 내수시장에 삼성차까지 가세하는 건 위험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외환위기 때 삼성은 스스로 삼성차를 과잉투자로 지목하고 지원을 끊어버림. 정작 인허가를 받는 과정에선 과잉 설비투자라는 비판을 경쟁사들의 흑색선전으로 치부해버렸음. 삼성자동차 직원들은 스스로 잉여설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 신호동 공장은 경쟁사 조립공장에 비해 노동강도도 세고 생산성도 높기로 유명. SM시리즈는 잔고장 없고 정숙해서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다. 이 모두가 살아남으려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력덕분. 정작 삼성차를 거쳐간 주인들은 정략적 판단만 거듭했다. 삼성그룹이 그랬고, 르노 역시 르노삼성이라는 자동차 회사를 키우려고 하기보단 정부와 지역경제와 노동자를 볼모로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했다.

(3) 한화 : 황제가 군림하는 의리의 조직
- 김승연 회장은 인수합병으로 그룹을 성장시켜옴. 취임 1년만에 김회장이 빼든 카드는 한양화학 인수였음. 지금의 한화 케미칼이다. 서른살 회장은 한국화약과 경인에너지에 국한돼 있던 그룹의 성격을 인수합병을 통해 180도 바꿔놓음. 85년엔 지금의 한화리조트인 정아그룹을 인수. 86년엔 한양유통센터를 인수해 한화갤러리아 백화점으로 바꿈. 김회장은 인수한 기업 대부분을 우량기업으로 바꿔놓는 경영수완을 보여줌. 김회장이 실패한 인수합병은 경향신문 정도였다. 02년 대생인수는 김회장에겐 가장 멋진 승부였다. 한화그룹이 대생을 인수할 당시만 해도 자칫하면 그룹 전체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더 컸다. 이젠 대한생명을 중심으로 한 금융계열사의 매출이 한화그룹 매출의 절반이 넘을 정도. 인수합병과 경영개선 작업이야말로 김승연 경영의 핵심. 인수합병도 경영개선 작업도 결국 최고경영자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 인수전의 성패는 인수주체가 얼마나 인수의지를 갖고 있고 동원할 자금이 어느정도이냐에 따라 결정됨. 둘다 그룹 총수인 김승연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는 변수다. 대생이 보유한 대표적 자산인 여의도 63빌딩 27층에 자리한 김회장의 집무실엔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설치돼 있음. 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데만 수억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이렇게 절대 권력인 회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게 한화 조직문화의 특징. 한화그룹이 한화케미칼이나 한화리조트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카리스마 경영 덕분. 화학과 리조트 산업은 모두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임. 수요만 명백하다면 먼저 과감하게 지르는 쪽이 이긴다. 80년대와 90년대 내내 화학과 리조트는 수요가 넘쳤다. 오히려 늘어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느라 급급할 정도였음. 김승연식 밀어붙이기 경영이 통할 수 있었다.
- 태양광 산업은 개인적 경영실패를 기업전략 변경으로 만회하려던 밀어붙이기식 오너 경영이 리스크로 남은 경우. 김회장이 불러온 오너리스크는 한화라는 브랜드의 이미지 실추가 아니다. 진짜 오너리스크는 최고경영자가 개인적 오기와 승부근성에 근거해서 경영할 때 발생. 황제경영에 간언하고 속도를 조절해줄 소통창구가 마련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한화그룹은 글로벌 한화로 거듭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음. 태양광은 한화그룹을 내수시장에서 벗어나게 해줄 동아줄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한화그룹의 한계와 김승연식 경영의 약점도 모조리 드러나 버림. 원래 태양 아래에선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4) 웅진 : 한국 기업 생태계가 빚어낸 실패
- 웅진그룹이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 건 07년 6월 극동건설을 인수하면서부터. 웅진그룹은 극동건설 인수전에서 론스타에게 농락당함. 론스타는 극동건설을 03년에 1700억에 사들임. 07년 매각할 때까지 4년 동안 배당금으로만 2200억을 회수. 4년간 빼먹기만 하고 투자에는 인색했음. 실제로 극동건설은 부채비율도 낮고 흑자기조를 유지해오긴 했지만 공사 수주량이 급감한 상태였음. 사람으로 치면 뼈만 남은 형국이었음. 비만은 아니니깐 건강하단 진단이 나오지만 발육할 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여서 성장 가능성이 낮아진 구조였음. 당초 시장이 극동건설 인수가격으로 4000억 정도 많다며 냉정한 평가를 내놓았던 것도 그래서였음. 그걸 웅진그룹이 6600억원에 샀음. 론스타는 극동거설을 팔면서 프로그레시브 딜 입찰방식을 적용. 말하자면 토너먼트 방식 입찰이었음. 계속 경쟁을 붙여서 마지막에 가장 높게 부르는 쪽을 인수자로 선정하는 식이었음. 론스타 탓만 할 것도 아니다. 웅진그룹의 인수의지가 지나쳤던 게 진짜 화근이었다.
