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고기를 가르고 요리하는 일에 비유했으니 이때도 옛날 재상들이 음식을 나누고 분배하는 주방장이었다는 흔적을 엿볼수 있다.
따지고보면 모든 사람이 불만이 없도록 먹을 것을 골고루 나눠서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요리사의 역할이며 재상의 임무다. 20세기 정치학계의 석학인 데이비드 이스턴 시카고대학 교수는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했다. 그런 면에서 고대 중국의 '재상=요리사'라는 등식은 현대 정치학의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있다.
- 상하이나 항저우 같은 화둥 지방에서는 주로 조기를 먹는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요리가 조기 탕수육인데, 고소하고 새콤한 맛이 별미지만 단순히 맛있기 때문에 먹는 것은 아니다. 탕수육 소스는 1년이 달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조기에도 특별한 뜻이 있다.
조기는 비늘이 황금처럼 누런빛이다. 그래서 중국어로 '황화위씨'라 불린다. 조기를 먹으며 한 해 동안 황금이 입속으로 들어오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와 달리 중국인은 참조기보다 짝퉁 조기인 부세를 더 좋아하는데, 참조기와 부세를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세가 참조기보다 크기도 크고 빛깔도 더 누런빛을 띠니, 이왕이면 크고 순도 높은 황금이 더 좋은 것과 같은 이치다.
- 황허강 상류에 급류가 흐르는 용문이라는 곳이 있다. 잉어들이 황허강을 거슬러 올라와 용문을 뛰어넘어 통과하려고 하지만 물살이 너무 거센 데다 높아 거슬러 오르다 떠밀리고 또 떠밀리기를 반복할 뿐 용문을 통과하는 잉어는 거의 없다. 그런데 집요한 노력 끝에 거친 물살을 헤치고 용문에 오르는 잉어가 있다. 잉어가 용문을 통과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처 잉어 꼬리를 태우고 잉어는 용으로 변신해 하늘로 승천한다는 것이다.
잉어가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용 숭배 신앙이 물고기 숭배 신앙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학자들은 물고기 토템이 용 토템으로 바뀐 것을 사회 구조의 변화와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물고기는 어머니, 곧 여성을 상징하는 반면, 용은 아버지, 곧 남성을 상징한다. 즉 물고기가 용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고대 모계 중심사회에서 부계 중심 사회로 옮겨가는 과정이 반영된 현상이다
-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 중 하나는 '만물은 드물면 귀하다'는 것이다. 귤이 왜 귀하고 드물었는지는 '강남 귤이 강북 가면 탱자 된다'는 고사에서 알 수 있다. 강남 굴과 강북 탱자는 춘추 시대에 초나라 영왕이 사신으로 온 제나라 재상 안영을 모욕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영왕이 안영을 만날 때 마침 포승에 묶인 죄인이 지나갔다. 죄목을 묻자 제나라 출신인데 도적질로 잡혔다고 했다. 영왕이 보란 듯 "제나라 사람은 모두 도둑질을 잘하나?"고
물으니 안영은 "강남 귤을 강북으로 옮기면 탱자가 되는데 그건 토질과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라며 "제나라에서는 도둑질을 몰랐는데 초나라에서 도둑이 된 것을 보면 초나라 풍토가 나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안영의 정치적 기지가 번뜩이는 고사로 후세에 널리 인용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무지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귤이 탱자로 바뀐다는 강남과 강북의 기준은 화이허강이다. 황허강과 양쯔강 중간을 흐르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비슷한 생김새 때문인지 귤과 탱자를 같은 종류의 과일로 오해했다. 한나라 때의 한자 사전인 "설문해자 에서는 탱자와 귤을 비슷한 나무라고 해석했다. 다만 같은 나무를 심어도 풍토에 따라 강남에서는 귤이 열리고 강북에서는 탱자가 열린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기술 서적인 ,주례 동관고공기요에서는 그 이유를 땅의 기운으로 설명했다. 조선 후기의 석학 다산 정약용 역시 귤이 화이허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는 까닭을 '식물의 성질은 땅 기운의 따뜻함과 차가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고 보면 18세기까지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던 듯한데, 사실은 당시 귤의 북방 재배 한계선이 화이허강이었기 때문이다. 귤이 자라는 화이허강 이남 강남 땅은 춘추 시대 오와 월, 초나라가 자리 잡았던 곳으로, 중원에서 보면 외딴 오지였다. 중원 사람들 입장에서는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나오는 귀한 과일이었으니 껍질 한 조각에도 열광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달린 것 같다는 둥 기막힌 진미의 열매라는 둥 이름을 붙인 것이다.
