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체(recession)은 흔하지만 불황(depression)은 드물다. 내 판단으로는 경제역사에서 불황으로 대략 묘사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시기인데, 1873년 공황 뒤에 이어졌던 물가하락과 불안정의 시기와 1929~30년 금융위기뒤에 이어졌던 대량실업의 시기였다. 19세기의 장기불황이나 20세기의 대불황은 끊임없는 경기하강의 시기는 아니었고, 반대로 둘다 경제가 성장하는 시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기개선의 경우들은 초기 침체에서 오는 위험을 저지하기에 절대 충분하지 않았으며, 악화가 뒤따랐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세번째 불황의 초기단계에 있는 것 같다. 아주 극심한 대불황이라기보다 장기불황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세계 경제에 미치는 대가와 무엇보다도 일자리가 없어서 망가진 수많은 이들의 삶에 미치는 대가는 막대할 것이다. (폴 크루그먼)
- 세계 주요 경제국은 장기불황에 빠져있다. 여기서는 불황을 경제가 이전의 산출액보다 훨씬 낮게, 장기 평균보다 낮게 성장할 때로 정의한다. 그것은 또한 고용과 투자의 수준이 그 꼭짓점보다 낮고, 장기 평균보다 낮은 것을 의미. 무엇보다도 자본부문의 이윤율이 불황 시작 이전 수준보다 대체로 낮게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 지금까지 현대 자본주의에서 세번의 불황이 있었다. 첫번째는 19세기 종반(1873~97)이었고, 두번째는 20세기 중반(1929-30)이었고, 현재 21세기 초반(2008~?)에 또 하나를 겪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심각한 침체와 함께 시작되었다. 가장 심각한 불황은 자본주의 순환의 하강국면들이 결합될 때 나타났다. 모든 불황은 여러 산업부문의 혁신순환이 무르익고 포화상태가 되었을 때, 세계의 생산 및 상품가격이 하강국면으로 들어섰을 때, 즉 물가상승이 둔화되고 물가하락으로 전환될 때, 건설과 사회기반시설 투자의 순환이 침체로 바뀔 때, 무엇보다 이윤율의 순환이 하강국면에 있을 때에 온다
- 불황은 사회 및 경제반응을 촉발. 19세기 불황은 제국주의 경쟁을 촉발했고, 이는 결국 1차대전으로 이어졌따. 30년대의 대불황은 유럽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의 발흥과 이와 함께 스페인에서는 혁명과 반혁명과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와 소비에트연합에서는 전체주의 지배의 강화를 초래했는데, 이는 상승하던 추축국들이 영미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를 위협했을 때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했다.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자본 스스로 기필코 극복하지 못하는 영구적인 침체는 없다고 주장. 자본주의는 노동대중이 이 체제를 대체할 정치권력을 얻지 못한다면, 경제에서 출구를 갖게 된다. 결국 여러차례의 침체를 겪으면서 자본이 불황의 심연의 바닥에 모여들고 있는 새로운 기술진보와 혁신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충분히 이윤율이 회복될 수 있다. 자본은 새로운 성장 및 발전의 시기를 위해 다시 부상할 것인데, 하지만 많은 기업들의 파산과 실업에서 엄청난 증가와 심지어는 수많은 사물과 사람의 물리적 파괴가 일어난 후에 그렇게 될 것이다.
- 주류 경제학 조차도 때때로 이윤과 위기사이의 관련성을 인정함. 그 관련성은 투자다. 얀 틴베르헌은 새로운 투자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이윤을 벌기 때문에 기대이윤이 새로운 투자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결론내림. 기대는 과거 및 현재 수익성의 경험에 기초할 것이다. 웨슬리 미첼은 투자행동이 총 수요 변동의 중요한 요소이며 따라서 투자의 감소는 위기를 촉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여주었다. 이윤율과 투자 사이의 강한 관계는 여러 연구에서 밝혀짐. 이런 연구들은 투자수준을 잘 예측하는 경제변수는 전체 기업의 이윤율이지 증권 시장가치평가나 다른 경제변수가 아니라고 밝혔다.
