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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중국문화

사회 2014. 10. 19. 13:31

 


두 얼굴의 중국 문화 / 112

저자
허세욱 지음
출판사
중앙M&ampB | 2003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여전히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새로운 조화와 합일을 모색해 나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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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년 덩샤오핑의 남방경제시찰, 곧 남순이 있은 뒤 광둥, 푸젠 등 연해지역의 경제특구들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일어선 도시처럼 기적과 번영을 이루어갔고, 덩샤오핑의 지위도 일시에 마오쩌둥의 그것을 능가할 기세였음. 그런데 개혁개방의 요구가 최고자에 달했던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열기가 다시 상승일로를 보임. 민주와 자유를 외치면서 자유여신상을 들고 학생들이 천안문에 집결하던 89년 6월, 그 거리에 노동자들은 마오쩌둥의 초상을 들고 나옴. 말하자면 개혁개방만이 마오쩌둥의 유령을 추방했다가 다시 불러들인 것임. 개혁개방과 함께 전반적 소득은 증대되었지만 인텔리와 자영업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상대적으로 노동자, 농민의 소득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 노동자, 농민 대중과 당, 군의 원로들은 누구나 가난했던 균빈사회와 한솥밥에 한 바지를 입었던 혁명시기를 그리워하게 되었음. 이와함께 마오쩌둥의 열기가 재현된 것.
- 중국민족은 매우 현실적. 우선 공자부터 논어에서 괴(지괴적인것), 역(폭력적인것), 난(난동적인것), 신(미신적인것) 등 네가지를 배제한다고 선언. 다시 간추리면 반평화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거부. 그뿐만 아니라 논어에는 썩은 나무는 새길 수 없다거나, 검박한 것은 사치스런 것보다 낫다, 잠잘때는 송장처럼 반듯하게 누워자지 않는다, 거친 밥에 맹물을 마시고 팔뚝을 구부려 베게를 삼을지라도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는 등 실용성과 실천성, 소박성을 강조한 부분이 많음.
- 중국의 고대 유가는 실용적 이성을 길렀고, 그 실용은 비록 생산성은 높지 않았지만 실리를 소중히 여기면서 그로써 삶의 위안을 삼아왔음. 특히 묵자 학파들은 그 실리를 생활화하는 공리주의로 발전시킴. 그 뒤 비록 맹자로부터 송나라 육구연, 명나라 왕수인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우주의 본체로 여기는 심학이나 위, 진시대로부터 도가들이 현묘지학으로 공리공담하는 현학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또다시 명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실용학파들이 그 폐해를 극복하면서 민리와 민생, 민본과 민권의 길로 연구의 터전을 넓힘. 물론 보통 사람들의 실용성은 실용학파들과는 동일성을 갖고 있었지만 차원이 다름. 아직도 쪽빛이나 까만천으로 지어입는 겨울 솜저고리인 탕좡과 몐아오 등이나 시골농가의 구조, 까만 베로 만든 신발이나 대나무로 얽은 침상 등의 가재도구, 그 모두가 때를 타지 않거나 내핍적 재료인데 너무 단순소박한 구조이다 보니 겨우 비바람막이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음. 검박도 지나치면 고류해지기 마련.
- 중국인의 낙천적 세계관에는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가 있음. 중국 사람들이 쉽게 만족하고 고분고분하여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오랜 봉건정치 때문이요, 한낱 꽈즐이나 먹고 1위안짜리 녹차에도 쉽게 마족하느 것은 오랜 경제적 빈곤 때문. 더구나 요즘 중국을 한두번 여행하고 온 사람이면 중국의 저임금이나 불편한 시설 등이 모두 50년 중국 사회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함. 중국의 통치자는 70년대 말 문화대혁명을 마무리 하면서 원빠오를 겨냥했음. 원빠오란 문자그대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정도의 경제수준을 말함.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나고 덩샤오핑이 사망하기 전쯤, 중국은 이미 샤오캉 진입을 스스로 천명. 또한 언론은 한때 원빠오의 국민소득을 약 5백달러 정도로, 샤오캉의 국민소득을 약 1천달러로 추정한 바 있음. 이를 두고도 중국 인텔리들의 시각은 각기 다름. 겨우 원빠오의 수준이지 샤오캉은 아직 이르다는 신중론자가 있는가하면, 최근의 중국 대도시와 황해연안 지역의 경제발전은 이미 샤오캉 단계를 뛰어넘었다고 주장하는 낙관론자도 있음. 어쨌든 그 평균치를 볼 때 중국이 개혁개방 20여년전에 샤오캉 수준에 올라선 것은 분명함.
