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냈다. 고대 금송아지 숭배가... 돈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돌아왔다. ... 이런 체제에서는 환경같이 허약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
- 중세에 십자군이 성지를 정복해야 한다는 요구는 "하느님이 원하신다"는 외침과 장단이 맞았다. 십자군은 정말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을까? 이 모험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면, 그들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이제 십자군은 오래전의 일이며, 내가 글을 쓰는 영역에서는 하느님의 의지로 추정되는 뜻에 기원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정책 십자군을 목도하며, 이 사람들은 종종 "Mercatus vult!" 즉 시장이 원한다는 은연중의 외침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시장의 의지에 호소하는 이들은 정말로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까? (폴 크루그먼)
- 삼위일체 세 위격의 정확한 관계에 관해 신학자들이 내리는 결정은 대다수 사람에게 죽음을 야기하지 않거나, 심지어 큰 관심도 끌지 못함.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내리는 결정은 말 그대로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결국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는 사태를 낳은 일부 재정 정책과 무역정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위반하는 죄라고 할 때, 이는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
- 08년 경제위기 직후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전에 런던 정경대를 방문했을 때 한 교수에게 왜 위기의 조짐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느냐고 물었다고 보도했다. 여왕은 모호하고 완고한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칼런더의 논문에서 우리는 여왕의 의문에 마땅한 대답인 '내 탓이오'라는 말을 발견한다. 칼런더는 말한다. "우리는 실제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는 척한다. 학계 경제학자들의 주류는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그리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는 척했고, 일부는 실제로 자신이 이해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사고와 주장을 겸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 역사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신화도 그런 특징을 보여줌. 이 신화를 활용하는 이들이 종종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 주장하기에, 인류학과 역사학 연구를 통해 최초의 인간에게 시장이 없었음을 밝혀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중요함. 초기 인류가 만든 것은 시장이 아니라 사회집단내부의 선물문화였다. 물론 누구든 선물을 받으면 결국 보답해야 했지만, 곧바로 교환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면 주고받는 거래가 되기 때문이다. 물물교환은 오직 외부인을 상대로 한 것이라서 신뢰, 상호성, 공동체의 중요성 등이 더 근본적이고, 이경우에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면 더 자연스럽다. 시장 이전에, 심지어 물물교환이 등장하기 전에 이런 것들이 존재했다.
- 가장 원시적 교환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둘은 갈등뿐만 아니라 관계에서도 중첩되는 사회적, 상징적 세계의 층위에 속했다. 두 사람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을 테고, 나중에소도 만나기 쉬웠다. 부족간 연계가 확대됨에 따라 한때 주변적이던 상인의 역할도 커졌다. 하지만 조개껍데기나 구슬처럼 단순한 형태가 등장했을 때도 구매자와 판매자와 모두 자기가 일정한 공통된 가정에 의존하는, 얽히고 설킨 더 큰 세계의 일부임을 알았다. 창끝과 고기조각의 교환이나 유사한 어떤 형태의 교환은 모두 몰역사적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유용한 허구일지 모른다. 시장신 종교에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기원 신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시장가치가 근본적이며, 심지어 인간 영혼에 깊이 박혔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티셔츠에 적힌 문구처럼 '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시장경제는 영원한 것이 아님. 시장경제가 오랫동안 존재해왔다고 영구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 우리와 함께할 것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 그들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 예수는 그들의 가난하고 무방비 상태인 순례자를 속이고 신전의 사제들이 환전상이 버는 수입에서 자기몫을 쏠쏠히 챙긴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유서깊지만 종종 위반되는 종교관행을 지키라고 강요한 것임. 타산적 이윤추구자의 약탈에 맞서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추적하는 가난한 이를 편드는 성서 속 하느님과 시장신의 기나긴 투쟁에서 한 일화를 보여주었다.
