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12.25 이타적 유전자

이타적 유전자

과학 2014. 12. 25. 10:36

 


이타적 유전자

저자
매트 리들리 지음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 2001-08-20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생물학적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
가격비교

- 사회는 이성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님. 그것은 인간본성의 일부로서 진화되어 왔음. 사회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인간 유전자의 진화적 산물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회적 유대관계를 창출하고 활용하는 본능에 주목해야 함. 또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비교 관찰해서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진화라는 사건이 때로는 어떻게 협동적 본능을 발양시키는지를 알아내야 함.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
제2장. 노동의 분화
- 한 생명체가 개체의 이익보다 집단이익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개체의 운명이 집단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 이런 경우에 개체는 집단과 운명을 같이 함. 비행기 탐승객이 생명보존을 위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책은 조종사의 생존이듯이, 생식을 할 수 없는 일개미가 불멸을 위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책은 여왕개미의 출산을 통한 대리번식임. 친족을 통한 대리번식이야말로 세포와 산호충과 개미가 응집해서 조화로운 협동을 이룰 수 있는 비결임. 개별세포들의 헌신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배아는 그들의 세포분열을 금지함. 일개미들의 헌신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여왕개미는 그들을 생식불능으로 만듬.
- 개미나 흰개미나 벌은 수렵채집 생활로부터 농경생활로 이행할때 예전보다 전문화되었음.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분화, 즉 노종의 사회를 활용해서 곡물을 경작하고 가축을 사육함. 개미의 경우 곰팡이와 진디가 밀과 젖소를 대신하지만 원리는 같음. 한편 잡식성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군집성 곤충이 독립성 곤충에 비해 전문화 수준이 낮음. 독립성인 딱정벌레나 나비 유충은 한가지 종류의 나무만을 먹음. 장수말벌도 한가지 종류의 먹이만을 사냥하도록 먹이에 맞는 신체를 갖추고 있음. 그러나 군집성인 개미는 닥치는 대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먹음. 흰개미는 나무를 갉아먹고 살지만 나무의 종류를 가리지 않음. 농사를 짓는 곤충도 잡식성임. 잎가위개미는 집에서 재배하는 곰팡이에게 여러 종류의 나뭇잎을 먹임. 이것은 노동분화의 커다란 장점임. 즉 개체의 수준에서 전문화됨으로써 군체 수준에서는 그 종이 더 일반화되는 것임. 그래서 개미는 딱정벌레에 비해 수가 훨씬 많은데도 생물학적 다양성은 훨씬 적다는 패러독스가 생김
- 나는 신체와 뇌가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10만년전의 조상들 또한 같은 정도의 노동분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믿는다. 한사람은 돌 도구를 만드는 전문가, 또 한사람은 사냥감을 찾는 전문가, 또다른 사람은 창을 던지는 전문가, 또 다른 사람은 전략가 등등... 어려서부터 어떤 일에 자주 접하면 그 일에 익숙해진다는 일반적 경향을 발견하고부터는 젊은이들의 도제교육을 통해 노동분화가 재생산되고 더욱 심화되었을 것임.
- 인간 사회의 장점은 노동분화와 그로 인해 성취되는 넌제로섬임. 이 개념은, 사회가 부분들의 단순총합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포착함. 그러나 이 개념만으로는 사회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되지 않음. 우리는 인간의 사회가 친족등용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 인간사회는 친족등용적 군체에 필수요소인 대리양육과 대리번식의 증거가 없음. 그렇다면 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호혜주의(recoprocity)임.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한 물건을 다른 것과 교환하고 교역하고 거래하려는 경향임.
