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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02 혼자일땐 외로운 함께일땐 불안한

 


혼자일 땐 외로운 함께일 땐 불안한

저자
이인 지음
출판사
사막여우 | 2013-10-01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당신도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나요? 사람과 만남과 관계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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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감과 공감능력은 여성의 태생적 특징이라기 보다는 여성들이 자신을 보호하고자 발전시켜온 노력의 결과. 둔하다는 남자들도 직장상사의 기분이 어떤지는 잽사게 읽어내고, 막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들의 촉은 여성들보다 더 민감하게 곤두서있음. 그래서 미국 사회학자 캐롤 타브리스는 예감과 공감능력이 권력의 차이에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함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고 예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보호를 위한 기술이며, 남녀의 권력이 동등하다면 남녀간의 차이는 사라진다." (캐롤 티브리스,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
- 혼자 있으면 외롭고 사람들을 만나면 불안해짐. 외로움과 불안은 피할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감정임. 그러나 아무리 떨쳐 내고 달아나려 해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음. 빛과 그림자처럼, 사람 사이의 기쁨과 황홀은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불안과 외로움마처 끌어안아야 함. 불안과 외로움은 누군가를 알아갈 때 느끼는 즐거움과 짜릿함, 흥겨움과 흐뭇함의 대가일 뿐이다.
- 이 시대의 비밀은 모두가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척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는 외로움을 등에 업고 생을 견디어 내는 달팽이들입니다.
- 고독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내적인 삶과 타인의 경험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의 심연이다. 그 결과 고독이라는 것은 타인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질적으로 여기는 타인들 앞에서 생긴다. 외로움이 힘들게 느껴지는 때는 시험삼아 나만의 즐거움이라든가 희망사항 또는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존 암스트롱, 사랑의 발견)
- 도덕적 감정 가운데 수치심은 가장 명백한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수치심이 단지 인간학적으로 내면 깊숙이 박혀 있는 벌거벗은 상태에 대한 수치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행위 수행에서 주체에게 결여되어 있는 도덕적 규범이 어떠한 상호행위 측면에서 훼손되는지 이 경우에는 확인될 수 없다. 수치라는 감정내용은 심리분석과 현상학적 단초들이 동일하게 확증하고 있듯이 일종의 자존심의 붕괴다. 행위가 반발에 부딪히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느낌을 갖게 된 주체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을 그 이전에 전제했던 것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 예컨대 풍족한 사회의 많은 여성들이게 쇼핑잔치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도이다. 많은 이들이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신유행을 따름으로써 찬사를 받고 상대 남성의 애정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옷을 구입한다. 산업사회에서 여성의 자긍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나, 보상심리로 아무리 많이 소비한다 해도, 이 욕구는 새 옷을 구입해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유사 충족기제이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인간욕구는 상품을 구입하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 아름다운 외모라는 축복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은 신용을 얻고, 삶을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자잘한 일상적 이점들을 모은다. 다른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곳에서도, 미인들은 미소를 얻고, 창구직원들의 친절을 경험하며, 더 많은 할인을 받는다. 또 그들은 면접에서 더 좋은 기회를 얻으며,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으며, 우정과 사랑을 나눌 때도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아이때부터 환영을 받으며 게임에서 거의 제외되지 않고 놀림을 적게 받고 얻어맞는 일도 거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따스한 대우는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의해 규정되는 계급사회에서 살고 있다. 단,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울리히 렌츠, 아름다움의 과학)
-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돈이 많거나, 권력을 지녔거나, 인맥이 넓은 사람이 아님. 세상 사람 그 누구와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임. 때와 상황에 따라 어느 누구하고도 진득하니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관계를 일구어내기 때문에 가장 큰 사람임. 큰 사람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음. 유용한 정보는 그때뿐이고 사람들은 그 정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면 바로 등을 돌림. 관심있는 정보에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결국 이야기하는 능력에 더 큰 매력을 느낌.