- 우리가 물건을 산 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은 (완전경쟁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면 거래하는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라고 보는 경제세계에서는 불필요하겠지만) 이런 넓은 맥락을 상기시핀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서로 어떻게 신세를 지는지에 관한 일정한 가정"을 공유하는 맥락 말이다. 그레이버는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묻고, 상대가 아무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기 지식을 공유해주기 바라는 단순하고 흔한 행위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금전적 거래의 밑바탕이 되는 상호의존과 사회적 평화에 대한 약속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 우리는 이제 시장이 신전의 제약을 받고 사람들이 탐욕을 의심하던 쇼베 동굴이나 샤르트르대성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퍼져 나갔다. 루이스 멈퍼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매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 화폐와 신용의 도움으로 상당한 투기이윤을 추구하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성장했다. 금욕적인 규칙성과 투기적 사업, 체계적 탐욕과 뻔뻔한 자부심이 결합된 것이다. 중세를 지배한 주제가 보호와 안전이라면, 새로운 경제는 계산된 위험의 원칙에 토대를 두었다."
- 피케티는 부는 스스로 축적되고 영속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보여준다. 히브리인은 이 점을 인식했고, 권유 이상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봄. 그들은 부의 정기적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했음. 결국 희년이 이런 재분배를 위한 주요수단이 됨
- 희년은 서판을 깨끗이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새롭게 경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가 우리가 보통 가난한 이의 주된 옹호자로 보는 예언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성스러운 율법에 한 층위로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 희년은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희년이 제대로 지켜졌을까, 아니면 노력해야 마땅하지만 실현된 적이 없는 일종의 이상으로 여겨졌을까? 학자들은 수백년 동안 이 질문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회의론자들은 이런 전면적 채무탕감정책이 있었다면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관행이 어떻게 유지되었겠느냐고 묻는다. 희년이 다가오면 대부잗들이 왜 돈을 빌려주는 위험을 무릅썼겠는가? 희년이 어느정도 지켜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빚 탕감 정책이 설명된 사실을 지적. 예컨대 성곽 안에 있는 땅과 성곽 밖에 텅 빈 땅을 각각 다르게 처리하라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성곽 안에 있는 당은 재분배에서 제외되지만, 성곽 밖에 있는 땅은 제외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농경과 방목지역은 분명히 하느님의 것인 반면, 성읍의 땅은 조금 의문이 있기 때문일까? 정답은 없다. 희년은 예수시대에 실행되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점령자의 가혹한 과세 정책과 억압적 토지 규제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임.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희년에 대해 알았다.
- 16세기 초의 많은 예술가와 여관주인, 교회 재정 담당자에게 희년은 눈부신 성공처럼 보였다. 그 순간 한 도시에서는 기독교의 신과 시장신이 짝을 이뤄 이익을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깔끔한 결합은 어그러졌다. 젊은 수사시절, 루터는 성도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외설적 모습에 넌더리를 냈다. 고향으로 돌아온 루터는 순례를 호되게 비난하며 사람들에게 로마나 팔레스타인 성지, 유럽에서 번성한 수많은 순례지로 여행하는 대신 자기 집에서 성서를 읽으라 조언했음. 아이러니하게도 루터가 교회 문에 항의문을 붙인 해에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인의 스카이라인에 자기 흔적을 남기는 산피에트로대성당을 완공하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 후 교황은 맥도날드나 세븐일레븐, 슈퍼커츠(미국 남성 미용실 프랜차이즈) 등 익숙해진 사업모델에 따라 사실상 프랜차이즈 영업권을 판매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덕분에 사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면벌부 판매자는 끌어모은 돈의 절반을 로마에 보내는 대가로 나머지 절반을 챙겼다. 교황은 이 돈을 야심적인 성당 건축 사업에 쏟아부었다.
