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지식은 팔다리, 엉덩이, 허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다. 따라서 인간 머리에서 나온 모든 지식은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논리적으로 이루어졌다, 논리란 사물이나 세계의 이치를 말한다, 라는 표현은 어떨까? 이것은 타당한 이해가 아니다. 세상은 논리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세상을 인간이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 우리가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세상과 사물의 원리가 마치논리 그 자체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 머리와 세상 혹은 사물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 논리는 세상의 원리가 아닐 뿐더러,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고학 학문과도 관련이 없다. 요컨대 논리는 자연세계와 사물과 무곤.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는 비슷할 수도 있겠고, 그런 자연에 대한 지식을 인간 머리로 얻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논리는 그저 인간 공통의 머리구조다. 생각의 형식, 인간 사유의 프레임, 사고법칙 등 다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머리 안쪽 세계에 관한 것으로 머리 바깥의 사물과 세계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 논리공부의 장점
1. 타인의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유리
2. 기존 지식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리
3. 자기 생각을 효율적으로 설명하는 데 유리
4. 타인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데 유리
- 논리의 관점
1. 국어력 관점 : 단어가 등장했고, 문장과 단락이 이어진다. 단락이 모여 주제가 됐고, 주제를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함으로써 논술이 되었으며, 분량이 늘어남에 따라, 장과 책이 되었다.
2. 논리학 관점 : 개념이 처음 등장했고, 이어서 판단과 추론이 나타남. 추론이 모여 지식을 만들고, 그 지식으로 소통한다.
3. 기하학 관점 : 최초의 점이 탄생. 그것은 단어였고 개념들이었다. 점들이 연결되어 선분이 되자 1차원의 생각이 탄생. 이때의 생각은 지금, 여기의 생각이었다. 여러 개의 선분이 연결되어, 2차원의 생각이 지금,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도약하면서 나타난다.
4. 논리 현실 관점 : 머릿속에서 점이 최초로 나타난다. 그것은 단어이자 개념이었다. 그 다음 점들이 연결된다. 복수의 논리끝이 연결될 수 있다. 더 많은 끈이 연결될 수도 있고, 끊어질 수도 있다.
- 내 머릿속 개념의 크기가 타인의 머릿속 크기 안에 있다면, 타인은 내가 사용한 개념을 이해해주고, 나는 그 타인에게서 얻는 배움이 있으며, 소통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개념의 크기를 맞춰가는 과정이 어쩌면 인간 소통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또한 개념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텔레파시가 아닌 논리를 사용하는 것. 단어마다 의미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 그리고 단어의 크기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 그걸 아는 게 논리의 출발점. 논리적인 사람은 생각에 맞게, 상황에 맞게, 적절한 의미크기를 갖는 개념을, 즉 그런 단어를 머릿속에서 선택함. 그런 선택능력이 바로 어휘력이다.
- 논리적인 사람과 표상적인 사람
논리학에서 말하는 생각이란 이처럼 개념과 개념을 연결해서 만들어진 판단을 의미. 즉 판단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사람은 판단한 것만을 생각으로 간주. 그런데 머릿속에서 항상 판단이 생겨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아직 판단의 옷을 입지 않은 온갖 이미지, 인상, 개념, 기억이 있고, 그것을 일컬어 철학자들은 표상이라 부름. 하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런 것조차 생각이라 여김. 아직 판단하지 않은 것을 생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표상적인 사람이라고 칭해 본다면, 논리적인 사람과 표상적니 사람의 차이를 흥미롭게 비교해볼 수 있다. 생각의 크기가 아주 다르다.
표상적인 사람도, 인간이므로 당연히 판단을 내리고 논리적인 생각을 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개념을 연결해서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보다는 개념들을 머릿속에 놔둔 상태조자 생각으로 여기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람보다 훨씬 그 생각의 범위가 크되, 그 윤곽은 흐릿하다. 반면 논리적인 사람은 머릿속에 개념들이 있는 것만으로는 생각이라고 보지 않기에, 표상적인 사람에 비해 생각의 범위가 작다. 이런 차이 때문에, 논리적인 사람과 표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화가 잘 안된다. 토론은 더욱 안된다. 전자는 연결된 개념을 위조로 이미 머릿속에 자리잡은 생각을 꺼내면서 신중하게 대화하고, 후자는 생각을 실시간으로 만들어가면서 신속하게 대화하므로, 양쪽 모두 답답할 것임. 만약 당신이 논리적인 사람이라면, 표상적인 사람을 만나서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 머릿속에서 자기처럼 개념들이 연결되도록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 만약 당신이 표상적인 사람이라면, 논리적인 사람과 대화하면서 순발력 있게 생각을 만들어내는 데 만족하지 말고, 평소 더 좋은 판단을 생각해 놓는 것이 바람직.
- 1. 지금 여기에서의 판단을 근거로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판단이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을 생각의 도약이라 부르자.
