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금융위기는 버블의 생성과 붕괴에서 시작된다. 버블은 특히 부채에 의해 조 달된 자금으로 지탱될 때 무너지기 쉽다. 부채로 조달한 자금으로 자산을 구매한 경우, 자산가격에 변화가 없다면 자산과 부채는 균형을 이룬다. 물론 이자를 지급 해야 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진다.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수지균형 상 여분의 부가 창출된다. 그러나 자산가격이 금리의 상승이나 외부 충격에 의해 급격하게 붕괴하면 이전에 창출된 부는 사라지고 수지균형상 손실만 남게 된다. 자 산가격은 하락하더라도 부채는 줄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차입으로 자산을 사들인 사람은 채무불이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식시장, 부동산 시장 전체가 커다란 가격붕괴를 경험하면 이런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들 의 채무불이행은 곧 은행들의 손실로 이어진다. 은행들이 손실을 보게 되면 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은행 간에 신용이 경색되고 이것은 실물 경제로 전염된다. 실물 경제에 자금이 돌지 않으면 기업들이 도산하고, 기업들 은 살아남으려고 고용을 축소한다. 축소된 고용에 의해 실업률이 올라간다. 실직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욱 많은 채무불이행이 발생하고, 이것은 다시 은행들의 손실을 키운다.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 같은 악순환이 극단적으로 반 복된 결과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경우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이처럼 금융위기의 근간에는 버블의 생성과 붕괴가 먼저 존재한다. 버블의 생성 과 붕괴가 없다면 금융위기가 시작될 이유가 없다. 아시아 위기 당시 한국은 특별한 자산가격의 버블은 없었으나 기업들의 과잉 설비투자로 말미암은 생산시설의 버블이 있었다. 금융위기의 제1막은 버블의 붕괴이고, 제2막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역시 그러했다.
- CDS의 진정한 문제점은 채권을 보유하지 않은 투기자도 거래에 간단하게 참여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종래부터 CDS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문제점은 시장에서 채권 발행액보다 훨씬 많은 CDS가 거래되고 있으며, 그 본질이 채권 보유에 대한 헤지가 아닌 순수하게 '도박'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 판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회사들이 채권만 발행하는 것이 아니며 은행들에 의한 직접금융도 매우 크다. 회사들에 대출해준 금융기관이라면 그 대출에 대한 헤지로 충분히 CDS를 거래 할 유인이 있을 것이다. 이들 회사에 매출 채권 등을 보유한 다른 회사들 역시 마찬가지의 유인을 가질 것이다. 한편 어떤 회사의 도산에 돈을 걸고 싶은 사람이 있 다고 할 때 CDS가 그에 대한 유일한 수단을 제공하느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주식시장에서 그 회사의 주식을 공매도 할 수 있다. 아니면 레포시장에서 해당 채권을 빌린 다음 공매도를 할 수도 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전술한 바와 같이 서브프라임 차입자 전체와 같은 리스크를 AIG와 같은 한 주체가 과도하게 보증을 했고, 그에 따라 AIG와 거래 관계에 있는 금융권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가 일개 보험회사인 AIG에 집중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문제점은 역시 규제의 부재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CDS가 채권투자자들에게 제공하는 신용위험의 헤지라는 순기능조차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다. CDS에 대해서 태산명동 서일필山鳴動 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란을 떨더니, 튀어나온 것은 쥐새끼 한 마리뿐이다' 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유겠으나 시장이 CDS에 과민 반 응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CDS의 거래금액=CDS의 위험'이라는 거짓 정보에 현 혹된 투자자들은 미국 증시가 3월 이후 크게 반등하는 국면에서도 여전히 금융 시 스템 붕괴를 확신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또한,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 경제의 크기는 GDP로 측정하는데 GDP란 결국 경제 전체의 총지출에 지나지 않 는다. 따라서 모든 주체가 부채를 변제하려고 지출을 급격하게 줄이면 그 결과 경 제 규모는 급격하게 수축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대차대조표 불황이다. 리처드 쿠가 이야기하는 대차대조표 불황이란 채무초과에 의한 불황이다. 경제 주체가 채무초과가 되는 상태를 피하거나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가능한 모든 지출을 줄이고 오직 변제에 몰두하게 되면 그 결과 경제는 심한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는 말이다. 쿠는 기업이나 가계의 차입 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는 상황을 강조하지 만, 대출기관이 차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꺼리는 상황도 결과는 같을 것이 다. 기업으로 말하면 설비투자도 줄이고 고용도 늘리지 않게 되고, 가계는 소비 지출을 억제하고 오직 빚을 갚는 데 몰두하는 상태다. 대차대조표 불황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통상의 순환적인 불황과는 달리 구조 적인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다. 불황이 끝날 때는 경제 주체들의 대차대조표가 다시 건전성을 회복했을 때다. 이때 건전성을 회복하 기 위해 지출을 줄이는 행위가 경제를 더욱더 위축시키면서 자산가격의 추가하락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 때문에 대차대조표 불황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끝없는 경제 규모의 수축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 대차대조표 불황이 선진국 경제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 사례가 1930년대의 대 공황이고, 1990년대 일본의 장기침체다.
