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십년간 고해성사를 받아온 신부에게 "오랫동안 내밀한 사연을 들으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우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행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은 성숙한 사람은 없다는 것, 두가지입니다." (실존주의 심리치료, 어빈 얄롬)
-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말라는 충고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을 밑바닥까지 겪은 뒤에야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낙관적 태도는 삶에서 선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니라 고통 뒤에 얻게 되는 사후적 가치다.
- 중년이 되면 에난티오드로미아라는 심리현상이 일어남. 에난티오스는 반대방향이란 뜻이며, 드로모스는 달리기 경로를 의미. 중년이 되면 심리적 에너지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며 마음의 축을 흔들어놓는다. 감성은 연약한 자의 전유물이라고 폄훼하고 이성에만 의지하던 사람이 마흔이 넘어서 낭만과 로맨스를 찾아 방황합니다. 논리와 합리를 금과옥조로 삼던 사람이 멜로 드라마에 눈물을 흘린다. 사고형 성격이 감정형으로 변한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에너지를 얻던 외향형 사람이 중년이 되자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비평과 분석으로 답을 얻기 보다 직관을 따르게 된다. 완벽을 향한 충동은 불완전성에 대한 수용으로 바뀐다. 모순을 억지로 풀려고 하기보다 대극을 품고 가려는 태도가 나타난다. 이 모든 현상의 마흔과 마흔 이후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변화들. 그야말로 중년은 전환의 시기다. 마흔은 상실의 시간이다. 이루지 못한 꿈을 떠나보내야 한다. 과거의 성공도 놓아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을 떠나고 헌신했던 직장에서 밀려나고 우정도 퇴색한다. 미래는 무섭고 과거는 아득하게 멀어져 시간의 흐름 안에서 길을 잃는다. 야망은 힘을 잃고 자존감은 무너진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막을수가 없다. 상실을 못 받아들이고 과거를 붙들고 억지부린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상실에서 비롯되는 자아의 재탄생을 목도해야 하는 시간이 바로 마흔이다.
- 중년이 괴로운 것은 전환과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환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짝을 이뤄 찾아온다. 상실은 슬픔을 몰고 온다. 슬픔과 두려움은 중년의 당연한 감정이다. 중년의 삶이란 슬픔과 두려움을 끌어안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스런 전환과 상실의 고통을 거부하면 우울과 불안이 망령처럼 따라붙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공황에 충격받고 공허감을 못 이기고 무너져 내린다.
- 삶은 고통이다. 누구나 상처 입고 고달픔을 맛본다. 세상에 나만큼 힘든 사람 없다는 말은 함부로 내뱉을 게 못된다. 세상 고통 혼자 짊어진 것처럼 굴면 철부지 소리를 듣는다. 마흔이 되어도 상처받고 깨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
- 인생은 목적지가 정해진 경주다. 죽음이라는 최종 종착지. 죽음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돌아보게 됨.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애초에 내가 원하던 그것이 맞는디, 제대로 살아왔는지, 진정으로 원했던 건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를 벼랑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때문에 중년이 되어 느끼는 절망감과 위기감은 누구나 느낄 수 밖에 없는 정상적 감정이다.
- 자기 자리라고 여겼던 공간에서 거부당하면 트라우마를 입는다. 존재기반을 잃어버림. 인격이 통째로 무시당하는 것. 애초에 어머니의 자궁에 자기 자리를 갖고 있던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것을 잃는다. 그 이후의 삶은 잃었던 자기 공간을 찾기 위한 투쟁이라 말할 수 있다. 출생 후 어디에도 속할 수 없게 된 존재가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 슬픈 현실은 자신을 위한 공간을 얻지 못한 채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것.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심리적 공간에서도 말이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소외된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
- 실존은 '거기에 있음'이다. '거기'란 하나의 자리, 공간이다. 자신이 속해야 할 공간에서 평화를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세상 어디라도 안정감을 느낀다.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녀도 두렵지 않다. 어떤 곳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인간의 자리는 정체성의 표상이다. 존재한다는 건 어떤 장소, 즉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공간을 내는 것. 마음의 자리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남기는 일이다. 남겨진 자리가 확고하다고 느기면 자신이 사라지는 죽음도 덜 두렵다. 지금 당신에겐 그런 자리가 있는가?
- 거짓 행복을 추구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지금 자신이 얻으려 하는 행복이 과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확인해 보라. 사회나 언론에서 심어준 행복, 이를 테면 사회적 성공과 부, 완벽한 사랑, 방황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심리상태 등 거짓상태에 현혹되어 있지 않은가? 영화나 신문에 나오는 행복의 이미지에 익숙해지면 나에게 진짜 행복이 뭔지 잊어버린다. ooo교수가 말하는 행복, ooo박사가 말하는 행복이 마치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 착각하면 나답게 살지 못한다. 병든 행복은 정상적 불행보다 더 나쁘다.
-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행동이 모여 생기는 부산물에 불과. 사실 희망이란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희망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가 희망을 하루하루 만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하는 활동이 희망을 만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은 단순히 쾌락적 정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즐겁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술을 마시거나 심지어 마약을 해서 기분이 좋아진다고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행복일까? 우리는 어떨 때 진짜 행복을 느낄까? 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인생의 신념이나 가치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때 좋은 기분을 느낀다. 만족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행동이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하지 않아 마찰을 일으키면 불쾌함을 느낀다. 불만족스러워지는 것이다. 즉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인생으 가치로부터 멀어진다고 느낄 때 고통을 느끼고, 하루하루의 삶이 가치에 잘 부합하면 행복하다고 느낀다.
