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

경제 2020. 3. 29. 14:14

- 1980년대의 아파트 열풍 : 규제 완화와 부동산 투기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이 열렸던 흥분의 1980년대에는 대형화되고 고층화된 건물 건설에 대한 규제가 전반적으로 더욱 완화되었 다. 아파트 지구 이외의 주거지역에서 건물의 높이와 용적률을 제한했 던 종래 〈도시계획법〉의 핵심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이로써 또 한 번의 도시 밀집화가 가능해졌다. 주거전용지역의 용적률이 15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올라 연립주택의 건설이 허용됐다. 결국 주도 대도시 특히 서울의 주택난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이미 10년 전 시작된 대규모 주택 건설 정책은 더욱 확대되었고, 건설부는 1981년부터 1005년까지 15년간 주택 5백만 세대 건설 계획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전반적으로 이 기간은 건설 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활황기였다. 국제 구도의 스포츠 제전을 앞두고 도시 미화를 위해 대형 건물과 대규모 주 택의 건설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이는 중동지역 전쟁으로 사업 침체를 겪고 있던 재벌기업 계열의 건설 회사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부동산 부문에서는 시기적으로 조금 앞선 일본의 경우처럼 시세가 폭등 했다. Aveline 1995, 90-91), 서울에서는 올림픽 시설물 건설 바람을 타고 강남 구와 송파구를 중심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기를 띠었다. 더욱이 강남의 교통망을 확대시키는 지하철 순환선이 테헤란로를 따라 지나면서 잠실 과 반포 사이에 제3의 업무 지구가 형성됐다. 코엑스빌딩 같이 화려한 마천루 건설에 연이은 사무용 건물의 건설은 이 지역의 지가와 부동산 가격을 급상승시키는 요인이 됐다.
- 한국에는 두 가지의 도시재개발 형태가 존재한다. 첫째가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1970년대 업무 지구 현대화를 위한 주상 복합 지역의 개발이 그 예다. 둘째는 '달동네' 라는 문학적인 이름의, 무허가 주택과 저소득층 주기 지역에 대한 주택 재개발사업' 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형태는 1990년대의 산물이 아니라 '불도저 김' 식의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이 있 었던 1960년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정부는 강력 한 재개발의 주역이었다. 철거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1983년 합동 재개발사업' 이라는 도시재개발의 새로운 형태가 도입 되는데, 이는 재개발구역 주민들의 참여와 민영 회사의 개입을 부추겼 다. 이 절차는 주도자가, 정부가 아닌 해당 지역의 주택 소유주로 구성된 '재개발조합 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1970년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크 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재개발구역의 무허가 주택 거주민들은 그들이 불법 점기한 토지에 대하여 선매권을 갖게 되어 시세보다 낮은 공시지가로 다시 사들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권한을 획득한 지역주민들은 주택 재개발 권고를 받고 민영 회사와 협의하여 필요한 자본의 일부와 자재, 기술력을 충당한다. 주민들은 이렇게 건설 예정 아파트단지의 새 아파트 에 대한 소유권을 누리게 되는데 건축 기간이 끝나면 원래 소유 주택보다 가격이 대폭 상승한 아파트를 소유하며 그 가격은 토지 재매입, 건축비 등 재개발에 투자한 비용을 웃돌게 된다. 민영 건설 회사의 경우, 가능 한 많은 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해 고층 초고층 건물의 건축으로 이익을 극대화한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이윤을 남기는 이 사업은, 재개발조합 창립에 대한 찬성이 거의 자동적으로 80퍼센트를 넘게된 이유를 설 명해 준다. 물론 옛 달동네의 주민들이 아파트에 입주하는 경우는 드물 다. 지역의 물질적 변모는 중산층의 유입과 함께 하층이 밀려나는 사회 계층적 변화를 수반하고, 애초의 주민들이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는 1980년대 말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자 강남지역의 아파트단지 개발이 수그러들었고 아파트단 지 건설이 가능한 택지가 줄어들었으며 아파트단지는 점점 도시 외곽으 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기존의 도시 개발 지역 가운데, 평 균 3~5헥타르에 이르는 재개발지구는 상대적으로 이점을 누리게 되었 다. 1983년에 시행된 합동 재개발사업이 민간 자본의 참여를 독려하는 조세경감이나 공공지원 등 다양한 조건들을 내세웠기 때문에 대기업들의 부담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 아파트단지 개발의 역사는 끊임없이 건축되고 재건축된 한 도시의 역사이다.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건축가, 주민 등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것처럼 '맨주먹으로 일으켜야 했던 대도시 서울의 끊임없는 변화는 이를 잘 보여 주고 남는다. 