- 웅진이 극동건설을 인수하고 태양광에 손을 댄 건 종합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하겠다는 야심 때문. 웅진그룹은 소비재 사업에서 한계를 느끼고 이었음. 한국같은 좁은 내수시장에선 소비재 기업은 결코 미국의 프록터앤갬블이나 월마트 같은 간판기업이 될 수 없다는 한계의식 탓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소비재에서 중공업 그룹으로 업종을 전환하면서 체질을 개선한 기업이 두산그룹이었음. 두산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식음료 중심의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건설로 이어지는 삼각동맹이 큰 역할을 했음. 웅진과 두산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두산은 대우가 붕괴되면서 중공업 핵심 역량을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 시장성이 검증된 사업들이었음. 웅진의 태양광 사업은 말 그대로 미래성장동력이었음. 시장성 검증이 끝나지 않은 분야였음. 어찌보면 웅진그룹의 태양광 사업이 중국 업체들의 저가공세와 유럽 수요 위축으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건 당연한 결과였음. 신사업은 수요와 공급 예측이 빗나갈 수 밖에 없음. 예측이 빗나갔을 때를 대비하지 못한 건 분명 웅진그룹 경영진의 패착이었다.
- 웅진그룹은 누구보다 시장을 잘 아는 회사다.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시장의 변덕을 잘 아는 회사다. 웅진은 방판시장과 교육, 식품시장 같은 정통 소매시장에서 성공. 정작 그 성공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음. 그룹의 규모가 커지면서 변덕스런 소매시장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기업구조로 변화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음. 좁은 내수시장의 한계도 극복해야 했음. 소비시장을 상대한다는 건 결국 내수기업이라는 의미. 내수시장이 좁기도 하지만 수출기업이 되지 않으면 한국에선 고도성장이 불가능함. 한국 경제의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 정부와 은행과 언론은 수출기업에게는 우호적임. 정책적 혜택이나 금융협력이나 여론의 흐름이 모두 내수기업에겐 매정하다. 웅진그룹처럼 중견그룹으로 발돋움한 기업이라면 다음 성장목표를 해외진출로 잡는 건 당연했음. 결국 찾아낸 게 건설과 태양광이라는 돌파구였음.

(5) 오리온 : 왕과 왕비가 다스리는 왕국
- 한국 기업사는 언제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음. 그렇게 창조된 기업 자체가 성과였다. 오리온 그룹은 유에서 돈을 창조. 어떤 면에선 한국적이라기보다는 성공한 기업을 팔아 환금을 하는 데 익숙한 미국적이거나 중국적인 접근법이었음. 감춰진 이유는 검찰 수사를 통해서 드러남. 검찰이 담회장과 이화경 사장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건 2010년 말부터. 국세청 조사과정에서 의심정황을 넘겨받고 수사를 시작. 그때만 해도 태광그룹이나 C&그룹이나 한화그룹 같은 부실재벌에 대한 본보기식 수사가 한창이던 무렵이었음. 태광그룹은 이미 악명이 높았다. C&그룹은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한화그룹은 건드리기만 했지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힌 상태였다. 결국 오리온 그룹만 남았다. 오리온은 실체가 있는 수사였다. 본보기가 되기에도 좋았다. 비자금을 만드는 과정은 판에 박힌 듯 전형적이었다. 청담동 빌라부지를 시세보다 싸게 팔아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 자금을 갤러리를 통해 세탁. 심지어 담철곤 회장과 이화경 사장은 홍콩에 위장계열사를 차려놓고 비자금 유통경로로 삼았음. 차명으로 계열사 주식을 보유해서 거액의 배당금을 받아 가로챔. 위장계열사의 이름은 아이팩이었다.

