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중국사회가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과연 한사람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정당한가? 중국현대사의 가장 자랑스런 사례는 중국이 왕정의 질곡을 타파하고 전혀 새로운 공화정 체제로 나아가게 만드는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연연하지 않은, 쑨원의 사례다. 그런데 가장 부끄러운 사례는 공산혁명을 완수하고 새로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질서, 그 법적질서가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1인의 임의적 결단에 의하여 모든 합리적 체계를 묵살하고 농단하여 국가를 혼미에 빠뜨린 마오쩌똥의 사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진핑의 막강한 권력이, 마오쩌똥과도 같은 1인집중의 독재권력의 위험성을 내포할수도 있지 않겠냐는 질문까지도 한다. 그러나 시진핑의 권력은 막강하지만 절대권력이 아니다. 마오의 권력은 절대권력이지만 실상 막강하지 못했다. 그것은 루안치빠짜오의 난동이었다. 마오의 권력은 임기가 없는, 오직 그의 신체적 종료만을 기다리는 황제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의 권력은 10년이라는 명료한 기한설정이 되어있는 권력이다.
- 10년후에 그는 다음의 후계자에게 깨끗한 백지수표를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부동의 제도가 되었다. 그리고 막상 10년이라고는 하지만 차기 후계자의 위상은 이미 5년차에 열리는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결정된다. 한마디로 마오의 권력을 인치의 권력이라고 한다면, 시의 권력은 법치의 권력이다.
- 뻬이따이어회의란 것이 있따. 뻬이따이어는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는 유명한 해변별장지인데 이곳에서 당대회가 열리기 전에 정치국위원 현역과 원로가 함께 모여 당대회의 결의사항을 미리 토의하고 사전조율하는 비밀회의를 연다. 이 회의는 50년대 마오시대로부터 존속되어 내려오는 특별한 관행이었다. 이 회의야말로 중국공산당 원로들의 부패가 바톤터치되어 계승되는 은밀한 메커니즘의 원흉이었다. 은퇴한 당 고관이 참석하여 영향력과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무대였따. 후진타오는 한때 이 회의를 중단시켰다가 결국 다시 열었다. 결국 다시 연 뻬이따이허 회의에서 후진타오는 지앙쩌민의 판 뒤집기에 당한다. 후 주석은 끝까지 자기 후임으로서 리커치앙을 밀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수포로 돌아갔다.
- 결론부터 말하면 시진핑을 국가주석으로 앉힌 힘은 후에게서 왔다기보다는 지앙의 라인에서 온것이다. 지앙쩌민-쩡칭홍의 현명한 연합전선에 의하여 결국 시진핑은 국가주석, 당총서기, 군위주석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시진핑을 오늘의 모습이 있게 만든 가장 큰 공로자는 지앙쩌민이었다. 그러나 현금 시진핑의 모든 개혁화살은 지앙쩌민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지앙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제도적 개혁도 어김없이 진행시키고 있다. 한겨레 기사는 시진핑이 뻬이따이허 회의를 완벽하게 폐지시켰다는 내용까지 싣고 있다. 이것은 독주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권력의 독주까지도 차단시키는 체제개혁의 문제인 것이다.
- 인간적으로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고, 바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공해준 은인을 죽일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바로 시진핑의 위대함이 있다.
- 중국에서 최고권력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처럼 국가수반 즉 대통령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국가주석은 권력서열에서 하위의 개념이며, 실권을 장악하지 못함. 반드시 당총서기가 되어야 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는 것이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를 직접 장악하지 못한 당총서기나 국가주석은 허수아비골이 되는 것. 역사적으로 이 세자리는(국가주석, 당총서기, 군사위원회 주석) 한 사람이 동시에 취임하는 예는 흔치 않았다. 마오쩌똥 시대에는 마오의 두루뭉술한 주먹구구식 절대권력 때문에 이 세자리의 위상이 분명치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마오조차도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의 실패에 대한 외형적 책임을 진다는 제스츄어로 59년 4월, 죽가주석자리를 유소기에게 내놓았다. 그러나 물론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자리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는 죽을때까지 움켜쥐고 있었다.
- 등소평의 경우만 해도, 우리는 78년부터 97년 사망까지 20년간을 등소평시대로 부를 수 있는데, 그 기간동안에도 등소평은 단 한번도 국가주석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 등소평은 소평(작은 평화, 나서지 않는 평화, 소강사회적인 평등)이라는 이름 그대로 권좌의 형식적 지위를 탐내지 않고 실질적 권력만을 장악했다. 제2세대적인 카리스카가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도 81년부터 89년까지만 차지하고 있었고, 89년 천안문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택민에게 당총서기자리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자리를 내주어 강택민체제를 구축했다. 등소평은 일생을 통하여 단 한번도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영도인 자리를 담임한 적이 없었지만, 실제적인 최고영도인으로서의 그 카리스마가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 백묘흑묘의 실사구시론, 빈곤이 사회주의는 아니라는 현실부응적인 강고한 신념, 솜 속에 바늘이 있다고 말하여 지는 그의 위인의 다면성은 모택동에 의하여 원칙없이 망가져버린 중국사회를 근대화시키는 데 엄청난 힘을 발휘했지만, 상왕정치의 모델을 만들고, 개혁개방의 효율성만을 서두르고 그 효율성의 부작용을 억제할 수 있는 제도적, 도덕적 원칙을 수립하지 못한 점, 그리고 인척과 측근의 부패를 방조한 점은 그의 한계로 남을 뿐 아니라 후대에 악영향을 끼쳤다.