-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자기 길을 꾸준하게 걸어가는 사람만이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생의 마지막이 되어보야 알 수 있는 법.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매일매일 노력하고 인내하고 애쓰며 사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인생 전체로만 답할 수 있기 때문. 우리에게 아직도 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숙제가 많은 만큼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많다는 뜻이기 때문. 아직 그만큼의 열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함. 숙제 없는 마흔은 생각할 수도 없다. 마흔이라면 당연히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어야 한다. 숙제가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가지를 알려줌.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과 당분간 숙제의 무게만큼 고통도 던져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힘이 들어도 우리는 계속해서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자아를 I(의식적 자아로서의 주체)와 me(출신과 기호, 미래에 대한 바람 등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따른 개인적 정체성으로서의 대상)로 구분.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me가 있고, me를 인식하는 I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me와 I 둘다 만들어진 이야기다. 정체성은 이야기다. 인간은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통일된 단일체로 인식.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 언뜻 보면 모순된 언행들은 하나의 이야기 아래 묶어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정체성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함. 나라는 사람은 기억의 결합체임. 기억은 끊임없이 편집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해서 일관된 이야기로 짜맞추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 있다.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가 삶의 일관성을 회복하려는 논리적 틀이다. 인생 서사는 그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어떤 제목을 붙일까?'라고 생각해보라. '내 인생이 한 편의 영화가 된다면 그것에 어울릴만한 광고문장은 무얼까?'라고 스스로 물어보라. 미래를 내다보면 인생 시나리오를 써봐도 좋겠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인생을 눈앞에 그려주는 힘이 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그 삶에 다가가기가 훨씬 쉬워진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는 자아를 계속 성장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가 있어야 안도하는 것이 인간. 무작위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짓는다. 그럴듯한 서사로 풀어낼 수 있어야 고된 인생을 견뎌낼 수 있다.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본능의 표현이다.
- 니체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역사로 만들 줄 아는 힘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흘러가는 이야기로 허무를 이겨낼 수 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내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기를 바라는가? 내 인생을 다룬 영화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나라는 캐릭터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까?
- 지금 내 앞에 존재하는 것과 싸우는 일만큼 비생산적인 것은 없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현상 그리고 사람들은 그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에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 곁에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좋든 싫든 나의 삶에 초대된 것. 이것을 쫓으려 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무조건 참거나 체념하거나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님. 패잔병이 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님. 고통과도 함께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하고, 우는 아이를 끌어안아 달래듯이 고통을 품을 수 있어야 하며, 가냘픈 꽃을 손에 살포시 쥐듯이 고통을 가볍게 움켜쥐고 갈 줄 알아야 한다. 너무 꽉 움켜쥐지 말고, 그렇다고 느슨하게 놓쳐버리는 것도 아닌 부드럽게 가슴에 안아 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힘을 빼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당장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고 일상을 챙겨나가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수동적 태도가 아니다. 깊은 성찰과 지혜가 필요한 적극적 대처방식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언젠가 그 속에서 통찰을 얻게 된다. 새로운 희망을 길은 언제나 수용에서 시작한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할수도 없다.
- 갈등은 푸는 것이 아니라 품고 가는 것이다.
- 자기를 변형시키는 것은 자기계발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내면의 특정 자기를 다른 거으로 대체하거나 부정할 수 없기 때문. 그런 방식으로 나를 바꿀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만을 갖고 싶다고 그런 취향에 일치하는 내 모습만을 바란다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갑갑하고 사소한 일에도 나를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자기를 쥐어짜고 변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신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필요함. 자존감을 높이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마련. 자존감은 내가 선택한 내면의 자아가 시대와 조화를 이루면 높아진다고 느낄 뿐이다. 시대와 불화하는 자아가 강조되면 자존감은 낮아짐. 자아의 한 측면을 시대가 인정해주면 자존감이 다시 높아진다. 어떤 맥락에서 나의 어떤 모습을 강조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 누구나 내 안에 다양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데, 그중 어느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가치 확인이론에 따르면 자존감에 위협을 느낄 때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임. 예컨대 학계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된다면 내가 매우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나 정말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내가 가정적 남자라는 사실에나 즐겨 이야기하는 정치 등에 관심을 돌리면 그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음. 자존감에 위협을 느낀 것과 무관한 분야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무척 효과적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책, 도시, 영화, 노래, 취미 같은 걸 생각하고 글로 적어봐도 좋다. 자아의 가치가 시대와 충돌하여 괴롭다면 내 안의 또 다른 자기에 주목하고 그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으세요. 인생의 과업은 내면에서 다수의 자기를 발견하고 그것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내 안에 있느니 모든 것을 인정하고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 지혜란 무엇을 간과할 지 아는 기술이다. (윌리엄 제임스). 마흔 이후의 지혜는 불필요한 기억이나 정보를 걸러내는 능력, 그래서 현명한 선택과 포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고 또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중년의 힘이다. 마흔 이후에는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 중년을 지나 노년을 맞이할 때가 되었는데도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만 하면 행복할 수 없다.