(6) 농심 : 소비작 끌어올리고 끌어내린다
- 11년 하반기 하얀라면의 등장이 제품수명과 시장판도에 큰 변화를 몰고 옴. 하얀라면은 라면시장에도 신제품 효과라는 걸 불러일으킴. 라면이란 상품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이야기. 소비자들이 꼬꼬면에 열광했던 건 꼬꼬면을 먹으면 더 배가 불러서가 아니다. 더 이상 라면은 배가 고파서 먹는 음식이 아니다. 밥 대신 먹는 게 아니라 별미로 먹는 음식이다. 별미의 맛은 다양할수록 제격이다. 소비자들이 꼬꼬면에 열광한 건 '어디한번 먹어보자'는 호기심이 작용했기 때문. 꼬꼬면의 등장은 라면이 화장품이나 옷가지처럼 유행을 타는 소비재의 성격도 갖게 됐다는 걸 의미. 소비자가 그걸 원했다.
- 농심도 민심은 알았다. 민심은 새로운 라면맛을 원하고 있었다.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신기한 라면을 먹고 싶다는 시청자 의견이 빗발쳤다는 사실부터가 소비자가 다른 라면맛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미 광대한 영토를 가진 농심은 민심이 크게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았음. 소비자의 입맛이 농심의 조리법 영역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음. 한번 나간 입맛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그게 농심의 꼬꼬면을 버리고 신라면 블랙에 올인했던 이유. 꼬꼬면은 닭육수로 국물을 낸 라면이었다. 농심은 쇠고기 육수를 사용한 라면으로 오늘날 라면왕국을 세웠다. 닭 육수라면은 애당초 삼양라면의 전매특허였다. 농심은 라면육수는 쇠고기 육수라는 등식이 뿌리내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농심은 소비자의 입맛을 길들여옴. 이제와서 닭 육수라면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 세운 방책에 구멍을 내는 일이었다. 삼양의 닭 육수라면에서 농심의 쇠고기 육수로 한번 바뀐 소비자의 입맛은 25년 동안이나 그대로다.
- 농심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농심은 오랜 세월 선도기업이었지만 선제적 혁신이 아니라 리액션 혁신에 머무르고 있다. 하얀라면이 시장을 혁신시키자 그 혁신을 활용했을 뿐. 시장을 읽는 농심의 안목은 녹슬지 않았다. 라면시장이 패스트패션처럼 변했다는 걸 알았을 때 재빨리 신제품 공세를 강화하면서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옴. 진짜진짜라면은 고소한 매운맛을 냈다. 하얀라면들이 고소한 맛을 신라면의 빨간 매운맛에 접목시킨 결과였음. 대응이었지 혁신이 아니었다. 손욱 회장이 만들고자 했던 농심은 P&G처럼 수많은 특허를 보유한 소비재 기업이었다. 시장이 변화하지 않으면 스스로 변화할 줄 모르는 기업이 아니었다. 1등기업은 1등전략을 쓸 수 있어서 1등을 지켜내기가 쉽다. 1등이기 때문에 쓸수 없는 2등과 3등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도전과 혁신은 1등이 쓰기 어려운 전략이다. 바로 이때 1등의 위기가 시작된다. 농심은 혁신을 시도했지만 스스로 좌초시켰다. 대신 과거의 방식으로 수성하는 길을 선택. 신라면 블랙은 실패했고 거센 도전을 받음. 하얀 라면이 만들어낸 라면 유행을 거꾸로 이용하면서 어부지리를 얻음. 그렇게 응전했고 천운이 따르면서 농심은 다시 1등을 지켜냄. 분명한 건 농심이 민심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돌아온 1등에게 소비자들이 보낸 경고다.

(7) 신한금융지주 : 외환위기를 돌파한 주주금융의 한계
- 외화위기를 거치면서 한국금융산업은 커다란 구조조정을 겪음. 관치금융에서 벗어나서 주주금융으로 거듭나게 됨. 은행들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거대 은행으로 성장. 게다가 덩치 불리기 과정에서 참여한 해외 금융투자자들은 한국의 은행들이 정부의 간섭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음. 자연히 관치에서 벗어날 대내외적 명분이 쌓였다. 하지만 주주금융에도 한계는 있었다. 덩치는 커졌는데 주인이 없었다. 한때 KB금융지주에서 황영기 회장과 강정원 행장이 권력암투를 벌였던 것도 딱히 뚜렷한 주인세력이 없는 금융지주 안에서 전문경영인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강병호 교수는 말한다. "대리인 문제는 현재 금융지주들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사실 은행지배구조 문제는 진작부터 공론화됐던 문제죠. 하지만 늘 그때뿐이었어요. 이름뿐인 사외이사제도 말고 현실적인 경영진 감시체제를 만들자고 말만했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죠." KB금융지주의 경우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의 거수기 노릇만 했다는 비난을 들었음. 신한금융지주는 최고경영자와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최대주주 집단이 연대하면서 역시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감시하기보단 경영진과 당색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임.