- 정보는 그것이 새로웠던 순간이 지나면 가치가 사라진다. 정보는 오로지 그런 순간에만 생명력을 가진다. 정보는 스스로 완전히 그 순간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시간을 놓치지 말고 그 순간에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사정이 다르다. 이야기는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내부에 자신의 힘을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펼쳐지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발터 벤야민, 사유 이미지)
- 독일의 사상가 벤야민은 정보와 이야기가 다르다고 함. 정보만 있는 사람은 그 정보 때문에 잠깐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지만,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재미있기 때문에, 늘 곁에 두고 싶어짐.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처음에는 외모에 끌렸더라도 그 매혹은 오래가지 않음. 아무리 예쁘고 멋지더라도 같이 있을 때 대화가 안 통하면 흥미가 사라짐. 그래서 우리는 결국에는 같이 있을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오가는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 언어, 그리고 대화는 나라는 존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말해줌. 나 혼자라면 언어는 별 필요 없음. 언어가 필요한 까닭은 나와 너는 다르기 때문. 서로 다른 너와 내가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상대와 깊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에게 당신이 필요하듯 당신 곁에도 내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무의식중에 주고받게 됨. 누군가와 한바탕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나면 그 사람이 좋아지는 이유이기도 함.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은 훌륭한 정원사처럼 자신의 주변을 이야기꽃으로 늘 흐드러지게 물들임.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이를 소중히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됨
- 대체로 우정에 관해 판단하는 것은 나이 들어 체력이 강건해지고 지적능력이 성숙한 뒤에야 할 수 있는 일이네. 소년 시절에 사냥과 공놀이를 좋아했던 사람이 성장해서도 전에 취미가 같았기에 좋아했던 사람들과 여전히 가까이 지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네. (...) 성숙해지기 전에 맺은 우정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없네. 성격이 달라지면 취향도 달라지고, 취향이 달라지면 우정은 소멸하는 법이네.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 아무리 애쓰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 밖에서 사유하기 어려움. 생각은 어떤 틀 안에서 이루어짐. 그 틀을 자꾸 변화시키고 대체할 수는 있겠지만, 틀 없이 사고할 수는 없음. 사고는 언제나 특정한 조건에 의해 제약받음. 사회와 문화, 경제구조, 정치나 역사, 나의 체험 등에 좌우됨. 생각은 나름대로 물질성을 갖고 있음. 열과 시간을 들여야 물질이 변하는 것처럼 생각 역시 가만히 놔두면 변하지 않음. 스스로 자신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 타인을 오해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음.
-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인지적 맹점을 산출한다. 이것을 없애려면 또 다른 영역에서 또 다른 맹점을 산출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어떤 상호작용 때문에 정상상태가 깨질 때, 이를 테면 다른 문화적 환경속에 갑자기 놓이게 될 때 그리고 그것에 관해 성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을 산출하면서 "전에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했다"거나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고 설명한다. (움베르도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앎의 나무)
- '의례적인 사과'가 필요한 상황에 처하면 여성들은 서로간의 관계에 생긴 약간의 미세한 불균형을 부드럽게 완화키시기 위해서 '미안해요'라고 말한다. 그것을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실수를 저지르니 않는 한,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다시 말해 상대방보다 낮은 지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들이 의례적인 사과를 할 때 남성들은 종종 허약함과 굴종, 말하자면 보다 낮은 서열을 확인시키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펠렌 피셔, 제 1의 성)
- 남자들이 사과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사과를 상대에게 무릎 꿇는 일처럼 생각하기 때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미안함을 표시하는 일이 패배처럼 느껴지는 것. 사과조차도 서열다툼이자 경쟁의 결과로 받아들일 정도로, 남자들은 가혹한 경쟁 속에서 자람. 남자들이 원래 경쟁을 좋아하고 투쟁을 원한다기 보다는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것. 남자들이 자연스레 사과할 수 있게 하려면 치열한 경쟁부터 줄여야 함. 그래야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서로에 대한 경쟁과 경계가 수그러들고 상대가 무찔러야 하는 적이 아닌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퍼질 때,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쉽게 나와 사람들 사이가 쫀득쫀득해질 수 있음.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서로에게 빚이 있음을, 서로에게 사과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갈등을 줄여주는 소중한 말들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음
- 대다수의 사이코패스들이나 범죄자들이 남자인 이유도, 남자들이 공감능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 오히려 남에게 잘 공감하지 못해야 남자답다고 여겨지며, 어려서부터 경쟁과 다툼이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남. 그래서 남자들은 눈물도 마르고, 웃음에도 인색한 메마른 사람이 되기 일쑤. 어려서부터 공감능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기 때문. 공감은 단순히 남의 감정을 느끼는 정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할 때 꼭 갖춰야 하는 삶의 기술임. 나의 삶과 너의 삶을 이어주는 다리라고나 할까. 공감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홀로 떨어진 섬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음. 자본주의 사회는 남녀 모두에게 변화와 새로운 자질을 요구. 논리력과 추리력 같은 체계화된 사고가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여자들에게는 이런 이성적 능력을 키울 것을, 남자들에게는 부족한 공감능력을 키울 것이 요구됨. 여자들은 효율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까칠하게 되짚으며 이성을 차갑게 계발할 수밖에 없고, 남자들 역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도 조율을 잘할 수 있는 소통능력, 공감과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해짐.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교양은 어떤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고감능력을 키워 소통하면서 남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능력임. 교양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타인에게 마음을 겸손히 전하고 상대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됨
- '소통의 에토스'는 이성적, 감성적 기술들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관점에 공감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관리자의 자아를 전통적 여성 자아 모델로 향하게 만듬. 더 정확히 말해, 소통의 에토스는 남자들과 여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게 하고, 친화적이 되게 하고, 자기를 상대방의 눈으로 보게 하고, 상대방에 감정이입하게 하며, 이런 방식으로 남녀의 구분을 흐린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 현대인들은 누군가를 차분히 이해하고 기다리지 않음. 그보다는 자신이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상대가 바로 받아주지 않으면 쉽게 마음을 접고 혼자 외로운 편을 택하기도 함.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관계에 있어서는 그 어느때보다 서툴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음. 어른이 될수록 사고의 깊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는 커녕, 스스로 철이 덜 들었따고 타박할 만큼 자기 세계에만 갇힌 채 퇴화함. 철학자 이정우의 말처럼 오늘날은 '전문가-어린아이'들을 양산하는 사회가 되어버림.