- 자수성가증후군에 빠진 사람은 완벽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크다. 성취해도 만족을 못 느낌. 그리고 더 큰 목표를 세우고 자기를 몰아세운다. 빈틈, 예외, 실수, 허술, 여유, 지는 것, 느린 것... 이런 것을 못견딘다.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 자체가 교훈이라고 여겨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역사 그 자체로 빛이 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돈만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억 속에 심어놓은 정신적 가치가 진짜 유산이다. 삶의 철학이 성실과 신뢰라면 가족과 직원 그리고 사회에 '그 사람은 성실했다. 그 사람은 언제나 믿을 수 있었다. 성실과 신뢰의 진정한 가치는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는 기억을 남기자.
- 오직 그 사람만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오직 그 사람만이 저 위에서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두 팔에 늑대와 양을 품되 그 둘이 서로 해치는 일이 없도록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을 이미 터득한 사람이다 (게오르게 구르제프, 놀라운 사람들과의 만남)
- 마흔 이후의 지혜는 자신의 삶 속에서 늑대와 양이 공생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데서 비롯됨. 늑대와 양이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모순적 상황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늑대가 배고픔을 느껴서 양을 잡아먹지 않도록 꾸준히 먹이를 주면서 돌봐야 한다. 내 마음에 늑대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양도 지켜낼 수 없다. 마흔이 넘어서도 내 마음에는 선한 양만 있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철부지다. 내 마음에는 늑대가 없다고 떠드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말라. 자기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는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못한다. 나이 헛먹은 사람이나 이런 소리를 해댄다. 제대로 나이 든 사람이라면 나만 옳다고 말하지 못한다. 타인의 언행에서 악을 발견해도 함부로 욕하지 못한다. 자기 마음에도 그런 악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으로 선과 악을 함부로 구분하는 사람에게 중년의 지혜가 있을 리 없다. 지혜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뛰어넘는다.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과 선이 공존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옳다, 그르다가 아닌 복잡한 설명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품을 수 있을 때 중년의 지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 의미는 비스듬히 추구되어야 한다. 거기에 매달리고 집착하면 안된다. 의미있다는 느낌은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긴다. 의미는 삶에 헌신한 뒤에야 드러난다. 의미 차제를 추구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관념적으로 의미를 찾으면 오히려 공허함만 쌓인다. 생각에서 빠져나와 활동에서 비롯된 충만이 쌓이면 나중에서야 '이것이 내 삶의 의미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의 두가지 행동양상
(1) 과도한 통제.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환경을 통제하려 든다. 물리적 환경은 그마나 정해진 곳에 물건을 놓거나 깨끗하게 치우는 등 비교적 통제하기 쉽다.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은 통제하기 어렵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자기 몰래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통제 안에 있도록 지시와 명령으로 타인을 옥죄려 한다. 잔소리가 심한 엄마들이 그러함. 자기 내면의 불안 때문에 아이를 과도하게 통제하려 한다.
(2) 회피.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움과 낯섦을 두려워함. 웬만하면 익숙한 일만 한다. 매일 만나던 사람만 만난다. 모험도 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가 스트레스다. 감정적 민감도가 높아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충격도 크다.
- 마흔 이후에는 모든 것이 편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병이 들기도 하고 사고도 많이 겪는다. 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아이들은 원하는 대학에 잘 진학할 수 있을지, 회사에서 해고당하지는 않을지 누구도 확실하게 답해주지 않는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중년은 불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 마흔이 되었다면 모호함을 견디는 힘을 키워야 함. 방법은 딱 하나 용기다. 불안하더라도 '지금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건 뭐지?' 라는 질문에 답하며 당장 소중한 것에 집중할 용기가 필요. 불안이 내 삶을 망가뜨리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신념이 필요. 불안해도 용감할 수 있다. 불안과 용기는 늘 공존한다. 불안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고 용감한 사람도 불안을 느낀다. 불안이 클수록 용기도 커진다. 불안이 나를 단련시켜 맷집을 키워주니까. '까짓것'이라는 마음이 중요함. 막연한 불안, 두려운 상황에 대한 회피 따위는 '이까짓 것들'하고 옆으로 제쳐두고, 진짜 중요한 것을 그냥 해보는 거다. '막상 부딪혀보니 별것 아니네!' 하는 체험이 쌓여야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 일탈에는 불안이 따르기 마련. 살던 대로, 평소 하던대로 하면 불안을 느끼지 않겠지만 살아가는 맛 또한 느낄 수 없게 된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을 상상하면 두려운 느낌이 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다. 하지만 감미로운 긴장감이다. 회피하고 자극을 좇는 일탈은 죄책감을 일으킴. 감미로운 긴장감과 죄책감은 구별해야 함.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앞으로 5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지금이 순간의 일탈이 5년 후 내가 그리는 그 모습과 자연스레 연결된다면 감미로운 긴장감을 느낄 것임.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이 따라오게 마련.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도 있지만 마땅히 내 모습이어야 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지 못할 때 느끼는 죄책감도 있다. 이런 죄책감을 '내재적 죄책감'이라고 함. 죄책감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신호다.
- 일탈이 없다면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고 자신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 삶을 살게 될 것임. 그런 삶에서는 윤기가 사라지고 만다. 어차피 결론이 나 있는 인생, 더 살아야 뭐 하나하는 허무함이 찾아온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현실이 어떻든 우리는 매 순간 일탈을 꿈꾸어야 한다. 일탈을 꿈구고 그것을 향해 몸을 던질수 없다면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임.