- 리처드 쿠에 의하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대차대조표 불황의 전형이었다. 1990년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붕괴로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자산가치는 1천5 백조 엔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 GDP를 평균해 5백조 엔으로 잡는다면 무려 려 GDP의 300퍼센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러한 자산가치의 붕괴에 의해 일본 기업들의 대차대조표는 심각하게 손상됐다. 자산가치는 하락한 반면 부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채무초과에 빠질 우려에 시달렸다. 그들은 채무초과에 빠지게 되면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설비투자를 통한 새로운 수요의 창출보다 기존의 부채를 청산하는 데 열중했다. 부채 청산은 차입 측의 사정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금융기관 역시 버블 붕괴 후에는 그동안의 무분별한 신용공급을 반성하고 더욱 엄격한 관리에 나서게 됐다. 금융기관들이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기간은 얼마나 구조조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금융구조조정에 10년이 넘는 세월 을 허비함으로써 경기 회복을 지연시킨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 통화주의자들은 재정지출에 의한 경기부양을 극렬히 반대한다. 재정지출은 필요가 없으며 오직 통화량만 늘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는 물론이고,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봐도 유동성 함정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의 일본과 미국의 사례로 볼 때 프리드먼의 이 론이 틀리고 케인스가 옳았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케인스의 유동성 함정과 재정지출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는 상식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시장원리주의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경제학과 수학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수학이 아니라 상식적인 추론을 통해 경제 이론을 이야기했기 때문 에 수학적으로 정합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약 인간들이 집합적으로 모여서 행하는 경제 활동 모두를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시장원리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인 공화당이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처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할 때면 이들은 언제나 정부에 의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환영했다. 표결에 지장이 없는 범위 에서만 국회에서 냉소적 의견을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고 이 데올로기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주의와 같은 입장으로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로서의 역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부에 의한 모든 정책에 사사건 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의 이론은 공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시장원리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인 공화당이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들처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고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할 때면 이들은 언제나 정부에 의한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에 대해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환영했다. 표결에 지장이 없는 범위 에서만 국회에서 냉소적 의견을 피력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대안도 없고 이 데올로기를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주의와 같은 입장으로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로서의 역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부에 의한 모든 정책에 사사건 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버블이 붕괴한 후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라는 주장을 한다. 이들의 이론은 공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있으나 인터넷에서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그 추종자 중 대부분이 진보주의자들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학파는 어떻게 보면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현대적 극 우사상이기 때문이다.
