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문장 쓰기는 글스기에 능숙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공들여 쓴 첫 문장이라도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 작가는 기껏 써놓은 문장을 무자비하게 학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첫 문장으로 마음을 사로잡아라!" 따위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도 됨. 우리는 광고문구를 쓰려는 게 아니다. 단박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첫 문장을 궁리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 기록은 자기 삶을 객관화할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영감을 불러오기도 함. 로또를 사지 않으면 로또에 당첨될 수 없다. 계속해서 뭔가를 쓰지 않으면 점점 쓸 말이 없어짐. 거꾸로,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계속 기록하다보면 반드시 쓸 거리가 생긴다. 많은 작가가 이구동성으로 영감이 떠올라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니 영감이 떠오른다고 말함. 영감은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지만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처럼 곧 사라진다. 영감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방법은 영감의 안테나가 작동하는 그 순간 기록하는 것뿐이다. '
- 전업작가들은 우리가 일하듯 글을 쓴다.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뛰어난 작가들은 작업시간과 분량을 정해두고 쓴다. 글스기 강사라는 특수한 직업 때문이겠지만, 전업 작가가 아닌 나 같은 사람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전에는 글을 쓰거나 읽고, 가능하면 하룽 500자 이상은 쓰려고 노력한다. 글쓰기를 평생 취미로 삼으려면 대단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일단 글을 쓰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 그러려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기보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짧은 메모를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야 한다. 모든 글은 짧은 기록에서 시작함. 무엇이든 기록하라. 언젠가는 쓰게될 것이다.
- 자신의 비밀을 쓰라.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일들. 그것이 우리가 먹어치워야 할 현실의 마지막 조각이다. 어쩌면 모든 글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절대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대면하고, 그것을 먹어치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들기 전, 허공에 발길질하게 만드는 그 일에 관해 써보자. 꿈에라도 나올까봐 두려운 일에 관해 써보자. 자신의 콤플렉스, 쪼잔함, 더러움, 비열함, 사악함에 관해, 자신의 흑역사를 기술하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게 해줄 것이다. 비밀은 나만의 것이므로 개별적이고 사적이지만, 그 사건이 비밀로 남아야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보편적인 것이 담겨 있음. 그러나 자신의 비밀에 관한 글은 내면이 강한 사람만이 쓸 수 있다. 비밀을 대면하고,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힘들기 때문.
- 한국어는 문맥상 이해가 되면 주어자 목적어 같은 핵심문장성분도 생략 가능. 한국어는 동사 중심의 언어이기 때문. 그래서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하고 맥락을 잘 살펴야 함. 그러나 문맥에 따라 적당히 주어를 생략하는 특징은 독이 될 수도 있음. 주어를 생략한 문장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글도 그렇게 쓴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글 못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주어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 언어는 문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고, 언어 역시 문화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주어를 생략하는 언어적 특성은 관계나 맥락 중심적인 한국문화를 반영하며, 동시에 그런 문화를 강화함. 가끔 "~라고 생각되어진다"라고 쓰는 학생들이 있음. 만약 데카르트가 한국인이었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대신 "생각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생각이 존재한다"라고 썼을지도 모름. 주어를 생략하는 습관이 문장에서 나를 숨기게 만들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혹은 "그렇게 생각되어진다"라고 말하게 만든다. 주어, 목적어 같은 핵심문장성분을 정확히 쓰지 않으면 정확한 문장을 쓸 수 없고, 정확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 문체는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태도에 가까움. 작가의 태도에 따라서 문장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적 훈련이 된 독자를 대상으로 높은 수준의 개념적, 논리적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적 논변을 펼치는 글을 초등학생용 문장으로 쓸 수는 없음. 그런 글은 초등생도 싫어하고 일반독자도 싫어함.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확하게 쓰고자 하므로 문장이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한다
- 사건의 뼈대는 행동과 말이 결정함. 사건 중심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면 행동과 말에 집중해야 하지만,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는 않음. 사실 사건에 관한 서술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 서술은 행동이나 말을 직접 기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견해도아님. 사실을 기록할 때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면 모두 서술이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다", "그가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왕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라는 문장은 독자가 아직 모르는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의 동기, 원인, 심경의 변화같은 정보를 담고 있다.