- 그러나 많은 인가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프랜차이즈 사업에는 부정적 면이 있다. 일단 제품을 다른 사람 손에 넘기면 품질관리가 어렵기 때문. 이런 프랜차이즈 영업권자 중 한명인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이트는 모든 죄를 사해주어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면벌부를 광고해서 경쟁자들을 앞지르려고 했다. 알브레히트는 가족의 가치를 호소해서 더 매력적인 제안을 하며, 자기가 판매하는 면벌부를 사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랑하는 사람이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을 깨끗이 덜어줄 수 있다고 주장. 이런 떠들썩한 호객행위는 잠재적 고객의 심금을 울렸다. 돌아가신 아버지나 어머니가 불길 속에서 애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망자를 이런 고통에서 구해주는 일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알브레이트는 차등요금도 적용했다. 면벌부 판매가는 신분에 따라 왕과 여왕, 주교는 25플로린, 상인은 3플로린, 가장 가난한 신자는 0.25플로린이었다. 미국 광고업계에서 파워포인트로 만드는 광고전략에 맞먹는 판촉활동이지만, 결국 아주 많은 비용이 발생. 무절제한 면벌부 거래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유럽의 절반이 종교개혁에 가담했고, 카톨릭교회는 오늘날 적당한 표현으로 하면 일부를 제외하고 고객기반을 상실했다.
- 모름지기 권력은 기업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부패하기 쉽다. 절대권력에 가까워질수록 부패도 심해짐. 마치 운명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비뇽과 르네상스 교회의 끝없는 부패는 결국 종말을 고함. 오늘날 종교가 모든 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현 교황은 작은 아파트에 살며 다른 손님들과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한다. 그렇다. 대불황은 가라앉기 일보 직전인 금융산업의 뱃머리 위로 경고사격을 했다. 제너럴일렉트릭에 관한 뉴스가 어떤 의미라도 있다면, 금융의 중앙제단에서 신을 섬기는 고위 사제들은 내키지 않을지언정 그 교훈을 배울 것이다.
- 15년 초, 경제학자 스티븐 체케티와 에니스 카루비는 명망높은 국제결제은행과 함께 세계 곳곳의 선진국에서 점증하는 금융부문이 실물생산부문과 비교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측정하려는 야심찬 연구에 관한 논문을 발표. 지배력이 점점 커지는 이 부문은 자국경제에 이득을 주는가, 훼방을 놓는가? 체케티와 카루비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5개 선진국 경제의 33개 제조업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대형 은행경영자와 옹호자의 주장과 정반대로 점증하는 금융부문은 전반적인 생산성 향상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 초대형 교회와 대기업이 공유하는 핵심요소는 양자의 규모가 단지 우연한 것은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규모는 본질이 되는 부분이다. 초대형 교회에 다니는 신자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들은 종종 처음에 규모에 끌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지나다가 건물의 크기 자체에 눈길이 간다. 신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혹 그 교회에 다니는 지인을 안다. 인지도라는 요인도 있다. 사람들은 이 교회에 다니면, 대화 중에 교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상대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을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지인들 모두 그 큰 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테니까. 이는 기업의 세계에서 브랜드 가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대규모 기관에 익숙해졌다. 많은 사람이 고층 건물에서 일한다. 진료받을 일이 생기면 작은 개인병원보다 종합병원에 간다. 수천명이 모이는 스포츠나 콘서트를 보러 간다. 교실 하나짜리 소규모 학교는 사라지건 통합되었다. 대형교회는 이런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 예배 참석자들이 성공에 대한 시장의 긍정적 태도를 공유한다는 점이 더 중요. 규모와 성장은 당연히 그런 태도를 수반함.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사람이 종종 교회의 수적 성장을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융합한다. 초대형 교회가 인상적인 성공을 거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음. 이런 교회는 대부분 자신이 예비 신자 친화적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라 주장. 이런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와 가지 않는 이유를 정밀하게 조사하고, 그에 따라 예배를 바꾼다. 편리한 주차장을 충분히 제공하고, 전통적이고 위압적인 붉은색 문을 없애는 등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함. 브라질 사우바도르에 있는 초대형 교회는 아예 문을 전부 없앴다.