- 투자은행, 헤지펀드, SIV와 같은 감독규제에서 비켜간 금융기관들과 ARS나 머니마켓펀드와 같은 신상품들에 의한 금융이 은행여신이나 회사채시장과 같은 정규 금융의 총액을 한때 웃도는 규모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그림자금융이 현재는 붕괴한 채로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 금액만 해도 10조 달러를 웃돈다. 여기에 더해 자산 역시 담보로서 중요한 금융의 기능을 담당해 왔다. 금융위기 전 과거 수년간 미국의 소비자는 주택을 은행에 설치된 ATM 기계처럼 사용했는데, 모기지에퀴티인출이라는 형태로 많은 돈을 차입했었다. 현재는 주택가격 하락으로 작동하지 않고 끊긴 상태다.
- 마찬가지로 헤지펀드들은 과거 포트폴리오에 있는 CDO를 담보로 프라임 브로커로부터 CDO 액면의 약 85퍼센트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은행들이 자산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줄 때 소위 헤어커트Haircu라는 안전이윤 Safety Margin을 제외한 나머지만을 현금으로 빌려준다. 그런데 CDO는 대략 헤어커트가 15퍼센트 정도였지만 금융위기 이후 이 헤어커트는 거의 80퍼센트 수준으로 올라갔다. 헤지펀드 처지에 서는 더는 자산을 담보로 현금을 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림자금융의 붕괴와 자산을 담보로 한 차입이 어려워진 데 따른 신용의 축소는 어느 통계에도 공식적으로 잡히지 않는다. 이것은 애초부터 M1, M2 등의 통화량을 나타내는 통계에서 빠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림자금융이다. 이렇게 해서 사라진 신 용은 적어도 수조 달러를 웃돌 것이다
- 백악관 경제자문인 로렌스 서머스 Lawrence Henry Summers는 2009년 여름 영국의 파이낸 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미국 경제는 수출지향적이고 환경친화적이며 소비와 에너지 소비에 도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금융산업보다는 생명공학과 소프트웨어 그리고 토목공학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국 경제는 부가 편중된 상위 몇 퍼센트의 계층에 의한 성장보다는 중산층에 기반을 둔 경제 가 될 것이다. ... 글로벌 불균형은 해소되어야 한다. 미국이 최후의 소비자 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그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최근 몇 년처럼 세계가 외환보유액을 쌓아 올리는 데 골몰하는 일은 향후 십 년 동안 점차 축소될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인사로서 무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서머스만이 아니다.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장관도 틈나는 대로 무역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 모두가 무언중에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라 생각한다.
- 미국은 과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왕성한 소비를 통해 세계 경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높은 성장률을 누리고 미국의 소 비자는 값싼 수입품을 소비하는 풍요로움을 누렸다. 그 대가로 중국에서는 3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파티 를 끝내야 할 때가 됐다. 그렇게 해서 쌓인 불균형에 의해 미국이 파괴될 지 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하버드 대학의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Nial Ferguson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를 차이메리카 himerica 라는 신조어로 비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최근 그는 차이메리카의 이혼이 임박했다고 선언했다. 이제 과거와 같이 경상적자를 키우면서 소비에 의한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미국의 상식이 됐다. 미국은 경기가 어 느 정도 회생국면에 접어들면 1980년대에 그랬듯이 국제 시스템을 손대는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적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수출국일 것이다.