한국 도시경관의 불안정성은,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불안정성은 우선 도시의 변화 속도 에 있어서 과격함을 의미한다(Lee Eun 1997, 124-125). 국토의 빠른 개발과 변모를 경험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공통적 특징은 '새 것에 대한 맹목적 중 배'로 나타난다. 최신형 아파트단지와 최신형 건물들의 경합은 일상화되 다시피 했다. 1970년대 이후 '새로운 도시'의 창궐은 '신'이나 '뉴'라는 접두사를 무한대로 사용케 했다. 이 책에서 쪽마다 쏟아 낼 수밖에 없는 '신도시', '뉴타운' 의 홍수는 필자로서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오늘의 서울은 이렇듯 도시 유행의 첨단을 보여 준다. 서울의 가옥 갱신 주기는 서구 도시보다 훨씬 짧다. 델리상은 도시 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한국인 대다수의 '무심함'을 지적한다(Delissen 1993). 베르크는 일본에서 도시의 의미 내지 일본의 도시성에 대한 조사에 서 유사한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시의 의미는 일본 사회 내 시·공간 조직의 핵심이라 할, ‘유동의 문화 (culture de flux)에 기초 한다고 보았다. 서울 주거 공간의 계속적인 변모 역시 '유동의 문화'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른다. 유동의 문화' 에는 시간의 순환적 개념이 배어 있으며 서구인들이 발전시킨 '축적의 문화 (culture de stock)와는 그 의미 가 매우 다르다. 축적의 문화'는 직선적인 시간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 미 지어진 가옥의 영속성에 더 집착한다. 여기서 필자는 문화 발전이냐 하는 논쟁에 대해 섣부른 결론을 내 리지는 않으려 한다. 분명 서울은 20세기 유럽 사회에서 발전된 가옥의 이데올로기와는 상충되는 관점을 갖는다.(Choay 1992). 한국에서 주택의 끊임없는 변모는 서구가 보여 주고 있는 도심의 박물관화와는 근본적으 로 대립된다. 서울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고 변화하고 있으 며 현재에 멈춰 설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확실히 서울은 지리학에 저항하는 도시이다.
- 1970년대와 1980년대 건설된 성격이 다른 여러 아파트단지를 대상으로 한 조사는 아파트단지를 사회계층 구성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홍두 승· 이동원 1993). 이미 언급한 대로 반포주공단지나 압구정동 현대단지 등 은 부유층과 최상류계층을 겨냥한 반면, 잠실 등은 그보다 낮은 소득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파트 면적과 사회계층 구성 간 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타당하다. 1977년 완공된 잠실단지는 평수가 19평을 넘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이 면적은 최소형 평수에 해당 된다. 1980년대 이후 건설된 대다수의 아파트는 주로 30평에서 40평대 이다. 1990년대 중반 필자가 수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잠실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다른 여섯 개 아파트단지의 300만원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64평 복층이 있는 반포단지나, 압구정 현대의 80평형 이상 아파트단지는 소득 수준이 더 높았고, 삼익단지 또 한 그러했다. 이 세 개 단지 주거 세대 중 35퍼센트 이상이 월수입 300만 원을 넘어섰다. 잠실의 경우,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봉급생활자인 경우 가 3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회사 사장은 없었으며 자유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6퍼센트로, 압구정의 13퍼센트, 삼익의 12퍼센트보다 낮았다. 또한 잠실단지는 가장 젊은 세대로 구성되어 있어 대다수 가장의 연령이 40세 이하인 반면, 다른 아파트단지는 그 이상이었다.
- 한국의 아파트가 갖는 유형적 특징은 프랑스와의 비교를 통해 보다 잘 드러난다. 그렁덩성블(grand ensemble)이나 씨테(cite)라는 프랑스어 용어 는 한국어의 '단지'를 표현할 때 쓰이는 프랑스 말이지만, 그 의미는 한국의 아파트단지와 매우 다르다.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1950년에서 1980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다음과 같은 용어 설명의 예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렁떵성블: 1960~70년대 프랑스 대도시의 근린지역에 건설된 대규모 건물군을 지칭하며 종종 '씨테'라고도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한 주택난을 해소 하기 위해 ZUP(우선시가화지구)의 절차에 따라 지정된 토지 위에 급조됐다. 대개 이 건물들은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주변 지역, 즉 도심이나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빠른 쇠락으로 점차 무기력하게 고립된 빈민 층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청년들과 이민자들의 거 주지가 된 것이 특징이다. 그 일부는 '문제 지역' 혹은 '민감한 지역'으로 불리며 청년들의 폭동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수년 전부터 도시 정책의 특별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Guglielmo 1996, 265).