- 자본주의에서 각 위기는 고유한 특징을 지님. 08년의 도화선은 가공자본의 엄청난 팽장이었는데, 이는 가계소득에 대한 주택가격의 비율이 극한에 도달하여 실질가치 팽창이 가공자본의 팽창을 더이상 지탱하지 못하여 붕괴됨. 하지만 그런 도화선은 원인이 아니다. 위기의 일반적 원인은 도화선 뒤에 있는데,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다. 다른 위기들처럼 08~09년 위기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과 이윤율 저하경향 간 모순에 기초하는 근본원인을 갖는다. 이런 모순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ㅅ용을 위한 생산이아니라 가치를 위한 생산이기 때문에 일어남. 목적은 이윤이지 생산 또는 소비가 아니다. 가치는 오직 노동의 지출로 창조된다. 이윤은 노동이 대가를 받지 않고 창조하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자가 전유하는 가치로부터 온다. 자본축적과 이윤율 하락 사이의 근본모순은 실질가치와 허구적 가치 파괴의 형태를 갖는 위기로 해결된다. 실로 자본의 허구적 팽창이 가장 많이 전개된 곳에서 위기가 시작된다.(튤립, 증권시장, 주택부채, 은행부채, 기업부채, 공공부채 등) 금융부문은 자주 위기가 시작되는 곳이지만 생산부문의 문제가 그 원인이다 자본주의에서 침체는 자본가의 투자붕괴로 시작. 투자의 변동은 처음에 이윤의 변동때룸에 일어나지 그 반대는 아니다.
- 마르크스의 법칙은 자본주의 체제는 금융부문에서 기술적 고장을 겪을 뿐 아니라 생산부문에 내재한 모순, 즉 자본 스스로 만드는 성장의 장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으로부터 결론을 내리면 자본주의 체제는 호황과 침체가 없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게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체제는 다른 체제로 바뀌어야만 한다.
- 19세기 후반의 초까지 영국은 자본주의의 선두 강대국이었다. 영국은 세계 무역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했는데, 특히 제조업에서 그랬다. 이 분야에서 산업혁신 및 확대의 세계 지도국이었음. 영국은 팍스 브리태니카 아래서 세계 지도국을 유지할 수 있는 커다란 식민제국과 군사력을 가졌었다. 1851년 대영박람회는 영국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절정이었다. 19세기 후반 동안 영국은 경제력, 금융력, 군사력, 정치력의 선두를 유지. 하지만 영국은 특히 미국과 비교하여 그 힘을 잃기 시작했고, 도한 1차대전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럽에 비해서도 그 힘을 잃기 시작. 그런 의미에서 1850~1914년 동안 영국은 1970년에서 현재까지의 미국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마르크스의 자본의 운동법칙 분석은 주로 영국에 기초. 그는 그곳에 살았으며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경제자료와 사건을 사용했다. 그래서 영국 경제는 19세기 종반 자본주의 축적과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적 타당성을 분석하는 데 딱 들어맞았다
- 장기불황은 실제였지 미신이 아니다. 장기불황은 유럽에서 터져서 미국으로 갔고, 다시 유럽에서 터진 국제금융공황이 촉발했다. 하지만 그 이후 동시대인들과 주류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장기불황의 주요원인은 금융부문에서 찾을 수 없고 또는 화폐 공급긴축이나 엄격한 금본위제 때문이 아니었다. 원인은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부문에 있었다. 산업생산의 성장이 둔화되었는데, 투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자본투자의 급감이 일어난 이유는 자본의 이윤율이 1870년대 초반부터 급락하여 1890년대 중반까지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침체와 약한 회복이 있었고, 각 국가들은 다양한 수준의 심각함과 회복을 겪었지만, 모든 국가들이 성장감소, 투자감소, 물가하락을 겪었으며 무엇보다 이윤율 하락을 겪었다.
