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고전에는 친구관계의 변화무쌍함을 표현한 문장이 많다.
요컨대 우리가 흔히 친구나 우정이라 부르는 것은 어떤 기회나 이익으로 맺어진 지우관계이거나 친교에 불과하며, 우리의 마음 또한 단지 그것으로 이어진데 지나지 않는다. (몽테뮤, 수상록)
몽테뉴는 친구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요인을 기회 또는 이익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진급이나 전근, 이사와 같은 기회가 왔을때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함께 있으면 편안하다든가 이야기가 통한다는 점도 넓은 의미에서 이익으로 간주) 친구를 사귄다. 마음이 달라지면 이익도 달라지고 친구관계도 달라진다. 이 밖에도 몽테뉴가 친구관계를 두고 한 말이 있다. '주의와 경계를 거듭하며 고삐를 조이고 나아가야 한다', '언젠가는 미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랑하라. 언젠가는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미워하라.'
- 우리는 단순한 계기나 이익만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한결같은 우정을 갈망한다. 몽테뉴 또한 세상을 떠난 친구를 떠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내가 말하는 우정이란 두 사람의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어디가 이음매인지도 모를 정도의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묻는다면, '그 사람이라서, 그리고 그게 나라서'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 책을 읽다보면 철학자의 다양한 생각과 만난다.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다가,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는 생각할 장면이 넘쳐난다. 책의 세계에만 틀어박히지 말고 멈춰 서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라. 평범한 순간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모리 히로노리)
- 그리스인에서 비롯된 서구 합리주의 전통은 곧 비판적 논의의 전통이다. 거기서는 다양한 주장과 이론을 논박하기 위한 확인과 음미가 이루어진다. 이 비판적, 합리적 방법을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증명법으로 여겨서는 안됨. 언제든 합의를 얻을 수 있음을 보증하는 방법도 아니다. 이 비판적, 합리적 방법의 가치는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이 토론으로 어느 정도 자기 의견을 바구고 토론을 끝내가 헤어질 때에는 전보다 현명해지는 데 있다. (포퍼)
- 토론은 공통된 언어를 가지고 공통된 기본전제를 수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들 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토론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 사람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포퍼)
- 제도는 확실하고 명료한 성 담론을, 지극히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계속하게 한다. 여러 권력은 그런 담론을 듣고, 또 다른 사람들이 계속 담론하게 만드는 일에 사로잡힌 듯 하다. (푸코)
아마 권력, 제도 등 언뜻 성과 관련없어 보이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어렵게 느껴질수도 있다. 두가지 모두 사회의 모습, 사회관계(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단어다. 여기서 푸코가 무어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는 편이 낫겠다. 이를테면 19세기 유럽에서는 소년의 자위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자위는 청소년의 신체발달을 방해하니 좋지 않다'는 설이 제기됨. 하지만 푸코는 이 주장을 자위가 나쁜 것이라서 금지했다는 식의 단순한 관점으로 보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 자위에 대해 불결하다거나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등의 비난은 존재했다. 하지만 자위행위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몰래 하는 행위에 어른들,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참견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푸코는 이를 두고 자위는 입구 또는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소년들, 사회규율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는 아이들을 통제하는 데, 그들의 성만큼 실마리로 삼기 편한 것은 없었다. 소년들의 성생활을 파악하고 간섭하는 일은 그들의 삶 전반을 감시하고 그들이 규율을 따르게 하는 구실을 톡톡히 했다. 다른 예도 있다. 자위행위에 간섭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을 무렵, 부부가 가지는 자녀의 수는 자연에 맡기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유럽은 출산율은 높았지만 영유아 사망률도 높아 태어난 아이들이 차례차례로 죽어갔다. 이렇듯 '가난한 사람은 자식이 많은' 현상을 없애기 위해 일반대중에게 피임과 절도 있는 성생활을 호소. 태어난 아이가 죽는 이유는 생활이 궁핍한데도 성행위를 자제하지 않거나 피임을 하지 못해 잇따라 아이를 낳는, 빈곤가정의 부부 성행동 탓이라고들 여겼다. 푸코는 이에 대해서도 단순히 성생활의 절제, 즉 금지가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고 주장. 사람들의 성 행동을 파악하고, 그것을 바꾸는 것은 그들의 생활 스타일 구석구석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테면 근로자는 어떤 집에 살고 방은 어떻게 배정되어 있는가, 근로자 가족은 하루 일과가 어떻게, 급여는 어떻게 소비하는가, 누가 어떤 지출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 이런 일은 사람들의 성 행동과 맞물려 있다. 지출형태에는 부부간의 힘 관계와 생활양식 등도 반영된다. 이러한 성적 사항은 사람들의 행동 전반을 파악하여 생활 스타일을 유도하고 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삶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이 말에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까. 무엇보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180도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생에 아직 기대할 만한 것이 남아있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새잉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 철학 용어로 표현한다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묻지 말고 우리 자신이 물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중략) 그럼 어떻게 해야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기거나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 적절한 태도로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다. 삶이란 삶에 대한 물음에 올바르게 답할 의무, 삶이 각자에게 던져준 과제를 완수할 의무, 시시각각으로 주어진 요청을 충족할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밤과 안개)
- 프랭클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삶은 수동적인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가 처하는 상황을 올바르게 마주하고 행동하다 보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야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된다고 여겼다.
