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이 주도해야만 좋은 인생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관념은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三分說'에서 나온 인생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는 일상생활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냉정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예기치 못하는 상황을 겪게 됩니 다. 인간관계에서 매우 화가 나는 일이 생겨서 상대방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다' 혹은 '어떻게든 무릎을 꿇리고 싶다'라는 생 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돈이나 연애 문제에서 큰 유혹에 빠져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지요. 이런 위험한 선택을 하려고 할 때 냉정한 사고가 활동하면 일시적인 혼란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다 좋은 방향을 찾고 위험을 피할 수 있지요. 이 지혜는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있는 사람에게 유익 합니다. 우울·초조 · 공포에 휩쓸릴 때 그 감정이 아무리 맹위를 떨치고 있고 이성의 힘이 약하더라도 냉정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다면, 욕망의 영혼이 만들어내는 비뚤어진 관념에 마음이 점령당할 일이 없습니다. 이성은 마음속 깊은 어둠에 나타난 한 점의 작은 빛과 같습니 다. 그 한 점의 빛만 있으면 사람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해 걷게 되고, 이윽고 빛이 그 사람을 비추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느끼던 우울·초조·공포는 사실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르 고, 과도하게 확대되고 비뚤어진 사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 다. 그러고 나면 마음 안에 있던 안개가 걷히고, 혼란스럽던 감 정은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기억하세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이성의 영혼을 유지하면 정신을 어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 니체는 이성으로 욕망을 견제하는 방법에 반대 의견을 내고, 비교적 균형 잡힌 제안을 했습니다. 니체는 욕망을 지나치게 방임하면 인생에 혼란을 가져오지만, 적절하게 방임하면서 잘 컨트롤하면 다양한 인생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생이 되려면 이성적인 훌륭함뿐 아니라 감정적인 욕망에 취한 아름다움도 섞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확실히 이성이 주도하는 인생을 살기만 하면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오히려 니체의 말처럼 욕망을 방임한 상태에서 정도 를 넘지 않고, 적절하게 컨트롤하면서 욕망을 향유하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삶은 계속해서 평균대 위를 걷는 것과 같은데, 그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정말로 이성과 욕망을 적절히 컨트롤하며 살 수만 있다면 미학에 더욱 부합하는 인생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그 렇게 산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진정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 는 이름 없는 거리의 은자이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조용히 아름다운 삶을 향유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존엄은 명예를 소유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명예를 누릴 자격을 유지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 어느 날, 좌선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마음은 고요하지만 만약 그 자아가 외관상의 모습에 불과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저런 생각에 괴로워할 일이 없어집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행복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자아라는 관념은 사고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서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오는 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흄의 자아를 의심한다는 가설을 도입하면 고뇌를 초래하는 사고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아라는 관념이 활동하지 않게 되면, 그와 동시에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대부분의 원인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더는 체면을 신경 쓰거나 타인의 눈을 두려워할 필요 가 없어집니다. 어쩌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삶의 필연적인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요.
- 오랫동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던 탓에 복사뼈가 아파서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제게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딱 한마디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는 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복사뼈의 아픔은 복사뼈에 맡기고,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좌선을 하게.” 매우 이상한 말이지만, 당시의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말에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나'와 아픔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프다는 사실에는 변 함이 없습니다. 그 아픔은 '나의 아픔 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라는 관념과 '아픔'이 분리되자 아픔이 더는 방해꾼이 되지 못했고, 마치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나의 아픔을 냉정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비롯하여 흄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은 이성적인 사고를 매우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이성에 기반을 두면 근본적인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다고 인식했지요. 하지만 흄은 이성을 철저하게 의심하고, 그 전통을 파헤쳤습니다. 그 후에 등장한 칸트는 “이성을 어떻게 파악하면 좋을까?" 라는 의문을 품고, 이에 대해 더욱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발견한뒤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했습니다. 우선 칸트는 흄의 회의에 찬동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지식 은 경험에서 온다'라는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플 라톤이나 데카르트처럼 지식(예를 들어 인과)이 선천적인 것으 로 생각했습니다.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런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 원인이나, 다른 문화 아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 람이 공통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실제로 칸트의 주장은 현대의 심리학에서도 상 당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언어나 지식을 아직 습득하지 못한 아기에게도 선천적인 지식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이 현재 도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지요.
-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이성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신의 정의는 무한하며 영원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해 있지만,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삼라만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식 형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식 형식을 초월해서 사고할 수 없다. 즉 애초에 우리는 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신의 정의를 바꾸지 않는 한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 는 이성으로 토론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칸트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볼까요? 우리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설령 신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인 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신의 대변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인류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전한 문자 언어를 사용해 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실로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가 능성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한마디 한마디에는 수많은 전제와 숨겨진 맥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신의 진짜 생각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신의 의사를 전하는 데 그 문자 언어가 신의 보증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 람이 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의 말은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백번 양보해서 신의 생각이 어찌어찌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오해 할 위험성이 큰 데다가 오해한 사람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 조차 깨닫기 어렵겠지요. 결국 신은 우리의 이성이 가진 한계의 바깥쪽에 존재한다고 정의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를 뚫고 지나 갈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신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심히 의문입니다.
