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내공

인문 2019. 6. 10. 08:20

- 얼핏 보면 이미 많은 사람이 충분히 자기 욕망에 충실하며 심지어 이기적이기까지 한 것 같다. 정말 그렇다면 그들은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왜 대다수 사람이 불행을 호소하며 자살에까지 이르는가. 인생의 최종목적이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이루려는 것이 허망하게도 결국 타인의 인정이다. 이기적으로 열심히 일해서 얻으려는 행복이, 타인의 우러름을 받는 것,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다. 이는 삶의 목적이 내게 있지 않고, 타인에게 있는 것이다. 타인의 욕구와 인정이 아닌,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이 당연한 진리를 망각해서는 행복할 수 없다.
- 삶만큼은 제품이 아닌 작품이길 바란다. 나의 삶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나의 삶이 획일적이고 수동적이라면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문제없이 나의 빈자리가 채워질 수 있다면 무척 서글플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마땅히 자식을 같은 작품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야 하고, 학교와 사회 역시 각 개인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작품으로 대우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행되어랴 할 것은 나 스스로가 나의 삶을 작품으로 창조하고 바라보는 일이다.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해주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만은 그러해야 한다.
- 부터는 감정을 다스리는 여러 수행법을 고안했는데, 그중 알아차림 혹은 마음챙김이라 불리는 수행법이 핵심. 알아차림이란 간단히 말해 나의 모든 반응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알아차리는 것. 즉 순간순간의 나와 마주하는 작업이다. 나를 관찰해 나에게서 일어나는 감정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 감정은 다스릴 수 있다. 일찍 알아차릴수록 더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알아차림은 나의 감정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먼저 몸의 현상을 주의깊게 관찰하라고 한다.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면 그 감정은 어떻게든 몸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분노가 일면 호흡이 가빠지거나 미세하게 몸이 떨린다.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면 나의 감정에 싹트는 것을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 그 감정을 내 의지대로 더 키우거나 꺼뜨리기 쉬워진다.
- 말씀의 세계에서 내쫓기는 것은 비참하지만 그것에 감금당하는 것은 더욱 비참하다. (버지니아 울프)
- 역사를 보면 지배계급은 언어를 소유했고, 피지배계급은 대체로 문맹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의 문맹률은 매우 낮다. 그러나 여전히 지배하는 언어를 지배하고 언어에 지배당함. 지배자는 언어를 창안하고 규정하나,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만든 언어를 사용함. 권력관계란 그렇다. 윗사람이 사슴을 말이라 하자 모두 말이라 했다는 지록위마는 지금도 유효함. 다만 그 방식이 은밀하고 세련되게 변했을 뿐이다. 현실권력을 쥔 사람이 언어를 지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현실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다. 피지배자는 그 언어를 공부하고 내면화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역전시키는 것은 역시 해석이다. 해석이란 말씀의 감옥을 부수는 약자의 무기다.
- 철학 입장에서 실제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절대적 전회란 없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가 플라톤이나 라이프니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발견한 것들은 비슷하지만 오히려 더 흥미롭고 자극적인 지름길이다. (알랭 바디우)
- 창의성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기존과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존과 완전한 단절만이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의성이란 그런 방식으로 탄생하지 않음. 단절보다는 현재에서 한 걸음 나아갔거나 내파한 곳에서 비롯됨. 아무리 천재라도 기존의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자고로 철학이라면 새롭고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철학자들에게도 완전한 단절과 전환은 없었다. 일례로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독창적 철학도 플라톤,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닮았다. 그들은 독창적이기 위해 역설적으로 기존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공부했음. 사실 그래야 허탈한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음. 일껏 패러다임이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이미 토머스 쿤이란 철학자가 몇십 년 전에 밝혀낸 것일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창의성을 기르려면 기존 것들의 허점과 특징을 발판삼아 발전을 꾀하는 편이 더 효율적임. 말도 그렇다. 고리타분하고 상투적으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흔한 예로 "꽃이 만발하는 봄이 왔습니다."로 시작하는 인사말이나 "저는 1남 1녀 중 장녀로서"로 시작하는 자기소개서는 별 매력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창의적으로 자기를 소개하기 위해 기존의 자기소개서를 참고하지 않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님. 기존의 사례와 방법들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발전시키며 나쁜 것은 반면교사로 삼는게 지혜롭다.