- 기업이나 종교가 과연 크기가 중요한가? 내 결론은 크기가 중요하지만, 상이하고 때로는 모순적 방식으로 중요하다는 것. 너무 커서 파산시킬 수 없거나 너무 커서 투옥할 수 없는 은행을 해체하면 최근 최근 일어난 금융붕괴가 재발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금융계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일부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틈새로 분할된 사회에서 초대형 교회가 지역 회중의 사업을 문닫게 하기보다는, 여럿 중에서 또 다른 영적 선택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대 주식회사와 초대형 교회가 성장염이라는 열광정 정신상태를 부추기는 한, 양자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유한한 지구에 커다란 위협을 제기한다. 어느 것도 영원히 커질 수는 없는 것, 사방이 초대형으로 뒤덮인 시대에도, 아니 그런 시대야말로 작은 것이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현재 경제학과 신학이라 부르는 학문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전에 살면서 글을 썼다. 그의 저작은 21세기 경제학자나 신학작 출간하는 저술과 닮은 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하지만 스미스의 저술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나 당대 신학자와 비슷한 추론패턴을 따름. 그는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와 철학전통의 흐름에 의지. 여기에는 성서연구도 포함됨. 예를 들어 이 장에 붙인 제사를 보면, 스미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국부론의 제목을 성서에서 빌렸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저자들이 아무런 신학적 의도 없이 성서구절에서 자기 저서의 제목을 따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분명 신학적 의도가 있었다. 이런 사실이 신학의 역사에 익숙지 못한 사람보다 그 역사를 공부해본 사람에게 분명 보일 것이다. 스미스가 조물주 혹은 간단히 신을 계속 언급하는 사실을 놓치려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그의 책을 읽어야 한다. 신학자들은 19세기 내내 스미스를 동료로 생각하며 그의 책을 읽었고, 칼뱅주의 섭리교의가 그의 사유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음. 예컨대 다음 문장을 보자. "주의해서 보면 자연의 모든 부분에 조물주의 섭리가 골고루 나타나므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에서도 신의 지혜와 인자함에 감탄한다."
- 스미스 시대 신학자들은 성서 외에 교의의 역사를 탐구했지만, 당대에 이름 붙인 자연신학과 계시신학, 종교철학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철학적 신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하위 학문분과로 갈라진 이 모든 탐구에 정통하고자 노력. 스미스 시대에 원래 그랬듯이, 그들은 신학이라 불리는 분야를 구성했다. 이 명칭은 우리의 청교도 창시자들과 함께 북아메리카로 옮겨왔고, 지금도 하버드, 예일, 시카고, 듀크 등 이런 학문분야를 탐구하는 대학원에서 사용됨. 스미스는 신학에 포함되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에서 헤엄쳤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인 1759년 도덕감정론을 출간한 사실이 중요함. 이 책은 심리학이나, 신학, 윤리학 혹은 이 모든 학문의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전작의 후속편으로 보지 않고는 국부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 전과 후의 모든 신학자가 그렇듯, 스미스 역시 18세기 신학자로서 그 시대에 접할 수 있는 고전적 경향과 당대의 경향을 모두 연구. 그런데 18세기 개신교 신학자가 왜 스토아학파에 몰두했을까? 몇몇 동료처럼 스미스가 고대운동에 끌린 한가지 이유는 소박함과 자제력을 강조한다는 점. 스토아학파 철학자는 스미스에게 평생 허튼짓 하지않고 견실히 하는 에든버러와 애버딘, 던디 시민의 선조로 보였음이 분명. 그는 당시 카톨릭 교도에게 무척 인기를 끈 귀족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한 혐오 때문에 스토아학파에 끌렸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스미스가 신학자라면 굳이 왜 비기독교 철학을 탐구했을까? 물론 그 답은 신학자는 항상 이런 분야를 탐구한다는 것. 신학자는 당대의 지적, 문화적 경향과 대화하면서 기독교를 재해석하려고 노력.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얼마전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정교하게 가공한 것. 