- 신한금융지주는 라응찬 회장의 카리스마가 강한 조직이었음. 한동우 체제의 신한은 그룹경영회의를 통한 집단 경영체제의 성격이 강함. 한회장도 말했다. "그룹경영회의를 통한 집단 경영은 회장의 힘을 키우거나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회사 사장들은 그룹에서 오래 일하면서 경륜과 노하우가 있어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터놓고 토론을 하면 더 좋은 결정이 나옵니다. 중지를 모으는 만큼 회장의 역할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라회장의 카리스마는 신한이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추진력이었다. 신한사태는 거대 금융사를 1인자가 지배하고 권위를 견제할 수단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보여줬다. 라회장은 은둔의 CEO라고 불린다. 지난 10년 동안 기자들 앞에 선 적이 거의 없었다. LG카드 인수전에서 신한금융지주가 하나금융지주를 누른 건 라회장이 10원단위까지 계산해서 맞춰준 입찰금액 덕분이었음. 신산이라고도 불렸다. 라회장만큼 오랜시간 금융 최고경영자로 자리를 지킨 사례는 없다. 그는 신한금융지주의 오늘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신한금융지주의 내일을 그리진 못하게 했다. 게다가 관치를 견제하기 위해 용퇴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관치를 부를 명분만 쌓아주었다.

(8) 현대그룹 : 적통설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 가치에 몰입하다
- 현대차그룹은 10년 전 계열분리됐을 때만 해도 알짜그룹은 아니었다. 기아차와 한보철강이라는 외환위기의 주범이 군식구로 딸려 있었다. 현대차 그룹은 10년 동안 기아차와 한보철강을 디자인 기아와 현대제철이라는 우량기업으로 도약시켰다. 그 과정에서 10조원이라는 현금을 쌓아둘 수 있었다. 이번 인수전에서 현대차그룹이 현대그룹에 비해 자급력에서 우세할 수 있었던 건 지난 10년간의 성적표가 더 좋았기 때문. 시장이 현대차그룹의 편을 들어주었던 이유다. 현대건설 인수전은 집안싸움으로 비추어졌지만 시장싸움이었다. 현대그룹이 패배한 진짜 원인은 지난 10년 동안 현대건설과 현대차그룹만큼 성장해내지 못한 데 있다. 현대건설 인수전은 반년 동안의 경쟁이 아니라 10년 동안의 성패였다.

(9) 금호아시아나 : 형제는 경쟁자였다
-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대우건설 인수를 주도한 건 박삼구회장이었음. 당시 박찬구 회장은 대우건설 인수를 반대. 무리라는 게 표면적 이유였음. 하지만 박삼구 회장은 아랑곳 없이 대우건설 인수를 지휘. 오너의 의지였다. 당시 이사회에선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없던 걸로 알려졌다. 대우건설 인수는 금호아시아나 그룹으로선 아시아나항공 설립이후 가장 큰 빅딜이었따.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70년대 석유화학과 운송업으로 성장한 이래 90년대 제2민항 사업에 진출할 때까지 언제나 안전한 선택을 해왔다. 공격적 인수합병을 한 적도 없었따. 무엇보다 금호 아시아나그룹의 사업들은 모두 국책사업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운송이나 석유화학은 산업화 시대에 국가적 요구로 금호그룹이 떠맡았음. 항공사업 역시 제2민항 사업이라는 국책사업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몫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말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공격적이기보단 수세적 경영을 해왔습니다. 무엇보다 형제간 동일지분이라는 체제는 금호가 파격적인 경영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어요. 지분구조가 뚜렷하게 나눠지고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으니까요.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이 쏠리기가 어려웠죠." 그런 힘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온 건 박삼구회장이었다. 그는 동일지분을 갖고 있는 동생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격적 경영에 나섬. 금호아시아니그룹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지였다. 당시 재계 관계자는 말한다. "흔히 이번 사태를 놓고 형제의 난이라고 하는데요.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뚜렷한 성장동력이 없었던 만큼 뚜렷한 오너도 없는 체제였지요. 형제가 모두 주인이니까 그룹의 외연이 확장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번 싸움으로 형제간 지분율의 변화도 생기고 뚜렷한 힘의 우열도 드러났지요. 가족경영은 온화하지만 변화엔 보수적일 수 있어요. 공격적 경영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박찬구 회장 해임안에서 박찬구 회장 본인을 빼곤 아무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면서요. 누가 리더인지가 드러난 셈이죠."