제3장. 죄수의 딜레마
- 맞대응이 승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호성과 보복성, 관용성과 투명성의 복합체라는 데 있음. 우호성은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막음. 보복성은 한번 배신을 시도한 상대편에게 다시는 배신을 꿈꾸지 못하게 함. 관용성은 서로 적대경험을 가진 상대와 다시 상호부조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됨. 투명성은 위의 사실들을 다른 참가자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함으로써 다른 참가자들과의 장기적 협력을 가능하게 함. (로버트 액설로드)
제4장. 비둘기와 매의 구별
- 흡혈박쥐는 몸집에 비해 아주 큰 머리를 가지고 있음. 신피질(neocortex), 즉 영민함을 관장하는 뇌의 앞부분이 일반적인 생체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뒷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크기 때문임. 흡혈박쥐는 박쥐 중에서 가장 큰 신피질을 가지고 있음. 그들이 일반박쥐들과 달리, 혈연관계가 없는 이웃들과의 호혜적 관계를 비롯한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님. 호혜주의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누가 누군지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하며, 선의에 보답할 줄 아는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를 기억속에 담아두고 그에 상응하는 경의와 유감을 표시할 수 있어야 함. 육상 포유동물 중에서 가장 영리한 영장류를 비롯한 육식동물을 살펴보면, 뇌의 크기와 사회집단의 규모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발견됨. 이루고 사는 사회가 클수록 뇌 전체에서 신피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음.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큰 뇌가 필요함. 반대로 큰뇌를 갖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야 함. 두가지 진술 모두 옳으며 그만큼 상관도도 높음. 둘의 상관도가 이렇게 높기 때문에, 어던 동물의 집단규모를 모르더라도 뇌의 크기를 알면 거꾸로 집단의 규모를 예측할 수 있음. 이 방법으로 추산해보면 인간은 150명 규모의 사회에서 삼. 보통 읍이나 시는 이보다 훨씬 큰 규모이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150명이라는 수는 옳음. 그것은 전형적인 수렵채집 부락의 주민수나 평균적인 종교공동체 구성원의 수, 개인주소록의 기입란수, 보병중대의 병력수, 그리고 원활하게 돌아가는 공장의 직공수와 일치함. 150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기에 가장 적당한 규모임.
-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30분간 같은 방에 머물게 한 뒤 한 사람씩 불러내서, 단판 승부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다면 누가 배반을 하고 누가 협력할지 점쳐 보도록 요구. 실제로 확인한 결과 그들은 확률적으로 유의미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음이 밝혀졌음. 인간은 단 30분의 만남으로도 상대편의 신뢰도를 예측할 수 있음. 우리는 인생의 적지않은 시간을 타인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데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익숙함. 우호적인 사람이 되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음. 즉, 남들로 하여금 당신과 게임을 하도록 설득력 있게 요구하기 위해서 남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평판이 나쁜 사람에게는 협력의 포상은 물론 배반의 유혹까지도 금지됨. 협력가는 다른 협력가를 찾아내서 그와 게임을 함.
제5장. 노동과 만찬
- 당신의 소유물 중 음식만큼 기꺼운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몇가지나 될까?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본성의 이상할 정도로 관대한 측면, 즉 다른 소유물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 지나친 호의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관한 단서를 우연히 찾아냈음. 나눔의 이득, 즉 노동의 분화와 협동적 시너지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최초로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육류사냥이었음. 음식나누기가 인간의 보편적 관습이고 그중에서 육류배분이 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류학자들은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 그 이유는 육류의 일회 획득단위가 어떤 식량보다도 크기 때문임.
- 고기를 획득함으로써 성교의 기회를 잡으려는 성향이 현대 남성의 본능 속에도 남아 있으리라고 가장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임. 그러나 인간의 사냥행위에는 이보다 더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 육류 유혹의 행동양식은 인류역사에서 음식나누기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좀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것, 즉 모든 인간 사회에서 발견되는 경제적 제도인 노동의 성적 분화를 발생시켰음.
- 인류진화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본다면 부부간의 유대는 상당히 최근에 진화된 것이며, 인류의 가까운 친척들에게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 특유의 현상임. 이것에 비한다면 남성들간의 유대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음. 남자들이 피를 나눈 친척들과 집단을 이루어 살고 여자들이 자기가 태어난 집단을 떠나는 것은 원숭이와 침팬지와 인간이 공유하는 습성이기 때문. 이 점에서 꼬리원숭이는 우리와 정반대의 습성을 가지고 있음. 그들은 암컷이 친척들과 함께 살고 수컷이 태생집단을 떠남. 그러므로 아마도 틀림없이 남자들끼리 만찬을 즐기는 습성은 아내와 만찬을 즐기는 습성보다 더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후자는 전자의 유산일 것임.
