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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통화전쟁

경제 2014. 12. 7. 19:53

 


세계의 통화전쟁

저자
하마다 가즈유키 지음
출판사
작가정신 | 200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자본주의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돈. 세계의 강국들이 자신들의 화...
가격비교

 

1. 달러제국의 종언
- 02년 6월말 조지 소로스는 "앞으로 몇년 사이, 달러의 가치는 3분의 1정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음. 소로스의 예견에는 그린스펀의 지휘아래 진행된 강한 달러 정책에 대한 반발도 있는듯함. 강한달러 정책의 영향으로 미국의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거점을 옮기고 국내고용이 줄어드는 상황은 엔고때 일본이 겪은 것과 같음. "경제활동의 기반인 제조업이 무너지면 그 나라엔 ㅣㅁ래가 없다"는 것이 소로스의 주장임.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지도자와 시민의 수입격차가 4배가 넘으면 그 사회는 내부붕괴를 시작한다"고 말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극단적 빈부격차는 국가의 안정을 해친다"고 경종을 울렸음.
- 미국이나 IMF가 기적의 경제회복이라고 극찬하는 한국은 02년이 되자 경제의 붕괴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 외국인 투자가들의 핫머니가 다시 한국을 떠나기 시작. 한국에 대한 직접 투자액은 01년 9월 10억달러에서 02년 10월 5억달러 남짓으로 절반가량 줄어듬. 한국은행에 따르면 02년 6월시점에 가계적자의 총액은 4천억 달러에 이르렀음. 전년보다 34퍼센트나 빚이 늘었고, 국내총생산에서 가계적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70퍼센트가 되었음. 요컨대 한국인들은 미국 금융기관이 벌인 신용카드 작전에 말려들어서, 저축하는 전통을 버리고 빚으로 소비하기에 나섰음. 그 결과 일시적으로 경제활성화가 나타난데 불과함.
2. 국제금융기구의 이면
- 스티글리츠의 말을 빌리면 자유무역은 21세기판 아편무역임.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에게는 상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해 관세장벽을 철폐시키면서 이들 나라의 농산물 등에 미국은 수입제한조치를 내리고 있기 때문. 어편무역 시절에는 상대가 말을 듣게 하기 위해 군사력을 썼음. 힘으로 해외시장을 연 것. 오늘날에는 세계은행과 IMF가 경제/금융정책을 구사해 상대국 시장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 예를 들어 WTO는 지적 소유원 보호라는 미명아래 에이즈 약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개도국의 의료나 복지에 필수적인 약품에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높은 관세를 물림. 인명보다 구미 의약품 회사의 브랜드를 중시하는 셈.
- 75년은 미국이 무역흑자를 유지한 마지막 해임. 이해를 기점으로 미국은 자국경제에 다가온 위기의 전조를 감지하기 시작했으며, 한편으로는 통화정책을 무기로 삼으면 무역적자 등이 생겨도 무난히 처리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 전환점이기도 했음. 그같은 발상의 전환을 토대로 미국은 몇가지 비책을 강구했음.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75년 실행된 은행규제완화였는데 일본에는 금융빅뱅의 일환으로 도입되어 수수료의 완전자율화 등이 화제가 됬음. 그러나 미국에서는 장기투자에 한정하지 않고 단기에도 투기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쪽으로 법개정이 이루어짐. 그러자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은 앞을 다퉈 개도국에 대한 융자를 늘리기 시작.