- 19세기 말에서 대공황까지는 금본위제에 의해 통화 시스템이 유지됐다. 금본위 제하에서 각국의 통화는 금과의 교환비율이 정해져 있었다. 또한, 통화의 발행은 그 나라가 보유하는 금의 양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됐다. 금본위제하에서 각국은 무 역에 의해 벌어들인 타국의 통화를 금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금으로 하는 무역결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금본위제하에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나라도 지속적인 무역흑자나 무역적자를 기 록할 수 없다. 만일 어느 나라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누적시키게 되면 그 나라의 금 보유고는 급격하게 불어나게 된다. 금이 불어나면 그만큼 통화량을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통화량의 증가는 호황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부르게 된다. 인플레이션에 의해 그 나라의 상품가격이 상승하면 경쟁력을 상실하 게 된다. 그에 따라 무역에서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유입됐던 금은 다시 국외로 유출되게 된다. 금본위제하에서는 세계 경제가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메 커니즘에 의해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 실제로는 이론과 달리 무역적자를 기록한 나라들은 지속적인 무역적자 탓에 금 의 유출이 지속했다. 그에 따라 경기 부진과 디플레이션을 경험해야 했다. 정부의 불개입이 지속적인 불경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시장 개 입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금리 인하나 정부의 지출은 생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 다. 이때는 아직 케인스가 역사에 등장하기 전이다. 금본위제는 대공황에 의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에서 이탈해 버렸다. 미국도 교환비율을 20달러에서 35달러로 바꾸면서 통화량을 대폭 늘리는 조치를 했다. 대공황으로 피폐해진 자국 경제를 살리려고 각 국은 수출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물론 그 수단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이었다. 모두가 근린궁핍화정책 Beggar Tity Neighbor Polity 으로 달아난 결과는 세계 무역의 붕괴였다.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은 금본위제를 일찍 폐기해 버린 나라일수록 경기 회복이 빨랐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통화체제는 대안을 찾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의 변동환율에 의해 무역 시스템이 망가졌던 교훈에서 고정환율과 같은 금본위제의 장점은 승계하고 단점은 버리는 새로운 제도가 모색됐다. 동시에 국제금융을 촉진 하기 위해 IMF와 세계은행이 탄생했다. 새로운 환율은 세계의 금 70퍼센트를 보유 하고 있던 미국이 달러와 금의 태환비율을 온스당 35달러로 유지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나라들은 자국통화와 달러의 교환비율을 정하고 상하 1퍼센트 안의 범위에서 환율을 유지하기로 했다. 무역의 결제통화는 달러지만, 각국은 원한다면 미국 정부 에 달러를 제공하고 금으로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1971년까지 지속한 이른 바 국제통화의 '브레튼우즈Breton wood 체제'였다. 브레튼우즈는 말하자면 금본위제에 가까운 금환본위제였던 것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 등으로 재정적자가 누적되고 무역적자에 의한 금의 국외 유출이 계속되자 달러와 금의 태환을 정지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것 이 닉슨쇼크'다. 이때부터 세계는 변동환율체제로 전환됐다. 이후 미국은 금의 보 유량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통화를 찍어낼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국제통화는 실질적인 달러본위제가 시작된 것이다.
- 1980년대 초반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과 싸고자 취한 고금리정책은 달러 가치 의 급등을 가져왔다. 그 결과 미국은 경상적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동시에 심각 한 불황에 빠지게 됐다. 그럼에도 달러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플라자호텔에서 미국과 일본, 독일 그리고 이들의 들러리로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5개국의 재무장관이 모인 회합이 있었다. 이 회의에서 일 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절상시키는 시장 개입을 공동으로 단행한다는 합 의를 했다. 당시 참석한 일본의 재무상인 미야자와 키이치는 훗날 총만 머리에 갖다 대지 않았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로써 엔화는 달러에 대해 50퍼 센트 이상 절상됐다. 일본의 대미 수출은 많이 줄어들지 않았으나 미국의 경상수지 는 흑자로 전환됐다. 그것은 대일 수출이 늘었기 때문이 아닌 유럽에 대한 수출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일본의 버블을 일으키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은 통화의 강세로 수출의 급격한 하락을 걱정했다. 내수경기를 일으켜 불황을 막고자 저금리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수를 활성화하려면 금융정책보다 구조조 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고용안정을 최우선의 정책으로 삼는 일본 정부는 구조조정보다는 저금리를 유지해 내수를 부양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결과 국외에서 유입되는 엄청난 양의 달러에 의해 국내 유동성이 폭발하기에 이르렀고 주식과 부 동산의 트윈버블이 발생하게 됐다.
