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히어로스

경영 2023. 3. 17. 12:15

- 삼성은 메모리 사업에 도전하기 약 8년 전인 1974년 말에 전자 시계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산업에 입문하였고, 입문 이후에는 삼성전자에서 필요로 하는 TV용 반도체의 내재화를 추진했다. 비록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ion) 메모 리와는 기술격차도 크고 종류도 다른 반도체였지만, 이 시기에 축 적한 반도체 경험이 훗날 삼성의 메모리 기술추격에 큰 도움이 되 었다. 이렇듯 삼성의 반도체 참여시기가 비교적 빨랐다는 점이 사 업을 성공으로 이끈 주요 요인 중 하나다.
- 한국반도체 인수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시작점이다. 한국반도체는 1974년 재미 공학자 강기동 박사가 전자 시계 칩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기업이다. 이 전자시계 칩은 CMOS(Complementary Metal-Oxide-Semiconductor)'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제품으로 실리콘밸리에 있었던 합작법인이 설계하고 부천에 소재한 한국반도체에서 생산하는 구도였다. CMOS 전자시계 칩 기술은 1971년 일본의 세이코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당시로는 첨단 기술이었다. 그러나 한국반도체는 회사를 설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오일쇼크로 자금난에 빠지게 된다.
한편, 1969년에 전자산업에 뛰어든 삼성전자는 자사 제품에 들 어가는 반도체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해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전 자제품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것은 이병철 회장의 설립 초기 마스터 플랜에 이미 담겨 있었지만, 반도체를 내재화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초대 사장이었던 강진구 사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한국반도체의 절반을 소유한 외국인 파트너가 지분 정리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진구 사장이 신속하게 이병철 회장의 승인을 얻 어 인수를 추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나머지 지분까지 인수함으로써 한국반도체는 완전한 삼성그룹 소유가 되었다. 
- 1979년 당시 독립기업이었던 삼성반도체는 한국반도체 시절부터 해오던 전자시계용 칩 사업과 삼성전자에서 필요로 하는 핵심 칩 개발 및 사업화를 주 사업으로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성과가 부진해 서 재무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전자시계 칩의 사업경쟁력도 뒤지고 있었고 삼성전자 제품의 반도체 내재화도 빠르게 추진할 수 없었기 때 문에 위기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로 편입되었고, 삼성전자 TV사업부 출신 김광호 사업부장이 수장으로 부임했다. 김광호 사업부장은 부임 이후 회사의 많은 부분을 혁 명적으로 바꾸었다. 수원의 삼성전자처럼 모두 회색 근무복을 착 용하게 했고, 결과 중심의 신속한 업무 보고를 요구하는 등 빠르고 강인한 기업문화를 추구하였다. 기업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경쟁 력이 취약한 회사를 정상화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반도체 시절부터 형성된 여유 있는 기업문화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간부와 엔지니어들이 회사를 떠났다. 김광호 사업부장이 조회시간에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한 명, 두 명 따로따로 사표를 써오지 말고 나갈 사람은 빨리 나가 달라"라고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 그러나 부임 초기의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자, 회사는 점차 근성 있고 빠른 실행력을 갖춘 조직으로 변모해갔다. 김광호 사업부장 의 강력한 추진력과 '이유 있는 실패를 용인하는 통 큰 리더십도 조직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회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 원들의 기숙사, 식당을 세심하게 챙기고 개선했다. "낭비는 철저 히 제거하되 쓸 돈은 아끼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삼성 반도체 특유의 현장 중시, 실행력 중시의 강인한 조직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매일 대하지 못하는 한참 위의 상사였지만, 나는 그의 현장 중시 리더십에 공감했다.
- VLSI 메모리반도체 사업에 관한 본격적인 준비는 1981년 가을에 부천에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하고 해외 기업들에 인력을 파견해 기술도 입을 타진한 일이 그 시작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82년에는 통 신과 반도체를 결합한 삼성반도체통신(주)을 출범시켰다. 당시 전자교 환기 사업 등에서 안정적 이익을 창출하던 통신사업과의 합병을 통해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반도체 사업의 본격적 추진에 앞서 든든한 재무 적 디딤돌을 마련한 것이다.