- 중국은 70년대 발, 개혁개방과 더불어 정계와 민간에 커다란 의식변화를 몰고 왔음.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사회주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키워서는 안된다는 마오쩌둥의 이른바 잡초론에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 쓰촨성의 뿌리깊은 속담이었던 흑묘백묘론은 실사구시와 실용주의의 산실이자 동시에 덩샤오핑의 트레이드마크가 됨.
- 중국에서 충효나 인의 같은 높은 덕목이 그러한 것처럼, 중국에서 공산당이나 국민당 같은 명분은 질기고 질긴 밧줄이나 다름 없음. 그것은 원칙과 근간을 지키는 본분임. 때로는 표면상의 구실처럼 명목에 지나지 않지만 그 바탕은 엄연하게 존재하고, 일견 변한 듯 보이지만 막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 명분의 벽이 낮아지면 현실의 물결이 들락거림. 때로는 명분과 현실의 경계선이 분명치 않지만 그 차별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님.
- 중국공산당과 중국 사회주의라는 명분은 그동안 여러차례의 현실적 수정주의와 맞섰음. 40년대 중국공산당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옌안에서 중국공산당은 레닌, 스탈린 주의를 수입하였지만 민족공산주의로 수정.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은 중국 역사를 바탕으로 중국적 마르크스 주의를 창출했고, 57년 촉발된 대약진운동은 스탈린 노선의 공업성장이 중국에 맞지 않음을 선포하면서 이를 수정. 그로부터 수년뒤인 6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난하면서 수정주의는 곧 자본주의의 부활이라고 밀어붙임. 66년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수정주의에 대한 반발이었음. 그해 6월부터 8월까지 이른바 오십일 동안은 수정주의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원들에게 일제히 공격을 퍼부은 기간이었음.
- 그러나 79년 덩샤오핑의 수정주의, 이른바 실용주의를 수용하는 개혁개방이 명분을 얻게 됨.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가 엄연히 기를 내리지 않고 있음에도 수정주의는 명분을 얻게 된 것. 수정주의는 비록 헌법에 명시된 것은 아닐지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곧 국리민복을 위한 명분으로 당당하게 등장. 개혁개방 이후 수정주의가 명분을 얻은 뒤 또 새로운 명분들이 꼬리를 물었음. 그것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명분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수정하고 현실화하면서 새로운 명분으로 자리잡아 갔음. 그중 대표적인 것 두가지는 84년 10월 경체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으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론이고, 다른 하나는 87년 10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임. 이 두가지는 모두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의 발전임. 이제까지 마오쩌둥의 계속혁명론과 평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의 기본틀인 계획경제와 공산당 1당독재체제를 대폭 수정하여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접목시킴으로써 경직된 사회주의 모델과 크게 다른 중국적 특색을 구비한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한 것. 곧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비록 사회주의 하부구조는 형성되었으나 낙후된 생산력이나 궁핍한 자본력 때문에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없었던 까닭임. 결국 초급단계란 경제성장 과정에서 제기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형태를 도입하자는 특정 단계인 것. 아무튼 이러한 합리화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유연한 수정이었음.
