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랑한다'는 기분을 정식으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았던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으면 내 신체는 그에 호응하듯 뜨거워지고 목소리는 상냥해지며 기분이 온화해진다. 그와 동시에 여자 친구의 목소리도 상냥해지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며 피부가 매끈해진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그 효과를 '사랑했던' 것이다. '사랑한다'란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감정을 형용하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입에 담기 전에는 거기에 없었던 것을 창조하는 말이었다. 일의 순서가 뒤바뀐 듯 하지만 사실 이래도 된다. 이 세상은 의외로 그런 곳이다. 그러므로 연인들이 질리지도 않고 '사랑해' 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은 이치에 맞는 행동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알았으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노'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인간이 화를 낼 때는 그 내면에 실체로서의 견고한 '분노의 감정'이 존재한다고 믿음. 먼저 분노의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말이나 몸짓을 통해 표현되는 거라고. 정말 그럴까. 당신은 분노의 말이나 분노의 몸짓을 우선 드러냈더니 그 뒤에 자신의 내부에서 분노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라는 순서의 전도를 경험한 적이 없는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격한 분노의 말에 이끌려 분노의 감정에 불이 붙어서 아무리 해도 멈출 수 없었던 경험은 없는가?
- 분명 거액의 교육투자를 하면 수험기술은 익힐 수 있고, 단기적으로 학력이 향상되는 것처럼 보이리라. 그러나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건대 인간의 지적자원에는 선천적 개인차가 있어서, 아무리 막대한 교육투자를 하더라도 주위의 지원이나 강제로 개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잠재능력을 폭발적으로 꽃피우는 경우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뿐이다. 부모의 경제격차가 아이의 학력격차로 이어지는 현실은 확실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학력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딱히 실질적인 손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때 학력은 가구나 차나 와인과 마찬가지로 그저 값비싼 상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학력이 고급차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지성의 지표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지리라.
- 상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입장에 따라 여러 개의 인격을 구분해서 쓰며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로써 공공성 높은 목적에 봉사하는 것은 고작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어른에게는 지극히 자련스런 행동이었다. 아니, 자연스럽다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게, 어떤 정치적 목적을 밝히는 일이 생명과 신체, 재산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국면에서 나다움을 계속 표현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포박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그런 말을 하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태평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서 태평하다는 말을 나쁜 뜻으로 쓴것이 아니다. 태평한 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학정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학정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은 친구를 팔고 이웃을 제물로 삼아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우리가 잔혹하고 강권적인 사회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정치체제를 결코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상상력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눈앞에 불러내기 위해서만 쓰는 게 아니다.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결코 현실로 불러내지 않기 위해서도 쓴다
-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후회로서 뿌리를 내리며, 그 후회 자체가 인격의 일부를 이룸. 반면 해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되도록 빨리 잊는 편이 좋은 종류의 후회이며, 대체로 우리는 사건과 후회를 한데 합쳐서 즉시 잊어버린다. 어떤 후회가 보다 독성이 강한지는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나는 이 귀중한 조언을 받아들여서, 일단 나중에 돌이켜 보았을 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법한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을 삶의 기본방침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나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어리석은 행동을 되풀이했지만 그 점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 논리적으로 사고할수 있는 사람이란 지금 쥐고 있는 페이퍼 나이프는 못 쓴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곧바로 사고방식을 바꾸어서 손에 잡히는 모든 도구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철수세미로 비늘을 벗기고 폭이 좁은 식칼로 몸통을 엇베고 집게로 잔뼈를 발라내고 칼날이 뼈에 닿아서 들어가지 않으면 쇠망치로 식칼을 후려갈기는 대담한 작업을 시도하는 것조차 꺼리지 않는 종횡무진, 융통무애하게 도구를 쓸 수 있는 이를 논리적 사람이라고 한다. 종종 논리적인 사람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르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부엌칼 하나로 모든 요리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다. 논리적인 사람은 쓸 수 있다면 드라이버든 호치키스든 가리지 않고 요리에 쓰는 사람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브리콜라주라 불렀다. 그때그때의 기술적 난문에 가장 어울리는 접근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온갖 도구에 대해, 그것에 잠재된 원래의 사용법과는 다른 사용법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자신의 사고방식은 자기 돈으로 산 도구다. 반면 그때그때의 기술적 과제에 어울리는 도구는 타인의 사고방식이다.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 논리성이란 달리 말하자면 어떤 우리에도 머무르지 않는 사고의 자유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이 대학에서 익혀야 할 것은 대체로 이뿐이다.