-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한국재벌의 전형적 성장단계를 밟아옴. 국책사업으로 큰돈을 벌어서 재벌을 일구었지만 뚜렷한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지 못함. 특히 이런 그룹은 대체로 2세경영에서 형제경영을 선택하곤 했음. 두산그룹이 대표적. 두산은 05년 형제의 난으로 분열될 때까지 사우디아라비아식 형제경영 기업으로 칭송 받음. 하지만 그룹 지배구조에서 형제경영이란 과도기적 단계에 가까움. 뚜렷하게 다른 사업확장 활로를 찾지 못했고, 기업역시 아직 규모가 작을 때 형제가 한꺼번에 가업을 이어나가곤 한다. 삼성가나 현대가는 규모가 크니 계열분리를 거듭했다. 우애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삼성이나 현대는 계열분리를 해도 각자의 파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중견그룹들은 형제경영이란 임시처방에 의존해야 했던 셈이다. 박삼구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형제경영은 할수 있으면 한다는 것이지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선대회장들과 내 대에서 형제경영을 끝내는 걸로 합의했었다." 형제경영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미래가치에 공격적 투자를 하려면 오너의 카리스마가 필요. 삼성과 현대자동차 그룹이 크게 성장할 수 었었던 건 오너경영의 강력한 리더십 덕분. 게다가 기업이 뚜렷한 성장도력을 스스로 개발하지 못하면 결국 인수합병에 매달리게 됨. 성장동력을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찾게 된다는 이야기. 하지만 인수합명의 저주는 만만치가 않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배구조가 가족중심으로 분산된 기업과 성장동력을 외부에 찾은 기업의 복합적 실패사례.
-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원래는 착실한 제조기업이었음. 설립자 박인천 회장은 46년 광주택시를 설립했고 광주지역 여객운송시장을 장악. 자연히 택시와 버스에 소모되는 타이어에 관심을 갖게 됐고 타이어 회사를 설립. 이어 타이어를 제조하기 위한 합성고무를 만들면서 화학업에 뛰어듬. 그게 대규모 설비투자업이다 보니 건설업에 뛰어듬. 88뇬엔 제2민항사인 아시아나를 설립하면서 도약의 발판까지 마련. 핵심역량을 중심에 두고 연관산업으로 시너지를 극대화하면서 성장해옴. 그만큼 내실이 있을 수밖에 없음. 2000년대 들어서 금호 아시아나 그룹은 핵심가치를 잃고 무차별적 확장에만 치중. 대우건설 인수와 대한통운 인수는 금호아시아나의 기업가치와는 별 관련없는 빅딜이었다. 그저 경쟁자보다 앞서야 한다는 승부수였다. 형제경영이란 허울속에 동업자간 힘겨루기가 이어지면서 리더십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탓도 컸다. 무리한 투자로라도 공적을 쌓아야 형제경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정작 이런 확장성은 경영에도 영향을 주었다. 핵심기업인 금호 산업과 아시아나 항공은 오랜시간 혁신정체에 빠져있다. 성장 일변도에 치중하다 질적 성장의 때를 놓쳤기 때문. 금호타이어와 금호석화와 금호산업 모두 해외공장 증설에 치중해 왔지만 저가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수준에 그쳤다. 진정한 글로벌 경영의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노동시장과 소비시장을 따라 옮겨다니다 보면 결국 갈곳을 잃게 된다. 기술경쟁력 확보에 소홀하게 될 수도 있다.