- 글쓰기에 미숙한 사람들은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서술로 글을 시작할 때가 많다. 행동이나 말이 부족하면 다루고자 하는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기 어렵고, 장황하지만 모호한 글이 되기 쉽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행동과 대화가 변변치 않을 때 지루한 서술에 의존하게 됨. 서술은 얼마든지 더할 수 있으므로 서술을 하다보면 뭔가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쓸데 없는 문장도 많아짐. 글스기에 미숙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므로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님. 서술로 전달하는 정보는 사실이어야 하고, 독자에게 꼭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어야함
- 묘사는 두 단계를 거쳐 완성됨 작가가 대상을 문장으로 번역하면 독자는 그것을 읽고 대상을 정함. 영상매체의 속도감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묘사는 지루할 것이다. 매체가 메시지라고 말한 맥루한의 통찰은 글쓰기에도 적용됨. 보고 싶은 것을 날것으로 들이대는 포르노그래피적 영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느릿한 묘사는 매력이 없을지도 모름. 속도감있게 잘 읽힌다는 말이 찬사처럼 쓰이기도 함. 그러나 지뤃마을 견딜 여유 있는 독자는 어디든 있게 마련임. 느릿함 묘사로만 전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가장 느릿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써보자. 서술과 묘사의 가장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전달하는 방식. 묘사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하지만, 서술은 볼 수 없는 것에 관한 정보를 직접 제공함. 서술은 행위나 말의 원인에 해당하는 동기, 욕망, 목적 등을 제시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지만, 묘사는 그것을 추론할 수 있는 장면을 보여줌. 사실중심의 글을 쓸 때는 먼저 행동과 말을 중심으로 사건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제시해야 함. 그 다음에 서술과 묘사를 활용하여 사실들에 감각적 구체성을 부여하거나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함
- 질문이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편한 질문, 그럴듯한 질문, 고상한 질문이 되지만 그럴수록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된다. 나는 '인간은 왜 이렇게 무례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고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무례한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 내가 그나마 답할 수 있는 질문은 '나는 왜 이렇게 무례한가?'이다. 물론 누군가는 인간의 무례함에 관해 매우 좋은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임. 그러나 깊은 공부 없이 거창하고 고상한 질문에 답하는 글들을 대부분 비겁하고 뻔뻔하고, 공허하며 남의 말을 반복하는 진부한 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든 글을 고해성사처럼 쓰라는 게 아님. 윤동주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자책에 빠질 필요도 없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삶에 관한 구체적 질문을 해야 함.
- '등에' 소크라테스는 그가 했던 질문들 때문에 미움을 샀고, 사형당했다. 질문은 사람을 죽일 수있을 정도로 위험하고 강력하다. 좋은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상식으로 가장한 편견과 무지를 드러냄. 불편함을 견디고 질문으로 들통나버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때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불편함 안에 쓸만한 것들이 있다. 불편함 안에 새로움이 있고, 불편함 안에 배울 것이 있다.
- 좋은 글을 쓰려면 색안경 컬렉션이 필요함. 다양한 기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란 지식과 정보를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들을 돌려 써가면서 대상으로부터 다양한 의미를 추론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색안경을 만드는 사람을 이론가 또는 철학자라고 하고, 색안경을 쓴 채 대상을 해석, 평가하는 사람을 평론가 또는 비평가라고 한다. 또한 자신이 어떤 색안경을 썼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자와 오직 하나의 색안경만 쓰고 그것을 벗을 줄 모르는 자를 멍청이라고 한다.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세상이 무지갯빛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쓴 색안경은 무지갯빛 세상을 이해하기에 형편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함. 그러나 일단 어떤 색안경이든 썼다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야한다. 그다음에 미련없이 색안경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 신이 존재한다거나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처럼 증명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를 공리하고 함. 공리는 원래 수학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세계관이나 가치체계의 뿌리가 되는 명제를 의미. 우리는 공리나 근본신념의 타당성을 문제삼을 수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실재하지도 않는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을 왜 믿어야 하는가? 그러나 공리나 근본신념은 한 사회의 법과 제도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이를 공공연히 부정하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을 잃게 된다.
- 글이란 게으른 자의 여가, 의지박양한 자의 자기고백이거나 변명일 때가 많다. 더군다나 글쓰기를 할때 한껏 부풀어 오른 자아는 평소라면 넘어갈 문제들을 끄집어내 매우 심각한 것처럼 만든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상황을 과장할 때도 있음. 이런 문제들을 어느정도 자각하고 있다면, 자신이 겪는 문제에 관한 글쓰기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방향을 가늠해 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