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가란 재가의 삶을 버리고 선택한 삶. 그런만큼 재가 삶의 특징인 욕망에 빠져 사는 삶, 분노에 사로잡힌 삶, 어리석음에 물든 삶도 버려야 함. 그러한 재가의 부정한 특질을 버릴 때, 출가 본연의 목적이 성취됨. 출가 상태에서 재가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그러한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시체를 태우다가 남은 장작처럼, 누구도 그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출가의 즐거움도, 재가의 즐거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출가든 재가든 현재 내가 처한 사오항에서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임
- 경전에서는 '수행에 몰두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만 나의 마음에 취착이 없어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기를...이라고 생각하는 비구는 결코 번뇌에서 해탈하지 못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수행자는 마치 닭이 알을 품지 않으면서 무사히 알이 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신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함
- 새끼줄이나 종이 자쳉 본래 어떤 냄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새끼줄로 향통을 묶어 놓으면 향냄새가 날 것이고, 종이로 생선을 싸면 비린내가 날 것이다. 그와 같이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나에게 다가오는 내용이 달라진다
- 방탕과 욕망은 배우지 않아도 쉽게 익히게 됨. 하지만 절제와 선함과 청정은 실천하고 익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번 물든 나쁜 버릇은 고치가 어려움. 생선 비린내가 밴 새끼줄에서 냄새를 제거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애초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스승과 좋은 벗을 가까이 해야 함
-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는 세종류이 사람이 있다. 바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 땅 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 물 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내는데 그에게 화가 오랜 세월 존속한다. 예를 들어 바위에 새기면 바람이나 물에 의해 쉽게 파괴되지 않듯... 이 사람을 바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이라 한다. ...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내더라도 그에게 화가 오랜 세월 존속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땅에 새기면 바람이나 물에 의해 쉽게 파괴되듯 .. 어떤 사람은 거칠게 말하고 날카롭게 말하고 불쾌하게 말하더라도, 바로 화해하고 친목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예를 들어 물 위에 새기면, 그것이 쉽게 소멸되듯이, ... 이 사람을 물 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이라 한다.
- 경전에는 두번째 화살이란 가르침이 있다. 이것은 어떤 불쾌한 상황, 혹은 화나는 상황을 계속해서 생각함으로써 끊임없이 분노의 화살로 자신을 찌르는 것을 말함. 욕은 한번 들었으나,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면 계속해서 욕을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면 그에게 마음의 평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화가 나면 물 위에 새긴 것처럼 화가 나는 상황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흘려버릴 수 있어야 함. 그것이 나에게 이로운 것이다. 화를 내야할 상황에서 화를 내되, 그 화를 간직할 필요는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좋은 것에도 집착하지 말하고 했는데, 하물며 해로운 것에 집착해서야 되겠는가. 화가나는 상황이 계속되어 잊히지 않는다면, 두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나는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화를 분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관을 하는 것. 경전에서 분노는 자비관으로 치유된다고 설해져 있다. 모든 존재들은 행복하소서. 모든 존재는 평온하소서라고 계속해서 되뇌는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이 말을 반복하다보면, 마음이 어느덧 편안해진다. 그러면 바위에 새겨진 분노의 흔적은 찾기 힘들게 될 것이다.
- 우리는 평소 유순한 소 같지만 어떤 특정 상황이 되면 예리한 뿔로 상대를 공격하는 이중성도 갖고 있다. 공격성을 감추고 실수라는 말 뒤에 숨거나, 때로는 모진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모르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기도 함. 때로는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도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함.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욕망과 공격성의 뿔을 잘라내지 못하더라도, 잘 단속해서 나와 남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한 당나귀가 소 떼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도 소이다. 나도 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당나귀에게는 소와 같은 모습, 소와 같은 목소리, 소와 같은 발걸음이 없기 때문에, 소 떼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도 소이다. 나도 소이다'라고 단지 생각만 할 뿐이다. ...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우리는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에 치열한 의욕을 일으켜야 하고,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에 치열한 의욕을 일으켜야 하고,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에 치열한 의욕을 일으켜야 한다.