- 스트레스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건강하게 버티려면 자기 정체성이 복잡해야 함. 자기 복잡성이 큰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를 바당도 덜 괴로워하고 우울증에 걸릴 위험도 낮음. 다양한 정체성이 스트레스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기 때문. 하나가 잘못되어도 다른 자기개념들이 자신을 지탱해주기 때문. 진정한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내 안에는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 그중에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라고 할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은 다양한 자아가 모여 이뤄진 집합체. 단일한 자기개념에만 집착할 때 마음의 고통이 생긴다. 다양한 자아 중에 일부만 인정하고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을 부정하고 억압할 때 문제가 된다.
- 복잡성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적 조건이다. 복잡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마음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의미. 한가지 자기상에만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건 배만 볼록 나오고 팔다리는 근육하나 없이 가늘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를바 없다. 승진과 돈, 인정과 평판, ... 삶의 다양한 가치 중에 한 가지에만 모든 것을 걸면 자아는 쪼그라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평소 듣지 않던 장르의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나의 정체성도 다양하게 분화된다. 마음 건강을 위해서는 한결같고 단순해지기보다는 복잡한 속성을 내면에 골고루 품고 있어야 한다.
- 모든 삶은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인간의 심장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달성하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의미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잃는 순간 인생의 시계도 멎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행복하고 즐거울 수만은 없다. 고통은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필수조건. 누구도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왜 하필 나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고통은 배가 된다. 고통이 찾아왔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 바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함. 지혜로운 사람은 삶에서 겪어야만 하는 시련을 이렇게 부른다
* 삶의 고통은 깨달음을 촉구하는 신이 보낸 메시지
* 고통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우주가 보낸 메시지
* 고통과 충격은 자기만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기 위해 나타난 길잡이
* 고통은 지친 영혼을 새롭게 담금질하라는 의미
* 상처가 아물어 새로운 살이 돋아나 새롭게 되라는 의미
* 고통은 성장을 위한 동기
* 고통은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
* 고통은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 위한 기회
* 시련 속에는 하느님의 숨은 의도가 있다
* 고통 속에는 하느님의 큰 뜻이 숨겨져 있다
-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내담자에게 빅터 프랭클 박사는 묻는다. "만약 아내를 남겨두고 당신이 대신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남겨진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요?" 내담자는 말합니다. "아내라면 이런 고통을 견딜수가 없을 거에요. 아내가 어떻게 견디겠어요" 프랭클이 말합니다. "보세요, 당신 덕분에 아내가 이렇게 큰 시련을 면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내가 이런 시련을 당하지 않도록 해준 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살아남아서 아내를 위해 더 많이 슬퍼해야 합니다."
- 인생을 살다가 역경을 만났을 때 그 역경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그 역경은 형벌일 뿐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 역경은 수업료일 뿐이다.
- 고통을 통해 깨달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시련과 고통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고 그 속에서 찾은 인생의 숙제를 고통 이후에도 계속해서 풀어가야 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는 꽃이 진 뒤에 맺히는 법이다. 사람도 상처받은 후에야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르누아르)
- 한강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뛰어내리는 곳은 다리 중간이 아니라 다리가 시작되는 초입.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다리에 들어서자마자 뛰어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충동적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충동적인 생각은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인생을 마감하려는 강렬한 충동도 그 순간만 버텨내면 시간의 힘으로 자연히 희석되게 마련. 아무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린다면 왜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삶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고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의 차이는 시간의 힘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긍정적인 사람은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거라 믿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 우리는 자기 자신이 삶을 만들어간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요? 인생은 시간이 지어낸 결과물이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정해져 있는 결론이든 아니든 간에 시간이 우리와 우리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인간과 삶을 이해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사라진다 해도 우리의 이야기는 그대로 남으니까요. 인생은 하나가 끝나고 다음이 시작되는 단편소설이 아니라 죽을 때 완성되는 장편소설이다.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이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시간의 힘을 빌려 자연스레 찾아간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죽음이 자기 앞에 찾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인생이라는 소설이 어떻게 완결되었는지 알 수 있따. 시간이 흘러야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인생이 짧아 보여도 훌륭하고 영예롭게 살기에는 충분히 길다.
- 사람들마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은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똑같다. 현실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자신이 갖고 있지 않다고 인식할 때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바로 스트레스다. 이런 상황을 두고 통제소재가 외부에 있다고 한다. 사장이 밤새도록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말단 직원이 상사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새우며 느끼는 스트레스가 다른 것은, 사장은 자기 의지대로 일을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만 말단직원은 그럴 권한이 없다고 지각하기 때문. 그렇다면 스트레스는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정상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스트레스를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도망칠 수없고 제 힘으로 풀 수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겪는 것이 스트레스인데,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치면 힘만 빠지고 더 괴로워진다. 통제소재가 자신에게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데 그걸 풀어보겠다고 달려들면 오히려 탈이 난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 빠진다. 세상에 나만큼 괴로운 사람은 없을 거라 믿으면 스트레스는 더 쌓인다. 삶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고 인식하면 스트레스 속에서도 단단하게 버틸 수 있다.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못난 사람이라서 스트레스 받는건가?'라는 의심에 속아 넘어가면 안된다. 스트레스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 충분히 내려놓지도 못했으면서 다 내려놨다고 하는 건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건드리자 말라'는 방어심리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세상이 문제라며 자기 문제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내려놓지 못했는데 내려놓았다고 믿으면 '나는 할 만큼 했는데, 너희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며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진짜 내려놓은 사람은 내려놓았다는 말조차 안한다. 내려놓았다는 그 마음까지 내려놓은 상태니까 말이 필요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내려놓았다. 마음 비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내려 놓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특히 중년 남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돈이 아무리 많고 사는 데 별 문제 없어도 인간의 욕심은 완전히 비워낼 수 없다.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은 그나마 줄일 수 있어도 인정욕구는 절대 못 줄인다. 조직, 사회, 친구, 가족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열망은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진다. '나이 먹었어도 나는 여전히 꼭 필요한 존재야'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하는 열망은 더 불타오른다.