- '문제 지역이니 '민감한 지역 이니 하는 용어들은 폭력과 도시문제로 얼룩진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어두운 현황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들 중 일부는 1990년대 초반 이후 발생한 폭동사건 4의 오명을 쓰지 않은 곳도 있다. 사르셀(Sarcelles)이나 라 쿠르뇌브(La Courneuve)처럼 프랑스 근 린지역 문제의 상징적인 아파트단지와는 달리 이블린(Yvelines) 지역의 파를리2(Parly II)와 벨리지2(Velizy II)단지는 대규모 건설의 표본적 사례이다. 전형적인 도시 중산층의 거주 지역인 지프-쉬르- 이베트(Gif-sur-Yvete)도 있다. 분명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이미지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면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아파트단지에 대한 전반적인 관찰에 충실하다면, 어떤 의미에서건 프랑 스의 아파트단지는 도시의 소외를 상징하며, 서울의 아파트단지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프랑스의 아파트단지와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서로 상반된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플라망(Flamand 1989, 242-249)과 레제(Leger 1990, 39)에 따르 면 초창기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더 나은 거주환경을 원하는 청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대거 개인주택으로 이동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오늘날 프랑스 아파트단지의 사회계층 구성은 20년 전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성장 과정은 이와는 정반대의 유형을 보여 준다. 1970년대 초반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던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그 이후로 오히 려 중간계급이나 부유층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ZUP'나 '그렁평성블'로 번역하는 것은 한국적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명성블' 이라는 표현이 반포, 잠실, 압구정단지를 지칭한다면 프랑스어에 스며있는 부정적인 의미 를 지우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 독자들로서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 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자는 내 주제가 한국 의 영구임대주택이나 위험지역 문제도 아닌,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중산 층의 공간에 관한 것임을 프랑스 동료들에게 수도 없이 설명해야 했다. 프랑스 동료들과 독자들에게, 한국의 아파트단지가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의 그렁덩성블이나 '씨테'와는 정반대의 개념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도시 형태는 운명적인 것 이 아니며, 모든 것은 주어진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장소의 가치가 갖는 의미에 따라 좌우된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 60년에서 90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빠른 전환, 군대식 선전구호, 독재정권에 의한 외적 정제성장 등은 한국적 모델을 특징짓는다. 프랑스에서처럼 부의 이전이나 연대의식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 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특징이다. 재분배의 측면보다는 양적 성장 그 자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기에는 개인의 행복이 아닌 사회의 행복' 이라는 특별한 비전에 접목 된 한국적 태도가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짓은 한국의 경우 개인적인 부의 재분배를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프랑스와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보다 훨 씬 덜 느낀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 낸 한국형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인 셈이다.
- 1998년까지 2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을 짓는 건설 회사는 시세를 밑도는 분양 상한가를 준수해야 했다. 이 가격은 도시별, 서울의 경우 지역 별로 서로 다른 해당 지구의 지가와 건설부가 지정한 표준 건축비를 고 려하여 결정된다. 또한 건설 회사는 주택은행이 관리하는 분양 제도에 따라야 하는 제약이 있어 수요자들에게 직접 주택을 매매할 수 없었다. 아파트 분양제도는 시행 초기부터 계속해서 수정·보완되어 왔다. 1983년 정착된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분양 제도에 이어 채권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주택 청약자는 추첨시, 서 울시가 정한 채권 상한액에 따라 채권을 매입해야 하며 이는 아파트단지마다 서로 다르다. 사실상 주택 구매에 대한 일종의 중과세에 해당하는 이러한 조처는 정부의 공공 유동자산을 증식시키는 동시에 투기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졌다. 주택 청약자들은 액면금액의 내림차순으로 명단에 등록된다. 즉 액면 금액이 높을수록 분양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편 이 제도에 따라, 주택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취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고 특히 주택보급률이 낮은 서울의 경우 수요를 급증시켰 다. 1990년, 300만 명 이상이 주택 청약 계좌를 신청한 반면, 같은 시기에 연간 주택 건설은 50만 호가 예정되어 있었다. 1994년, 서울의 경우 청약 자의 숫자는 약 50만 명을 기록했던 반면 연간 주택 건설은 약 6만 5천 호 뿐이었다(서울통계연보 1995). 이 두 사례는 정부의 가격 통제 방식과 함께 1998년까지 주택 시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이상과 같은 가격 통제 방식은 1995년부터 점차 사라져 1998년 2월 부터는 완전히 자율화되었다. 그 결과 신규 건설 주택가는 시세에 맞춰지 게 되었고 점차 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는 주택 상품으로 변화했다.