- 왜 과일보다 육류를 나눠먹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일까? 캐플런은 이에 대해 두가지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음. 첫째, 고기는 협동작업을 통해 획득됨. 두번째, 고기는 행운을 의미. 어떤 사람이 아르마딜로나 커다란 멧돼지를 짊어지고 캠프로 돌아왔다면 그것은 그가 운이 좋았기 때문. 물론 그의 재주가 뛰어나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사냥은 운이 없으면 안됨. 에이크족의 사냥에서 하루평균 40%의 남자들이 빈손으로 돌아옴. 반면에 숲에 갔다가 야자과육을 따오지 못하는 여자는 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게으른 것임. 따라서 고기를 나눠먹는 것은 일종의 호혜주의적 행위로서, 오늘 행운을 얻은 사람이 내일의 불운에 대비해 보험을 들어두는 것과 같음. 이것은 흡혈박쥐가 피를 구하지 못한 동료에게 여분의 피를 토해주는 것과 같고, 채권거래자가 변동금리 대신 고정금리를 선택하는 것과 같음. 고기가 금방 썩어 저장이 불가능한 열대지방으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됨. 함께 나누어먹는 것은 총공급량을 줄이지 않으면서도 위험도를 낮추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임.
제6장. 공적 자산과 개인적 선물
- 가족을 먹일 수 있는 뿔닭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기린을 쫓아가는 남성의 동기는 분명함. 그것은 섹스임. 남성들은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것보다 정부에게 고기를 바치는 데 더 관심이 많음. 그러나 그것이 왜 섹스로 귀결되는가? 여성들은 무엇때문에 능력있는 사냥꾼에게 섹스로 보답을 하는가? 호크스가 캐플런이나히로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임. 호크스는 여성을 섹스로 이끄는 것은 형체가 없는 무엇, 즉 성공의 향기 같은 것으로서, 말하자면 여성들이 사회적 관심이라고 부르는 어떤 매력이라고 보았음. 여성들이 이 거래에서 얻는 것은 은밀한 지위상승임. 그러나 힐과 캐플런의 생각은 다름. 그들은 여성에게 아주 구체적인 이익, 즉 맛있는 고기가 주어진다고 생각했음. 기린의 각 부위는 맛이 같지 않으므로 기린을 잡은 사냥꾼은 가장 좋은 부위를 먼제 베어내어 정사를 맺고 싶은 여성에게 뇌물로 제공. 이렇게 보고나면 사냥꾼이 왜 뿔닭을 포기하는지, 어떻게 음식나누기가 강제가 아니라 호혜적으로 이루어지는지의 수수께끼가 해명됨. 우리는 여기에서 발정난 암컷에게 먹이를 먹이기 위해 원숭이 사냥을 하는 곰베지역의 수컷 침팬지 문제로 다시 돌아왔음. 섹스라는 특별한 화폐를 통해 호혜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임.
- 호크스에 따르면 사냥꾼은 다른 화폐(평판)을 구입함으로써 한가지 화폐(고기)에 의존하는 위험을 줄임. 이것은 달러시장에서 싼값으로 공채를 모집할 수 있는 기업체가 달러환율 등락의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독일의 마르크화로 스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 즉 누군가가 위험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자신의 재화를 다른 것과 교환하거나 다른 사람과 거래하는 것임. 수렵채집인 같은 단순한 존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임. 그들의 뇌는 우리의 뇌와 차이가 없으며 지혜로운 거래에 대한 그들의 본능은 시카고 증권거래소의 브로커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연마된 것임. 문제를 이런 식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음. 복합금융상품이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종류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사람과 짝을 맺기 때문. 선물시장이나 스왑시장은 모두에게 이익이 됨. 그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님. 사업가들이 서로 위험을 스왑할 수 없다면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됨. 인간의 사냥과 음식나누기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됨. 사냥은 허탕을 칠 가능성이 높음. 음식나누기는 이 위험률을 감소시킴. 그리고 모두가 이득을 얻음.