- 닉슨쇼크로 '브레턴우즈체제(IMF설립을 위한 국제통화기금협정과 세계은행 설립을 위한 국제부흥개발은행협정을 총칭히는 관용어)가 붕괴' 하는 과정에서 국제통화환경의 격변속에서 74년 4월 IMF 2차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고정환율제 원칙이 파기되고 새로이 변동환율제가 각국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졌음. 외환시세를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무역적자는 얼마든지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음. 당시 미국 재무당국이나 금융기관으로서는 더 바랄 나위 없는 일이었음. 미국으로서는 IMF라는 국제기구를 이용하는 작전을 보기좋게 성공시켰다고 볼 수 있음. 스티글리츠가 비판한 것처럼 미국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세계은행과 IMF를 요긴한 금고로 변신시킨 것. 여기서 잊어선 안 될 것은, 변동환율제 이행으로 투기가 폭주할 수 있는 토양이 생겨났다는 사실. 그 뒤 아시아 통화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당시 변동환율제로의 시행은 헤지펀드 집단의 투기가 폭주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음.
-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인공버블 바이러스 주사를 맞은 것처럼 힘을 잃음. 그러나 일본인들 다수는 당시 엔이 강해졌다 또는 일본의 국력이 발전하는 증거라고 착각했음. 그래서 다투어 미국의 토지와 건물을 사들였음. 뉴욕 록펠려 센터 빌딩도 일본 기업이 사들였는데, 일본인들의 돈 씀씀이가 하도 비정상적이어서 미국인들은 고질라의 역습이라며 겁을 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라며 기막혀했음. 사실은 그 배경에 '미국인들이 만든 미국의 부동산 거품을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었는데, 다시 일본은 이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했음. 미국은 전후 최대의 부동산 붐을 맞았고, 일본에서도 유명해진 도널드 트럼프 등이 크게 활약했음. 그러나 그 화려한 부동산 붐 뒤편에서는 금융기관들이 불량채권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음. 누가 마지막 골칫거리를 치울 것인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제팬 머니였음. 미국에게는 사들여봤자 가져갈 수도 없는 것을 비싼 값에 사들이는 고마운 일본인들이 등장했음.
- 일찍이 동유럽 사회주의 경제의 성공모델이라고까지 불리던 유고슬라비아는 80년까지 매년 6%를 넘는 경제성장률을 자랑했음. 의료비와 교육비도 무료였고 평균수명도 72세였음. 여러 민족이 사이좋게 공존공영하고 있었음. 그런데 이 사회주의 경제의 우등생을 시장주의로 이행시키기 위해 미국이 IMF와 함께 강제주입한 것은 충격요법을 동반한 극약이었음. 80년부터 90년까지 미국의 원조를 제공받는 대신 유고슬라비아는 통화의 평가절하, 임금동결, 재정지출의 대폭삭감, 국영기업 폐지, 외국기업투자 금지의 해제 등 일련의 IMF주의 경제개혁안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음. 80년부터 90년까지 10년간의 격변이 사회 불안을 조장하고 지역격차를 키워 민족주의를 대두하게 한 것은 틀림없음. 결국 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이어 보스니아도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으로 돌입했음.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이 확대되고 가속화된 원인은 미국이 IMF와 더불어 강경하게 추진한 경제개혁이 실패한 탓임.
3. 유럽의 기대되는 새별 유로
- 언뜻 보면 시대착오로 보일 수도 있는 통합 통화 유로의 창설에는 간과할 수 없는 전략이 담겨 있음. 거기에는 경제, 금융에 관련된 발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치, 군사적 요소가 숨어 있음. 이것이야말로 유로탄생의 숨은 배경임. 과거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지정학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끈 적이 있었음. 유로의 등장은 지리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함 그 역사적 의미와 전략적 구도가 떠오름. 유로의 발족에는 국제금융 세계와 정치, 안전 보장의 문제가 동전의 양면처럼 가로놓여 있음. 바꿔 말하면 유로의 등장은 냉전 종결로 생겨난 안전보장상의 필연적 흐름임. 미국으로서도 그 흐름에는 저항하기 어려움. 초대국 미국에게나 2의 초대국 자리를 노리는 유럽에게나 새로운 통화가 성공하기 못하면 곤란한 지리경제학적 상황이 생긴 것. 이 전략적 상황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유로의 도전을 미국이 잠자코 넘길 리 없다', '영국 등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유로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유로역시 투기꾼들의 공격을 비켜갈 수 없다'는 식으로 진부한 관측밖에 할 수 없을 것임. 지리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유럽은 시장사회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음. 즉 유럽은 냉전시대부터 그 직후까지 주류였던 시장 지상주의의 폐해에 염증을 느끼고 경제정책의 방향타를 크게 바꾼 것임. 그들이 지향하는 정치, 경제체제는 신 마르크스 주의 혹은 환경중시 복지경제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사회주의 색채가 농후함.