- 트리핀의 딜레마란 로버트 트리핀 교수가 1960년대에 지적한 내용이다. 브레튼 우즈체제에서 미국은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달러를 국외에 공급해야 한다. 그래 야 다른 나라들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하고 그 달러로 결제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달러를 외국에 공급한다는 의미는 바로 미국이 경상적자를 기록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경상적자가 누적되면 미국 내에서 외국으로 금이 유출되고 달러의 신인도가 추락한다. 그러므로 달러의 유출과 유입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 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이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결과 브레튼우즈체제는 붕괴했다. 그 후 미국은 막대한 경상적자를 기록했지만 달러의 폭락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달러가 폭락하고 미국의 시대는 끝난다는 예언은 무성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폴 케네디는 1980년대 말 자신의 저서 《대국의 흥망》에서 미국은 몰락하고 일본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예언했다. 그는 일본에서는 아직도 영웅이지만 미국 내에서는 바보취급 당하고 있다.
-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 주장이 1930년대부터 1970년 전후까지 전 세계의 경제사조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것이 주목할 만한 경제사상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나 유일 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케인스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주목할 만한 경제학자로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요셉 슘페터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이에크는 경제사상적으로 케인스와는 정확하게 대척되는 인물이다. 하이에크 와 케인스의 차이는 결국은 시장에 대한 신뢰의 차이로 귀결된다. 이것은 현대의 신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의 대 표격인 사람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유방임주의 Laissez faire라 해도 무방하다. 하이에크는 학문적 업적보다도 《노예의 길 The Road to selfdlom》 이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집권한 이후에는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됐으나 정작 하이에크 자신은 스스로 보수주 의자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다. 더불어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글을 통해 보수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 하이에크가 동시대인으로서 케인스의 이론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소원하지 않았다. 《노예의 길》을 읽은 케인스는 그 책의 모 든 내용에 동의하며 그것도 가슴 깊이 동의한다는 편지를 하이에크에게 보냈다. 하 이에크 역시 훗날 케인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케인스이며, 그에 대해서는 언제나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시카고대학에서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eedman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들은 케인스의 사상이 전 세계를 석권하던 시절에는 세상의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점차 이들 자유시장주의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작은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플레이션이 창궐하면서부터였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 제하기 위해 시장가격에 대해 규제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 를 가져왔다. 그러는 와중에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을 중시하는 케인스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부에 의한 시장 규제를 혁파하자는 운동도 일어나게 됐다. 이 무렵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고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됐다. 하이 에크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면 밀턴 프리드먼은 경제 이론에서 집요하게 케인스 이론을 비판하고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프리드먼은 한때 중앙은행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훗날 중앙은행은 통화량을 경제 성장률과 같은 정도로 늘리는 소극적인 역할만을 해야 한다는 선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경제의 운영을 시장의 자율적인 기능에 맡기고 정 부는 경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감세를 주장하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부터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사조를 낳게 됐다. 