- 합리적이고 경제학적인 눈으로 볼때 포틀래치의 효용성은 무엇일까? 형식주의자의 대답은 간단함. 포틀래치에는 썩기 쉽고 내구성이 약한 재산이 동원됨. 그러나 포틀래치를 통해 얻은 평판은 영속적인 것이며 늘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임. 갑자기 너무 많은 식량과 기름을 갖게 된 추장은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잔치를 열어 손님들에게 주거나 그래도 남을 때에는 태우는 것임. 이 같은 무절제나 관대성은 그에게 존경과 명성을 가져다 줌. 이 논리로는 동전이나 담요같은 내구재가 포틀래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설명되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음. 동전으로 지위를 살 수 있다면 거래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임. 이들은 재산을 등가의 경제재를 얻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누르기 위한 게임에서 고정가치의 모조화폐로 사용하는 것임.
- 포틀래치를 호혜주의의 미덕을 축적하기 위한 합리적 전략으로 보는 것은 확대해석임. 그것은 실상은 호혜주의에 빠져드는 인간의 속성을 악용하는 교활하고 이기적인 방법으로서 호혜주의에 기생하는 일종의 기생충임. 포틀래치는 인간이 호의에 보답하려는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악용하기 위해 고안된 것임.
- 선물주고받기와 경쟁적 호의가 우리의 본능 이전에 존재했던 것은 아님.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존재하는 본능, 즉 호의에 대한 존경과 함께 나누지 않으려는 자에 대한 경멸에 대한 몬능을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그런 본능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인색함을 참지 못하며 인색함에 대해서는 처벌을 가한다고 누구나 인식하게 될 때, 우리 사회의 호혜주의 체계를 감시하고 다른 사람의 행운에 대해 자기몫을 강요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 따라서 부족사회의 선물주고받기는 다른 사람을 의무감에 구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사실은 선물주기가 아님. 그것은 호혜주의적 본능의 악용일 뿐임.
제7장. 인간의 도덕성
- 인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도 사회적 거래를 적용함. 예컨대 초자연적 존재와의 관계조차 우리는 사회적 거래관계로 인식함. 자연세계를 사회적인 거래관계로 의인화하는 것은 세계의 공통된 현상임. 우리는 트로이전쟁에서의 패전, 고대 이집트의 메뚜기 피해, 나미브 사막의 가뭄, 주말에 교외로 나갔다가 겪게 된 재수없는 일 따위를 우리가 저지른 잘못때문에 신이 화를 내셨다라는 식으로 논리적 정당화를 함. 고장이 잦은 기계를 발로 걷어차면서 그 무생물이 품고 있는 앙심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우리의 일상행동에서도 의인화의 습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남. 우리는 제물과 음식을 바치고 정성껏 기돌르 하면 신이 흡족해 그 대가로 군사적 승리나 풍년 또는 천당입장권 따위를 내려줄 것으로 기대함. 종교가 있든 없든 간에 불운이나 행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한 처벌이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한결같은 태도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임. 우리는 사회적 거래기관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기전으로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뇌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것은 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확실한 사실만큼이나 분명함.
제8장. 협동과 전쟁
- 투척형 무기의 등장의 실제적 중요성은 전쟁의 승률을 높이고 위험성을 감소시켰다는 데 있음. 투척형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거대연합은 공격과 방어에 더 유리해졌음. 인류역사상 최초로 대량의 정교한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직립원인이 갑자기 큰 키와 두꺼운 두개골을 획득한 것은 우연이 아님. 직립원인은 늘 머리에 타격을 받고 살았던 것임. 무기와 연합은 공생관계에 있음. 최근들어 인류학자들은 무기가 등장하면서부터 불확실성이 싸움의 법칙으로 정착되었고, 이것 때문에 지도자는 강압보다 설득에 더 의존하게 되었음.