- 주택정책을 다룬 한 논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주택정책은 오랫동안 부유층에 유리한 방향으로 시행되어 왔다. 이러한 방향은 ‘주택 여과 과정(Hiltering Process)'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하위 계층은 부 유증이 더 값비싼 최신 주택으로 옮기 가면서 남기고 간 주택을 저렴한 비 용으로 구입해 옮겨 간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chung, 1995, 3.20 321). 대다수가 개인적 주기사의 진보에 따라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하위 계층도 주택을 소유하게 된다는 주택 여과 과정' 의 원리 는, 사실 모든 지역의 집값이 똑같은 도시 공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즉 중심도 주변도 없이 미분화된 도시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 원리는 도시의 진동기들이 남지도 변형되지도 않는다는 전제에 입각 한 것이다. 따라서 이미 끊임없는 쇄신을 거듭하면서 중심과 주변의 문화가 갈수록 심화되이 온 서울의 변천 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 실제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키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 계층을 주변 지역으로 내몰고 도심을 상층 계층이 차지하는 젠트리피케이션(sentulication)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후 세대당 가족 수의 비율과 주택당 가구 수의 비율이 아파트에서는 낮아지고 개인주택에서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 서울의 세 대당 평균 가족 수는 개인주택이 9.5명, 아파트가 5.9명이었고 1995년에 는 각각 9.8과 3.7로 벌어졌다. 주택당 가구 수의 비율도 비슷한 곡선을 보여, 1970년과 1995년을 비교해 보면 개인주택이 1.9가구에서 3가구, 아파트에서는 13가구에서 1가구를 기록했다(RPL 1970; 1995). 아파트의 인 구밀도 저하와 개인주택의 인구밀도 증가는, 아파트단지 건설 정책이 주 로 중간계급이나 주택 구입 능력이 있는 계층을 위주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국 전혀 수혜를 입지 못한 최하위 계층은 별 수 없이 개인주택의 일부나 영세한 연립주택 등 다른 형태의 주택으로 옮겨 가야 했다.
- 한국에서 정부의 직접 투자가 빈약했던 주택 부문은 산업 발전의 희생양이었다. 범국가적 차원에서 수립됐던 주택 부문의 계획이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수렴되고 국민총생산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주택 부문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인 노력은 미미했다. 아파트의 대규모 건설 공약은 계속되었다. 분명 대규모 주택의 공급 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발전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이었다. 공공 재정의 역할은 미미했지만, 한국인들은 정부 정책에 부응해 주택 구입의 재정적 부담을 받아들였다. 이 역시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전 국민 이 수락했던 수많은 물질적 희생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커밍스 (Bruce Cumings)에 따르면, 이것은 한국의 경제 기적을 가능케 했던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엄밀히 말해 '기적'이 아니라 1960년대 성인 계층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자 그들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북한과의 적대적 경쟁 관계와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북한을 능가해야 한다는 총량주의적 목표를 추구해 왔다. 1960년대에는 공장의 벽보나 방송에서 ‘경제 우선!’, ‘수출 목표 10억 달러!'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단순화된 경제 발전 목표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만들어졌고 주택 분야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주택 건설 2백만 호!'라는 구호는 1970년대에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가장 충격적인 구호는 '주택 건설 180일 작전’ 으로, 잠실의 초창기 네 개 아파트단지가 이 기록적인 기간 안에 건설됐다. 군대 용어에서 빌려 온 '작전' 이라는 용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정부 선전 구호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졌다. 앞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서울 시장 김현옥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개발 시대 고위 관리들의 전형적인 특성 을 지적했는데, 이를 잘 보여 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서울에서 김현옥 의 과격한 정책 추진 때문에 문화재 파괴를 우려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지금 100미터를 달리고 있다. 오직 속도만이 나의 무기다. 격려도 비판도 생각할 시간이 없다. 꼴찌로 도착한다면 무슨 소용 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Jung 1997, 32), 대단지 아파트는 '기적'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량 생산체제의 직접적 산물이자 한국 사회가 '양과 속도' 의 신조를 따르는 성장의 이데올로기에 완벽하게 통합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최평두 1991, 227-264).