- 중국에서 어문일치 운동, 곧 백화문화운동을 제창한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후스는 차부뚸(差不多, 거기서 거기)란 말로 중국인의 대강대강 넘어가는 비과학, 비논리, 비효용적인 패덕을 풍자한 바 있음. 뿌즈다오란 대답은 그 형태로 보아 세가지로 나뉨. 하나는 묻자마자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응수하는 즉답형, 하나는 상대의 질문에 성실하게 머리를 쓰다가 끝내 알 수 없어 쩔쩔매는 성실형, 또 하나는 길가의 동네 개가 과객의 행색을 살핀 후 멍멍 짖거나 아예 슬금슬금 비켜더리듯 질문에 따라 작전상 후퇴하는 관찰형이 있음. 즉답형은 준비된 답변임.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의 질문과 함께 조건바나적으로 튀어나온 만큼 실상 무슨질문인지 알 턱이 없음. 따라서 이때의 뿌즈다오는 일종의 거부요 가장임.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이기심의 발로일 수 밖에 없음. 즉답형의 대부분의 식자인 경우가 많음. 알면서도 뿌즈다오라고 말함. 사람마다 자기집 문앞의 눈만 쓸뿐이요, 남의집 지붕위의 서릿발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중국의 속담대로 사는 사람들임. 성실형의 얼굴엔 기름기가 없다. 대체로 골목에 쪼글려 앉아 있거나 어느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는 품팔이들, 더러는 웃통을 벗고 끙끙 거리며 멜빵을 진 늙은 짐꾼들임. 아니면 대문 문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수를 놓거나 회화나무 두터운 그들에서 한담을 즐기는 아녀자들임.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서로가 진지한 표정임. 결국 돌아오는 건 뿌즈다오지만 가장이나 냉담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의 얼굴에 그려진 황토빛 주름살만 보아도 알 수 있음. 마지막으로 관찰형은 푸르뎅뎅하거나 주름투성이가 적음. 길에서 물으면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뿌즈다오 하거나 고개를 쳐들고 묻는 이의 행색을 슬쩍 훑어보고는 시큰둥하게 대답함. 주로 도시에서 많이 만나는 풍경. 묻는이의 행색이 부티가 난다거나 거만하면 그냥 냉소로 대신하고 묻는이가 추레한데다 다소곳하면 최소한 성의를 보여주는 듯함. 그러니까 묻는이에 따라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여세추이형이요, 임기응변형임. 몹시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행동방식임.
- 중국은 거의 40년 동안 극좌의 정치노선에 시달려 왔지만 내부에는 여전히 유가문화가 깊이 뿌리박고 있는데다, 량밍수, 슝스리, 펑유란, 첸무, 마오중싼 등 현대 유학자의 연구가 국내외에서 심화되었음. 더구나 문화대혁명의 반작용,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네마리 용으로 불리는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의 발전요인을 공자의 유가사상에서 찾는 외부적 운세를 탄 것임.
- 멀리 3천년을 되돌아보면 중국의 역사율은 삼국지연의 제1회 첫줄에 쓰인 것처럼 통합된지 오래면 분열되고, 분열된 지 오래면 통합된다는 분합을 비롯하여 정반과 진퇴의 반복. 전통과 혁신, 정통과 반역, 진보와 퇴영, 심지어 한족과 호족의 상생상극의 역사임. 그래서 시간대를 크게보면 주, 한, 당, 명이 전통이요, 정통, 통합이며, 진보와 한족의 시대이자 마당임. 이는 음양과 성쇠를 정률로 보는 유가의 해석이요, 동시에 정점에 이르면 되돌아간다는 극즉반의 적용임. 그렇다면 사회주의 전홍 시가 50년을 겪으면서 원빠오와 샤오캉의 단계를 지나 경제 번영의 문턱에 설수록 전통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만큼 중국은 지금이야말로 진, 합, 정의 시점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음.
- 현대 중국어로 도시를 청스(城市)라고 함. 기실 청스는 성과 시의 결합어임. 성은 도읍을 보위하려고 쌓은 성벽이요, 시는 시민들의 생필품을 유통시키는 저자임. 그래서 성은 도시로, 시는 시장으로 발전되었음. 하나는 권위요, 하나는 현실임. 그러나 그것들은 따로 격리될 수 없음. 한데 어울려서 살게 마련. 그래서 청스는 도읍과 시장을 합성시킨 만큼 크든 작든 도시를 뜻하게 됨
- 중국 공산당 통치 반세기 동안 정치사회적으로 상용되었던 샤(下)자 돌림 두글자 어휘가 있음. 바로 마오쩌둥 시대의 샤팡, 덩샤요핑 시대의 샤하이, 장쩌민 시대의 샤강인데 그 특성들이 잘 반영되어 있음. 샤팡은 간부나 지식인이 사상개조를 위해 농, 공, 광의 현장에 가서 강제노동하는 일이요, 샤하이는 장사와 무관하던 직능인이 장사에 띄어들어 돈 버는 일에 몸을 담그는 일이요, 샤강은 경기변동과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의 실업 노동자를 말함.