- 침팬지처럼 우리는 이방인 혐오증을 가지고 있음. 문자발명 이전의 모든 인간사회와 현대의 모든 사회는 적, 다시 말해 너희와 우리의 구분개념을 갖는 경향이 있음. 친족관계의 남자들과 그 아내들 및 식솔로 이루어진 부족사회(형제애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는 보편적 형태의 부족주의)에서는 적의 중요성이 더 컸음. 달리 말하자면, 여성들이 이동을 하고 남성들이 태생 집단속에 머무르는 경향이 강할수록 집단간의 적대주의는 더 강함. 이에 비해 모계사회나 데릴사위 제도에서는 반목과 전쟁이 더 적음. 이것은 모계중심과 데릴사위제도의 비비비사회에서 집단간의 분쟁이 별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 한편 혈연관계가 가까운 남성들이 하나의 사회적 단위를 이루고 사는 집단은 침팬지 사회처럼 집단간의 반목과 분쟁이 끊일 날이 없음.
- 민주주의나 국경, 집단안팎의 차별, 전쟁 같은 것들은 모두 부족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며, 이 부족주의적 사고방식은 집단을 만들고 연합을 형성하며 살아온 유인원의 진화적 유산임. 코끼리의 사회에는 폐쇄성이 없음. 암컷 코끼리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지만 이들 집단은 서로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이지도 않으며 세력권도 없고 구성원이 일정하지도 않음. 코끼리들은 집단과 집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감. 인간이 그런식으로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임. 사실 여성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음.
제9장. 투쟁하는 개체들의 화합
- 협동이 인간 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 것은 친족주의나 호혜주의 또는 도덕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협동적인 집단은 살아남고 이기적인 집단은 도태되는, 그래서 협동적인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들을 제치고 살아남는데(집단선택) 때문이었는지도 모름. 자연선택은 개체 차원이 아니라 집단과 부족의 차원에서 일어났을 것임.
-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짓는 것은 문화임. 전통이나 관습이나 신념 따위를 사람에서 사람으로 직접 감염시키는 특성 덕분에 인간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진화를 겪고 있음. 즉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임. 더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지 못하더라도 실제적 수준의 뭔가를 알고 있거나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사람이 달느 사람을 밀어내고 성공하는 경우가 있음.
- 음악은 감정을 변화시킴. 음악에 대한 감정적 동요능력을 진화시킴으로써 얻는 이득은 구성원들이 집단을 위해 동원되었을 때 그들의 정서적 분위기를 일치, 화합시키는 것임.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들은 음악을 투쟁하는 요소들간의 화합이라고 보았음. 음악이 춤부다도 더 밀접하게 집단에 대한 헌신성의 과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님. 찬송가, 축구장의 응원가, 국가, 군가 등 음악과 노래는 다른 기능을 획득하기 훨씬 이전부터 집단 규정적 의례로서 기능해 온 것으로 추정됨.
- 현대 기독교의 보편성은 종교적 교리라는 것의 중요한 속성 하나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음. 종교적 교리는 거의 예외없이 집단 내부와 외부의 차별을 강조해 왔음. 종교는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선택된 종족이고 그 밖의 경쟁집단은 모두 미개한 야만인이며 인간 이하의 족속이라고 가르침. 대부분의 종교가 부족으로 분할된 폭력적 사회에서의 배타적 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돌이켜볼때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님.
- 인간이 오랜세월에 걸친 집단간 폭력을 통해 습득한 이방인 혐오증에 의해서만 서로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을 도덕주의자들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임. 인류나 가이아 또는 지구전체를 보호하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도 용기가 될만한 생각은 결코 아님. 윌리엄스가 지적했듯이, 개체간 투쟁의 잔혹성을 비난하고 집단 선택의 도덕성을 옹호하는 것은 살인보다 종족 살상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바 없음. 또 크로포트킨이 말했듯이 개미와 흰개미는 홉스주의적 전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개체간의 전쟁에서 집단간의 전쟁으로 돌아섰을 뿐임. 군체 내에서는 서로 의좋게 살아가는 벌거숭이두더지쥐도 다른 군체의 벌거숭이두더지쥐에 대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공격적임. 그러나 이와 반대로 집단 내부의 협동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찌르레기 무리에게는 다른 무리에 대한 적대감이 없음. 집단들 내부의 협동성이 강할수록 집단간 투쟁도 폭력적이라는 진화법칙에서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님.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협동적이고 사회적인 생물이지만, 동시에 가장 호전적인 생물임.