- 대불황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30년대에 전면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케인즈가 제공. 그는 경제에서 총수요의 감소가 소득과 고용의 커다란 감소에 이바지했다고 주장. 그런 상황에서 경제는 경제활동이 평균수준일 때보다 낮은 균형에 도달했고, 실업률이 높아졌다는 것. 산출액의 증가는 구매력의 크기에 의존하는데, 이는 시장에서 오는 것으로 예상된다. 회복은 구매력 증가에 의존한다. 케인즈는 구매력과 산출액을 높이는 데 작동하는 세가지 요인이 있다고 언급. 첫째는 현재 소득에서 소비자지출의 증가이고, 둘째는 자본가의 투자증가이고, 셋째는 정부당국이 차입이나 화폐발행을 통한 지출로 추가소득을 창조하기 위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 소비자의 대부분은 노동자이기 때문에, 실업률이 높고 임금이 낮은 시기 동안 필요한 규모의 소비지출 증가는 가능하지 않다. 기업투자는 결국 실현될 것이지만, 오직 정부당국의 지출로 흐름이 바뀌고 난 다음이다. 공공 일자리를 창출하는 공용에 대규모 정부투자가 먼저 일어나야 하고 오직 그런 다음에야 민간투자가 시작된다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이 총투자를 회복하는 것은 경제회복을 만드는 데 필수이다. 하지만 심각한 침체에서 개별 자본가의 투자는 비합리적이다. 그래서 각 자본가들은 회복의 증거, 즉 다른 자본가들이 생산적 지출을 수행하는 증거가 있을 때까지 투자를 미룰 것임. 따라서 구조적 모순이 자리잡는다. 각 투자자들이 다른 투자자들이 투자할 때까지 투자하지 않느다면, 어떤 자본가도 투자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이 투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린다. 민간투자 체계에 외부 자극 부재로 불황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민간시장에 외부의 힘이 가해질 수 있다면 오직 회복이 가능하다. 정부가 구조하도록 하라. 따라서 총수요의 붕괴가 불황을 이르켰다는 것이다. 수요의 회복을 위해 외부개입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경제는 불황에 계속 빠져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케인즈의 설명은 두가지 결함이 있다. 첫째, 그것은 왜 총수요가 갑자기 붕괴했는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과관계의 설명이 아니다. 둘째, 그것은 정부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채택되거나 정부정책의 동기로소 사용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대부분 국가들의 경제가 1932년 후에 저절로 회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대불황과 2차대전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가 일단 깊은 불황에 빠져들면, 경제팽창의 새로운 시기가 가능하려면 자본주의가 이전에 수십년 동안 가치로 축적한 모든 것의 부단하고 깊은 파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를 피하면서 자본주의 부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대불황을 다루는 그의 처방이 루즈벨트와 미국인으로부터 퇴짜를 맞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는 전쟁상황을 제외하고는 나의 주장이 증명될 수 있는 대단한 경험을 만드는데 필요한 규모의 지출을 조직하기에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다고 케인즈는 언급. 전쟁은 결정적으로 대불황을 끝냈다. 미국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었고 많은 부문이 군수품 생산에 맞춰졌고, 또는 완전히 군수품에 의존했다. 대불황 기간동안에 전쟁이 낳은 과학과 기술의 빠른 변화가 계속되었고, 강화된 추세가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미국을 제외한 모든 주요 경제국들이 파괴됨에 따라, 미국 자본주의는 1945년 이후 정치 및 경제주도권을 획득했다.
- 하이먼 민스키에게 자본주의 생산과정, 즉 실물경제에서 결함은 없고, 오직 화폐라는 가상과 생산과 소비사이의 금융중개에 있다. 부채가 쌓여 가면서 이는 그런 과정에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불러 일으킨다. 헤지 대출자, 투기대출자, 폰지 대출자 등 세종류의 대출자가 있다. 헤지 대출자는 대출하고 나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고, 투기대출자는 이자만 상환하는데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자산가격 상승에 의존하고, 폰지 대출자는 더 많이 대출하여 이자를 상환. 호황 동안에는 헤지 대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투기대출자와 폰지 대출자의 비율이 늘어나서 부채 피라미드가 무너지기 시작할 대에 불안정성의 위험에 길을 열어줌. 이런 부채위기의 실제 도화선은 07년처럼 자산시장에 있을 수 있고, 2000년처럼 주식에 있을 수 있다. 투자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레버리지와 부채에 대한 의존이 더 커질수록 붕괴의 가능성도 더 커짐. 부채상환을 보장할 수 있을 만큼 주택가격이 충분히 상승하지 않게 되면, 갑자기 위험을 싫어하게 되고, 부채축소를 바라게 되는데, 이것이 07년과 같은 민스키의 순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 경기순환 가운데 호경기는 정부가 현재 이자율의 유지를 바라기보다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더 많이 공급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따라서 현재 이자율은 하락하기 시작함. 대출가능한 자금이 수요를 초과하고, 그러면 이는 비생산부문에서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02~07년 주택시장 호황의 경우가 그렇다. 호경기 동안의 이런 실수는 오직 불경기의 시장에서 드러난다.