- 새로움은 단절이 아니다. 하늘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기존의 것에서 시작하자. 멋지게 자기소개나 인사말을 하고 싶다면 그런 예를 배우자. 그리고 전적으로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과, 반대로 이전 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안일함을 버리자
- 한 사건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성격은, 그것을 사건이게 하는 그 공백을 기입시켜 명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의 말을 간추리면, 사건이 되게 하려면 공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공백은 어떤 분야에서 은폐되고 가려진 지점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으로 특히 주류가 숨기려는 것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해 드러낼 때 그것은 사건이 된다. 사건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식과 체계의 출현이다. 즉 사건이란 창의적 결과물인 셈이다. 예를 들어 거시성과 의미담론은 근대 모더니즘의 특징. 이때의 공백이라 할수 있는 미시성과 무의미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사상과 예술로 표현한 것이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처럼 말이다. 말할 때도 공백에 주목해야 함. 예컨대, 칭찬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잃어 내지 못한 장점을 발견해 칭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상대는 색다름을 느끼고 호감을 품게 됨.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 누구나 흔히 지적하는 것보다는 공백의 부분, 즉 애써 외면해 왔던 문제점을 드러내 일깨워 주는 것이 효과적임
-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 이론을 전해들었습니다. 전에 제가 말한 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이미 근심했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쳐보았습니다. (이황)
이황이 기대승에게 쓴 편지의 일부다. 기대승이 이황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황이 이에 답하면서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됨. 당시 이황은 중년의 대학자였고, 기대승은 아들뻘의 초학자였다
- 경청은 단지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말에 적절한 추임새와 눈짓, 몸짓을 보내는 것을 포괄. 그래야 내가 진심으로 집중해서 듣고 있다고 느낄 것읻. 따라서 거울처럼 경청하기란, 상대를 그대로 비춰주는 것을 말함. 거울을 통해야 자신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듯이, 상대의 거울이 되어 그의 감정과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게 경청이다. 이 방식은 첫째, 상대방이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감정을 일깨워줌. 감정이 복잡한 상황일 때 특히 그러함. 경청하면 상대방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미처 감지 못했던 감정도 보게 됨. 둘째, 상대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함.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객관적이기는 어렵다. 그럴 때에 간단한 질문과 상황요약을 통해 자신과 대면하게 이끌 수 있다. 거울처럼 듣는 법을 상담심리학에서는 거울기법이라 함. 다만 주의할 점은 추임새가 조언이나 충고가 되면 안된다. 먼지가 잔뜩 낀 거울은 제대로 사물을 비추지 못한다. 경청은 내려다보는 듣기가 아니라 나의 먼지를 먼저 닦아내고 겸허히 듣는 태도다
- 결론을 이끌어 내고 싶다면 질문들을 질서 정연하게 하지 말고 마구잡이로 던져라. 그러면 상대방은 도대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며, 나의 질문에도 대비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을 이용해 다양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고, 심지어 정반대의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쇼페하우어)
- 쇼펜하우어는 상대를 꼭 이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질서 정연하게 질문할 것이 아니라 되는대로 마구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 상대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말고 답하는 즉시 새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적어도 하나쯤은 어긋난 답을 하게 되고, 그때 그걸 물고 늘어짐으로써 상대를 궁지로 몰 수 있다는 전략이다. 인용문 외에도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논쟁술은 하나같이 악랄하다. 상대가 발끈하는 지점이 약점이나 거기를 공략하라.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은근히 끼워넣어라. 상대의 주장을 확대해석하라. 화를 내도록 유도하라. 하나를 인정하거든 전체를 인정한 것으로 단정하라. 내가 승리한 듯이 분위기를 몰고 가라. 정 안 되면 인식공격을 단행하라. 이런 내용이 담긴 책이 쇼펜하우어 논쟁술이다. 쇼편하우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보임. 첫째,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임. 둘째, 실제 논쟁에서 사용할 법한 비열한 수단을 모두 열거, 분석함으로써 오히려 이에 맞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 비열함을 이기기 위해 비열함을 공부하는 것임. 셋째, 사람이 얼마나 비열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통과 발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논쟁에 임하는 당사자의 실제 목적은 이기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애써 그걸 숨긴 채 점잖은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점을 꼬집는다.
- 상대방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충고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게 낫다. 충고목적이 상대를 기분 나쁜게 하는 데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제해야 함.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 있음. 그러므로 굳이 내가 억지로 재확인시켜줄 필요는 없다. 조언을 요청받아 하게 될 때도 그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부드럽게 해야 함. 삼월 봄바람이 겨우내 쌓인 눈을 녹이듯이 부드럽고 찬찬히 말이다
- '이해하다'와 '동의하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다. 이해가 처지를 고려하는 것이라면, 동의는 있는 그대로를 지지하는 것이다. 누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그 주장을 하게 된 배경과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말에는 세가지 법칙이 있다. 고찰이 있을 것. 근거가 있을 것. 실천이 있을 것이다. (묵자)
- 길거리나 시장에서 친구를 만나거든 당신안의 영혼이 입술을 움직이고 혀를 굴리게 하라. 당신 내면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속삭이도록 하라. 그러면 그의 영혼이 당신 마음의 진실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마치 포도주 빛갈이 지워지고 포도주 잔이 더는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맛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것처럼. (칼릴 지브란)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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