- 보통 식사 횟수는 왕이 아닌 이상 하루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우리 문헌을 보면 대략 18세기까지는 벼슬을 하는 관리의 경우 하루 두 번 식사를 했는데,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조선의 관리들은 관청에서 식사를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밥을 준다고 했고, 정조 때 실학자 이덕무(1741~1793)도 청장관전서에서 사람들은 하루에 조석으로 5흡의 곡식을 먹는다고 기록했다
하루 두 번 식사는 역설적으로 점심이라는 단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요즘은 한낮에 먹는 밥을 점심이라고 하지만 이는 원래 새벽 일찍 일어났을 때 먹는 간단한 음식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기록했다. 덧붙여 점심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으로 허기져 출출한 것을 조절한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성호사설 의 풀이는 당나라 때 정참이라는 관리가 아침 식사 전 공복을 채우는 음식을 보고 점심이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는데, 이렇듯 당나라에서도 식사는 하루 두 번이 보통이었다. 하루 두 끼 식사는 유럽도 마찬가지여서 '런치'도 원래는 간단하게 먹는 치즈나 빵을 의미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야 식사와 식사 사이에 가볍게 먹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니 점심을 먹은 역사는 동서양이 시기적으로 비슷했던 것 같다
- 북방 민족의 풍부한 육식 문화와 조리 기술이 한족의 요리법과 서로 융합하면서 중국 요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혼란의 시기였지만, 위진남북조 시대만 문화적으로 특히 음식 문화에 있어서 호한계 융합의 시기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송나라 때 널리 퍼진 국수
송나라 때 국수가 널리 퍼진 이유는 농업과 경제, 기술 발전 덕분이다. 송나라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북방의 요와 금나라에 밀리고 핍박을 받았지만 경제적∙문화적으로는 획기적 발전을 이뤘다. 음식문화만 해도 지금 중국인의 주식인 쌀밥과 국수, 만두를 비롯해 중국 음식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가 바로 송나라 때다
당나라 초에는 북방에서 조가 중심이었고 밀은 소량 재배에 그쳤지만, 당 중기에는 밀이 널리 보급되면서 세금을 거둘 정도가 됐다. 그러다 송나라에서는 밀이 중심 작물이 되고 조는 주요 식량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쌀 역시 송나라 때 논에 물을 대어 심는 논벼가 널리 보급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졌고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수확량이 늘었다. 그 결과 남방 쌀을 북방에 공급하면서 북방에서도 국수, 만두와 함께 쌀밥을 주식으로 먹는 전기가 마련됐다
- 만주 벌판의 숲속이 생활 터전이었던 만주족에게 돼지고기는 역사적.문화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만주족의 조상인 읍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읍루는 고조선시대 만주 지방에 살던 부족으로, 후한서에 따르면 읍루족은 돼지를 잘 기르고, 그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온몸에 두텁게 바르는데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막아준다고 했다. 살아가는 데 돼지가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었던 것이다
진서. 동이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숙신은 일명 읍루라고 하는데 소와 양은 기르지 않고 돼지를 많이 키운다. 그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입고 그 털로 옷감을 짜는데, 유목민과는 달리 소와 양은 키우지 않는다. 읍루와 숙신의 후예인 여진족과 그 후손인 만주족, 그리고 만주족의 수장인 청나라 황제가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던 이유다
- 그렇다고 만주족의 돼지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아니다.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 소시지의 나라 독일과 비교해보면, 만주인들이 왜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는지, 청나라 때 왜 중국에 돼지고기가 널리 퍼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독일은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아예 하늘을 가려 하늘이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숲이 우거졌었다. 그리고 겨울은 춥고 길며 날씨는 변덕스러운 척박한 지역이었다. 오죽하면 카이사르의 로마 군단조차 독일의 검은 숲 앞에서 진격을 멈췄을 정도였다. 이런 숲에서 살았던 고대 게르만족인 켈트족과 프랑크족의 음식이 독일 소시지의 뿌리다. 언제나 식량은 부족했고 가축도 사육 기간이 짧은 돼지 외에는 키우기가 힘든 데다 그마저 먹일 사료가 부족했기에, 겨울이 오기 전 종자로 삼을 종돈을 제외하고는 돼지를 몽땅 잡아 좋은 고기는 햄과 베이컨으로 만들고 부스러기는 소시지로 만들어 보관했다. 