-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완벽은 언제나 나를 피해갈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리라. 피터드러커는 인생에서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 강조. 정진홍 박사도 '완벽에의 충동'에 이렇게 썼다. "완벽에의 충동은 살아있음의 저력이고 생명을 이끄는 힘입니다. 완벽에의 충동이 살아움직이는 만큼 내 삶도 유효합니다. 완벽에의 충동이 사라지는 순간 내 삶은 쉰내가 나는 것입니다. 썩는 것이지요." 완벽을 향한 충동이 사라지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같다.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쯤 되면 완벽주의가 삶을 풀어가는 묘약이라 믿겠지만 오히려 독이 될수도 있다. 완벽주의가 독이 되면 성취해도 행복을 못 느낀다. 만족할 만한 순간에도 흠결이 눈에 들오와 불행해진다. 최선을 다하고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과도한 완벽주의는 정신겅강의 적이다.
- 완벽주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미워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고 믿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강요하는 것은 이 세상 누구도 살아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 완벽을 향한 여먕도 좋지만 완벽하지 않은 자기 모습, 완벽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품고 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도 완벽을 강요하지 않는 것, 중년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 우울이라는 감정은 숨기려 하거나 부정해서는 안된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아, 내가 요즘 우울하구나'하고 인정하면 된다. 우울한 게 이상하거나 나쁜 감정도 아닌데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살다보니 지치고 상처받아 우울한 건데 그걸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그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어. 그랬더니 내 감정이 나더러 쉬라고 하네'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겁먹지 말고 우울을 똑바로 보면서 '너, 왜 나에게 왔니? 도대체 왜 지금 내가 우울해져여 하는 거야?' 라고 물어보라. '한동안 아내와 많이 싸우고 회사 일도 많았느데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고 살아서 그런거야'라는 원인이 나올수도 있고 '회사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애들 교육비도 많이 들고 돈은 더 필요한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그런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수도 있다. 이런 저런 나름의 이유가 내 마음을 긁어놓으니까 피도 나고 상처도 생기고 그게 곪아서 우울증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음 한구성게 감춘다고 낫겠는가? 더 곪기만 한다. 이제라도 내보이세요. 그래도 됩니다. 그래야 우울을 날려버리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우리의 기분은 힘이 세다. 기분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변한다. 생각보단 기분이 앞선다. 생각을 바꾸면 기분이 달라진다고 흔히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임. 이를 정서 우선주의라고 함. 감정을 일으키는 변연계의 작용이 사고를 지배하는 전두엽의 활성도를 넘어서기 때문. 우울감에 휩싸여 있을 때는 긍정적 생각을 아무리 해도 기분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체험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우울해지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라는 느낌이 마음을 지배함. 이런 상황에서도 활동을 아주 잘게 쪼개면 적은 의욕으로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아침에 일정한 시가에 일어나는 것만이라도 하라고 한다. 기상 후에 따뜻한 물로 샤워만이라도 해보라 한다. 이것도 못하겠다면 아침에 일어나 바로 외출해도 부끄럽지 않은 옷으로 갈아입고 있으라고 조언한다. 굳이 잘 차려입고 있을 필요는 없다. 손님이 집에 왔을 때 옷을 갈아입어야 할 정도만 아니면 된다. 햇볕 쬐며 걸으면 좋지만 그것도 힘들다고 하면 누워 있지 말고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라. 우울하다는 주부들에게는 외출 약속이 없어도 간단한 기초화장 정도는 꼭 하라고 한다. 우울증 치료에 가장 효과적 활동은 운동이다. 운동을 하면 세로토닌의 합성과 분비가 늘어나는데 특히 대뇌피질과 기억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세로토닌 활성도가 증가함. 달리기를 한 뒤에 뇌 PET 검사를 해보면 엔돌핀 농도가 대뇌피질과 변연계에서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유산소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면 전두엽의 회질과 뇌량의 백질 부피가 증가. 몸부터 살살 달래가며 행동을 활성화하는 것이 우울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함. 움직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바뀜. 움직이다 보면 정서가 자극을 받아 변하기 시작함. 부정적 생각도 몸으로 털어버려야 함. 움직이면 생각이 달라진다. 기분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다 보면 기분이 바뀌고 생각도 바뀐다. 기분은 생각이나 의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바꿀 수 있다. 기분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생각만 긍정적으로 한다고 행복해질 수 없다. 마음을 편히 먹는다고 우울이 사라지지 않는다. 항우울제가 우울증상을 없앨수는 있어도 회복탄력성을 키워주지는 않는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활동을 추구하면서 늘 활동상태에 있기 위해 노력하면 스트레스 면역력이 길러진다. 우울한 기분이 들어도 우울증으로 이어지지 않게 예방가능. 우울증 치료의 핵심은 행동을 활성화하고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몸의 경험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 스트레스를 받을 때 긍정적 마음을 가지라고 충고하는데 이는 말처럼 쉽지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정신건강은 마음만 챙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님. 마음보다 몸이 먼저임.