사업진출 선언 6개월 뒤인 1983년 9월에 기흥사업장 건설이 시 작되었을 만큼 그룹 차원의 사전준비가 많이 되어있었고, 정부 당 국도 인허가, 전기와 용수 공급 등 특별한 지원을 해주었다. 반도 체 공장 건설 공기를 1년이나 줄여 사상 유례없는 빠른 속도로 이 듬해 3월에 건설을 완료하기까지 철야 돌관공사(事) 등 비상한 노력이 있었다.
이와 함께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64K D램, 일본 샤프로부터 16K S램 기술을 도입하여 기흥공장 1라인을 가동하였고, 자체기 술 확보를 위해 사전 구상대로 재미 공학자들을 영입하여 기흥 반 도체연구소와 미국 메모리연구소에 배치하는 등 치밀하게 수립된 계획을 발 빠르게 추진했다.
삼성반도체인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반도체인의 신조"를 제정 하고 64km 행군을 시행하는 한편, 삼성그룹 내 최고 대우를 해주 겠다고 약속하는 등 선진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오랜 기간 험난한 추격의 길을 가야 하는 엔지니어들의 각오를 가다듬었다. 사업의 성패를 가를 큰 결정이 사업도전 선언 1년 이내에 모두 내려지고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 미국 메모리연구소는 삼성이 영입한 재미 공학자인 이상준, 이일복 박사 주도하에 현지 메모리 기술자들을 고용해 256K D램, 64K S램 등을 개발하고 있었다. 인텔과 TI 같은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 들이 메모리보다 유망한 CPU(Central Processing Unit), DSP(Digital Signal Processor) 등 프로세서 사업에 집중하면서, 메모리 주도권이 일본 기업 들에 넘어가던 시기였다. 그 덕분에 실리콘밸리에서 실력 있는 메모리 기술자를 고용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30여 명의 현지 채용 엔지니어가 256K D램, 64K S램 등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공정을 개발하는 팹(Fab)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 반도체 신화의 창작자이자 주인공이었던 이병철 회장이 1987년 11월 타계했다. 한국의 민주화가 6.10 항쟁으로 결실을 맺고 민주적인 선거에 의한 대통령이 탄생하기 한 달 전이었다.
삼성반도체가 1987년 당시 D램 가격하락으로 기존 1, 2라인조 차 제대로 돌릴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이병철 회장 이 3라인 착공을 지시했던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미·일 반도체 분쟁으로 삼성에 큰 기회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찾아온 1988년의 D램 호황 덕 분에 삼성은 누적적자를 모두 회복하고 D램 사업에 자신감을 얻 었다. 그가 반도체를 위해 남긴 마지막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 김광호 반도체 총괄이 진두지휘하던 1988~1993년에 삼성반도 체는 기술추격을 완성하고 메모리 사업에서 선두권으로 진입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의 하이라이트를 정리해본다면 어떤 것들이 있나?
회사의 중심사업이었던 D램 부문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D램의 셀(Cell) 기술이 3차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조기에 스택(Stack) 공법으로 방향을 잡아서 성공적으로 4M, 16M D램의 기술추격 속도를 높여 나갈 수 있었다. 1992년에는 64M 시제품을 확보하여 차세대 제품개발에서 선진기업을 따라잡았다. 이 64M 시제품에서의 기술격차 해소는 공정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유명한 '수요공정회의' 가 큰 역할을 했다.
'수요공정회의'는 매주 수요일마다 공정 인력들이 참석하여 진 행한 회의로, 이윤우 연구소장이 매번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엔지 니어들의 압박감이 무척 높았다. 그러나 그러한 압박감이 포토, 에 칭 등 단위공정 엔지니어들에게 강력한 모티브로 작용했다.
삼성반도체는 당시 D램 불황으로 투자를 머뭇거리던 경쟁사들과 달리 제조 라인을 공격적으로 건설하여 1992년에 D램 시장점유율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메모리 전체 시장점유율에 서도 세계 1위를 달성했다. 업계 최초 8인치로 건설된 5라인의 가 동이 시장점유율 1위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 Non-D램 사업도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매출성장을 이루어 메모리반도체 1위 달성에 기여했다.
