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행복은 목적없고 효용없는 것 덕분에, 고의로 장황한 것 덕분에, 비생산적인 것, 에둘러 가는 것, 궤도를 벗어나는 것, 남아도는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는 아름다운 형식들과 몸짓들 덕분에 있다. 느긋한 산책은 곧장 걸어나기나 달려가기, 행진하기와 비교할때 호화롭다. 무위의 예식성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활동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 무언가를 위하지 않음, 목적과 효용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위의 핵심 본질이다. 이것은 행복의 기본공식이다.
무위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산책자의 특징. 산책자의 특유한 망설임, 움직임 없이 관조하는 사람의 고유한 상태가 기다림이듯이, 의심은 산책자의 고유한 상태인 듯하다. 실러가 쓴 한 비가에는 '나비의 의심하는 날개'라는 표현이 나옴. 기다림도 의심도 무위의 모습이다. 의심의 순간이 없으면 인간의 행보는 행진에 가까워짐. 나비의 날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걸음은 망설임에서 우아함을 얻는다. 결연함이나 서두름은 인간의 걸음에서 우아함을 깡그리 앗아간다. 산택자는 행위하지 않는 능력을 사용한ㄷ. 그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 의도없이 자신을 공간에 내어준다. 그에게 눈짓하는 공간에 내주고, "다음 길모퉁이가, 안개에 싸인 먼 광장이, 앞에서 성큼성큼 걷는 여자의 등이 발휘하는 자력에" 내준다.
- 무위의 변증법은 무의를 문턱으로, 불확정성 구역으로 변신시킨다. 그 구역 덕분에 우리는 이제껏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문턱이 없으면, 같음이 반복된다. 니체도 이렇게 쓴다. "발명하는 인간은 행위하는 인간과 전혀 다르게 산다. 발명하는 인간은 목적없고 규칙없는 행위를 하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도돌, 새로운 길들. 그는 유용한 행위를 하는 인간처럼 익숙한 길을 가기보다 더 많이 더듬는다." 창조적으로 행위하는 자는 행위하되 어떤 성과를 위해 행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용하게 행위하는 자와 구별된다. 이처럼 행위에 무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무언가, 있었던 적 없는 무언가의 발생이 가능해진다.
- 자연농법 개척자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장자가 가르친 무위를 일관되게 실천. 그는 자신의 농사방법을 무위농법이라 부르며, 근대 농업기술이 부드러운 자연의 법칙을 파괴한다고 확신. 그 기술은 해법을 제공하긴 하지만, 그 해법은 그 시술 자신이 야기한 문제들의 해법일 따름이다. 무위농법은 장자의 요리사처럼 이미 자연에 깃들어 있는 가능성들 혹은 힘들을 이용. 장자라면, 지혜로운 농부는 밭을 갈지 않는다, 라고 말해을 터이다. 실제로 후쿠오카의 무위농법은 밭 갈기 없이 이루어진다. "무위농법의 첫째 원리를 토지를 가공하지 않는 것이다. 즉, 흙을 갈아엎지 않는 것이다. 수백년 전부터 농부들은 밭 갈기가 농작물 재배에 불가결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자연농법을 위해서는 경작하지 않기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토지가 토지 자신을 자연적 방식으로 일군다. 땅속에서 뻗어나가는 식물들의 뿌리와 미생물, 작은 동물, 지렁이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 사람들은 자연에 개입하는데, 그러면서 아무리 애쓰더라도, 그 개입이 유발하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 반면에 토지를 그냥 놔두면, 토지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또 식물 및 동물생명의 순환과 조화를 이루며 비옥함을 유지한다."
장자의 요리사와 마찬가지로 능숙한 농부는 자신의 일을 벌어지는 대로 놔두기로 간주한다. 그의 기조는 무위다. 다음과 같은 후쿠오카의 말은 장자의 격언처럼 들린다. "나무를 정성들여 심고 처음부터 나무의 자연적 형태대로 놔두면, 가지치기나 온갖 농약은 필요하지 않다." 하이데거도 장자의 무위철학에 접근한다. 하이데거의 놔두기는 무위의 면모를 포함. 사람들은 땅을 땅 자신의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가능성 법칙으로부터 떼어내어 총체적인 처분가능하게 만들기에 예속함으로써 땅을 파괴한다. "기술에서 지치게만들고 완전히 사용되게 만들고인위적인 변화를 겪게 만든다. 의지가 땅을 강제하여 자연적으로 형성된 땅의 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나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불가능한 무언가가 되도록 만든다." 땅을 구원하는 길은 땅을 가능성 안에, 자연적으로 성장한 땅의 가능성의 범위 안에 놔두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무위윤리의 핵심은 불가능한 것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가능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은 겪을 능력이 없으며, 다른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그 능력의 부재 때문에 생각할 수 없다. 당함과 감수함은 기계로 성취할 수 없는 상태들이다. 무엇보다 기계는 관조하는 무위를 모른다. 기계가 아는 상태는 둑지, 켜짐과 꺼짐뿐이다. 관조하는 상태는 그저 기능을 중지함을 통하여 발생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기계는 행위하지도 않고 무위하지도 않는다. 그림자는 빛을 조형한다. 즉, 빛에 윤곽을 부여한다. 그림자와 빛은 서로의 조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위와 무위를 생각하기의 두 가지 상태 혹은 모드로, 더 나아가 정신의 두가지 모드로 간주할 수 있다. 생각하기는 빛과 그림자로 짜인 직물이다. 반면에 기계지능은 빛도 모르고 그림자도 모른다. 기계지능은 투명하다.
- 상징이란 과연 무언지를 우리는 풀라톤 대화편 향연에서 알게된다. 그 작품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공처럼 둥근 놈이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너무 강해지고 오만해지자, 신들이 인간을 두 조각으로 쪼개버렸다. 그때 이후 그 쪼개딘 절반 각각은 나머지 절반과의 통일을 추구한다. 이 쪼개진 절반을 고대 그리스어로 쉼볼론이라 한다. 인간은 쪼개진 절반으로서 치유를, 치유하는 전체를 갈망한다. 이 갈망이 사랑이다. 재건해야 할 전체가 상처를 치유하고, 근원적 분할에서 유래한 존재결핍을 해소한다.
- 상징은, 상징적인 것의 경험은, 이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이, 자신과 들어맞는 놈을 보충하여 치유와 전체에 이르겠다고 약속하는 존재의 조각이라고, 혹은 전체에 이르기 위해 보충할, 늘 찾으려 애써온 우리 삶의 또 다른 조각이라고 느낀다. 상징적인 것은 존재의 충만을, 치유를 약속한다. 상징적 질서가 없으면, 우리는 조각이자 파편으로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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