- 아테네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맥락을 달리함. 우선 그것은 방대한 노예인구나 이주민인구, 그리고 여자를 제외한 특수한(토지를 소유한) 시민계층에 한정된 문제였다. 그리고 그 인구는 3만명 정도였으며, 아테네 전체인구 30만명의 10%에 지나지 않음. 에클레지아라는 공공의 의회가 1년에 10번 열렸고, 모든 안건은 에클레지아에서 거수로 판결되었는데, 대충 보아 가불가를 결정. 거수표결 이전에 찬반 연사들의 연설이 볼만한 잔치였다. 에클레지아는 분명 직접선거제도였으나, 그곳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일정하지 않았고, 표결의 모든 방식이 매우 엉성했다.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아테네에 줄곧 민주주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투키디데스가 극찬한 페리클레스라는 사람만이 민주제도에 의한 집권을 장기화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자기 선생 소크라테스가 민주제도라는 엉터리 제도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믿었다.
- 폴리스라고 하는 지극히 공간적으로 제한되고 고립된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는 생겨날 수 있지만, 고대중국과 같은 거대한 토지와 인민을 지닌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남상이라고 으시대는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도 귀족세력이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일 뿐, 오히려 희랍의 민주주의보다도 더 경직된 것일수도 있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미국이라는 신대륙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대륙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공간, 그러니까 구대륙과의 자유로운 단절이 가능한 풍토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정치실험이 민주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민주도 미국 자체의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럽전통의 아이디어를 대충 빌려온 것이다. 록크나 룻소나 몽테스키외 같은 사상가들의 삶의 체험에서 형성된 철학적 관념을 원용한 것이다. 그것이 곧 아메리카 신대륙이 원했던 이상을 표현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연방주의가 전국적 제도로서 안착된 것이 남북전쟁이 끝난 후의 사건이므로 우리나라의 동학운동 시기와 겹친다. 다시 말해 미국의 민주주의라고 해봐야 19세기 중반에 우리 민중이 인내천이라는 매우 근대적 인간평등사상을 자각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그 노력에 비해 월등히 시대적으로, 철학적으로 앞섰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이승만이 도미하여 제일 먼저 만난 존 헤이 미 국무부 장관만 해도 아브라함 링컨의 비서를 했던 사람이니까, 우리의 역사와 미국의 역사가 알고보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 중국 '당-군-국'의 삼위일체체제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그들이 전통적 중국문관제도의 정수를 이루는 적우제의 방식에 의하여 상당히 안정적으로 민본적 가치를 구현하는 리더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튐이나 정당연줄이나 선거에 의해 형성되어가고 있는 리더십의 퀄리티에 비하여 훨씬 더 천하위공의 이상을 구현하는 상층인력 인프라가 잘 구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 중국은 인치라는 말을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 중용에서 말하는 기인존,  즉기정거의 인본주의 원칙은 대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 시진핑을 태자당으로 말하는 것은 천박한 규정이다. 중국 최근세사에서 근본적으로 태자당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 그것은 일본의 정치평론가나 저널리스트들이 즐겨쓰는 말일뿐, 중국인들은 그러한 개념으로써 한 권력집단을 구상화하지는 않는다. 민국시대에 장송공진 사대가족내의 세력집단 같은 것을 태자당이라 말할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정도의 집단의식을 갖는 특권그룹은 현대 중국에 존재하지 않음. 일본저널리스트들이 쓰는 의미는 중국공산당의 고급간부의 자제로서 특권적 지위에 있는 자라는 의미나, 이때 당이라는 것이 한 개인을 가리킬수는 있으나 집단세력을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시종쉰의 정치생애는 시진핑의 삶의 역정에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함수인 것은 분명하다. 시종쉰의 삶은, 시진핑에게 시련을 주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자연스레 형성시켰다. 여기 자연스럽게라는 말이 매우 중요. 시종쉰은 자기아들을 정치가로 성공시키기 위해 인위적 노력을 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종쉰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적 삶의 원칙, 철학 같은 것을 고수했다. 시종쉰은 죽음의 자리에서까지 아들에게 좋은 기회를 선사했다. 고위간부가 죽으면 반드시 성대한 장례식이 치루어지게 마련이고, 맏아들인 시진핑이 상주로서 모든 하객을 접대하게 마련이다. 그가 북경에서 서세한 시점은 2002년 5월 24일 시진핑의 생애에서 매우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시진핑은 당시 복건성 지방간부에 불과한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시점에서 지앙쩌민, 리펑, 주르옹지, 후진타오, 원지아빠오, 지아칭린 등 당대 중국 최고지도부를 모두 만나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성실한 인품의 존재성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계기로 인하여 시진핑은 그해, 복건성과는 급이 다른 절강성 부서기, 성장대리가 되었다. 2002년 11월에는 중곡 16대에서 중앙후보위원에 불과했던 그가 곧바로 중앙정치국위원 25인 중 한명으로 예외적인 급상승을 하게 됨. 시진핑의 평소에 쌓아온 덕성이 갑자기 고위간부들에게 인지되어 정권의 중핵으로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역정이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도 비움  (0) 2018.07.29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  (1) 2018.07.22
한국인이 모르는 중국인의 심리코드  (0) 2018.07.09
인생이 묻고 붓다가 답하다  (0) 2018.07.02
마음 편하게 살아라  (0) 2018.06.30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