-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이윤율 법칙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위기는 기술적 고장이었고, 경제의 금융부문에서 즉 불로소득 부분에서 그리고 가치 또는 소득의 분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생산부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었따. 케인즈는 위기가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즉 투자와 소비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소가 있고, 이는 이윤과 임금의 감소를 일으킨다는 것. 반대로 마르크스는 이윤에서 시작한다고 제시한다. 이윤이 감소하면, 자본가들이 투자를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해고시키며, 임금이 하락하고, 소비가 감소한다. 그러고 나서 유효수요의 부족이 있는데, 그러나 이는 야성적 충동의 감소나 신뢰의 부족 때문이 아니며, 또는 너무 높은 이자율 때문도 아니며, 이윤의 감소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에 있으며 금융부문에 있지 않다.
- 세계 자본주의의 생산과 투자는 이윤율이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부채가 충분하게 감소하여 투자를 위한 새로운 차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아주 높아서 실업과 임금제약을 통해 상승한 잉여가치율도 이윤율을 제대로 높이기에 충분치 않기 때문에 이윤율이 이전의 꼭짓점들보다 낮다는 것을 보았다. 자본주의 침체는 결국 생산과 자본가치를 충분하게 떨어뜨려서 살아나은 기업들의 이윤율을 높인다. 실업은 노동비용을 낮추고 파산과 기업인수는 자본비용을 떨어뜨린다. 기업들은 점점 생산을 다시 늘리고, 끝내 새로운 자본에 투자하고 직업이 없는 산업예비군에서 노동력을 고용하기 시작한다. 이는 투자자에 대한 수요를 촉진하고, 결국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비재를 구매하기 시작하고, 회복이 시작된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산업과 건설부문에서 유휴설비의 과잉이 많고, 기업, 정부, 가계 모두 여전히 떠안고 있는 부채규모가 커서 회복을 방해하고 있음.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수요에 필요한 것보다 생산설비를 30% 넘게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기록적으로 높은 수치. 이는 좀비기업들의 체계, 유휴생산수단, 비생산 노동자들을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채의 더 많은 대손상각을 위해 또 다른 침체가 필요할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
- 현재의 세계 저상장은 잠재 자본 수익률과 비교한 차입비용으로 보면 여전히 큰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부담의 반영이며, 따라서 성장을 이루는 데 여전히 큰 부채규모를 짊어지고 있는 부담의 반영이다. 침체가 하는일(유형자간과 무형자산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자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 기업과 정부의 부채를 상환하는 비용이 지속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기에, 새로운 침체가 쉽게 촉발될 수 있다. 침체는 이윤율의 의미있는 상승을 여전히 막고 있는 자본의 남은 과잉을 청소해줄 것이다. 그 동안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위기 이전 추세율보다 훨씬 낮게 유지되었고, 이와 함께 생산성 증가를 낳을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능력보다 낮은 상태에 있다. 장기불황은 계속된다.
