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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트

etc 2016. 8. 14. 19:26

- 왜 보는 것은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인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다른 것을 같게 인지하는 방법이기 때문. 그래서 모든 것을 본다고 한다. 듣는 것을 들어본다고 하고, 먹는 것을 먹어본다고 한다. 심지어는 느껴본다, 냄새를 맡아본다고 한다. 본다는 것은 세계를 내 속에 들여놓는 과정이며, 내가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 당신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은 놀라운 속성을 찾아라. (피카소)
- 창조성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나 결핍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님. 바꿔 말하면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그 법칙에 능통해야 함. 창조의 대가라는 스티브 잡스가 과연 결핍된 존재였는지, 능통한 존재였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 어떤 연구의 성과는 면밀한 의도나 계획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아인슈타인)
- 감성은 대상으로부터 감각되고 지각되어 표상을 얻게 되는 수동적 능력이다. 그래서 감성은 오감의 입력을 받아야만 작동하는 수동적 능력이며, 이는 인간의 한계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함. 이성과 감성의 공통적인 특성은 과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성과 감성의 공통적 특징은 과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바꿔 말하면 이성이든 감성이든 결핍된 상태에서는 새로운 사고의 기제나 감각적 소재를 크게 확장하기 어렵다는 의미. 특히 감성은 이성을 확장하는 경험과 학습을 집중한다고 해서 급속도로 발달하지 않음. 더구나 감성은 우뇌가 집중적으로 관여하고, 그 우뇌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달하는 구조. 멈출수 없는 생각의 소비를 제공하는 것 또한 감성의 영역이고, 우뇌의 영역이다.
- 자신이 가진 언어나 이미지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이자 표현의 한계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한계는 곧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의 한계라는 의미다
- 나는 직감과 직관, 사고의 심연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떠오른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
- 자신이 가진 언어나 이미지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이자 표현의 한계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한계는 곧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의 한계. 이것이 첫번째 갇힌다는 의미다. 이렇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결과가 두번째 갇힌다는 의미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언어 표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을 더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표현한 자기 생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반추하지 않는다. 결국, 이 말은 자신의 표현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범주에 갇힌다는 의미. 이런 문제는 자신의 표현을 받아줄 상대가 생길 때에 더 잘 나타나미. 상대가 생기면 자신의 표현문제가 상대방의 이해문제가 되고, 반대로 상대방의 표현에 대한 자신의 이해문제로 확대되기 때문.
- 과학은 개념으로 설명되지만, 예술은 미적 형상으로 표현됨. 결국, 이 둘은 하나의 뿌리를 가졌고, 그 표현의 방법만 다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과학과 예술의 뿌리는 하나인 것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주로 예술로 표현했을 뿐이고, 우리가 본 것은 그 표현일 뿐이다. 이것이 과학과 예술의 뿌리이자 본질.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술가의 눈으로, 과학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시가 지금까지 본 방법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이고, 그 방법이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이다.
- 학문을 영어로 표현하면 learning이 되지만 science로 표현하기도 함. 두 단어를 합하면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것.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학문과 과학은 좀 다른 의미가 있음. 학문은 감성적으로 인식된 세계를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재인식하는 것이지만, 과학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둔다. 그렇지만 두 단어는 하나의 의미로 통용된다. 그럼 예술은 다른 것일까? 예술은 이렇게 습득된 감성적, 이성적 지식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과학은 개념으로 설명되지만, 예술은 미적 형상으로 표현됨. 결국, 이 둘은 하나의 뿌리를 가졌고, 그 표현의 방법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학문 세계를 주로 예술로 표현했을 뿐이고, 우리가 본 것은 그 표현일 뿐이다. 이것이 과학과 예술의 뿌리이자 본질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술가의 눈으로, 과학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가 지금까지 본 방법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이고, 그 방법이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이다.
- 자신이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을 머리로 아는 것이 이성의 수준이라면, 자신이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을 자신의 몸이 이해하는 것은 오감과 감성으 수준이다. 로댕은 작업하는 자신의 머리와 손만을 사용하는 작업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작업하는 대상을 이해하려 했고, 심지어는 그 작품이 되려고 했다. 로댕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체가 가지고 있는 선들을 통합해서 나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냐 한다. 그래야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은 그토록 알고 싶어하던 이론을 떠올리고도 정작 이것이 어떤 수학적 해결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직관의 답은 얻었지만, 이성에 의한 증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아인슈타인의 예처럼 직관은 통합적으로 인지하여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려깅다. 그래서 직관을 여섯번째 창조의 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통합적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통합적 인지는 모든 감각과 이성, 감성적 능력을 종합하여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실제로 통합적 인지는 하나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인지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오히려 감각으로 통합적 인지를 설명한다면 한번에 인식되는 여러겹의 다차원적 공감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한 세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 (폴 호건, 미국 극작가)
- 육체는 새로운 진실이나 꿈을 좇지 않는다. 육체는 오로지 생존만을 추구한다. 이처럼 육체는 감각에 의해 포착된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만 판단한다. 이 세계를 음식처럼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위협인지로만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판단이 내려진 것에는 무관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을 포착할 때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점이 발견된다 해도 감각은 무심히 흘려보낸다. 감각의 무감각이라 할 수 있는 이 현상을 깰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뇌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이고 감성이다. 이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감각이 이성과 감성을 자극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할 방법이 이성과 감성에 숨어있다니 말이다. 감옥을 탈출하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밖에서 문을 열어서 나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감옥을 빠져나오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인 새로운 감각을 통해감옥문을 여는 방법은 우리가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만 우리가 이해한 대로 놀라울 정도로 새롭지 않다면 감각 대부분은 편집되고 무시되고 검열당한다. 두번째 방법은 감옥안에서 예리한 이성과 감성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감옥문의 창살을 자를 정도의 예리한 도구로 이성과 감성을 다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성과 감성은 편집하지 말 것을, 무시하지 말 것을, 검열하지 말 것을 명령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성이 예리해진다는 것은 감성이 섬세해진다는 것이고,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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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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