이 때문에 케인스주의는 퇴조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케인스주의가 완전히 패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시장원 리주의자들은 정부의 완전한 무간섭을 주장했고, 실제로 정부의 재정지출이 줄어 들기는 했으나 중앙은행에 의한 금융정책은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해갔기 때문이다. 각국은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재정지출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됐으나 적극적인 금리정책으로 경기순환에 대처하게 됐다. 그리하여 중앙 은행 특히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의 힘은 갈수록 커지고 FRB 총재인 그린스펀은 재직 당시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게 됐다. 상아탑에서는 1970년대 이후에도 거시경제학은 신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대립이 지속했다. 이러한 대립은 최근 폴 크루그먼이 기고한 거시경제학의 역할에 대한 반성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고문은 현재의 경제위기를 거시경제학자들이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 같은 것인데 내용은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시장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을 제한하고 규제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며 시장의 완전한 자유를 존중하는 신고전주의적 흐름이 1980년대 이후의 거시경제학의 대세가 됐다는 점에서 크루그먼의 이 같은 거시경 제학 비판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 호황이 장기간 지속하면 기업들이든 금융기관들이든 미래의 경기에 대해 낙관론 이 만연하게 된다. 이에 따라 투자 수익에 대한 낙관적인 환상이 생기며, 그 결과 투자가 왕성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투자든 간에 더 많은 사람이 투자에 나서 게 됨으로써 자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이 수요가 자산가격을 더욱 끌어올리는 작용을 한다. 지속적인 자산가격의 상승은 많은 사람에게 부채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켜 머니게임에 참가하는 수가 점점 더 늘어나게 한다. 이윽고 경제 전체의 시스 템 속에 상당한 양의 부채가 축적되게 된다. 이때가 되면 아주 작은 기폭성을 가진 사건일지라도 경천동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너무 많은 주체가 투자를 하고 자 부채라는 계약상의 의무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자산가격의 하락이 보 이는 상황에서 부채 상환이라는 의무를 이행하려면 자산을 청산하는 수밖에 없다. 자산가격의 하락이 계속되면 너도나도 앞을 다퉈 일제히 포트폴리오를 청산하는 쪽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 경천동지의 결과를 가져오는 순간을 '민스키모멘트 Minsky Momen' 라 부른다. 이 말은 민스키가 아닌 세계 최대의 채권펀드인 PIMCO의 이코노미스트인 폴 매콜리 가 1998년의 러시아 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명명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과정에서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기 위한 민스키모멘트는 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업 체인 뉴센츄리파이낸셜의 도산이고,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기 위한 민스키모멘트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투자를 경기 변동의 주원인으로 본다. 이에 반해 민스키 는 투자를 일으키려고 조달한 부채의 건전성 그리고 사회 전체의 부채 축적과 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투자 자체가 불안정성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투자를 위해 부채가 얼마나 동원됐는가를 불안정성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헤지금융, 투기금융, 폰지금융: 민스키는 경제 주체가 부채를 얼마나 쌓아 올렸는가에 따라 그 차입 구조를 헤지 금융(Hedge Finance), - 투기금융(speculative Finance), 폰지금융(Ponzi Finance) 의 3단계로 구분한다. 헤지 금융 단계에 있는 채무자는 본업에서 발생한 현금흐름으로 원리금을 지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다. 투기금융의 단계는 본업에서 이자 지급은 가능하지만 원금을 갚으려면 대출을 연장 하거나 다른 곳에서 다시 차입을 일으켜야 하는 상태 다. 폰지금융이란 본업에서 원금은 물론 이자도 지급할 수 없는 상태로 필연적으로 자산의 가격이 올라야만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 민스키에 의하면 금융기관은 전형적인 투기금융의 상태에 있다. 금융기관은 근본적으로 헤지금융의 상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금융기관은 구조적으로 단기부채인 예금의 비중이 높고 대출은 상대적으로 기간이 길며, 따라서 장단기 미스매치에 의해 필연적으로 롤오버에 의한 재차입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 금융에서 투기금융 그리고 마지막에는 폰지금융의 상태로 위험을 높여가게 된다. 금리가 높아지거나 실물 경제에 타격이 와서 본업에서 들어온 현금흐름으로 이자 나 원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헤지금융의 상태에서 투기금융의 상태로 내 몰리게 된다. 붐이 오랜 기간 지속하면 투자에 나서는 주체들이 점점 늘어나고 투자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돼 결과적으로는 이자율의 상승을 불러온다. 붐의 지속이 투자를 늘리고 투자 수요가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는 이것이 시스템에 내재한 메커니즘임을 보여준다.