- 걱정은 사람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
- 생각의 엔진이 꺼지지 않는 것은 걱정거리가 있을 때 그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마치 그 일이 해결된 듯한 착각에 빠져서 심리적 고통이 일시적으로 줄어들기 때문. 그러다 보면 걱정이 걱정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짐. 자기도 모르게 걱정에 중독된다. 그래서 생각 속에 빠져들면 들수록 현실에서는 멀어지게 됨. 결국 불안을 일으킨 근원을 제대로 찾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 빠져 실제 행동으로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기회를 날려버리거나 그럴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 걱정의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고 30%는 이미 벌어졌고, 22%는 아주 사소한 것이고, 4%는 바꿀 수 없고, 단지 남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이다. 결국 우리가 하는 걱정의 96%는 쓸데없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어니 젤린스키)
- 우선 걱정이나 염려 때문에 자신이 생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 아래 6가지 경우처럼.
(1) 과거의 일이 자꾸 생각나고 그것과 연관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2) 사소한 잘못이나 흠결이 자꾸만 눈에 거슬릴 때
(3)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질 때
(4) 마음이 혼란스럽고 별일 없는데도 바쁘게 느껴질 때
(5) 비교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따지려 드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
(6) 움직이지 않고 생각 속으로만 함몰된다고 느껴질 때
위와 같을 때는 '내가 생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점검해야 함. 찬찬히 내 마음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세요. 걱정이라는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보지 말고 내 마음의 걱정을 보세요. '제기랄, 너무 불아낳고 걱정돼!'라고 짜증내기보다는 '내가 지금 불안하다고 느끼는구나', '내가 지금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자기 마음을 관찰하세요
- (1) 고민을 했더니 기분이 좋아졌나? (2) 고민을 했더니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나? 만약 (1) 이나 (2) 둘 중의 하나라도 '예'라는 대답을 한다면 계속 고민해도 된다. 5분이상 고민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둘 다 '아니요'라면 고민을 계속해봐야 기분은 더 나빠지고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을 게 분명. 고민이 효율적이나 아니냐는 5분 안에 결정된다.
- 우리가 걱정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실재의 일 때문이 아니라 가상의 생각 때문. 세상 근심걱정은 거의 대부분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걱정하는 일이 생겨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지면 오히려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려워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나기를 오히려 바란다면(어떤 경우는 그 일이 일어나도록 일부러 행동하기도 한다.) 생각의 의도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어 걱정도 사라진다. 이런 치료법을 역설의도라고 한다.
- 공황장애는 불안에 대한 불안이다.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는 공포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 하지만 이런 불안과 공포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일상이 만들어내는 질식감과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죽음과 상실에 대한 공포가 이런 허구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 공황장애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무언지를 깨닫게 되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너무 숨가쁘게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러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절감할 때 번쩍하고 찾아오는 것이 공황이다. 공황장애는 자신의 삶과 마음을 되돌아보라는 신호다.
- 중년이 되면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된다. 무의식에 숨겨져 있던 여성 속의 남성성, 남성 속의 여성성이 꿈틀대기 시작. 이것을 각각 아니무스, 아니마라고 한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성스럽게 성장해야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인관계에 적응할 수 있음. 그렇게 살다 보면 남성은 남성다운 외적 인격이 우세해지고 무의식의 아니마를 억압하게 된다. 여성은 아니무스를 억압하게 된다. 남성 속에 억눌려 있던 여성성과 여성 속에 억눌려 있던 남성성이 표출되는 것에 대해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얌전한 여성의 페르소나에 오랫동안 눌려 있는 아니무스는 분화되지 못한 채 한순간 충동적인 공격성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있다. 점잖은 신사의 페르소나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살아온 남성은, 무의식 속에서 방치된 채 돌보지 않았던 아니마가 아마존의 원시여성과 같은 야생적 충동으로 나타난다."
- 남성이 자신의 아니마를 의식화하지 못하면 중년이 되어 여성적 특성이 미숙한 형태로 드러남. 남성의 무의식에서 억암되었던 분화되지 못한 아니마는 변덕스럽고 감성적인 기분, 허무함, 쓸쓸함, 과민성, 짜증, 때로는 폭발적 분노로 표출된다. 아니마는 원래 남성 안에서 영감, 창조적 통찰, 예감, 섬세한 정감을 갖게 한다. 아니마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남성은 융통성과 생동감, 창조성을 잃어버린다. 완고하고 기계적으로 변한다. 감정을 잃고 메마른 사람이 된다. 미성숙한 아니마에 자아가 사로잡혀 버림. 그렇게 되면 피로를 느끼고 책임감을 잃고 공허에 휩싸임. 소심해지고 불안에 휩싸이기도 함. 미성숙한 아니마가 다른 여성에 투사되면 그 여인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색정적 환상을 유발. 아내와는 완전히 다른 여성, 또는 전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타입의 여성에게 넋을 잃고 빠져버림. 내면의 아니마를 돌보는 작업은 섬세한 정서를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 자기감정을 돌아보고 보살펴야 함.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함. 정서가 요동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함. 그동안 합리와 이성에 과도하게 의지해왔다면 마흔이후부터는 감각과 감성에 더 공을 들여야 함. 중년 남성이 자기 내면의 아니마를 돌보고 성숙시켜 나가면 생동감과 창조성이 되살아난다. 아니마는 진짜 자기에 닿기 위한 안내가자 된다.