- 주거의 공간적 특성과 생활양식은 도시화되고 산업 화된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결정 요인 중 하나이다. 인류학자 알타베는 프랑스의 사례연구를 통하여 유사한 결론을 끌어낸다. Althatbe 1985). 그에 따 르면 주택(가구, 설비 등)이 자신의 실제 계층보다 더 상위 계층에 속해 있음 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거주 장소는 자신의 계층을 정의 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도시 중산층을 의미하는 가 장 함축적인 상징으로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분명 특이한 점 이다. 이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주택에 결부된 상징 내지 표상을 구별 짓 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작고 소박한 것이라도 단독주택 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한국에서 아파트는 경제 발전의 주역이자 가장 큰 수혜자인 중간계 급에 일반화된 주거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사례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아파트단지의 형태는 다양하며 그것은 중간계급 내 부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렛은 아파트의 이미지가 실제의 지리학적 현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아파트는 도시 주민의 의식 속에서만, 마치 그 안에서는 사회계층적 차이가 존재하 지 않는 듯이, 과도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향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외형적 관점에서 아파트는 여러 계층과 범주로 이루어진 중간계급 일반의 주거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상류사회적 형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런 이유로 아파트단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은 이들이 전체적으로 도 시 중산층의 가치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 라고 할 수 있다(Lett 1998, 227).
- 크게 보아 1970년까지는 주민들의 거부감을 없애 줄 만한 아파트 모델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아파트는 하위 계층의 전유물이라는 이미지 가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부유층과 상류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물질적 · 비물질적 장려책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학교 이전 등을 포함하는 거주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개선책이 뒤따르면서, 이들 계층이 아파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아파트단지의 성공은 또한 면적이나 설비 등 주택 조건의 개선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도 아파트단지가 중간계급 을 끌어들이던 때에는 이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잠실의 아파트단지는 1950년대 사르셀의 아파트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원천은 상층의 도시 중산층들이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또 프랑스의 아파트단지와 한국의 아파트단지의 진화 과정에 있어 중 대한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1950~60년대 아파트단지는 젊은 세대의 중간계급이 거주했고 얼마 후 이 계층이 단독주택으로 옮겨 가면서 가차 없이 버려졌다. 그와 반대로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상위 계 층에서 시작되었고 중간계급 일반과 하위 계층으로 확산됐다. 아파트가 한국인 전체에게 표본이 된 것이다. 요컨대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공 급한 대단지 아파트를 상층의 도시 중산층이 수용하게 되었을 때 한국에서 아파트 신화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 아파트단지는 도시 형태의 측면에서 한국 경제의 '기적'을 낳게 한 과정과, 30년에 걸친 농경토지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을 반영한다. 건설 회사와 분양 희망자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남겨준 분양가 통제제도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주택을 양산하는 도시계획 안에서 하나의 집합적 세력으로 고려되고 움직였던 존재였다. 처음에 서울 주민들은 아파트에 대한 저항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주택 형태를 전파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이 도시 역동성을 강남으로 재분배하면서 대규모로 시행되자 여론은 급선회했다. 이러한 여론의 급선회가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사회적 지위를 주장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말만 해도 하위 계층의 주택 유 형으로 간주되던 아파트가 왜 점차로 도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특성적 기 호의 하나가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주택 시장과 임대 시장에 각 개 인의 접근 방법을 결정하는 경제적·물질적 조건들은, 어떻게 중간계급 대다수가 아파트단지의 대규모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하는 구조를 밝혀 준다. 결국 아파트'는 상품이 되고, 재테크의 수단이 되었다. 권위 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 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 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를 너무도 쉽게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무관심 은 이렇게 해서 허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 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에서는 인구 규모와 토지 면적 간의 단순 비율 혹은 인구밀도에 대 한 잘못된 논리가 아파트단지 건설을 정당화하는 주요 논거로 동원된다. 김주철과 최상철의 지적대로 “대규모단지의 체계적 건설의 주된 이유는 서울의 지속적인 인구증가에 비해 건축 가능 용지는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Kim et Choe 1997, 200)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서울에 관한 도시계획이나 지리학에 관련된 모든 문헌에 스며들어 있다.13 그러나 서 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아파트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 아니라 연립주택 지구나 달동네이다.
