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게

심리 2019. 12. 26. 08:31

- 무슨 일이든 해보지 않으면 소용없다. 해내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하지 못한다"는 현실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곧 할거야"라는 가능성 속에서만 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못한다.
- 행복은 존재와 관련되어 있지만 성공은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미키 기요시, 인생론 노트)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성취하는, 예를 들면 일류 대학에 합격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는 과정이 필요함. 반면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말은 행복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인간에게는 '지금, 여기'에 이미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그 어느 때라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그 무력함이 행복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의미
-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아들러)
- 아들러가 말하는 불완전함이란 인격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지식과 기술에 대한 불완전함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 즉시 '잘하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새로 시작하는 일이니 못하는 것은 당연함. 그런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잘하게 되는' 것의 첫 걸음이다.
- 아침에 눈뜨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눈을 떴다. 적어도 '오늘'이라는 날은 살 수 있다." 그것은 병을 앓기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 앞날을 고민하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지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건 별로 즐겁지 않다.
- 많은 부모가 '장래를 생각해야지'라고 말하며 아이를 타이르고, 회사에서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먼 장래의 일을 왜 그렇게 염려하는 걸까? 그 이유는 시간과 인생을 한 줄의 직선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어디쯤에 있습니까? 젊은 사람은 직선의 출발점에 가까운 쪽을, 노인이라면 종착지에 가까운 쪽을 가리킬 것임.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간과 인생을, 시작과 끝이 있으며 불가역적으로 종점으로 향하는 움직임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움직임을 키네시스라 불렀다. 키네시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디에 도달했고 무엇을 완수했는지가 중요. 무슨 일이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움직임이 중단되거나, 샛길로 빠지면 그것은 미완성이자 불완전한 움직임이 됨. 예를 들어 월반이나 벼락출세는 키네시스 관점에서 보자면 바람직한 움직임이다. 한편, 젊어서 죽은 사람이나 인생이나 완주하지 못한 마라톤은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움직임이 된다. 하지만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그 과정의 한순간 한순간이 완전하면 완성된 것으로 여길수도 있음. 이런 경우는 시간이나 인생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네르게이아는 '이루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그것이 그대로 '이룬 것'이 되는 움직임이다.
- 에네르게이아를 비유하자면 춤이다. 춤출 때는 순간순간이 즐겁다. 도중에 멈추더라도 괜찮다. 춤이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추는 게 아니기 때문.
- 인생도, 살아 있는 '지금, 여기'가 그 자체로 완성된 에네르게이아이다. 에네르게이아의 관점으로 살아간다면 남은 인생을 생각하며 우울해하거나 암담한 기분이 되지 않을 것임.
- 앞날을 염려한다는 건 '지금, 여기'를 소홀히 한다는 뜻.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며 살지 않으니 앞날이 걱정되는 것이다.
- 늙어가는 용기, 나이 든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용기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 바구는 용기인지도 모름. 노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병과 쇠약만이 아님. 간병문제도 생길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조우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등의 시련에도 직면할 것임. 그럴 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만 바궈도 마음에 구원의 빛이 따뜻하게 비치게 될 것이다.
- 죽음은 수많은 악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으로 꼽히지만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는 이미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 저세상이란 좋은 곳인 모양이야. 가고 나면 아무도 돌아오지 않네 (다카야마 후미히코, 아버지를 보낸다)
- 자신의 과제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건 상대의 결정 또한 존중한다는 의미. 간병하는 데 있어 이는 아주 중요한 자세다. 노년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 자신이다. 부모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서 나의 이상과 희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이가 들어도 기력이 정정해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즐겼으면...', '손주들에게도 다정하고 본보기가 될 수 있게 행동했으면...' 등등, 부모에게 이상적인 모습을 바라는 이유는, 어른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요건, '자기중심성에서의 탈피'를 하지 못했기 때문.
- 인지증에 걸린 부모의 기억이나 착각이 가족엑 망상처럼 여겨지기도 함. 인지증은 뇌의 질병이다. 그러나 많은 기억 가운데 무엇을 잊고 어덯게 남기는지는 스스로 택한다. 본인이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잊을 필요가 있어서 잊는 거라면 그 기억을 굳이 지적하거나, 억지로 떠올리게 하여, 기억을 정정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인지증을 앓던 저의 아버지는 만년에 자신의 부인이자 저의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든이 넘은 아버지가 과거에 자신이 결혼햇으나 사반세기도 전에 반려자를 잃었고, 그 이래로 쭉 혼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과연 행복한 일일까?
- 망령을 통해 마음에 닿는 것을 신뢰한다. 망령은 여과기 (쓰루미 순스케). 인간은 만년에 '지금, 여기'를 살아가기 위해 여러 기억을 버리고 정말로 소중한 기억만을 남기려는 건지도 모른다.