그런 만큼 돼지와 소시지는 게르만족에게 생명줄과 다름없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에게도 돼지는 생명줄이었다. 하늘과 조상께 제사를 올릴 때 돼지를 희생으로 바쳤고 청나라 황제는 신하들과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결속을 다졌다. 만주족 출신인 청나라 귀족의 음식 문화가 명나라 이후 돼지고기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한족 상류층의 음식 문화와 맞물리면서, 청나라의 육식 문화는 돼지고기 강세. 양고기 약세 추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 중국 음식 중에서 최고급으로 꼽는 제비집 요리는 많이 알려진 것처럼 '금사연'이라는 바다제비의 집을 재료로 만든다. 원래 제비집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소량만 채취했기 때문에 주로 베트남 등에서 조공으로 진상했던 품목이다. 역대 청나라 황제가 좋아했기에 중국과 교역을 원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건륭 60년인 1795년, 제비집 100근을 구해 보내며 중국과 거래를 추진했을 정도다. 이렇게 귀한 제비집을 오리고기를 삶고 찌는 데 소스로 사용했으니 서태후의 생일상 준비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며 그 정성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제비집 요리는 이렇게 조리하는 것이 맞다. 제비집 수프 역시 내용물을 보면 제비집을 재료로 끓이는 수프가 아니다. 제비집으로 만든 육수로 상어지느러미인 샥스핀이나 해삼, 죽순, 전복, 버섯 등 다른 재료를 조리한 음식이다
그 귀하다는 바다제비집을 왜 이런 식으로 요리하는 걸까? 최고급 재료는 그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제비집은 굳이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해야만 한다. 사실 바다제비집은 아무맛도 없다. 아무 맛이 없으니 단독으로는 요리할 수 없는 것이다
특별한 맛이 없는 제비집이 왜 최고의 식품이 됐는지, 어떻게 청황제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재료가 됐는지 궁금해진다. 그 이유를 청나라 학자이자 미식가였던 원매(1716~1797)가 쓴 수원식단 에서 찾을 수 있다. "제비집은 마치 평범한 사람과 같아서 결코 그 자체만으로는 맛이 없고 반드시 다른 재료에 의지해야만 제맛을 낸다.'
그러니 그 가치가 아무리 높아도 단독으로는 먹을 수 없다. 비유하자면 밥과 같다. 쌀로 지은 밥은 그 자체만으로는 강한 맛이 없다. 그 덕택에 반찬과 함께 먹으면 최고의 맛을 낸다. 밥이 주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맛 자체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듯 제비집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재료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 재료의 맛을 최고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원매는 제비집에 빗대어 귀로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 소문만으로 지레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니, 비단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 중국에서 샥스핀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18세기 후반 청나라 무렵이다. 미식가로 유명한 원매의 요리책 수원식단에 샥스핀 요리법이 보이고, 비슷한 시기에 나온 본초강목에 샥스핀이 연회 음식으로 기록돼 있다
정리하자면 16세기 말에는 동남아시아와 광둥 둥 남부에서 주로 먹었던 상어지느러미가 18세기 후반 이후부터 청나라 부유층의 요리로 퍼지기 시작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청나라 황제의 식탁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상어지느러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국빈 만찬 요리에 등장하면서부터다.
- 주요 정상들과의 만찬에 불도장을 준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도장의 유래와 내력에서 중국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불도장은 맛있는 냄새에 식욕을 참지 못한 스님이 담장을 뛰어넘어 음식을 먹고는 파계했다는 요리다. 또 청나라 황제가 여름 보양식으로 즐겨 먹은 요리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전부 마케팅 차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청나라 황제는 불도장을 구경도 못 했다. 요리가 생긴 역사도 짧거니와 황제가 살던 자금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특산 요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도장은 푸젠성에서 만들어진 요리다. 청나라 말 푸젠성 금융기관인 관은국 책임자가 상급 관청 감독관을 대접하려고 만든 음식이 불도장의 시초다. 속된 말로 감독관을 구워삶으려고 산해진미를 동원해 한번 맛보면 반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는 요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1980년대 중반. 불도장으로 국빈을 대접했을까.