- 자본주의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가지. 첫째는 이윤을 늘리고 투자를 재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노동력의 착취율을 높이는 것. 두번째는 약하고 수익성 없는 자본(기업)을 청산하거나 오래된 기계, 장비, 공장을 기업 회계장부에서 감가상각처리하는 것. 물론 자본가들은 침체후에 이윤량과 이윤율 회복을 모두 시도한다. 이번 위기에서는 이런 회복이 09년 중반 대침체의 바닥이후부터 오래 걸리고 있다. 자본저량의 가치하락과 이전에 축적한 부채축소를 진전시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으며, 심지어 통화정책이 이 진전을 막고 있다. 하지만 착취율 증가의 진전은 상당하다
- 유로위기는 정말로 국가부채 위기 혹은 재정위기가 아니다. 그 근원은 자본주의 실패에 있으며 거대한 은행 및 민간 신용위기에 있으며, 자본주의 실패에 대처하지 못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 중앙은행, 각료 이사회, 유럽의회 같은 비민주적 범유럽 자본주의 기구들의 무능력에 있다. 통화동맹을 비롯해 미국 및 아시아와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려는 프랑스와 독일의 야망은 근본적으로 실패했따. 하나로 통일된 자본주의 유럽이라는 원래의 꿈, 즉 생산, 노동, 금융의 자유시장이라는 원래의 꿈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림. 이제 단일 통화동맹이 위협받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야망이었다.
- 유럽연합 지도자들과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이런 신자유주의 해법의 진짜 목적은 보통 말하는 그런 성장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노동력의 착취를 높이는 것. 이는 이윤율을 북돋울 수 있고, 그러면 민간부문은 일자리 창출과 더 많은 국내총생산을 위해 투자하게 될 것인데, 물론 이는 자본주의가 그전에 다른 침체를 맞지 않았다고 가정하고서다. 그런 정채들은 아직까지 효과가 없었다. 유로존에서 약한 자본주의 경제국들의 경우에 그런 정책들은 끔찍했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키프로스, 슬로베니아, 아일랜드의 인민들은 이미 그리스가 겪었던 청년 실업자 전체를 잃어버린 세대로 만들어 버리는 긴축을 앞으로 몇년간 더 견딜 수 있을까?
- 인도자본의 이윤율은 세계 경기침체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꾸준히 하락. 최근 이윤율은 더 많이 하락했고, 현재는 80년대 수준보다 약 20% 낮음. 2000년대 초반 두자리수 경제성장의 호황기 때는 모든 이야기가 인도의 소프트웨어 외주제작산업과 새로운 자동차 공장에 관한 것이었는데, 노동에게로 분배되는 가치의 몫을 급격하게 삭감하지 않고는 그런 호황을 돌이킬 가능성은 없어 보임. 모디노믹스는 충분한 성장과 이윤율 개선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인도 자본주의의 실패를 해결하지 못할 것임
- 주류경제학의 주장은 중국이 이른바 중간 소득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완전한 소비주도 자본주의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신흥경제국들은 대자본 투자와 값싼 노동력과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수출품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데, 중국 모델이 그렇다. 하지만 60년에 중간소득이었던 101개 국가가운데, 08년까지 단지 13개 국가만 그 집단에서 떨어져나와 선진국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 주류 경제학은 내수 소비진작으로 전환이 있어야 하며, 국가주도 경제는 이것을 할 수 없다고 주장. 그래서 그 주장은 자유무역과 자본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좌파 경제학자 존 로스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소비를 늘리는 것이 실제로 경제정책의 목표인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는 중국의 국내총생산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몫을 급격하게 늘리는 생각과 혼동되어 왔따고 존 로스는 주장. 이 두가지 목표는 실제 서로 모순이 되는데, 국내총생산 성장이 크게 투자때문에 일어나고, 투자가 지속성 있는 소비를 뒷받침하기 때문. 하지만 국내총생산에서 소비비중이 급격히 증가하면 투자규모를 축소하고, 그리하여 의도와 다르게 국내총생산 하락을 낳으며, 그 결과 소비성장률 하락을 만든다. 이는 왜 소비주도 성장이 혼동된 생각인지 보여준다. 중국 공산당 3중전회의에서 앞으로 5년에서 10년동안 무엇을 할지 논의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일반철학에서 변화는 없으며, 따라서 국영기업부문의 우위유지에도 변화가 없었다. 더 많은 민주주의나 인민들에 의한 법체계의 관리와 결정을 위한 어떤 조치도 없었다. 반대로 지도부는 중국 인민들을 감시, 통제하고 반체제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서 더욱 억압적인 국가안보 서비스를 세워나가고 있다.