이자가 상승하면 투기금융 상태의 채무자는 이제 폰지금융의 단계로 진입한다. 폰지금융의 상태에서는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하면 문제 해결 방법으로 포트폴리오 처분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포트폴리오 청산 때문에 자산가격은 크게 하락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은 채무자들을 더욱 곤경에 빠트리고 채무불 이행에 빠지게 한다. 이로써 재무자의 손실유 금융기관의 채무가 되고 이러한 손실 의 누적으로 금융기관 또한 타격을 입게 된다. 금융기관이 살아남으려고 대출심사를 강화하고 신용제공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자금의 순환이 막히게 된다. 결국 경제 전체가 신용경색이라는, 일종의 질식상태에 놓이게 된다. 언제나 투기금융이나 폰지금융의 상태에 놓인 채무자들이 자산가격의 붕괴를 가 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산가격의 하락에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이윤을 확보하지 못한 채무자는 자산가격이 조금만 하락해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 에 없다. 이 안전이윤은 호황이 지속함에 따라 스스로 붕괴하는 경향이 있다. 낙관 이 만연하면 채무자는 기존에 확보한 안전이윤조차 너무 보수적이라고 판단해 스스로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 민스키는 금융 기법의 발전이 버블의 형성과 붕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수익을 위해 중개기능을 늘리고자 하는 금융기관의 속성에 따른 것이라 한다. 장기간에 걸쳐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사회 전체가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지는 상황이 도래하는데, 그럴 경우 사람들은 가격 하락의 위험에 거 의 무감각해진다. 이때 사람들의 낙관론에 편승하는 위험한 금융상품이 출현하게 되고, 이 상품은 그 자체로 유동성을 늘리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버블 형성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민스키의 말을 빌자면 금융기관은 호황기에 접어들어 시장이 경쟁의 격화에 의 해 수익의 기회가 줄어듦을 우려하게 된다. 금융기관들은 수익의 기회를 늘리려고 언제나 금융 혁신으로 신상품을 개발하게 된다. 금융 혁신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현상인데 그것은 금융기관의 수익 기회를 늘리기 위함일 뿐이다. 금융 혁신은 호황 에 이은 안정적인 흐름과 떼어내려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월가를 비롯한 금융시장이 언제나 커다란 베팅에 나서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 금융위기의 결과로서 공항이나 부채 디플레이션이 될 것이냐, 아니면 통상의 경기 침체로 끝날 것이냐는 경제 전체의 유동성이나 정부부문의 크기 그리고 중앙은 행의 최후의 내부자'로서의 역할에 달렸다. 즉, 중앙은행에 의한 충분한 유동성 공 급, 정부의 재정지출을 통한 민간 수요의 대체, 중앙은행의 파탄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구제 등이 실행된다면 공황은 피할 수 있다. 민스키가 케인스주의자로 불리는 이유는 이처럼 중앙은행과 정부의 적극적인 역 할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스키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자본주의의 제 도적 약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금융의 공기업화를 주장했다. 이점이 그를 통화주의자로 가득한 당시의 경제학계에서 더더욱 비주류 에 자리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민스키의 팽창과 수축 사이클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강력하다. 부 채로 이루어진 투자는 불안정하고 그와 같은 투자를 지탱하는 금융 시스템은 불안 정하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민스키의 독특한 점은 금융에 의한 시스템적 불안정성을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의 내재적 특성으로 자리 매김한 데 있다.
- 민스키는 새로운 금융 기법의 출현을 자본주의 경제에서 호황기에 나타나는 전 형적인 특징으로 묘사했다. 경제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장기간 호황이 지속하면 서도 안정적인 흐름을 보일 때 금융기관들은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 레버리지를 늘 린다. 또한, 새로운 금융 기법을 창안해 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탄생한 새로운 금융상품은 종국에는 버블의 형성에 이바지하고 금융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는 비록 중앙은행에 의해 안정적인 경제흐름을 달성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팽창수축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움직 임을 보인다는 것이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 화폐전쟁  (1) 2020.08.23
아파트 공화국  (0) 2020.03.29
미국이 파산하는 날  (0) 2020.03.27
월스트리트의 반격  (0) 2020.03.18
하버드 부자수업  (0) 2020.03.18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