그리고 아퀴나스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의 공식 철학자다. 19세기 독일 개신교 신학은 헤겔과 칸트 등이 정립한 범주를 활용했다. 20세기를 보면 실존주의의 도전에 대응한 종교 사상가 중에 개신교(폴 틸리히), 카톨릭(가브리엘 마르셀), 유대인(마르틴 부버)이 있고, 다른 이들은 다윈주의 진화사상을 다루었다.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 주의의 다양한 표현을 놓고 고심. 스토아학파의 경우 많은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와 유사성이 있다고 언급했으며, 성서학자는 성 바울의 저술에서 이런 유사성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스미스가 결코 이상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스미스의 신학에 미친 두번째 영향은 당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온건한 칼뱅주의다. 16세기 제네바의 완고한 종교개혁가 혹은 존 윈스럽이나 후대의 조너선 에드워즈처럼 신학적으로 엄격한 뉴잉그랜드 칼뱅주의 창시자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 사람에게 온건한 칼뱅주의란 형용모순처럼 들릴지 모름. 하지만 스미스는 칼뱅보다 200년 뒤에 살았고, 그의 시대에 군림한 칼뱅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 않았다. 앞서 주목한 것처럼 당대 칼뱅주의는 오히려 칼뱅에게 중요한 다른 개념, 즉 세상에서 신의 섭리적 존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유익한 기여, 신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서 이성의 중요한 역할, 신의 자애로운 인도 아래 인류의 축복받은 미래 등을 강조했다. 스미스가 인간 본성에 대해 순진하거나 감상적 견해를 품었다는 말은 아님. 그는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을 익히 알았고, 만물의 복잡한 연관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려는 우리의 무능이나 거부에서 이런 죄와 어리석음을 분명히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하는 "자애롭고 전지한 존재는 ... 자신이 관할하는 체계 속에 우주적 신에 대해서는 필요가 없는 악을 한 조각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
- 스미스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라고 썼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뉴턴.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펼쳐 보이겠다고 약속. 오늘날 뉴턴이 성서에 관한 주석서도 몇권 쓰고, 요한계시록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사고에 미친 지배적 영향은 그가 특히 독일식 표현으로 익숙한 자연법 전통이다. 이 학파는 보통 말하는 자연의 우주보다 윤리와 도덕에 관심이 많았다. 이 학파는 스미스가 글래스고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자연법 신봉자는 인간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타고난다고 주장. 그 신학적 함의를 명시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이 능력이 신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간혹 이런 견해는 인간의 이성이 죄로 인해 크게 왜곡되어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런 도덕적 식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에 위배된다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스미스는 이런 뚜렷한 모순과 싸워야 했다. 신학자는 이런 활발한 지적 흐름에 관여하기를 원하게 마련이라는 통념에 놀라서는 안된다. 20-21세기에도 철학자와 신학자는 이런저런 자연법을 놓고 씨름한다. 로마 카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대부분 자연법에 근거를 둔다.
- 시장은 초기단계부터 영적 영역에서 단어와 상징을 빌려옴.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처음 등장한 어스레한 과거부터 언제나 앞선 종교의 여러 양상을 빌리고 훔치고 개조했다. 예컨대 성서 저자들은 천지창조와 태곳적 대홍수 이야기를 끌어와서 자기 목적에 맞게 개작. 기독교의 세례는 고대 유대의 미크바라는 관습을 각색한 것. 히브리 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야기는 겹쳐져서 코란에 나온다. 불교는 기원전 500년에 처음 등장할 때 밑바탕이 된 힌두교 환경의 요소를 담고 있음. 시장 종교는 이런 관행을 되풀이할 뿐이다.