제10장. 비교 우위의 법칙
제11장. 공존의 생태학
- 인디언은 자연과 하나였고 자연을 숭배했으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자연과 깊게 감응했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하면서도 사냥감인 동물 종 자체에는 해를 입히지 않도록 철저한 규칙을 준수했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임. 그러나 유적조사의 결과는 이같은 희망적 신화에 의문을 던짐. 이리는 늙거나 아주 어린 짐승만 잡아먹지만, 인디언이 사냥한 엘크는 대부분 한창때의 것들임. 인디언은 황소보다는 암소를 더 많이 잡았고 오늘날만큼의 수명을 유지한 엘크는 거의 없었음.
- 환경파괴는 일종의 죄수의딜레마에 의해 일어남. 게임참가자가 두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만 다름. 죄수의 딜레마에 따르는 숙제는 두명의 이기주의자가 더 큰 이익을 위해 협동하면서 상대편의 희생위에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을 회피하는 것임. 환경보존의 문제는 이와 동일한 구졸르 가짐. 이기주의자들이 공해와 쓰레기를 배출해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자제를 실천하면 그는 몰상식한 다른 사람의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됨. 나의 인내는 너에게 기회가 됨. 이것은 게임참가자가 두사람이 아니어서 게임이 더 힘들어진다는 점만 뺀다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임.
제12장. 소유와 분배
- 어떤 사람에게 자갈밭의 소유권을 부여해보라. 그는 곧 그곳을 정원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같은 사람에게 그 정원을 9년간 임대해보라. 그는 그곳을 사막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 소유권이라는 마력은 모래를 황금으로 변하시킨다. (아서 형, travels(1787))
- 제3세계 어느나라의 경우이든 골치아픈 환경문제는 으레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데서 비롯돔. 사람들은 우림의 나무에서 열매와 약재를 거둘 수 있는데도 무엇때문에 나무를 베어버릴까? 목재는 숲속의 나무와는 달리 직접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 멕시코는 왜 미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원유매장량을 소모하면서도 원유의 활용도는 낮고 돈도 적게 벌어들이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원유에 대한 소유권이 더 잘 확립되어 있기 때문. 페루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는 제3세계의 빈곤은 그 국민들이 부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안정적 소유권을 확립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함. 공동 소유의 비극에서 정부는 해결책이 되지 못함. 오히려 비극의 주범임.
- 공동소유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1970년대 국유화가 진행됨. 공동소유권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는 하딘의 논리는 전세계에 걸쳐 정부재산을 확대하는 구실이 되었음. 73년 한 경제학자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음. "공동소유의 미극을 회피한다는 것이 전체주의 국가의 참혹한 궁핍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국유화라는 처방은 영락없이 비극을 초래했음. 리바이어던은 오히려 전에 없던 공동소유의 비극을 빚어냈음.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을 예로 들어보자.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식민지시기와 60~70년대의 독립기에 야생동물을 국유화했음. 그 결과 농민들은 코끼리와 들소의 등쌀에 시달리게 되었고, 육류와 금전수입의 제공원으로서 그것들을 보살필 모든 동기를 잃고 말았음. 아프리카 코끼리와 코뿔소 등 야생동물 수의 감소는 국유화가 초래한 공동소유의 비극임. 야생동물의 소유권이 다시 공동체 소유로 사유화된 지역에서 야생동물의 수가 신속하게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함.
- 공동소유의 비극을 막기위해 사적소유나 소집단의 공동소유를 도입하자는 것은 논리적으로 올바른 결론이지만, 본능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음. 인간에게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더 명료하게 표명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잔존하고 있는 뿌리깊은 인간본성, 즉 모든 형태의 축재에 저항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 축재는 금기이며, 분배는 미덕임. 에스키모 사회에서는 마지막 담배 한개비라고 해도 나눠피우지 않으면 여러사람 앞에서 그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함. 여러명의 상속자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도록 규정한 나폴레옹 장전이나 힌두법은 이 같은 전통의 일부임.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은 소유는 도둑질이라고 했음. 인류는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평등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경향은 수렵채집 사회에서 특히 강했음.