- 여성이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억압해 왔다면 미숙한 형태의 남성적 특징으로 표출됨. 여성의 내부에서 성숙하지 못한 아니무스는 비판적이고 논쟁적이며 경쟁적이고 공격적이고 고집스런 자기주장으로 나타남. 미성숙한 아니무스가 따지는 버릇으로 나타나 이유 없이 논쟁적이 되거나 폭발적 감정으로 표현됨. 미성숙한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성은 의견이나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당신 말이 맞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자기주장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가치를 깎아내리고, 비관적인 생각에 자아가 사로잡혀 버린다. 만사가 귀찮고 사는 게 의미없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아니무스다. 중년여성은 자신의 내면에서 억압되었던 아니무스를 의식화해야 한다. 먼저 외부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함. 자신의 확신이 옳은지 되돌아보고 자기 의견과 다른 생각들을 비평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거이 중요. 내면의 아니무스가 성숙해갈수록 중년여성의 용기와 지혜도 함께 자란다. 무엇보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내면의 아니무스는 자존감을 해치는 원인이다. 하지만 아니무스가 의식화되어감에 따라 중년여성의 자존감도 커지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다.
- 마흔 이후에는 밖으로 우세한 외적 인격과 안으로 억압되었던 내적 인격간에 새로운 힘의 균형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남자는 정서와 관계성을 향한 욕구가 커지는 반면에 여자는 자율성과 자기실현을 향한 욕구가 커짐. 아내가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해진다면 남편은 당황한다. 남편이 감성적, 의존적으로 변하면 아내는 자신이 어떻게 남편을 대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진다. 중년이 되어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의 변화를, 아내는 남편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함. 당황하고 놀라면 거부하게 된다. 서로 상처받고 움츠러든다. 마흔이 넘으면 아니마, 아니무스를 돌봐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 갱년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 갱년기 증상으로 얼굴이 붉어지면 혈색이 좋아졌다고 여기라.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라. 얼마나 원했던 시간인가? 일하고 자녀 돌보느라 자기 시간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소리 좋은 헤드폰을 귀에 덮고 음악에 몸을 맡겨라. 식은 땀이 나서 불편하면 운동으로 땀을 더 흘려라. 갱년기를 의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갱년기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운동밖에 없다. 자신을 호르몬 전쟁의 피해자로 남겨두지 말라
- 분노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분조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상처받았다는 의미. 타인과 세상에 대해 실망을 느꼈다는 의미. 무조건 덮어두는 것도 옳지 않다. 화를 억지로 눌러서 생기는 게 화병이다. 억울하고 분해도 아프다고 소리치거나 "나에게 더 이상 상처주지 마!" 라며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가 생긴다.
- '지금 느끼는 분노가 정당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정당한 분노라면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모멸감을 느끼고 부당한 이유로 자존감에 상처 입고 고유한 자기권리를 침해당했다면 화를 내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이런 분노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적응적 감정이다. 적응적 분노는 참아서는 안된다. 고함을 지르며 표출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 "아, 성질나서 미치겠네"가 아니라 "당신 잘못으로 너무 화가 납니다."라고 자기 느낌을 언어화한다. 그러고 나서 원하는 것을 묶어서 알려준다. 나에게 사과했으면 좋겠다고, '나'를 주어로 해서 나의 느낌과 욕구를 표현한다.
- '나는 혼자다'라며 소외감을 느끼면 배측전대상피질 영역이 활성화되면서 암 환자처럼 통증을 느끼게 됨. 외로우면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 괜한 소리가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자꾸 아프나고 하는 건 관심 끌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진짜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외로울 때 춥다고 하는 것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외로움은 체온감각을 변화시킨다. 고독감을 느낄수록 주변의 온도를 더 낮게 지각하도록 뇌가 변한다. 추우니까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게 만들기 위한 진화생물학적 장치가 우리 뇌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 61년 미국 내과의사 스튜어트 울프는 펜실베니나주 로세토 지역의 의사와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다. 그 지역에 사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다른 지역 주민보다 심장병에 잘 안걸린다는 것. 울프 박사가 이 지역의 심장병 유병률과 사망률을 조사해 보니 55세에서 64세 인구 중 심장병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고, 65세 이상 인구 사망률도 전국 평균의 절반에 불과. 더 놀라운 것은 로세토 주민들은 소시지나 미트볼을 즐겨 먹고 술과 담배도 엄청나게 해댄다는 것. 그런데도 심장병에 잘 안걸린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효과가 나타나나 조사해보니 이 지역 특유의 서로 존중하고 협동하는 공동체문화 때문인 것으로 밝혀짐. 이웃 주민들이 서로를 가족처럼 믿고 의지하는 것이 건강 비결. 이것이 바로 로세토 효과다. 사람이 실제로 옆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보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외로움이 더 중요. 외로움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해보면 친구의 숫자나 대인관계의 폭보다는 스스로 외로운 사람이라 인식하는지가 우울증과 연관되는 것으로 나타남
- 사람은 모두 외롭다. 마흔이 지나면 더 외롭다. 지금 외롭지 않아도 언젠가 외로워진다. 나는 외롭지 않다고 외치는 이는 거짓말쟁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어도 심리적 간극이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사람은 서로에게 영원한 이방인이다. 어떤 관계도 외로움을 완전히 달래주지는 못한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만 춥고 외롭다는 생각에 빠져들면 안된다. 외로움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 결혼이 외로움과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사랑과 결혼을 통해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사람과 함께 살아도 외로운 건 매한가지다. 사랑이 클수록 외로움도 커짐. 사랑이 커질수록 결국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 지금 부부생활이 행복하니까 나는 괜찮다고 안심할 게 못된다. 결혼은 너무나 깨지기 쉬운 제도이다.