- 칸트의 '우선 한계를 생각한다'라는 사고방식은 일상생활에서도 도움이 됩니다. 그는 우선 기본적인 제약을 생각하고, 새롭게 무엇에 희망을 품으면 좋을지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환상을 떨쳐버리고, 헛수고로 끝날 만한 인생으로 향하는 것을 저지합니다. 그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면 추구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목표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는 “우리 생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 생명의 유한함을 도외시하고 지식만 따르면 평안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려고 하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보면서 스스로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말은 인생에는 끝이 있는데 지식에는 끝 이 없고, 끝이 있는 인생에서 끝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일은 헛 수고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계를 받아들이고 지식을 구하는 방향을 수정해보면 어떨까요?
- 쇼펜하우어는 왜 모든 것은 계속해서 변동한다고 주장한 걸까요? 그는 이런 의 문에 “의지가 모든 것을 움직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에 담긴 '의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의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는 자연 안의 온갖 힘을 가리킵니다. 쇼펜하우어는 폭풍우나 천둥도 의지일 뿐 아니라 생물의 생명력, 충동, 본능, 욕망까지도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의지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절대로 쉬지 않고 자신을 키워가기 위해 계속해서 활동합니다. 이처럼 의지는 실 체는 보이지 않지만 에너지로 가득한 무언가를 뜻합니다. 이 의지는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솟구쳐 오르는 충동과 욕망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 또한 의지의 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강한 마음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 어질 때 충족감이나 쾌감을 느낍니다. 사실 이는 자신이 의지의 충동에 따라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전쟁이나 싸움에 지는 일이 굴욕감이나 고통을 낳는 이유는 상대방 안에 있는 의 지에 졌기 때문입니다.
- 고독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고독이라고 하면 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평범한 교제도 없이 외톨이가 된 쓸쓸한 상황을 흔히 떠올립니다. 영어로 표기하면 loneliness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영어에는 또 하나의 고독이 있습니다. 바로 'solitude' 입니다. 쇼펜하우어가 권한 고독은 바로 이것 입니다. 이 고독에는 우선 세상의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짝 떨어 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세상에 등을 돌리는 것이지요. 또한 세상에 범람하는 형편없는 가치관이나 투쟁에 구속당하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 의지를 속박하는 손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고독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무리 지어 행동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무리 사이에서 활동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가치관을 맞춰야 하므로,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이탈하기를 권합니다. 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유의 하나이며 사교를 위한 번거로움, 배려나 양보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혼자 있는 상황을 여유롭게 즐기는 일입니다. 만약 스스로 고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 타인의 의지에 휘둘리거나 생각의 노예가 되어 사는 날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의지에 농락당하는 일입니다. 이런 삶이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고민을 낳을지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삶의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세속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져 가능한 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고독에 외로움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유쾌할 정도로 자유로우며 풍족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갖춰져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 클수록 밖에서 얻어야 하는 것들은 적어지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 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고독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 니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가치관을 뿌리부터 의심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니체는 시적인 느낌을 주는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 충격적인 문장만 유명해지고 말았지만, 그의 모든 업적을 들여다보면 결국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한 가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 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자기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라'라는 것 입니다. 니체는 왜 각자가 자기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을까요? 만약 당신이 세상의 모든 가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 부자로 태어난 자가 가난하게 태어난 자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재미 없는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가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 가치의 거푸집에 자신 을 끼워 맞추며 살려는 태도를 취하기 쉬우니 말입니다.
- 세간의 기준에 따라 실패 없이 살아왔는데 그 대가는 어째서 한없는 허무일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보다는 세상에 맞춰 살았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맞춰 살아왔다'라는 말은 세상의 상식을 자신의 상식으로 삼고, 세상의 윤리 도덕을 자신의 윤리 도덕으로 삼아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의 방 식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지요. 물론 이런 삶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에게는 훌륭한 분별력을 가진 사회인으로 여겨지겠지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마음 한편에 공허를 안게 됩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의 분주함으로 덮으며 스스로 눈속임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지요. 만약 100퍼센트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다면 허무가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전혀 없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입증할 훈장, 남들이 보내는 존경의 시선, 멋들어진 직 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답게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테니까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흔히 자기 자신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란 본능과 의지 그리고 능력의 가능성이 응축된 것으로, 자 기 자신으로 사는 일은 이를 모두 해방해 충분히 활동하게 함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나 고양이, 아기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 삽니다. 계획이나 어떤 의도 없이 그저 천진하게 살지요. 기쁨이 나 웃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조금의 후회도 없습니다. 내일의 일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의 손익조차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한 계속해서 기분 좋게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구의 제한도 받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의지와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목표도 제한도 없는 끝없는 수고, 이것이 의지의 핵심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니체가 전하는 지혜를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자신을 온전히 살리는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인생이라는 춤의 스텝 하나하나를 스스로 정하며 자신만의 안무를 짜야 한다고 말이죠. 니체는 그 일이 가능한 사람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살았던 19세기까지의 이름입니다. 그로부터 반세기 정도의 세월이 흘렀고, 이 단어가 뜻하는 의미는 조금바뀌었지요. 현재는 그런 이들을 자기실현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능동적으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며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에 성공하려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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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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