- 프랭클은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주위에 살가운 말을 건네고 마지막 빵까지 아낌없이 주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그때마다 주어진 요청에 구체적 행동과 태도로 응한 사람들이다.
- 이 요청(삶이 우리에게 주는 요청)과 존재의 의미는 사람마다, 순간마다 변화한다. 따라서 삶의 의미는 일반론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으며, 의미에 대한 물음에 일반론으로 답할수도 있다. 여기서 삶이란 결코 막연하지 않고 늘 구체적이며 따라서 삶이 우리에게 주는 요청도 지극히 구체적이다. (중략) 구체적 상황은 어떨 때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요구하며, 어떨 때에는 인생을 음미하며 진가를 발휘할 기회를 주며, 또 어떨 때는 담담히 운명을 감내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단 한 번, 둘도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그때마다 물음에 대한 단 하나의 올바른 답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답은 구체적 상황 속에 이미 준비돼 있다. (빅터 프랭클)
- 냉혹한 상황에서 이미 준비된 답을 모든 이가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미래를 잃어버리면 몸과 마음 전부 무너지지 않을까. 이에 대해 프랭클은 비참한 상황이 주는 운명을 똑바로 마주하다 보면 전 우주에서 자기에게만 주어진 삶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운명이 인간을 괴롭힌다면 사람은 이 고통을 단 한 번 부과되는 책무로 여겨야 한다. 인간은 고통과 마주하고 고통으로 가득한 운명과 함께 전 우주에서 단 한 번, 둘도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에 이르러야 한다 아무도 그 사람의 고통을 없애줄 수는 없다. 아무도 그 사람 대신 고통에 시달릴 수는 없다. 이 운명을 타고난 그 사람 스스로가 이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뭔가를 이룰 단 하나의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은 결코 비현실적 사유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이런한 생각은 하나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중략) 우리에게 삶의 의미란 죽음가지 포함한 삶 전체를 의미했고, 살아 있다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은, 고통과 죽음을 포함한 총체적 삶의 의미였다. 그 의미를 찾으려 우리는 발버둥 쳤다. (빅터 프랭클)
- 고통은 오직 당사자만 겪을 수 있다. 프랭클이 추구한 것은 단순한 삶의 의미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고통, 죽음과 올바로 마주하고 행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고통과 죽음까지 포함한 총체적 삶의 의미다. 여기에는 삶읠 쉽게 포기하면 안된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프랭클이 겪은 것은 상상이상으로 가혹했다. 하지만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삶의 의미를 중시한다는 그의 생각이 수용소 생활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 프랭클은 강제수용소 경험을 특권화화지 않았다. 이미 수용소에 끌려가지 전에 의미 구축을 중심으로 정신건강을 심리치료(로고테라피)를 확립한 상태였음. 일반적으로 참혹한 경험은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이 되고 종종 불안과 불면증 등의 과도한 상태, 심리적 외상과 관련된 사물을 회피하는 경향, 충격적 사건에 대한 간접체험 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행됨. 이렇듯 일상의 스트레스를 넘어선 가혹한 경험은 인간의 기능을 손상시키는 해로운 사건인 경우가 대부분. 그런 사태는 가급적 피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움. 하지만 최근 심리적 외상이라는 극히 가혹한 경험이 나쁜 결과만 남기지는 않는다는 연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참혹한 경험을 한 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변했고 성장했다는 느낌, 외상후성장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기 때문. 프랭클도 만년에는 수용소를 경험했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남김. 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꽤 오랜 세월이 필요할 듯하다.
- 밀이 태어나기 직전 이 세상을 떠난 임마누엘 칸트는 행복을 윤리적 원리로 보는 입장을 행복주의라 부르며 거세게 비판. 행복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그대로 공리주의에 적용해볼 수 있다. 그 대목이 확연히 드러난 문헌을 살펴보자.