불도장이 유명해진 것은 레이건 대통령과의 만찬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의 유명 요리사를 제쳐놓고 푸젠성 푸저우의 불도장 전문 음식점 요리사를 직접 베이징으로 불러 만찬을 준비시켰다. 정확한 배경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불도장이 황제도 먹어보지 못한 요리, 그동안 서방 세계는 물론 중국에도 알려지지 않은 최고 보양식. 스님조차 파계시켰다는 깜짝 놀랄 만한 요리라는 이야기를 내세워,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중국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경제 대국. 군사 강국이 되어 큰소리치는 중국이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개혁 개방을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외자 유치에 혈안이 돼 있던 시기였다. 일부 화교 자본을 제외한 외국 자본은 관심만 보일 뿐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을 때였다. 중국은 열과 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해야 했고 불도장을 처음 만들었다는 푸젠성 관은국 책임자처럼 정성과 감동으로 외국 투자자를 유치해야 했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1980~1990년대 중국은 외자 유치를 위해 처절할 정도로 노력했다. 그 흔적이 바로 식탁 위의 불도장이다
- 실크로드는 당나라에서 원나라까지 1000년을 휠씬 넘는 세월에 걸쳐 완성됐지만 그 시작은 한나라 때부터다. 한서, 서역전에는 장건이 서역의 길을 열었다면서 모두 서른여섯 나라와 통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무제가 흉노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서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하서회랑의 통제권을 장악한 덕분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20세기 초, 독일의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1833~1905)이 처음 사용했다. 유럽 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주요 관심 교역 품목이 비단이었기에 지은 이름일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명칭으로 인해 얼핏 비단과 도자기 같은 중국의 선진 문물이 로마까지 전해진 길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다.
처음 서역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한나라 때는 오히려 이 길을 통해 서역의 풍부한 자원과 물자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한나라가 교역을 시작했다는 서른여섯 나라는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 멀리는 이란 동부 지역에까지 걸쳐 있는 나라들이다. 사막과 초원에 흩어져 있는 낙후된 유목 국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발달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자원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게 얼핏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기. 흉노전 과 대대원전, 한서 서역전에 적힌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서역이 얼마나 노다지 밭이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른여섯 개국 중 하나였던 대원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나라다. 이곳에는 우리가 '천마지'라고 불렀던,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는 한혈마가 있다. 한나라가 나중에는 전쟁까지 벌이며 3000마리를 구했을 정도로 탐을 냈던 말이다. 신라에서도 왕릉인 천마총에 그림을 그려놓았을 정도로 부러워했다. 안식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동부에 위치했던 나라인데, 수레와 배를 이용해 수천 리를 오가며 교역을 하고 은을 화폐로 삼았다고 한다. 장건이 갔을 때의 기록이니 얼마나 문물이 발달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전이라는 나라에는 염택, 즉 소금 호수가 있다고 했는데 당시 소금은 금과 은을 주고 거래할 때였다. 카슈미르 지방에 있었던 나도와 계빈에는 금은과 구리, 주석이 나오는데, 한서에는 이 모두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한나라가 얼마나 군침을 흘렸을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 사기, 한서에는 대완, 안식, 조지, 나도, 계빈을 비롯해 서역 여러나라에서 밭에 밀과 쌀보리를 재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 핵심만 기록하는 역사책에 서역에서 밀과 쌀보리를 널리 재배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라가 서역과 교역을 시작할 당시. 중원에서 귀족과 부자들이 먹었던 음식은 기장이었다. 평민들은 좁쌀이 주식이었고 서민들은 수수나 귀리 아니면 토란 등을 먹었다. 밀이 중국에 전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밀가루가 아닌 통밀을 쪄서 먹었을 무럽이고 그나마 왕을 비롯해 극소수 계충만 먹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쌀과 밀가루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시기는 1000년도 휠씬 지난 뒤인 송나라 때 일이고, 최초의 밀가루 음식인 탕병이 처음 등장한 것도 기원전 2세기 무럽이다. 그러니 사마천과 반고가 서역에서는 밀을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사기. 한서에 따로 기록할 법하다
- 흔히 서양은 식사가 육식 위주이기 때문에 후추가 필요해 금값에 버금가는 비싼 돈을 주고 동양에서 후추를 가져간 반면, 동양은 후추가 나는 지역인 데다 채식이 중심이 되어 서양처럼 후추 수요가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추측이다.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서양보다 더 후추 구하기가 어려웠다. 구하기 힘들었던 만큼 동양에서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후추가 조미료보다는 약으로 쓰였다. 옛날 의사에게 후추는 건강을 지켜주는 신비한 약재였고 도인에게는 신선이 되기 위한 불로장상의 선약이었다.
도소주는 새해가 시작될 때 마시면 1년 내내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술로, 중국에서는 처음 전통 향신료인 산초를 넣어 만들었지만 서역에서 후추가 전해진 다음부터는 후추를 넣어 마셨다. 옛날에는 후추와 산초 모두 귀했던 데다 초기 증류주 역시 구하기 힘든 귀한 술이었던 만큼, 술에 후추를 탄 초주, 즉 도소주는 문자 그대로 약주였다.