- 재능에는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시간을 할애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전혀 괴롭지 않고, 또 그것에 종사하는 시간이 속속들이 발견과 환희로 차오르는 활동, 자신에게는 그 활동이 무엇인지 알고 주저없이 그것을 선택하는 이를 우리는 재능있는 사람이라 부른다.
- 경험적으로 볼 때 직업선택이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하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소거해 나간 끝에 남은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곁에서 보기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이 명확한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일, 못하는 일이 명확한 사람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 싫고, 못 하는 경우, 스스로에게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권염의 상태, 불능의 구조를 제대로 언어화할 필요가 있다. 하기 싫은 일을 언어화하기란 어렵다. 못하는 일을 언어화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게 지루하잖아"라든지, "그런 건 싫단 말이야, 싫어"라는 식으로 말하면 평생 바보인 채 끝나고 만다.
-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누구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충분한 데이터가 없는데도 선택을 해야할 때 우리의 오감은 비일상적으로 예민해짐. 몇 안되는 정보의 단편으로부터 우리가 그 일부에만 접속할 수 있는 대상의 질과 깊이를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훈련을 받는다는 동작은 그러한 오감의 연마를 전제로 한다. 적당히 훈련을 받아 본 뒤, "나는 이거랑은 전혀 안 맞네"라며 실실댈 수 있는 사람은 치명적으로 감각이 둔하다. 그러므로 그 뒤 어떤 학교를 다니든 어떤 훈련을 받은 프로가 되는 것은 결코 불가능. 나도 대부분의 프리터에게는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못하는지를 제대로 언어화하는 것을 게을리 한 사람, 한정적 데이터로 훌륭한 시스템과 그렇지 않은 시스템을 판별하지 못한 사람 자신의 책임이다.
- 대부분의 프리터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에게 유리하게 산다는 것은 어드밴티지를 가진다와 같이 애매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비싸고 맛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거나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다거나 타인에게 혹사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같이 노골적인 일이다. 어째서 그런 부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인가. 스무 살 넘어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지도 않은 채 10년, 20년이 지나면 낮은 등급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어지며, 게다가 이는 타인에게 혹사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리터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어른은 아무도 없다. (무라카미 류, 모든 남자는 소모품이다 Vol6, 2001)
- 자신의 신체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휴식인지, 활동인지, 긴장인지, 이완인지...), 신체가 원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자세는 무엇인지, 음악은 무엇인지, 옷은 무엇인지, 장식은 무엇인지. ...그것을 느끼는 일이 자신에 대한 경의의 첫걸음이다. 신체 감수성을 예민하게 발휘하는 사람은 타인의 신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감수성을 발휘시킬 수 있다. 어떤 동작을 하고 싶은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싶은지, 어떤 종류의 목소리를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지,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지, 어떻게 하면 싫은지,... 함께 있는 상대의 그런 부분을 자연스레 깨닫고 그가 바라는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기분을 아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얻음. 사회적 경의는 그런 사소한 축적위에 구축된다. 자신의 신체가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신체가 보내는 신호도 감지하지 못한다. 자신의 신체를 도구로 이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신체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 나는 옳다, 너는 틀렸다는 토의와 우리는 모두 틀렸지만 각각 틀린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니 가장 적게 틀린 것 같은 가설에 응하자는 토의는 사용하는 뇌의 부위가 다름. 나는 옳다, 너는 그르다는 식으로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의견의 무모순성과 상대 의견의 모순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 한편 미래예측이 빗나갈 개연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토의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주장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고찰함. 이는 '나는 어떤 식으로 현명한다'가 아니라 '나는 어떤 식으로 어리석은가'에 초점을 맞춘 사고방식이다.