- 시장은 왜 욕망을 창조할 필요가 있을까? 광고 산업의 최근역사를 잠깐 훑어보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화 연구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현대광고의 출발점을 신기술이 발명되고 독점체가 형성되면서 기업들이 생산을 늘리는 방법이 아니라 과잉생산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도전에 직면한 19세기 말로 추적. 어떻게 하면 만들어내는 모든 제품을 판매할 수 있을까? 이 도전은 2차대전 이후 극심해짐. 전투기, 탱크, 대포를 건조하던 공장들이 전례없는 수준으로 자유롭게 소비재를 생산. 이 생산물을 전부 흡수할 소비자가 있었을까?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을 사지 않으면 경제가 심각한 곤란을 겪었을 것. 이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뒷날 대통령경제자문위 초대 위원장에 오르는 에드윈 너스는 34년, 브루킹스 연구소의 한 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 그 보고서인 '미국의 생산능력'은 시장침투와 과잉생산능력을 심각한 도전으로 꼽음. 이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몇가지 기제가 고안됨. 먼저 예약할부제, 할부구매, 장기담보대출, 최종적으로 신용카드 같은 광범위한 신용도구를 창조하는 것. 이 모든 수단은 사람들에게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물건을 사도록 부추겼고, 사람들은 부추김에 넘어감. 종교영역에서 이런 변화는 이전 시기에 장려된 검약과 소박함, 만족의 유예 같은 일부 도적적 미덕이 이제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었음을 의미. 교회는 사람들에게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마음을 편하게 먹아라"라고 장려할 것이 기대됨. 많은 종교기관이 이런 기대에 부응. 소비자 채무는 급증했고, 저축예금은 감소. 어떤 이들은 이 과정을 저축에 맞서 소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82-90년 미국 소비자 평균 부채는 30% 증가했지만, 기업이윤은 급등했다. 판매를 확대하기 위한 또 다른 전술은 진부화 속도를 높이는 것. 가정용품은 더 빨리 닳도록 설계됨. 그래야 물건을 새로 사기 때문. 스타일의 변화, 특히 여성복의 변화속도가 빨라짐. 맵시 있는 모델이 활보하는 밀라노와 파리의 런웨이가 텔레비전과 컬러잡지를 통해 가정에 들어옴. 자동차 업체는 해마다 포드나 닷지의 신모델을 출시. 기업은 제품개선보다 포장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 점점 더 많은 예술적 재능과 상상력을 쏟아부음. 금융부문의 확대는 파생상품인 부채담보부 증권 같은 수많은 신제품 발명으로 귀결됨. 냉전은 미국과 광범위한 동맹국을 위해 다시 한번 무기를 대량생산하는 군수공장의 장기적 성장을 부추김. 하지만 쇠약해진 수요와 시장의 포화상태에 대응하려는 이런 고안물 가운데 광고업계에 의한 욕망의 창조와 주입이 가장 강력해짐. 욕망을 창출해서 판매를 확대하기 위한 혁신적 기법은 텔레비전이 그 범위와 침투력을 확대하면서 무대에 등장. 그것은 시장의 초대형 폭풍과도 같았고 거대한 성공이었다. 언젠가 잡스가 말했듯이 "여러분이 말해주기까지 많은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번 말을 듣자 확실히 한입 베어 문 사과모양 로고를 좋아하는 취향이 생겼다.
- 라틴어로 restoratio humani(인간의 회복)이라 불리는 구절은 인간을 만물의 질서에서 적합한 자리, 즉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 이 교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질문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에 답하고자 한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생명으로 화신한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임. 신화라는 이 개념은 초기의 일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 로마 종교이 일부 경향으로 들어갔다. 후자의 경향에서는 인간이 때로 신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취하셨다" 하느님의 목적이 인간을 신성화하는 것이라는 이런 사고는 지금도 기독교 신학,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함. 결국 등장한 지배적 모티브는 약간 다르다. 신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온 것은 인간을 신성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되어야 하는 모습, 즉 진정으로 인간적 모습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 인간의 회복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는 취지와 관련하여 restoratio는 비대한 시장에 관한 핵심적 질문을 제기함. 시장은 단순한 시장이 될 수 있을까? 만물의 질서 속에서 중요하지만 신성하지 않은 자기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시장은 과대망상증, 그 상피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시장은 폐지가 아니라 철저한 개조, 즉 restoratio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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