- 유로가 발족하려면 참가 예정국가들이 마스트리히트조약(유럽의 정치통합과 경제 및 통화통합을 결의한 조약)에서 정한 경제통화동맹에 가입하는 조건 즉, GDP대비로 재정적자는 3%, 누적적자도 60%이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했음. 그러나 97년 초기단계에서는 가맹국의 태반이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어 보였음. 그래서 관계당국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상태에서 적자와 실업률을 줄이려면 오로지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을 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 지출삭감이라는 수단은 국민의 반바을 부를 것이 뻔해,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이었기 때문임. 그러한 유럽에게 있어 최대의 과제는 '세계를 석권한 수출대국 아시아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였음. 미국과 동유럽 시장에서 아시아를 몰아내는 것이 그들의 급선무가 되었음. 그러자면 적어도 97년에 한해서는 아시아 경제발전을 저지하고, 제조업과 급성장 중이던 금융시장의 기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음. 유로의 순조로운 출범을 위해셔는 헤지펀드의 아시아 투기 공격으로 일본 엔화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망이 제기됨. 실제로 유럽 국영은행이나 대형 금융기관들은 헤지펀드에게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아시아 시장 공략을 도왔음.
- 중국은 정치환경을 교묘하게 활용해 유로와 위안이 시장 사회주의의 기축통화로서 상호협조하도록 한다는 전략노선을 전개하고 있음. 글자 그대로 금융권력을 구사해 미국과 유럽의 균형을 꾀하는 중국식 지리경제학의 전형임
4. 중국의 위안은 현대판 만리장성
- 97년 홍콩 반환 당시 영국은 앞으로 50년간은 여왕 폐하의 통화를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홍콩에 있던 38억 달러의 외화준비를 중국으로 이관하는데 동의했음. 그 이래 홍콩에서 발행되는 홍콩달러 1달러 당 미화로 13센트 씩 외화준비를 쌓게 했음. 그 결과 홍콩달러는 미국달러와 고정환율로 묶였고, 홍콩달러가 위안과 묶인 시점에서 위안은 미 달러와의 페그제(고정환율제)로 공동운명체가 됬음. 경제가 달러 베이스로 움직인 덕분에 중국은 미국처럼 인플레에서 해방되었음. 이같은 달러와의 일체화 전략으로 해외로부터의 투자가 급증했다고 볼 수 도 있음. 또 아시아 통화위기 때 생긴 급격한 엔고의 영향으로 위안은 평가절하를 하지 않고도 평가절하와도 같은 효과를 보았음. 이것도 홍콩달러, 미국달러와 연동된 덕택임. 결과적으로 중국은 대미, 대칠 수출을 대폭 늘릴 수 있었고 해외로부터의 투자환경도 개선할 수 있었음. 정말 교묘한 두뇌 플레이라고 할 것임.
- 미국은 중국을 라이벌로 삼기보다는 협조관계로 이끌어서 미국내 기업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음. 중국이 성장하는 거대시장인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 부시정권은 클린턴 정권과는 달리 처음에는 중국을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음. 그러나 9.11테러로 상황은 일변했음. 인권문제와 관련짓던 이전의 중국정책은 자취를 감추었음.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을 대테러 포위망에 넣고 싶은 미국이 대중국 융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꿈
5. 엔은 부활할 수 있는가
- 일본의 잉여저축을 외화로 환류시킬 수 밖에 없게되면 일본 국민의 귀중한 저축은 환 리스크에 노출됨. 따라서 일본인들의 자산가치를 유지하려면 엔의 국제화와 도쿄 엔시장의 활성화가 매우 중요함. 이 문제는 일본의 경제력이나 제조능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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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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