(10) NHN : 삼성의 길을 쫓아가다
- NHN은 활짝 열린 벤처기업으로 출발. 이질적인 네이버컴과 한게임이 합병할 수 있었던 것도 제몫만 챙기지 않는 개방형 기업이었기에 가능했음. 05년 무렵까지만 해도 그랬다. 당시만 해도 NHN은 단순한 검색회사라기보단 여전히 검색회사와 게임회사가 동거하는 기업이었다. 매출만 봐도 그랬다. 네이버라는 포털이 검색광고로 급성장하고 있었고 지식인 서비스가 유명하긴 했지만 한게임의 매출도 견고했음. 검색과 게임이라는 힘의 균형은 검색광고의 매출이 급성장하면서 틀어지기 시작. 03년엔 검색광고 매출이 한게임 매출을 넘어섰다. 05년 한게임의 매출은 전체 매출의 20%까지 위축됐다. 엔씨소프트나 넥슨에 밀려 한게임이 대박을 터뜨리지 못한 탓도 있었다. 검색광고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게 더 큰 이유였다. 검색광고 매출은 03년 418억에서 04년 856억으로 늘었고, 05년엔 1732억까지 증가. 정확히 매년 두배씩 성장. 이런 변화는 NHN의 색깔을 싹 바꿔버림. 게임은 기술이면서 창작이다. 검색은 기술이면서 서비스다. 한게임을 중심으로 회사가 돌아가던 시절엔 NHN은 창작하는 기술회사가 가까웠다. 자연히 개방적이었다. 한게임 출신 인재들이 특히나 자유분방했다. 그들은 NHN을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회사로 이끌고 싶어했다. 김범수, 천양현, 문태식, 남궁훈 같은 한게임쪽 NHN창업자들은 회사안에서도 가장 탈조직적인 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캐시카우가 한게임에서 검색광고로 바뀌면서 NHN의 역량은 검색과 서비스와 영업에 집중되기 시작. 결정적 갈림길이 있었다. 검색기술에만 집중하던 네이버가 이메일과 커뮤니티 서비스를 시작한 일이다. 당시로선 앞서가는 다음과 야후와 프리챌을 추격하자니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결정으로 NHN의 항로는 기술기업에서 서비스 기업으로 영원히 바뀌어 버림. 갖가지 서비스를 유지하자니 회사인력은 갈수록 늘어만 갔고 그 인력을 유지하자니 보수적 인력관리 체계를 갖출수 밖에 없었따. 2010년 NHN전체 인력은 3000명까지 불어났다. NHN의 인사업무는 삼성그룹 인사실 출신이 맡았다.
- 06년 구글이 한국에 진출했을 때 네이버가 제일먼저 한 대응은 네이버 서비스의 폐쇄성을 강화한 일이었다. 구글 검색으론 네이버 지식인이 검색되지 않도록 제한. 네이버로선 지식인 같은 핵심역양을 거저 내줄 순 없었다. 이해진 CSO는 평소에 "지식의 보편화를 위해 네이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미 네이버는 지식의 사유화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 폐쇄적 기업이 돼 있었다. 기술을 개방할 수 있다. 기술은 나눌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공개한 것도 그래서였다. 덕분에 구글은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폰 시장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다. 서비스는 공개할 수 없다. 서비스는 독점적이지 않으면 차별화가 안되기 때문이다. 서비스 기업으로서 NHN은 폐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NHN 관계자는 말한다. "종종 왜 구글처럼 안드로이드를 못 만들었느냐는 비난을 듣습니다. 구글과 NHN은 크기가 다른 회사입니다. NHN은 구글을 상대로 생존하기에도 벅찬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어쩌면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였는지도 모른다. 구글은 개방적 기술기업을 꿈꾼다. NHN은 폐쇄적 서비스 기업을 지향한다. NHN은 항업 10년만에 가장 개방적 기업에서 가장 폐쇄적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 IT업계의 관계자는 말한다. "NHN은 검색부터 블로그와 메일과 SNS와 이젠 소셜커머스 시장까지 모두 발을 뻗쳤지요. 구글은 서비스 기업이 아니라 기술기업을 지향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 같은 OS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NHN은 서비스 시장을 확장하는 데만 열을 올린 탓에 새로운 기술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해외 앱 서비스 업체들을 만나면 한국을 비웃습니다. 포털이 진공청소기도 아니고, 말단에서 작은 창업기업의 몫까지 빼먹고 있다는 거죠. 그뿐인가요. 스마트폰 시장으로 재편되니까 이제 그 시장에 무임승차를 하려고 합니다. 와이파이망을 깔고 스마트폰을 개발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이제 포털이 소셜 흐름도 가져가겠다고 하는거죠.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공헌을 했습니다. 네이버는 무엇을 했습니까. 생태계를 만들어주기는 커녕 생태계 파괴만 일삼았죠."
- 구글과 페북은 판을 키울줄 안다. NHN은 판을 독식할 생각만 한다. NHN은 더 이상 새로운 생각을 하는 기업이 아니다. 삼성전자처럼 막강한 독점력을 활용해서 빨리 따라잡을 궁리를 할 뿐이다. 변화에 등 떠밀리듯 대응한다.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고 혁신을 방해한다. NHN의 전 임원은 말한다. "개방적인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든 그건 이해진 CSO의 전략단하고 얘기하란 말만 듣기 일쑤죠. 경영컨설팅 회사의 경력직원들이 대거 합류되면서 인수합녕에만 능한 회사가 됐습니다."