행복의 원리에 행동방침(준칙)을 부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행복을 고찰대상으로 삼았다고 해도 이 원리는 의지의 법칙으로 유용한 행동방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즉, 행복에 대한 인식은 절대적으로 경험에 기초하며 행복에 관한 개인의 판단은 개인 스스로의 의견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 게다가 각 개인의 의견 자체도 때에 따라 크게 바뀔 가능성이 있으므로 행복에 관한 일반적(평균으로 흔히 통용되는) 규칙은 있을 수 있어도, 보편적(언제나 반드시 통용되는) 규칙은 없다. 바꿔말하면 평균적으로 가장 잘 들어맞는 규칙은 있어도 언제나 반드시 통용되는 규칙은 없으므로 어떤 실천법칙도 이 행복의 원리에 기초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중략) 이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 단 하나의 실천법칙을 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이성과 의지를 지닌 모든 사람에게 타당해야 하므로 객관적으로 필연성이 있다고 간주된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 칸트는 행복주의를 비판하며 행복추구가 나쁘다거나 쓸데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판의 핵심은,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임을 인정하되 윤리원리는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제까지 자주 오해를 산 대목이다. 행복이 윤리원리가 될 수 없다고 칸트가 생각한 이유는 다음 두가지로 요약됨
(1) 행복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이므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윤리의 원리가 될 수는 없다.
(2) 무엇을 행복으로 느끼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며 같은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 달라지므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윤리원리가 될 수 없다.
위 문헌에서는 이유 (2)가 전면으로 드러난다. 사람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다르므로 저마다 자신의 행복관에 따라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관을 기준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면 안된다고 칸트는 입이 아프게 주장했따. 아무도 여러분의 행복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다수의 행복을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면 결국 누군가의 행복을 다른 누군가에게 밀어붙이게 된다. 그러므로 다수의 행복에 기초한 윤리원리에는 보편성이 없다. 이유 (1)은 다소 난해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해석해보자.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므로 굳이 다수의 행복을 증대하자고 생각하지 않아도 각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다보면 저절로 다수의 행복이 최대로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모든 사람의 행복, 즉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굳이 생각해야 한다면 거기에는 행복과는 다른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활약한 존 스튜어트 밀은 대중사회가 도래할 것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사회의 동조압력이 강해지는 현상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스스로 본받고 자신만의 방식대로는 살려고 하지 않았다. 밀은 사람들이 관습의지배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은 기계와 같다고 여겼다. 스스로 삶을 결정하느 것이야말로 인간의 독자적 능력이며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 주장. 인간은 양이 아니다. 양도 구별이 안 될 만큼 똑같지는 않다. 밀은 인간은 제각기 다른 존재라고 생각. 옷과 신발도 사이즈 하나만 존재할 수 없는데, 하물며 모두가 똑같이 살면 행복해질리 없다고 생각. 저마다 취향이 다르며 어디서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을 느끼느냐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한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일도 다른 사라에게는 고통만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가 다양한 삶을 보장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삶을 찾아 행복한 인생을 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었다.
- 인간은 태어나서 한참 동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라면서 조금씩 다양한 일을 혼자 할 수 있게 되고, 그런 식으로 서서히 다양한 것에서 자유를 얻는다. 부모의 손을 떠나 학교를 떠나 작은 세계에서 넓은 세계로 진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서구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 인간은 교회에서 자유로워졌다. 17,18세기에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자연에서, 신분제 사회에서 자유로워졌다. '소극적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아가 적극적 자유(~를 향한 자유)', 즉 개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인생을 개척할 자유, 소중한 나를 실현할 자유까지 손에 넣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사실은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프롬은 보았다. 인간은 교회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신이라는,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 존재에 홀로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과 신분제 사회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대신 시장과 산업조직이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 던져저 늘 타인과 경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근대사회는 개인의 자류를 증대해했지만, 하녚ㄴ으로 사람이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커다란 힘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불안과 고독, 무력감도 증대하고 말았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꾀하다.
그러한 불안과 고독, 무력감을 견딜 수 없을 때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 프롬에 따르면 사람은 두가지 방법으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꾀한다. 우선 자기보다 힘이 있는 인간이나 집단에 동조해 자신을 버리고 거기에 일체화함으로써 (1) 불안과 고독을 외면하거나, (2) 자신에게도 힘이 있다고 믿는 방법이다. 이를 프롬은 권위주의라 불렀다. (1)의 경우 사람은 자신의 사고와 판단을 전부 타인에게 맡긴다. (2)의 경우 사람은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강자를 동경하고 권위를 칭송하는 한편 약자를 미워하고 괴롭히거나 몰아붙인다. 또 하나는 타인과 사회가 기대하는 '내'가 되어 주위와의 모순과 마찰을 없애서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지 않는 방법이다. 프롬은 이를 '기계적 획일성'이라 불렀다. 이 방법의 특징은 당사자는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는 모두와 똑같은 생가을 하고 있을 뿐인데, 모두가 좋아는 말을 듣고는 시도하고 입고 먹고 가보고 있을 뿐인데 당사자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굳게 믿는다. 자신의 자유가 사실은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며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모른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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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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