비록 5대 일본 메모리 기업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미세한 차이로 시장점유율 1위에 등극한 것이지만, 모두에게 메모리반도체 사업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큰 이정표였다. 여전히 질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삼성반도체가 메모리 업계의 선두그룹으로 부상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이 시작되어 새로운 성장의 씨앗이 뿌려졌다.
- 김광호 CEO의 후임으로 이윤우 연구소장이 반도체 총괄로 선임 되었다. 1994년 초 이윤우 반도체 총괄은 기존의 메모리 1, 2 담당을 통 합하여 메모리본부를 출범시키고 진대제 박사를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기존의 D램과 Non-D램 메모리 개발과 사업화 조직을 하나로 통합한 메모리 사업의 중심조직이 탄생했다. 나머지 조직은 특별한 변화 없이 반도체연구소가 차세대 기술개발, 기흥공장이 제조, 마케팅 부문이 영업을 담당했다.
메모리본부의 출범은 제품개발 조직이 사업의 경쟁력을 책임지 는 중심조직으로 진화하는 시작점이었다. 단순한 기술개발 목표 보다는 사업경쟁력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개발 활동을 본부 내에 서 기획하고 목표를 수립하도록 했다. 메모리본부는 그 산하에 메 모리 설계 부문, 공정기술 부문, 제품기술 부문을 두었는데, D램과 Non-D램으로 이원화된 체제 아래에 나뉘어 있던 기술인력을 부 문별로 통합함으로써, 두 부문 중 앞선 기술을 메모리 분야 전체에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인력 운용의 풀을 넓혀 유연하게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포석이기도 했다.
- 1996년 초부터 시작된 D램 가격폭락으로 삼성전자의 경영이 급 격하게 악화되었고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삼성전자의 전사 CEO 교 체가 있었다. IMF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1년여 전이었다. 삼성그룹은 이 같은 메모리반도체 사업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나?
삼성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사업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반도 체 사업을 확장하고 안정시키려 했다. 메모리반도체 사업의 성공 경험 을 시스템반도체 사업으로 확장하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오랫동안 품어온 희망이었다. 이를 위해 1997년 초 진대제 메모리본부장을 사장으 로 승진시켜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총괄하게 했다. 이와 함께 메모리 부 문에서 활동하던 권오현 박사 등 다수의 핵심 임원들이 시스템LSI 사업부로 이동했다.
- 폭락 전 D램의 제조원가는 판매가격의 50% 수준이었고, 그 제조 원가의 30% 정도가 재료비 등 변동성 경비였다. 칩 슈링크 경쟁과 제품 다양화, 이 두 가지 생존 경쟁에서 뒤처진 기업들은 제품의 판매로 변동 성 경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추가 손실을 막기 위해 공 장을 멈춰 세웠다. 공장이 멈추면 적자가 누적되고 생산시설이 노후화 되며 고객기반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이 1998년까지 3년간 계속 이어지 자 파산에 이르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파산까지 가지 않은 경우에도 사 업을 계속하지 못할 정도로 큰 손실을 입었다. 그 결과, 이후 수년에 걸쳐 D램 업계의 재편이 일어났다.
대공황 이전까지 D램 산업을 주도하던 일본 기업들의 적자 규 모가 매우 컸고, 그 결과 일본의 5대 반도체 기업들이 하나둘 D램 공장의 가동을 멈추었다. 결국, 일본의 D램 기업들은 이후 수년에 걸쳐 NEC가 중심이 되는 엘피다메모리로 통합되거나 D램 사업 에서 철수하는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에서도 현대전자와 LG 반도체가 하이닉스반도체로 통합되었다. 그밖에 독일의 인피니언, 미국의 마이크론이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D램 업계의 대 재편이 일어난 것이다.
- 유일하게 삼성만 이 대공황을 별다른 손실 없이 극복했다. 대공 황이 이어진 1996~1998년 삼성의 메모리 사업은 미미하긴 했지만 흑자 를 기록했다. 그 결과, 천문학적인 적자를 내고 도산 위기에 몰린 경쟁기 업들과 커다란 격차가 만들어졌다. 원가경쟁력에서 앞서 있었고, 그 위 에 다양한 제품과 탄탄한 고객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격하락 이 덜한 제품을 생산하면서도 생산 라인을 완전가동할 수 있었다. 고객 관계를 고려해 가격이 폭락한 PC용 D램도 생산했지만, 그 비중을 20% 이하로 유지할 수 있었다.