(11) 신세계 : 윤리로 무너지는 윤리기업
- 신세계는 윤리경영을 강조해 왔음. 지난 10년 동안 신세계가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윤리경영에 있다는 해것이 많았다. 유통은 장난이 끼어들 여지가 많은 산업이다. 특정 업체를 입점시킬 때 뒷돈 거래가 무성할 수밖에 없다. 설날이나 추석때만 되면 백화점 점장의 책상 위엔 입점업체들의 선물이 수북하게 쌓이곤 했다. 결국 그런 뒷돈은 고객한테 부담으로 돌아간다. 신세계는 그걸 뿌리뽑겠다면서 윤리경영을 강조했다. 정용진 부회장이 가장 강조했던 것도 윤리경영이었다. 신세계 명함에 윤리경영이란 글귀가 쓰여 있을 정도. 직원 개개인의 청렴성을 극도로 강조해 왔음. 실제로 그런 유통개혁이 신세계의 성장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게 사실. 정작 정 부회장과 오너 일가가 스스로 비윤리적이었던 셈. 직원들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뒷돈을 감시하고 자기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은 챙겼던것. 그게 신세계 윤리경영이었다. 신세계 SVN사건은 신세계 유통 10년의 구조가 한계에 다다랐던 걸 보여주는 것일 수 있음. 고속성장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 셈.
- 결국 유통업은 부동산 선점 경쟁이다. 90년대부터 이마트가 해왔던 게 바로 부동산 부지매입이었다. 국내 부동산 경기가 하강할수록 신세계 그룹의 보유자산가치도 내려갈 수밖에 없음. 경기가 위축되면 내수산업의 한계도 드러남. 중국진출이 기대만 못한데다 중국 경기도 위축되면서 내우외환일 수 밖에 없다. 경제학자 룩셈부르크는 유통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생산하지 않고 가치만 덧붙이는 유통이 산업을 지배할 때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음.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짐. 미국에선 월마트가 GM을 누루고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최정상에 오름. 금융업이 제조업을 누르고 미국경제의 근간이 됐다. 덕분에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를 맞아 쓰러져버렸다. 반면에 한국경제가 금융위기를 견뎌낸 건 탄탄한 제조업 기반덕분이었다. 어쩌면 한국경제 역시 유통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단 점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름. 무엇보다 거대 재벌가에서 유통의 끝단까지 장악하면서 내수시장의 활기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문제. 신세계는 윤리경영으로 자칫 왜곡되기 쉬운 유통거래를 투명화하는 데 일조했음. 지금도 신세계 페이라고 불리는 클린 경영문화는 신세계 경영의 근간임. 그러나 이제 그 윤리가 무너지기 시작. 가장 정상에서부터 말이다. 신세계가 정용진 체제로 진입한 지 2년여만에 신세계의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이마트는 노조설립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결국 질주하던 정부회장은 신세계와 이마트의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했다. 성공이 윤리에서 시작됐든 실패도 윤리에서 시작됐다.

(12) 하이트 : 영원한 1등은 없다
- 주류영업은 혁신의 분야가 아님. 기본의 분야다. 경험의 분야다. 오비맥주가 점유율을 역전시킬 수 있던 것도 맥주맛을 되찾아오고 대리점과 밀착영업을 하는 기본으로 돌아갔기 때문. 맥주 제조사에서 아이폰을 만들일은 없다. 기적과도 같은 천상의 맥주맛으로 한방에 역전하는 일도 없다. 어느 나라나 맥주시장이 과점시장인 것은 맥주맛의 격차는 존재하지만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맥주맛을 원하게 되더라도 주류 맥주시장의 경쟁은 소수끼리의 땅따먹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업력이 중요해진다. 영업은 스킨십이다. 세월이고 인연이다. 하이트는 3세경영을 위한 물갈이를 통해 스스로 인적 기억상실증에 빠져버렸다. 이미 하이트와 진로의 화학적 결합이 실패하면서 상당수의 인력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다시한번 맨파워를 잃어버렸다. 사실 박태영 상무로의 권력이동을 잘 알고 있던 상황에선 기업조직 안에서도 줄타기와 눈치보기가 만연할 수 밖에 없음. 누구도 하이트 점유율 하락을 앞장서서 막아보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하이트는 내부조직의 불확실성을 키워서 외부변화에 대한 조직의 적응력을 잃고 말았다.