2. 생각의 도약은 아무렇게나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이미 보관되어 있는 기존판단, 경험, 지식이 있다. 그것들이 논리에서 대전제로 작동.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면, 그 판단이 대전제를 소환하고, 그러면 대전제가 생각의 도약을 결정. 그것을 일컬어 추론이라 부름. 추론이 생각의 도약이다.
3. 지금 여기에서의 판단을 담당하는 머리의 요소를 지성이라 부르고, 지금 여기에서 생각을 도약시키는 머리의 요소를 이성이라 부름. 즉 이성은 추론능력(추리력)을 의미.
- 누군가의 결론에 맞서면서 반박하고 대항하고 싶을 때
1. 주장은 사람마다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 있다. 같을 때는 대체로 추론에서 사용한 대전제가 같기 때문. 대전제가 다르면, 결론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2. 이런 주장은 단순히 근거로 작용하는 사실판단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인간 머릿속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연역 프레임이 근거, 즉 사실판단을 매개로 대전제를 호출했기 때문. 그러므로 사실 판단에 사용된 다양한 근거들을 탄핵했다는 것만으로는 상대방의 주장을 꺾어냈다고 만족하면 안됨
3. 주장은 주장으로 교정할 수 없다. 주장은 그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대전제의 우세력과 사실 판단에 의해 생겨난 결론이고,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다른 결론으로 대체되거나 교정될 만한 게 아니다. 즉, 대전제가 흔들리지 않는 한, 주장도 흔들리지 않음. 만약 당신이 타인을 설득하려면, 그 사람의 주장을 직접 바구려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대전제가 다른 것으로 교체되도록(즉, 내게 유리한 대전제가 선택되도록) 섬세하게 전략을 짜야할 것이다. 타인의 머릿속에는 아주 많은 대전제가 들어 있다.
4. 결론판단은 단순한 사실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원리일 수도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개념과 판단이 연결됨. 종종 끊기기도 하지만 그 연결이 수정되거나 새롭게 이어지기도 함. 연역추론에서 나타난 결론이 머릿속에서 연결없이 고립될 리 없다. 이리하여 인간은 연역프레임 속에서 생각을 통해 많은 원리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연역추론 자체는 간단한 논리구조이지만, 덕분에 인간은 지식을 확장할 수 있음.
- 개별요소의 대전제는 그 사람이 선택한다. 다음 세가지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첫째, 세계관은 강력한 대전제다. 철학에 다뤄지는 세계관도 대전제이며, 창작에서 다뤄지는 세계관도 대전제다. 문학에서 작가는 세계관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작품 전체에 우세력을 행사하는 대전제를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관이 없다면, 즉 작품 전체에 미치는 대전제가 없다면, 문학은 소구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문학이 아닌 경우, 개인의 경험지식이 대전제를 만듬. 경험이 다르면 대전제도 다를 가능성이 크다.
셋째, 흥미롭게도 그 대전제는 내 생각이 아니라 타인이 주입한 생각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대전제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아니다. 타인이 주입한 대전제의 경우, 의식의 주체로서 내가 등장함을 계기로 대전제가 바뀔 수 있다.
- 단어를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말은 경험을 개념화한다는 뜻. 경험활동은 단어활동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새롭게 경험할때, 그리고 무언가를 학습하거나 공부하거나 체험할 때,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첫번째 유의미한 이벤트는 단어에 관한 것이었다. 새로운 단어를 머릿속 사전에 등록하거나, 더 정확한 의미로 머릿속에 이미 보관된 그 단어의 기존 의미를 업데이트하는 거이다. 이것이 바로 개념화다. 그런데 개념화란 단순히 그 단어에 해당하는 문자를 암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했다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서, 선명하게 기억했음을 뜻한다. 그러려면 자기 머릿소게 단어 사전에 그 단어를 아주 쉽게 풀이해서 보관해야 한다. 쉽게 풀어서 보관한다는 말은 그 단어를 머릿속에 붙들어 놓는다는 뜻.
- 유추는 접근 불가능한 경험이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경험에 대한 생각의 도약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경험보다 더 큰 한계가 있고, 추론의 정확도도 떨어짐. 따라서 오류가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서 유추를 남용하거나 유추를 통해 다다른 결론을 지나치게 확신해서는 안됨.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추론의 결과가 경험으로 검증할 수 없다면, 그 추론지식이 어떤 이름을 갖든 결국 개인의 믿음이나 신조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의 일을 확신하고, 가보지도 않은 장소를 누구보다 확실히 아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유추를 애호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상력을 체험한다. 오류는 인간의 인간적인 특징이다. 문학과 종교에서는 유추가 마음껏 허용된다. 전자는 오류를 검증하지 않고, 후자는 오류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학문과 사회적 소통의 영역에서는 유추를 하더라도 겸손함이 필요하다.