- 타자들과의 부딪히이라는 과정없이, 삶 일반의 지평없이 자신의 영역에 갇일 때, 그 영역안에서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 해도 한 사람의 인간자체로서는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됨.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제외한 다른 영역에서는 고등학교/대학교 수준에서 그대로 멈춰 버리기 때문.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오히려 퇴화해 버리기 때문. 이들이 과학자든, 예술가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이들이 40대든, 50대이든, 이들의 대화내용은 (그들의 전문분야를 예외로 한다면) 늘 중고생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현대 사회란 이런 전문가-어린애들을 양산해 내는 사회이다. (이정우, 주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누구나 컴플렉스와 트라우마를 갖고 있음. 콤플렉스는 자신이 뒤떨어지거나 못났다는 열등감이고, 트라우마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외상을 일컬음. 의식하면서 괴로워하느냐 무의식중에 두려워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모두 해로운 감정 에너지에 붙잡힌 상태임. 털어내고 풀어야 하는 멍울이지만 맞닥뜨리기는 너무 두려움. 그저 피하고만 싶음. 하지만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약간의 후련함과 홀가분함이 내안에서 싹트게 됨.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슬픔의 크기는 줄어들고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것 같던 슬픔이 견딜만해 짐.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무엇이지 직시하면서, 글로 쓰거나 타인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함.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언어로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함
- 트라우마가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우리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드는 모순된 정보들의 신풍으로 인해 계속해서 경악하고 망연해하고 혼란스러워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하는' 사물들과 사실들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고, 우리에게는 트라우마가 퍼트린 안개를 흐트러트릴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다. (보리스 시륄닉, 벼랑끝에 선 사랑을 이야기하다)
-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통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음.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는 나를 붙들고 있는 끈끈이 주걱 같은 것이지만, 벗어나기만 한다면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음. 그대로 두면 한이 되겠지만, 재의미화된 콤플렉스나 트라우마는 힘이 됨. 어릴 때 가난을 경험했던 사람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며 빈곤을 추방하는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사랑을 못받고 자란 사람은 사람들의 스산함을 이해하는 상담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 화병은 미국 정신의학회 국제질병 진단 기준에도 명시된 한국인 특유의 증후군. 참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아주 흔한 질병임. 병이 될 정도로 지나치게 참는 것도 안 좋지만, 반대로 요즘 우리는 너무 사소한 일에도 피가 거꾸로 솟아서 문제임. 버릇처럼 복받치는 감정은 진화한 화가 아니라, 내 안의 어떤 뒤틀림과 응어리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정작 자신이 신경이 곤두선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음. 그 본질적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화는 뽀루지 나듯 또 다시 올라옴. 그러지 않으려 해도 화가 난다면, 괜히 상대를 증오하게 된다면, 일단 자기 삶을 멈춰 세우고 차분히 살펴보는 시간을 마련해야 함.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증오를 자기경멸과 연결지음. 자신에게 만족하고 평정을 얻은 사람은 비록 타인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증오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에 대한 못마땅함과 혐오가 타인을 향한 증오의 형태로 터져나온다는 것.
- 증오는 우리의 부적합성, 쓸모없음, 죄의식, 그 밖의 결함을 자각하지 못하게 억누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표현이다. 여기서 자기 경멸이 타인에 대한 증오로 변질되며, 이 변질을 숨기기 위해 매우 단호하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 정당한 불만인 경우에도, 증오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보다는 자신이 무력하고 부적합한 존재, 겁쟁이라고 느낄 때, 달리 말하자면 자기경멸을 느낄 때 더 많이 일어난다. (에릭 호퍼, 맹신자들)
- 다윈은 유머를 '마음의 간질임'이라고 했음. 유머러스한 말 한마디에 누군가가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듯 마음의 빗장이 사르르 풀어지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와 닿을 것.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도 사람들이 유머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썼음.
진화 심리학의 발견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또 가장 황당한 것은 전 세계 인류가 유머감각에 부여하는 가치였다. (...) 짝을 찾는 독신 남녀들이 왜 한결같이 뛰어난 유머감각을 요구하고 선전하는지, 이제 고객가 끄덕여질 것이다. 코미디언 재능은 창의성을 드러낸다. 코미디는 우리의 강력한 네오필리아 성향을 활용하고, 싫증을 느끼는 경향을 피한다. 창의성은 지능, 에너지, 젊음, 프로테우스주의의 믿을 수 있는 지표다. 유머는 매력적이다. 그래서 진화했다. (제프리 밀러,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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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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