- 당시 일본은 자동차, 소재 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십 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공계 인재들이 여러 산업으로 분산되어 반 도체 분야 인재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다. 공급된 인재들도 다시 5개 대기업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어느 기업도 충분한 인적자원을 보유하 지 못했다. 1990년대 후반, 일본 기업들과 기술교류를 하면서 삼성의 인 적자원이 질과 양에서 일본 기업들을 큰 차이로 뛰어넘었다고 느꼈다. 차세대 기술개발과 생산성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특히 고객과의 접점 인 제품개발과 사업화 역량에서 격차가 크다고 느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대공황 시기의 제품 다양화, 차별화가 크게 작용했고, 이로 인해 일본 메모리 기업들의 쇠퇴가 크게 앞당겨졌다고 생각한다.
- 더 근원적인 이유는 한국이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에 반도체 산업이 탄생하고 성장했다는 점이다. 지켜야 할 기존 산업 이 없는 신흥공업국에서는 신산업 분야에서 우수 엔지니어의 확보 가 상대적으로 쉽고, 그들은 더 헝그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메모리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기에 10여 년 먼저 시작한 일본 기업들이 기술을 축적하고 이 산업을 방어할 기간이 절대적으로 짧았다. 그런 데다 고객인 미국 기업들이 공급 자 선택의 폭을 넓히기를 원했다. 1980년대 미국의 일본 기업 반덤핑 제소가 진입 초기에 휘청이던 한국 기업들이 다시 힘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후에도 미국의 대형 IT 기업들은 그들의 요구를 투명하게 공개하여 한국 기업들에게 '잘 만들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 사업부장 취임 후 1년여에 걸친 고심과 시행착오 끝에 새로운 시 스템반도체 사업 비전과 전략을 수립했다. 철저하게 '성공 가능성에 초 점을 맞추어 사업 분야를 선택했고, 집중적으로 육성해 글로벌 일류사 업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사업 분야 선택기준은 두 가지였다.
1. 성장하는 글로벌 대형시장이 예상되는가?
2.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사업환경이며 인력확보가 가능한가?
- 선택된 사업 분야는 시스템 칩 영역에서 디지털TV, 모바일 CPU, 휴대폰 모뎀, 미디어 플레이어, 액세스 포인트(Access Point) 등 5개 분야였고, 주변 LSI 영역에서는 디스플레이 드라이버, 이미 지 센서, 칩 카드, RF 등 4개 분야였다. 그리고 파운드리가 직할 사 업으로 선택되었다. 사업부가 영위하던 30여 개 사업 중 10개사 업이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성장동력이 떨어지는 마이콤, 아 날로그 제품군은 인력 재배치, 분사 등으로 정리하였다. 
- 삼성은 1969년에 삼성전자를 창립하여 TV 수출사업으로 전자 사업을 시작했다. 1974년 말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에 입문하였고, 1980년에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해 통신사업에도 참여했다. 삼성의 전자사업 입문은 반도체와 컴퓨터의 발명으로 정보산업이 싹트기 시작한 지 20여 년 지난 시점이었지만, 다행히 이 시점은 PC가 등장 하여 정보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10여 년 전이었다. 삼성이 전자 와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PC가 일으킨 정보산업의 폭발 적 성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리해보면, 1983년에 VLSI 메모리반도체 사업도전을 선언한 것이 반도체 사업의 본격적인 시 작점이다. PC가 가져온 D램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참여하기 위 해, 당시 한국의 산업 발전을 몇 단계 뛰어넘는 과감한 결단을 내 린 것이다. D램을 발명하고 키워온 것은 미국이었지만, 그 무렵 미 국이 급성장하던 CPU에 집중하면서 일본 기업들이 D램 시장을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삼성은 이 산업에 10년여 늦은 후발주자로 참여했으나, 17년 뒤에는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완전한 싱글 톱으로 도약했다. 첨단산업에서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추월하는,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IR은 어떻게 기업의 무기가 되는가  (8) 2023.03.22
퍼포먼스 마케팅  (3) 2023.03.22
데이터로 말해요  (0) 2023.03.09
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없어요  (2) 2023.03.09
의장 이의 있습니다  (2) 2023.03.04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