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비움

인문 2018. 7. 29. 21:45

- 피도 눈물도 없이 불필요한 옷을 버린 뒤에 내게 남은 것은 결국 유행과 무관한 것들이다. 유행의 노예가 되는 순간 옷은 소모품이 아닌 소중한 무언가가 되고, 무엇이든 결코 버릴 수 없다.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 입어야 하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유행이란 늘 업그레이드 버전이고 호랑이 담배물던 시절에 입던 옷은 미래에도 안 입을 활룔이 높다. 대신 단순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화이트, 블랙 혹은 그레이, 네이비와 같은 중간색 옷으로 가득찬 옷장은 단조롭지만 결코 피곤하지 않다.
- 갖고 있는 신발이 적으면 더 신경써서 관리하게 된다. 굽교체 등은 기술좋은 단골 수선집에 맡기는데 플랫힐을 신은 뒤로 바닥에 닿는 굽의 면적이 넒어 굽의 교체주기가 길어졌다. 굽 면적이 좋은 스틸레토힐의 잦은 교체주직에 비하면 신경쓸 일이 하나 준 것이다. 신발은 더럽지 않게 닦아주고 신지 않는 많이 낡은 신은 미련없이 버린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는 여전히 하이일, 비즈니스 미팅에는 미들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개인적 시간에는 플랫슈즈나 스니커즈를 신는다. 하이힐은 여전히 내게 스타일의 격을 올려주는 매력적인 도구다. 하지만 이제 하이힐을 신지 않은 작은 키의 내가 더 자연스럽다
- 10대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에 메이크업을 살짝 해보기도 했는데, 정작 어른이 되고 나서는 가벼운 화장을 선호하게 됨. 건강한 피부일 때는 화학물질을 마구 바르고, 노화로 피부가 망가지기 시작하면 화장품이 독하다는 생각에 화장을 줄인다. 화장품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많이 바르면 피부를 자극시켜 노화를 촉진할지도 모른다. 나는 되도록이며 피부에 아무것도 바르고 싶지 않다. 민낯을 바라보며 건강한 안색인지 살피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얼굴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메이크업은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밝은 인상이다.
- 헤어스타일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지만 머릿결을 만드는 일에는 신경을 쓴다. 검은콩을 넣은 밥을 지어 먹거나, 견과류를 일상적으로 챙겨 먹는 것이 우선이다. 또 미용실에서 주기적으로 트리트먼트를 받기도 하는데, 집에 셀프 헤어케어 제품을 없애버린 탓도 있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관리가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시대에 내가 모든 것을 직접할 이유는 없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직접 해내겠다는 과도한 욕심으로 쓰지도 않을 물건을 사며 헛되이 돈을 써온 것에 홈케어 제품도 한몫했다. 차라리 내가 이런 쪽에 게으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한달에 한번씩 전문가의 손에 맡긴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한 두피 마사지도 하고, 모달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편이 만족스럽다
- 삼시세끼를 일정시간에 챙겨먹기, 식사후 양치질 꼼꼼하게 하기, 과일과 채소 많이 먹기, 집에 오면 손씻기, 일기예보를 잘 듣고 황사나 미세먼지가 심하면 마스크를 챙기기, ...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지식은 유치원에서 모두 배웠다. 누구나 다 아는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더 자극적인 일에 신경이 쏠려서다. 혼자살면 스스로를 더 잘 챙겨야 한다. 사실 다 큰 성인을 애초에 누군가가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광이 아닐까. 함께 살아도 혼자 살아도 내 몸은 내가 돌보는 게 당연하다. 지나치게 많은 물질에 집착하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 내 한몸보다 중요했던 청춘의 시기가 지났다. 이제 그럴 듯한 겉모습이 아닌 진짜 잘사는 것에 집중한다.
- 매끼니를 챙겨먹으면 폭식을 예방할 수 있따. 우리 몸이 가장 좋아하는 하앙성 때문이다. 아침에 조금 더 자려고 식사를 거른 적이 많았지만, 이제 간단하게라도 먹는 습관을 들였다. 고작 토스트와 과일, 치즈 정도지만 점심 폭식이 사라지고 자연스레 적당량을 먹게 된다. 위도 쓰리지 않다. 소식의 시작은 제때 끼니를 먹는 것에서 출발했고, 느리게 먹은 뒤에 완성되었다.
- 집 곳곳의 여백을 바라보다 보면 가끔 생각이 정지된 기분을 느낀다. 무념무상의 상태가 명상이라면 나는 분명히 예전보다 명상에 자주 잠긴다. 순백의 도화지 같은 벽을 보고 있으며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나에게 가끔 찾아오는 그런 쉼표가 고맙다.
- 보통 불안감을 느끼면 그에 대비하는 물건이나 행동이 불안의 크기만큼 늘어난다. 불안은 느긋한 생활을 방해한다. 가정법으로 만들어진 미래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지금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니까 여분의 공식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아닌 지금의 편안함으로 계산한다.
- 나는 너무나도 부유해서 구멍난 양말을 솜씨 좋게 꿰매어 신는 일도 없고, 음식도 넘치게 먹으며 심지어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늘 돈이 없다고 말해왔다. 이런 생활이 싫어서 쓰지 않는 물건부터 버리며 삶의 규모를 줄여 보았다. 그것이 행복에 가까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시 눈에 들어오는 자극적 물건을 사게 되고 얼마 뒤 후회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결국 이 사슬을 끊지 않으면 결코 내가 생각했던, 가볍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일상은 만들 수 없을 듯 싶었다. 꽤 오랫동안 품격있는 생활이란 디자이너 가구와 값비싼 신제품 가전, 유행하는 패션 아이템들이 즐비한 공간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대대로 물려받은 고가구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할머니가 뜨개질한 머플러에서 감동을 느낀다. 수십년 동안 아끼고 관리하며 써온 물건을 가족의 보물처럼 간직하는 쪽이 최신 유행에 휩쓸리는 것보다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좋다.
- 물건은 가지면 가질수록 눈높이가 올라가서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은 늘 쪼들렸다. 그 돈을 벌어들이는 과정은 늘 고단했는데도 돈이 아까운 줄 몰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병들 날에 대비해 돈을 모으려고 노력하다 병이 든다. 낡은 장롱이나 벽돌로 지은 은행에 넣어둘 돈을 벌다가 병들고 만다"라고 이야기했다.
- 모든 추억을 디지털로 저장하면 깔끔하지만 한편으로 삭막함을 느끼며 살아야 할지도 모름. 살면서 어떻게 얼마만큼,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았는지 떠올리게 해주는 추억들은 수중하다. 하지만 소유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릴 때 받은 편지를 어른이 되어 열어본 기억이 없듯이 디지터화된 파일을 열어보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든 소유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보다 실상 믿을 것은 나의 기억, 그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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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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