- 중국 정치 엘리트들이 동의한 정책의 목표와 정책제안에는 중국 경제, 사회, 정치모델의 성격을 바꾸겠다는 것은 없다. 중국 지도부 다수는 공산당 간부들이 모든 수준에서 지휘하고 있는 국영기업이 지배하는 경제모델을 계속 유지할 것임. 시장이 경제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고, 가치의 법칙이 가격, 노동자의 소득, 국내거래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 엘리트들은 세계은행과 친자본주의 요소가 원하는 자본주의 길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위기나 침체를 촉발하지 않으면서 이런 가운데 길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도시 노동계급 인구가 국가운영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시작할 때 정치 엘리트들은 아래로부터 폭발에 직면할 것인가? 존 로스가 지적하듯이 중국의 산업 성장은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다. 적어도 앞으로 10년 더 중국의 연간실질 성장률은 최소한 6~7%가 될 것이다. 노동인구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곧 꼭짓점에 도달할 것이고, 산업기계에 결합될 농촌 노동자들과 소농들이 수십만명 있다. 중국은 팽창을 지속할 필요 때문에 점점 더 많이 세계의 원료를 빨아들이고 있다. 중국의 위대한 경제기적이 고갈될 날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 현재 우리는 다른 이윤율 하강 파동에 있는데 2018년이 지나서야 바닥에 도달할 것 같다. 그래서 산출과 고용의 침체는 적어도 197475년과 1980~82년처럼 심각하고 장기간 계속될 것이다. 이는 현재 이윤의 하강파동이 82년 시작된 콘드라티예프 가격순환의 하강파동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면서 2018년 즈음을 지나서야 바닥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 세차례의 불황은 콘드라티예프 순환의 겨울국면과 함께 발생. 이 장기불황들은 역시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로 발전하는 것과 함께 일어났다. 19세기 종반 장기불황은 제국주의 발전과 식민지로의 금융자본의 팽창과 세계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열강들 간 전쟁을 위한 자극제였고, 이는 결국 1차대전을 초래. 이 대불황은 새로운 제국주이 전쟁을 초래했고, 1차대전 때까지 해결되지 못함. 패권을 가진 제국주의 강국 대영제국은 1914~18년 전쟁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지만, 상승하던 패권국 미국은 제국주이 패권의 해체를 맡으려고 준비하거나 맡으려고 하지 않았따. 제국주의 경쟁국인 독일가 일본은 더 많은 전리품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2차대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45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 현재 콘드라티예프 순환의 가을국면(1982~2000)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을 보았다. 현재 장기불황은 미국 제국주의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는데, 미국의 패권은 이미 중국, 브라질, 인도, 러시아 같은 새로운 야심찬 강대국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새로운 경쟁이 앞으로 10년 정도의 기간동안 커다란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협이 되고 있다. 결국 현재 전개되고 있는 콘드라티예프 순환의 겨울국면은 콘드라티예프 봄 국면에 길을 내주면서 현대 자본주이의 다섯번째 콘드라티예프 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겨울 국면 동안에 여러번의 침체를 겪으면서 자본의 가치가 파괴된 뒤에 새로운 상승국면으로 접어들 것. 2030년대 중반부터 우리는 콘드라티예프 순환의 여름국면에 접어들 것이며, 이때 이윤율은 하락할 것이고, 자본주의는 다시 위기에 빠질 것이고, 계급투쟁은 강화될 것임. 이는 2050년대까지 지속될 것 같다. 이야말로 우리가 장기적 관점이라 부르는 것이다.