한편 경험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이라면, 유추를 하지 말고, 직접 경험해야 한다.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유추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경험할 수 없으니까, 경험하기 힘드니까 유추논리를 사용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 우리가 안다는 것은 머리 안의 현상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을 아는 것이며, 머리 바깥의 존재를 제대로 알려면 내 머리 안의 현상을 더 자세히 탐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상학이 등장했다. 현상학은 머릿속 현상으로 나타나는 존재를 탐구한다. "당신 머릿속에 들어온 존재를 판단하십시오. 그것이 지식이요, 학문입니다. 그러려면 대상에 대한 더 섬세한 관찰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존재는 머리 바깥의 존재와, 혹은 타인의 머릿속 존재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실존주의는 인식론 이후 불일치 문제에서 현상학과 달리, 머리 바깥의 리얼리티 세계에 주된 관심을 둔다. 그것은 단순한 머릿속 대사잉 아니라, 머리 바깥에 살아 있는 존재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은 그 살아있는 현실 속 존재를 존재자(being)라 불렀다. 말하자면 실존주의 철학은 머리 바깥의 현실세계에 있는 살아있는, 존재자의 존재(being of beings)를 탐구한다. 머리 바깥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존재와 존재자는 동의어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머리 안쪽에서 생각하는 본질보다 더 중요하고, 더 앞선다고 강조한다.
- 적대적인 양자대결에서는 타인의 근거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공략하더라도 그다지 성과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대적인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모든 시도는 허사이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일이다. 어린 아이처럼 논쟁에서 이겼다고 정신승리하거나 상대방을 함부로 모욕하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없다. 상대방은 더 강한 논리로 무장하여 다시 나타날 것이다. 오히려 고양된 적개심으로 내 앞길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정신승리와 모욕은 이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큰 손해라 하겠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명한 방법은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대전제들의 우선순위 다툼이 일어나도록, 즉 앞에서 말했던 변증이 상대방 머릿속에서 생겨나도록 작전을 짜는 것뿐이다.
- 적대적 양자대결에서 반론의 힘은 연약함. 특히 근거들에 대한 반론이 그러함. 적대적 양자대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대전제들 사이의 우선운위 논쟁이 발생하도록 할 것인가, 이것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심하게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감정이 폭발하는 상황에서는 그 감정을 지휘하는 대전제가 항상 안전하게 논리의 우선권을 쥐기 때문에 다른 생각의 토대가 참견하지 못함. 그때 활약하는 대전제는 우리에게 매우 적대적인 반면, 그 대전제로 말미암하 참견할 기회를 상실한 대전제는 우리에게 유리할 수도 있는 가능성, 생각해 볼 만하다. 따라서 감정적인 반응은 좋은 방법은 아니다.
- 대결중인 상대방의 머릿속 구도가 우리와 다를 리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머릿속 대전제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내게 유리한 대전제가 논쟁 중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찬스에서는 상대방을 몰아붙이거나 놀리는 언행을 중단하는 것이 좋다. 반론의 힘이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저절로 나타났으니, 그 힘이 우세해지도록 우호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현명하다. 상대방에게서 대전제의 우선순위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레토리카는 우리들에게 타인을 설득하는 세가지 스킬을 강조.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다. 각각 좋은 태도, 좋은 심리, 좋은 논리다. 이 세가지 중에서 가장 실용적인 것은 논리나 심리가 아니라 태도다.
에토스, 즉 좋은 태도는 내용적인 게 아니라 형식적 스킬이다. 좋은 심리는 내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관한 것이고, 좋은 논리는 상대방의 반론까지 고려한 <충분한 근거인가?> 테스트를 통과한 근거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관전자의 신뢰형성을 방해하려는 이런 공격은 생각의 집합을 향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 관전자가 토론 상대방의 생각의 집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논점을 흐린다
* 상대방 영역에 사실과 거짓을 섞은 다음에, 그 거짓을 과장함으로써 진실에 대한 관전자의 관심을 방해한다
* 관전자가 싫어할 만한 생각의 운동장을 만들어서 그 안으로 상대방을 몰아넣는다.
이런 수법을 쓰는 토론 당사자에게는 상대방의 진심, 그들의 대전제, 주장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공론장을 이성의 영역으로 생각하기보다 승패의 감정세계로 몰아넣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전자가 상대방의 생각을 왜곡해서 이해해주면 좋은 것이다.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므로 죄책감도 적다. 심리학 용어로 프레임 덧씌우기라 불리는 이런 나쁜 공격은 확실히 효과적이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상대방의 생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물론 상대방은 분노한다. 그리고 그런 분조는 공격자의 의도에 부합한다.
이런 나쁜 공격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 머릿속 생각의 집합이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공격을 방치하면 건전한 토론문화가 실종되고 공론장이 붕괴될 것임. 지금 우리가 그런 사회를 겪고 있는지 모른다. 토론할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더 불신하게 되고, 이들 토론을 지켜보던 관전자 중에서 더 재능있고 도덕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악의에 찬 사회를 외면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나쁜 공격의 폐해는 실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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