- 사랑은 오해다 뜨거운 사랑일수록 오해도 깊다. 결혼은 오해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이뤄진다. 서글프게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이게 현실이니까. 부부 사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멀어져야 정상이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라며 변치 않느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할수록 역설적이게도 결혼생활은 더 고달파진다.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사랑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괴로워지는 것이다. 주말에 부부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멀뚱멀뚱 보고 있다면 아주 잘살고 있는 것이다. 심심한 관계가 별 탈 없이 오래가는 법이니까.
- 결혼해서 더 처절한 외로움을 겪어본 사람, 식어버린 열정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결혼생활의 절정과 바닥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만이 결혼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다. 부부간의 정과 결혼의 의미는 오랜 세월 동안 동고동락해야 깨달을 수 있다.
-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예찬, 알랭 바디우)
-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자여는 "그래, 네가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구나."라는 말을 첫번째로 듣고싶어 할 것이다. 그 다음이 "네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줄래?" 이다. 마지막으로 "아빠 생각에는 이렇게 해보면 좋을 것 같아"라고 조언하라. 자녀가 지금 경험하는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려는 시도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 오면 좋다. 쉽게 말해 "학창 시절에 공부하느라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게 너를 성장시켰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라는 의미부여는 맨 마지막에 해야 한다. 이런 말부터 먼저 꺼내면 꼰대소리 듣는다.
- 섣부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의 감정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 자체가 중요. 인간이 겪는 불행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보편화할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사연들은 언어를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이것이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 이런 사람에게 겪은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해보라고 하거나 정확히 무엇 때문에 힘든 거냐고 다그치면 상처는 덧날 수밖에 없다.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일이 반응하려 드는 것은 좋은 경청이 아니다. 상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바로 따져 묻지 말고 일단 들어주는 것이 먼저다. '당신의 마음을 듣고 싶어요'라는 바람을 간직한 채 침묵하며 기다리기, 표현하기 어려운 진심이 드러나도록 시간을 주며 기다리기 등 진정한 듣기의 힘은 기다림 속에서 발휘딤.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곁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확신은 힘든 고난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듣기는 사람의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다.
- 옳은 말로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밀어붙이지 말라. 언어와 논리로 타인을 장악하려는 욕심은 버려라. 설득하려 목소리를 높일수록 내 생각은 타인의 마음에서 튕겨나가니까. 내가 옳다는 믿음으로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하면 타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방어성향을 더욱 강화한다. 자기 신념에 동조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뿌리깊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처럼 보여도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나름의 이유와 합리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것을 바꾸려고 덤벼든다면 어떨까? 오히려 저항하며 자기 신념에 따른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심리적 역반응이 일어나고 불화는 오히려 더 커진다.
- 갈등은 해롭고 무조건 없애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라 감탄의 원천이다. 우리는 갈등을 겪고서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람과 세상의 이면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아무런 충돌이 없다면 좁디좁은 인식으로 타인을 한정하며 그 틀로만 세상을 보게된다. 충돌이 생기고 감정이 요동치면 그제야 '어, 이게 뭐지?' 하며 타인을 낯설게 인식한다. 관계가 매끄럽게만 흐르면 새로운 관점과 인식은 생기지 못하고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성가시고 괴로워서 화도 나겠지만 갈등이 생길 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 무슨 실미로 저런 말을 하지?' 라면 의문을 품게 되고 이것이 인생에 대한 통찰로 이어짐
- 용서란 본디 어려운 법이다. 아니, 용서는 불가능하다. 용서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해줄 자격조차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많은 흠결을 갖고 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저지르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벌하거나 꾸짖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도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어!" 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가이 용서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아무런 흠결도 갖고 있지 않은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는 자기애적 착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분조를 멈출 수 있다. 이것은 타인을 용서하지 말라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누군가를 억지로 용서하려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거나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자신을 탓하는 일은 그만두라는 뜻. 억지로 용서하려고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미움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게 내버려두지 말고, 매 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함
- 모든 세대가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한 중년이다. 마흔 이후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진심으로 귀 기울여야 하는 시기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고 지친 사람에게 마음 한 자리를 내어주고 우왕좌왕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하는 이들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불행해진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하고 타인과 세상에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 생기를 잃는다. 살맛은 세상을 향해 나를 던져 넣을 때 생기는 법이다. 마흔이 넘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을 벗어난 무언가에 헌신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깨닫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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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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