- 전국시대에 저술된 중국 오경 중 하나인 예기의 예운편은 중국 정치원론서의 으뜸으로 꼽히는데, 거기서 원시 공산사회의 효시적 이론인 대동과 사유제와 계급제의 효시적 이론인 샤오캉 등 두가지를 제기. 이는 선후의 계승관계를 보였지만 서로 대립적 사회의 패턴임. 그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그 아이만을 아이로 여기지 않는 박애적 사회에 균등한 분배와 따스한 복지가 있고 안전과 평화가 깃들인 곳을 대동이라 한다면, 사람마다 집마다 가족과 전답을 다스리면서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살리는 것을 샤오캉이라 하니, 그 사이에는 문화의 충돌이 따랐던 것. 예운편의 이 대목은 마치 2천년 전에 오늘의 중국을 겨냥한 예견인 듯 보임
- 북방인을 대표하는 베이징 사람들은 건조하고 한랭한 기후와 싸우면서 천년의 정치중심을 지키고 사느라 정치적이고 논리적이라면, 남방인을 대표하는 상하이 사람들은 축축하고 따뜻한 기후를 타고 수천년의 비옥한 땅과 넉넉한 삶을 누리느라 세속적이고 현실적. 한마디로 베이징 사람들이 관료적이면서도 평민적이라면, 상하이 사람들은 타산적이면서도 감각적임. 또 다른 각도에서 베이징 사람들이 귀족적이면서 투쟁적이라면, 상하이 사람들은 시민적이면서도 이성적. 한편 베이징이 남성적이고 대륙적이라면, 상하이는 여성적이고 축소적이라는 말도 없지 않음. 최근 인터넷에 오른 남방인과 북방인에도 남방인은 심력이 튼튼한 경제인이요, 북방인은 체력이 튼튼한 문화인이라고 구별. 그리고 남방인은 즐거울 때 술을 마시고, 걱정이 있을 때 오히려 노래를 한다고 함
- 1910년대 중국 최초로 어문일치 운동을 제창안 중국 철학자요 문학가 후스에게 차부뚸 선생전이란 짧은 수필이 있음. 차부뚸란 대강대강 혹은 그만그만이란 뜻으로 논리성, 정확성, 구체성, 책임성이 결여된 애매성을 말함. 곧 오늘이나 내일, 동쪽과 서쪽, 큰 것과 작은 것, 십자와 천자, 심지어 삶과 죽음을 곧이곧대로 차별하지 않고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 사람을 무책임하고 비과학적인 사람이라 매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덕성이 두터운 사람, 세상을 원만하게 통달한 원통대사라고 찬미하는 중국인의 의식을 풍자. 후스는 이 글의 끝에서 중국이 게으름뱅이 나라가 된 원인을 이 차부뚸때문이라고 말했음. 이는 원만의 패덕을 지적한 것.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서는 원만의 미덕을 선양. 말하자면 비극이 아닌 원극, 끝내 헤어지거나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상생하는 구성임.
- 한자는 귀족적인 문자로서 익히기 어렵다는 불편성에 품사의 애매성, 문법의 불확실성, 동음자의 혼돈, 어문간의 일치난, 무병신음적인 수사, 자획의 번잡, 자형의 사각성 등의 단점을 지님. 중국어의 장단점 역시 마찬가지임. 중국어는 4성이란 성조로 말미암아 리듬의 미감을 비롯하여, ㄱ, ㅂ, ㅅ 등의 입성자의 퇴화, 한 글자로 여러 뜻을 간접표현하는 쌍관어의 활용, 단음절어의 응용 등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단점도 있음. 무엇보다도 무수한 방언 때문에 언어교통에 장애가 있는데다 동음어의 번잡, 어체 사용의 한계, 품사의 다양화로 인한 어법체계의 혼란 등의 폐단을 줄곧 보완하고 있지 못함. 비록 중화민국이 건국된 1910년대부터 이른바 국어통일을 시도했고, 더구나 신중국과 함께 발족된 중국문자개혁연구위원회가 한자의 대체방안으로 한어병음안과 한자정리, 표준어보급 등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상기한 폐단을 줄이기에는 아직도 요원해 보임.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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