- 신고전파 경제학은 총요소 생산성이라 부르는 더 복잡한 생산성 척도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는 고용된 노동력의 생산성뿐만 아니라 혁신으로 이룬 생산성도 측정. 그 척도는 실제로는 실질 국내총생산과 노동 및 자본 투입물의 생산성 차이에서 얻은 나머지다. 그래서 실제로 다소 위조된 수치다. 하지만 콘퍼런스 보드는 그 수치를 액면가대로 고려하여 2013년 세계 경제의 총요소 생산성이 0미만으로 떨어졌고 이는 자원의 최적배분과 사용에서 효율성이 정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더 나쁜 것은 생산성 성장이 둔화되면서 세계 물가상승률도 둔화하고 있고, 몇몇 주요 경제국들은 물가하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황의 또 다른 전형적 지표다
- 노아 스미스(케인즈 학파 경제학자)는 최근 불황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 불황의 설명은 아직도 축소하고 잇는 부채와 이윤의 낮은 기대와 낮은 신뢰이다. 역시, 이윤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는 왜 자본이 유휴하고 있는지에 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충분히 이윤을 벌지 못하기에 그런 것 아닌가? 이윤율을 되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번의 침체를 통해서이다. 이런 침체는 생산적이지 못한 축적된 자본의 가치를 파괴하고 그리하여 남아있는 자본가치와 비교하여 이윤이 상승하고 자본축적의 과정이 재개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30년대 대불황 때와 같이 죽은 자본의 대량파괴 없이는 자본주의는 이렇게 긴 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1880년대와 1890년대동안 자본주의은 여러번의 커다란 침체를 겪고 나서야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술이 진보하면서 산업의 자본집약도는 높아지고, 노동집약도는 낮아짐. 그리고 기술은 새로운 산업을 창조할 수 있고, 이런 산업들은 거의 언제나 자본집약적이다. 따라서 자본과 노동사이의 투쟁은 강화된다
- 30년대 케인즈는 세계가 사회격차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의 세계화는 전례 없는 사회 불평등을 만들어냄. 노동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되고, 생산과정이 국가간에 대륙간에 서로 침투하고 겹쳐지고, 부유한 엘리트들의 힘과 부가 커지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착취와 억압이 강화되었다. 사실상 모든 국가들에서 행해진 연구는 최근 몇십년간 노동자들의 일자리 불안과 일터에서 억압의 체감이 늘었다는 것을 보여줌. 로봇이라면 달라질 수 있을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주요 이유는 첫째, 마르크스 주의 경제학 이론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는데, 오직 인간이 어떤 일을 하거나 노동을 수행할 때만 물건이나 서비스가 생산된다. 자연에서 제공된 것 외에는 그렇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오직 노동만이 자본주의에서 가치를 생산할 수 있고 가치는 자본주의에 특유한 것이다. 살아있는 노동은 물건을 창조하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가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생산하는 물건의 실체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수단을 통제하며, 노동자가 창조한 가치를 전유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사용하게 할 뿐이다. 자본 자체로는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제 기술, 소비상품, 서비스의 전체 세계가 노동을 수행할 살아있는 노동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고, 로봇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재화와 서비스는 생산되지만 가치의 창조는 일어나지 않을 것임. 마틴 포드는 '더 많은 기계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수록, 평균노동자들이 부가하는 가치는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축적은 로봇이 완전히 장악하기 훨씬 전에 멈출 것이다. 왜냐하면 수익성이 자본편향 기술의 중압을 받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운동법칙, 즉 이윤율 저하 경향이 작동할 것이다. 자본편향 기술이 증가하면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상승할 것이고, 따라서 노동은 결국 이윤율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가치를 생산할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에서는 절대로 로봇사회에 도달하지 못하며, 노동하지 않는 여가사회로 이를 수 없다. 위기와 사회폭발이 그런 사회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방해할 것이다. 노동에게 분배되는 가치 몫의 감소로 이미 이런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집적의 증가를 통해 자본이 몇몇 손아귀에 축적되고 있다. 이는 노동이 생산한 가치를 자본이 전유하고 99%에게 분배되는 몫을 최소로 만드는 것을 보장한다. 이는 완전경쟁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독점이 아니라 소수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독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순전한 기능이며, 자본주의의 전부이다. 노동분배율이 줄어들게 만드는 것은 독점기업을 가진 악덕 자본가에게 가는 지대 증가나 독점력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다. 미국과 다른 주요 자본주의 경제국들의 자본주의 부문에서 노동분배율이 감소한 이유는 세계화와 해외의 값싼 노동력, 노조의 파괴, 더 큰 규모의 산업예비군 창조(실업과 불완전 취업), 복리후생비와 종신고용 보장의 종말로 된 자본편향 증가와 기술증가이다. 이는 정확하게 마르크스의 노동계급의 궁핍화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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