- 대나무는 60~20년 주기로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하지만 열매를 맺은 대나무는 그 후 죽음을 맞는다. 열매는 대나무에서 생겨나지, 결코 밖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자신을 품은 대나무를 죽게 만든다. 이런 의미로 경전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대나무 열매에 비유하고 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삼독이라고 하는데,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들이다. 이 삼독은 밖에서 주어지거나, 생겨나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내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대나무 열매가 대나무에서 자라나 대나무를 죽이듯이, 내 안에서 생겨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결국 나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 어리석은 자는 설령 평생동안 현명한 사람을 모시더라도, 그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마치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
- 친구의 깊은 우정도 순식간에 끊어 버리며 건강과 부귀영화도, 높은 지위나 권력도, 참으로 소중한 행복도 간단히 파괴하는 위력적인 폭약이다. (쇼펜하우어)
- 부처님은 상처 가운데 가장 심한 상처는 근심이며, 이 근심은 탐욕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많은 경우, 지나간 일에 근심하며 나아가 미래의 일을 근심한다. 그러한 일들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욕망과 탐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너를 위해서란 말에는 나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애써 외면할 뿐이다. 그리고는 근심하며 아파한다. 그래서 고통을 안겨주는 상처는 얼핏 보면 나를 둘러싼 사람들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자신을 잘 관찰하여 내가 내 자신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는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따. 나에게 상처를 주는 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알아야 비로소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 마치 쇠로부터 생겨난 녹이, 그것(녹)이 생기고 난 뒤, 오히려 쇠를 삼키듯이, 자신이 지은 악업이 자신을 나쁜 곳으로 이끈다.
- 숲(vana)은 번뇌를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을 의미한다. 삼독은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들이다. 여기에 교만, 의심, 악견을 더하여 이 여섯가지를 근본 번뇌라 함. 그리고 이들 근본 번뇌로부터 다양한 번뇌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수번뇌라고 함. 근본번뇌에 의지하여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오염된 마음작용이란 의미다. 부처님은 이를 덤불(vanatha)에 비유하고 있다. 즉 숲은 근본번뇌이며, 덤불은 수번뇌인 셈이다.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근본번뇌와 수번뇌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시에서 숲이 없는 상태가 되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때 쓰인 단어가 nibbana(숲이 없는) 이다. 이 단어는 열반과 관련이 깊은 단어다. 결국 숲과 덤불을 모두 제거해 숲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낱낱이 보일 때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무언가 감추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이렇듯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마음이 명징한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된다. 밝고 맑은 마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알기에 거짓이나 위선이 설 틈이 없다.
- 옛 선사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와 같은 표현들을 즐겨 사용하였따. 이는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란 표현일 것이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도 '패해서 사는 것보다 싸워서 죽는 것이 낫다'와 같은 결연한 수행의지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다. 반면 자애경처럼 어머니가 외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표현은 치열한 자기투쟁만이 수행의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 마음속이 선한 특징을 인식하고, 그것을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듯 소중하게 키워가는 방식의 수행도 있는 것이다.
- 해야 할 일을 마친 사람에게 게으름은 없다. 오직 해야 할 일이 남은 사람에게 게으름이 있을 뿐이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에게 마음의 걸림, 곧 구름은 없다. 그의 마음은 밝게 빛나는 달과 같다. 작은 일이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일을 완벽하게 끝내면 속이 시원하다. 하물며 수행을 마친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 프랜시스 크릭은 94년 자신의 한 저서에서 '영혼은 팅커벨처럼, 오로지 그것의 존재를 믿는 믿음 때문에 영속되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 크릭 이후 신경과학의 비약적 발전은 영혼에 대한 믿음을 근본부터 제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인간의 지각능력, 기억, 감정, 의식 등은 뇌 속의 전기화학적 신호가 변화된 신경콛에 불과하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인간이해를 반박하는 견해도 분명 존재한다. 이렇듯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아마도 결론에 도달하기는 요원할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러한 논쟁은 무익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논쟁해도 결론이 나지 않고, 그것은 어떠한 이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존재하듯 그렇지 않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잘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직시하여 올바른 방향에서 해결책을 강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
- 이 세상이 고통스럽지 않은데 누가 수행을 하겠는가. 수행을 하거나 어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안전하지 않아 불안하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만큼 현실에 대해 냉혹한 관찰을 요구하는 종교도 드물 것이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불교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철저한 현실에 대한 직시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참된 모습이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바른 인식이 성립하면, 그 원인을 탐색하여 밝이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부처님은 고통을 종교적 믿음의 차원으로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을 따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력의 종교다. 이렇듯 고통에 대한 바른 인식과 원인탐색의 과정, 그리고 원인에 대한 제거와 그 결과를 말하는 것이 사성제라는 가르침이다.
-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안경색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색안경 때문에 달라지지 않느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인식이 왜곡되었을 뿐이다. 이 이치를 알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옳은 것이고,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에 사로잡히게 된다.
- 조선시대 통치자의 곁에는 항상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을 남김. 기록한다 함은 자신이 한 일을 알리겠다는 의미. 그래서 기록이란 구체적 행위를 통해 통치자는 스스로의 행동과 말을 자제했을 것이다. 만약 통치자의 사적 영역이라면서 사관을 배제했다면 훨씬 더 많은 부정과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권력과 무력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취하는 방식이요, 지혜로운 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행동과 말과 뜻을 선하게 갖고자 노력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자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자제와 부끄러움을 늘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온갖 사악한 욕망과 거짓과 부패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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