- 홍탕인 충칭훠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청나라 말기 도광제 때 발달했다는 설도 있고,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 시절인 1920년대에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양쯔강과 자링강이 만나는 쓰촨성 충칭의 부듯가에서 일하던 노동자, 특히 배를 밧줄에 묶어 흐르는 양쯔강 물결을 거슬러서 소처럼 배를 끌고 올라가는 선부들이 먹었던 음식이 홍탕의 기원이라는 설이다. 한마디로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가난했던 막일꾼들의 음식이었단 얘기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 이들이었으니 제대로 된 고기를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때문에 내다 버리다시피 하는 소 창자와 천엽, 그리고 오리 내장 등 부스러기 고기를 긁어모아 잠깐 쉬는틈에 펄펄 끓는 육수에 데쳐 먹고는 서둘러 일하러 갔던 것인데, 이런 전통이 남아 있기에 지금도 충칭휘귀의 재료로 소의 천엽과 내장 등이 인기가 높다고 한다
-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 중국에서 충칭훠궈만큼은 소고기 위주로 먹는데, 여기에도 역시 이유가 있다. 충칭훠궈를 처음 만들어 먹었던 사람이 강물을 거슬러 몸으로 배를 끌고 가는 막일꾼이었다면, 이들에게 부스러기 고기를 판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가난한 소수민족이었다. 그 정체는 바로 쓰촨성과 이웃한 간쑤성에서 소를 키우며 살았던 이슬람 문화권의 회족미션이다. 충칭에서 소를 도축해 팔고 난 후 버리기 직전의 마지막 남은 부위인 창자와 천엽까지 막일꾼들에게 팔아넘겼던 것이다. 이렇듯 충칭휘귀인 홍탕에서는
밑바닥 막일꾼과 가난한 소수민족이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흔적이 엿보인다.
충칭훠궈의 육수가 새빨갛고 얼얼한 종탕으로 발전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충칭휘궈 역시 쓰찬 음식이라 기본적으로는 매운맛이 특징이다. 쓰촨성은 끈적거리고 후텁지근한 날씨탓에 땀이 뚝뚝 떨어질 만큼 미워야 오히려 입맛을 찾을 수가 있다.
"쓰촨 사람은 음식이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여기에 더해 강한 향신료를 쓰지 않으면 먹지 못할 정도로 음식 재료가 형편없었던 것도 충칭훠궈가 홍탕으로 발전한 이유다.
- 기원전 2세기에 한 무제의 명으로 서역에 간 장건이 그곳 들판에서 왕이나 부자들만 먹는 곡식인 밀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모습을 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놀라움은 사기와 한서에 호들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중국에 서역의 밀이 빠른 속도로 전해졌고, 동시에 맷돌을 비롯한 연마 도구와 제분 기술이 전해지면서 밀가루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수제비 비슷한 밀가루 덩어리인 병이라는 음식이 등장했다. 2세기 무렵에는 밀가루를 새끼줄처럼 길게 만든, 국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삭병이 보이고 3세기 삼국 시대 말기에 드디어 만두가 등장했다.
- 송강 농어와 관련된 고사는 조선 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책과
문학에서도 적지 않게 인용되고 있는 이야기다.
순갱노회의 고사는 장한의 멋과 낭만, 그리고 호연지기를 말할 때나 농어회
의맛을 품평할 때 주로 거론되지만, 내막을 한꺼풀 벗겨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송강 농어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상당수의 중국 고사가 실제와는 다르게 알려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왜 그리고 언제부터 만한전석이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 잔치로 둔갑하게 됐을까? 만한전석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진 것은 1970년대 이후로 추정된다. 만한전석이 엄청난 가짓수의 호화로운 잔칫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1970년대 홍콩 텔레비전에서 소개되면서부터인 듯하다. 이후 1990년대 홍콩 영화 금옥만당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서 만한전석이 만주족 요리와 한족의 요리가 망라된 청나라 황실 잔치로 포장되면서,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한 잔치라는 전설이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전설이 만들어진 배경에 중국인. 특히 한족 특유의 자기변명과 합리화가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족이 만주족에 정복당한 만주족의 식민지가 아니라 만주족의 요청을 받아 한족이 협조해 만든 나라라는 합리화, 만주족에 지배당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족을 흡수해 중화민족이 함께 건설한 것이 청나라라는 변명이 만한전석의 전설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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