-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두드러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음. 평등이 알파이자 오메가임. 침팬지 사회의 연합에서 지나치게 강한 개체의 야심을 길들이는 습성이 드러나는 데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음. 이것은 축재에 대한 강한 혐오감에서 다시 확인됨. 그러나 정착적이며 안정적 생활방식이 등장하게 되면, 한 강력한 개인이 나눠주기라는 사회보험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의 소유권에 의존할 수 있게되므로 분배의 강제는 안개처럼 사라짐.
제13장.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이 책을 통해 의도한 것은 인간이 몇몇 문화적 관습을 언제 획득했는지에 관한 신화들을 깨려고 한 것임.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도덕이 있었고, 국가가 존재하기 전에 무역이, 화폐가 존재하기 전에 거래가, 홉스 이전에 사회계약이, 인권이전에 복지가, 바빌론 시대 이전에 문화가, 그리스 문명 이전에 사회가, 애덤 스미스 이전에 사리추구가, 자본주의 이전에 탐욕이 존재했음. 이런 것드은 홍적세의 수렵채집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 본성의 표현임.
- 인간에게는 긍정적 본능만큼이나 부정적 본능도 많음. 경쟁적으로 소집단 분열을 지향하는 인간사회의 경향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인종차별과 종족 학살적 분쟁에 너무 쉽게 빠져음. 또 우리는 기능저거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적절히 운용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함. 인간사회는 전쟁과 폭력, 절도, 분쟁, 불평등으로 갈기갈기 찢겨 있음.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천성이나 교육, 정부, 탐욕, 신 등에게 그 탓을 돌림.
- 유럽에거 종교적, 정치적 내전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할 무렵인 1650년대에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쓴 의도는 형제를 서로 죽이는 항구적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려면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었음. 홉스의 주장은 목가적 자연상태를 이상향으로 추구하던 17세기 철학자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함. 당시의 철학자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평화롭고 풍요한 생활을 완전한 사회의 모델로 간주했음. 이에 대해 홉스는 자연상태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을 압박했음. 홉스는 다윈의 지적인 직계조상임. 홉스는 데이비느 흄을, 흄은 애덤스미스를, 애덤 스미스는 맬서스를, 맬서스는 다윈을 낳았음. 다윈이 1세기전의 애덤 스미스가 밟은 전철을 따라 집단간의 경쟁에서 개체간의 경쟁으로 사고의 중심을 바꾼 것은 맬서스의 글을 읽고 난 뒤의 일임. 홉스의 진단(처방은 없지만)은 아직까지도 경제학과 진화생물학의 중시에 자리잡고 있음. (애점스미스는 밀턴 프리드만을 낳았고, 다윈은 도킨스를 낳았음) 이 두 분야는 자연의 평형이라는 것이 위로부터 설계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밑에서부터 형성되어 올라온 것이라고 한다면 총체적인 조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음. 케인즈는 종의 기원은 리카도의 경제학을 과학적 용어로 번안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스티븐 제이굴드는 자연선택이란 애넘스미스의 경제학을 자연에 적용한 것이라고 보았음. 마르크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음. 1862년 6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음. "다윈은 어떻게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서 그가 살고 있는 영국사회와 그 요소, 즉 노동의 분화, 경쟁, 새로운 시장의 개척, 발명, 생존을 위한 맬서스적인 투쟁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바로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 홉스주의는 1845~1945년의 1세기에 걸쳐 유행했음. 이보다 한세기 전이나 반세기 뒤에는 인간본성에 대해 좀더 낙관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견해가 정치철학을 지배했음. 그러나 이들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사사잉 인간의 부정적 본능을 표출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긍정적 본능을 지나치게 표출시키는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
- 탐욕예찬같은 권고가 공동체 의식 붕괴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거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인간의 좀더 좋은 다른 천성들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걸쳐 오로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되라는 가르침을 받은 후 우리는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렸으며, 그 결과 사회는 비도적적으로 치달았음. 이것이 최근의 점증하는 범죄와 사회불안에 대한 표준적이면서 약간 좌익적인 경향의 설명임.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성과 양육  (0) 2014.12.25
수학으로 이루어진 세상  (0) 2014.12.25
게놈  (0) 2014.12.25
눈먼 시계공  (0) 2014.12.25
풀하우스  (0) 2014.12.25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