- 부모가 뭔가를 잊어버리거나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사실을 우울해해 봤자 사태는 호전되지 않음. 설령 부무가 과거에 집착하더라도 자식이 먼저 과거를 놓아주기로 결심하고, '지금, 여기'에 전념해야 함. 과거를 놓아준다는 말은, '인생을 날마다 새로 시작하듯 산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어제의 일을 들먹이지 않고 날마다 처음 만나듯 부모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부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대할 수 있을 것임.
-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놓아주는 결심도 필요하다. 앞으로의 일만을 걱정하면 지금을 소홀히 하게 된다. 하루하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니 내일의 과제는 내일 생각하면 된다.
- 자신이 학교와 사회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부모가 불행해지기를 아이는 바라지는 않는다. 부모의 행복과 불행은 아이에게 전염된다.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이 불행한 듯 행동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주변과 세간의 동정을 사기 위해서임.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아이를 적으로 돌리게 됨. 아이를 열심히 키웠는데 그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아서 나는 이렇게 불행하다는 것을 동네방네 알리고 다니는 부모의 행위를 아이가 기뻐할 턱이 없다. 아이가 학교에 가느냐 마느냐에 관계없이 부모대로 행복하면 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간병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 차고 넘칠 정도로 부모에게 애쓰는데, 충분히 효도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주변에 알리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자식에게 간병받는 부모 입장에서 간병하는 자식의 모습이 불행해 보인다면 그것은 그리 달갑지 않을 것임. 부모에게 자식의 불행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자식의 불행한 이유가 자신을 간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미키 기요시)
- 갓난아기가 부모에게 보살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듯, 간병받는 것을 당당히 받아들여도 된다. 간병을 받아도 '즐거워 보인다', '간병받는 것도 나쁜게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생을 보내면 그것도 하나의 타자공헌이다. 간병받게 되었을 때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압적이 자세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뜻하는 대로 간병해주지 않으면 분노를 표출하는 것. 그런 사람은 자신이 공동체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함. 다시 말해, 어른으로서 자립하지 못한 사람이다. 걱정거리가 되어 주변의 관심을 끌어 공동체의 중심에 있고자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간병받는 몸이 된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다들 처음에는 힘들겠지. 어쩌면 나도 똑같이 행동할지 몰라.' 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런 사람과도 화내지 않고 지낼 수 있다. 간병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같다.
- 자립한 어른일 것, 생산성을 따지는 사고에서 벗어날 것, 하지 못하는 일에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
- 성공과 행복을, 실패와 불행을 동일시하게 된 이래 인간은 진정한 행복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철학자 미키 기요시는 이렇게 지적, 인생론 노트에서 그는 성공과 행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공은 직선적 향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행복에는 본래 진보란 없으며 행복이 각자의 것, 각자에게 고유한 것인데 비해 성공은 일반적이며, 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 서로간에 노력하면 다시 마음이 통할 수 있다. 먼저 지금을 과거의 연장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여태까지 두 사람이 어떤 인생을 보냈는지는 앞으로 사이좋게 사는 것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문제도 되지 않음. 지금까지는 지금까지고 앞으로는 앞으로라는 것이다. 부부로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고 해서 섣불리 '이 사람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안된다.
- 배우자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가 주어인 발상이다. 아무석도 하지 못해도 이렇게 살아서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그것만으로 서로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부부관계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 '나는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행복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행복을 경험해도 그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행복은 공기와도 같다. 공기의 존재를 보통은 의식하지 않듯이, 행복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 인간관계의 문제는 타자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거나 침범해오는 데서 일어남. 자기 생각을 말해도 되는 순간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내 생각을 말해도 돼?'라고 묻지 않으면 안된다. 설령 자기 생각을 말한다 해도 상대가 받아들인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관대하다는 것은 진로 선택의 예로 말하자면 자식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앞날을 지켜보자고 결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과제를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다고 신뢰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신뢰관계를 맺고 싶다면 이쪽이 먼저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함. 많은 사람이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타자를 신뢰하기를 두려워함. 하지만 배신당할까봐 두려워서 타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 자신의 불우함을 호소하거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다. 바로 타자에게 주목받기 위해서임. 그런 사람이 곁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의 불편한 심기에 주목해서는 안됨. 그럴 때는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심기가 쭉 불편한 사람은 없으니 기분이 좋아지면 그때 말을 걸면 된다. 심기가 불편해도 주변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심기가 불편한 채로 있어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잊어버려도 된다. '지금, 여기'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풍요로운 숲을 만들고, 다음 세대의 양식이 되는 도토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과거를 생각하고 후회하거나, 미래를 생각하고 불안해질 필요가 없다.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할 때 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0) 2020.01.20
진심은 감추고 본심은 읽어라  (0) 2020.01.17
마흔, 마음공부를 시작했다  (0) 2019.12.16
아들러 삶의 의미  (0) 2019.12.02
삶의 무기가 되는 심리학  (0) 2019.11.28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