(13) 삼성 : 자신을 넘지 못하는 거인
- 팬택계열의 디자인 책임자는 이런 말을 했었다. "휴대폰 경쟁은 결국 디자인 경쟁으로 옮겨가기 마련입니다. 기능적 혁신이 끝나면 결국 형태의 경쟁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형태는 기능을 닮는다고 했다. 스마트폰이 네모반듯해진 이유다. 기능혁신이 끝나면 이제 형태의 경쟁이 시작된다. 진화의 시기다. 반면 06년 6월 8일은 폭풍같던 스마트폰 혁신의 종말이었다. 애플이 주도한 화려한 혁신의 시대는 끝나 혁신자는 길을 비켜주고 진화자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기술혁신은 혁신과 진화가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 인텔과 폭스바겐이 내부에서 혁신과 진화를 추진하고 있다면 스마트폰의 시장에선 애플과 안드로이드 진영인 구글과 삼성전자가 혁신과 진화를 추진하고 있었다면 스마트폰 시장에선 애플과 안드로이드 진영인 구글과 삼성전자가 혁신과 진화를 나눠 맡고 있을 뿐이다.
- 이건희 회장은 분명 통찰력 있는 경영인이었다. 그는 반도체산업은 시간 산업이라고 정의. 시계는 패션업이었다. 가전은 조립양산업이고 카드업은 술장사라고 했다. 백화점은 유통업이 아니라 부동산업이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사업의 본질이 업태를 통찰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 본질에 따라 경영을 했고, 성공했다. 이회장만 그런게 아니다. 사업적 성공을 거둔 경영인들 모두 산업의 본질을 남들과 다르게 통찰했던 인물이었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 산업의 본질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걸 통찰했다. IBM이 PC를 파는 데 열중할 때 빌 게이츠는 PC의 OS를 장악했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 OS를 기반으로 소프트웨어 시장을 장악. 스티브 잡스는 MP3 플레이어의 본질은 음악유통에 있으며 휴대전화의 본질은 음성통화가 아니라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을 소비자가 자유롭게 개발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아이팟고 아이폰을 파는 건 그 다음 일이었다. 그런데 이회장에겐 잡스나 빌 게이츠와는 다른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이 회장은 유에서 더 큰 유를 창조해야 했던 후계자였다. 그래서 이회장이 맨 먼저 고민한 업의 특성은 그룹의 총수란 무엇을 하는 자리인가였다.
- 04년 삼성전자는 스스로 혁신자가 될 수 있었다. 앤디 루빈이 청바지를 입은 채 청색 수트를 차려입은 삼성전자 임원들을 만나려고 한국을 찾았을 때 말이다. 정작 삼성전자는 혁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혁신을 한 적도 없고 혁신을 할 뜻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삼성전자의 실패였다. 삼성전자는 진화자가 될 기회마저 놓치진 않았다. 삼성전자는 기술혁신이 끝나갈 때 애플의 바통을 이어받아 기술을 대중화함. 어쩌면 삼성전자에겐 더 어울리는 길이었다. 애플이 혁신조직으로서 유지되기 위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수직계열화를 이뤄왔다면 삼성전자는 진화조직이 되기 위해 부품과 제조를 수직계열화했다. 외부에서 혁신이 일어났을 때 누구보다 빨리 그 혁신을 대중화할 수 있는 구조임. 혁신은 눈 밝고 귀 밝은 애플의 몫이었다면 삼성전자에겐 단지 외부의 혁신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챌 수 있는 코가 있으면 됐다.
- 관건은 애플과 구글이 만들어낼 다음 혁신의 폭풍 속에서 다음 진화의 시기까지 삼성전자가 견뎌낼 수 있느냐다. 삼성전자는 혁신조직이 아니라 진화조직이기 때문. IT산업은 혁신가들이 폭풍같은 혁신으로 진화자들을 집어삼키고 그 폭풍에서 견뎌낸 진화자들이 혁신가들을 밀어내고 시장을 차지하는 싸움을 영원히 반복한다. 다음 혁신의 폭풍이 다가올 때 삼성전자는 또 한번 흔들릴 공산이 크다. 삼성이 여전히 이건희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성공했고 결국 소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성공신화에서 벗어날 수 없음. 언제까지 구글-삼성 연합군이 유지될지도 알 수 없다. 구글은 이미 모토로라를 통해 하드웨어 제조기반을 확보. 지금 삼성전자가 필요하지 앞으로도 삼성전자가 필요하지는 않다. 마이크로소프트-IBM연합이 그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을 발판으로 윈도우OS를 시장지배적 운영체제로 만든 다음. IBM을 버렸다. IBM은 그 뒤로 피나는 노력끝에 서비스 솔루션 기업으로 변신해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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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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