- 내 지성의 어느 부분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지를 점검하는 것은 내 지성이 얼마나 멋지게 기능하는지를 과시하는 것보다 훨씬 우선순위가 높은 일이다. 정말로 적절한 지적 퍼포먼스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자신의 어리석음 점검부터 일을 시작할 것이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 가설에 들어맞지 않는 사례는 반드시 공책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다. 왜냐하면 자기 의견의 옳음을 해칠 수 있는 데이터는, 그의 위대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의견의 옳음을 해치는 데이터는 구조적으로 외면하고 조직적으로 잊어버린다. 원래 그런 법이므로 그 점을 탓해봤자 소용없다. 따라서 데이터 관리에 대해 중립적이기를 바란다면, 결코 자기 의견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을 우선하면 안된다. 우히려 내가 간과한 것을 찾아내어 그로서 자기 의견을 수정하고 개량하여 보다 범용성 높은 의견으로 갱신해 나가야 한다.
- 사랑이란 상대의 노력으로 내가 쾌적해지는 인간관계까 아니라, 나의 노력으로 상대가 쾌적해지는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어떤 인간관계도 사랑이아는 말에 들어맞지 않는다.
- 방대한 양의 무의미한 정보가 배출되는 이유는, 쓸모없는 정보조차 그것을 모르는 자와 아는 자 사이에서 사회적 지위의 차별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뮤지션의 이름을 아는 것, 아무도 본 적 없는 영화에 대해 견해를 말할 수 있는 것, 그런 하찮은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정보감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됨. 정보감도는 정보사회에서 사회적 차별화의 기준이다. 정보는 그 자체로는 어떤 실체도 없으며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않음. 그것은 상징적 교환에서의 탕진과 마찬가지로 물건을 이동시키고 교환활동을 가속화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수위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인류학적 시스템이다.
- 어째서 정보가 사회적 차별화의 지표가 된 것인가. 인간 사회 차별화 지표는 역사적으로 정치권력, 부, 정보의 순서로 이동하고 있다. 옛날에는 권력의 유무가 사람들을 차별화했다. 근대에 이르러 부의 유무가 이를 대신하였고, 현대에는 소유하는 정보의 많고 적음이 차이의 기준이 되었다. 예전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부와 정보가 집중되었고, 이어 돈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과 정보가 집중되었다. 지금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권력과 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 권력의 본질은 권력의 탕진 속에 있다. 그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그의 죽으을 바랄 때까지 부조리한 존재로 계속 지낼 수 있는 권능. 누구의 제약도 없이 자멸을 향한 외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 속에 있다. 부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화폐의 본질은 탕진되는 것이다. 얼마나 대량의 화폐를 소유하고 있든, 그것을 묵혀두는 사람은 경제적 기능에서 극빈자와 다름없다. 화폐는 무언가와 교환하지 않는 한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이다. 즉 돈이란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물건이다. 없어지지 않는 한 기능하지 않느다. 그것이 화폐다. 따라서 부호는 (권력자가 권력을 그저 탕진하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화폐를 그저 탕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되도록 무의미한 것에 있는 부를 모조리 쏟아붓는 사람. 그것이 부호의 정의다. 고만고만한 자산을 언제까지고 껴안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부호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부호라 부르는 것은 극빈을 향한 길을 최고 속도로 내달리는 듯한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일종의 사회적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다.
- 인류가 권력-화폐-부로 핵심재화를 바꾸어온 이유는 오직 화폐는 권력보다, 정보는 화폐보다 탕진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며, 그 이상의 필요성은 없다. 네로가 진시항이나 히틀러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 어지간한 폭적을 휘두르는 권력자라도 멸망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림. 부호가 부를 다 쓰는 것은 그보다 빠르다. 정보 소유의 사회적 차별화 기능이 상실되는 것은 그보다 더욱 빠르다. 요컨대 고도 정보화 사회란 임금이나 위신이나 권력이나 경의 같은 사회적 자원의 순환이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된 사회라는 의미. 우리는 이제 권력자가 몰락하거나 대부호가 빈민이 되거나 아이돌이 영락하는 모습을 저속촬영 영화처럼 빠르게 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나는 잘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고도정보화 사회가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진리를 우리에게 뼈저리게 경험시켜준다는 점. 이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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