-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이전의 단독 주택들도 개량되어 이제는 매우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다. 서울에 지어진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어디라도 이제는 화장실이나 수도 등 최 소한의 편의시설이 실내에 있다. 새로 짓는 집들은 연탄 난방이 아닌 가 스보일러를 설치한다. 이러한 변화는 잠실단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서, 1996년에는 이미 13평에서 15평의 주택에 사는 주민의 80퍼센트가 연탄 난방을 가스보일러로 교체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 요인 은 현실로서의 아파트가 인기를 끌었다기보다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 택'에 대해 만들어 낸 이미지가 인기를 끈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 다. 기술의 진보는 순수하게 한국적인 산물이었음에도 서구적인 것으로 이미지화된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도식 안에서 서구식 모델' 이 누리는 권위는 아파트를 현대성의 유일한 상징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현대적인 아파트에서는 어느 정도 마루와 방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 다. 한옥에서 마루는 온돌 난방이 들어오는 바닥에 콩기름을 입힌 한지 를 바른 다른 방들과 달리 나무판을 깔고 난방이 되지 않는다. 아파트에 서 전통적 의미의 방과 마루의 구분은 사라졌으나 어떤 이들은 되살리려 하기도 한다. 방바닥은 전통 한지 장판의 실오라기 문양과 황토색을 모 조한 리놀륨 장판을 깔고 거실에는 원목 마루판을 깐 집도 있었다. 아파 트에서 한옥의 공간 분리는 단순화되어, 마당의 기능을 대신하는 다용도실, 발코니, 현관 등과 나머지 공간들 사이의 대비로 요약된다. 이 대비는 높이를 달리 한다든가 바닥재의 차이 등으로 구체화된다. 현관은 다른 공간의 높이보다 10여 센티미터 바닥을 낮추고 타일을 깐다. 다용도실 과 발코니도 타일을 깔며 높이는 다른 공간과 차이는 없으나, 문턱이 있 어 다른 공간과 분리된다. 바닥재의 차이에 따라 신발 사용 습관이 생겨 나다. 아파트에 들어올 때는 거리의 먼지로 덮인 외출용 신발을 벗고 아 파트 안에서는 양말이나 실내화를 신는다. 다용도실이나 발코니로 나갈 때는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는다. 신발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이렇게, 안과 바깥 사이에 놓인 전환적 장소로서 한옥이 갖고 있는 한국 고유의 가정 공간 구조를 보여 준다. 이처럼 한국 아파트의 특별한 구성 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토로했던 한옥의 특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전통적인 움직임(특히 음식을 준비할 때 신을 끊임없이 벗고 신는 것)을 그 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의 공간 구성과 각 장소의 용도는 한옥 구조를 재구성한 것임을 확인시킨다. 넉넉한 저장 공간을 갖춘 가정 공간은 구심성을 띠며 마루를 향해 열려 있다. 반면 늘 안주인이 차지하는 큰방은 은밀하고 엄숙한 '중심' 으로 남는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 굳게 닫혀 있기는 하나, 아파트는 바깥과 '안' 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가지 형태의 공간을 갖는다. 이 차이는, 바깥은 가정경제 관리의 공간, 안은 일상생활 공간이라는 기능적 구 분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며, 신발을 신고 벗는 특별한 통행 방법으로 나타난다. 한옥의 트집거리가 되는 이 통행 방법은 아파트 구조 안에 체계적으 로 옮겨졌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 혹은 '전통 가옥을 규정하는 문 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실제의 공간 구조와 생활양식이 아니라 한국인들 자신이 그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나 가치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한강의 기적'을 낳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한 강의 기적이 만들어 낸 가장 분명한 결과이다. 아파트단지의 건설은 건설 산업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동했으며 한국의 산업구조 안에서 그중 요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71년에서 1996년 사이, 건설 산업의 생산은 국민 총생산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Kim Jaeyoung et al 1998). 건축, 도시계획, 국토 개발 등 이 분야의 산업은 중간계급에게 많은 일자 리와 아파트라는 형태의 주택을 제공했다. 1998년까지 분양제도에 따른 가격 통제로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에게 부의 축적을 가져다준 아파트는 한국의 중간계급을 형성시킨 진정한 공장이었다. 결국 아파트단지는 농촌공동체로부터 도시로의 이주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 정체 성의 기준들이 무너지는 가운데에도 이들 신흥 중간계급에게 사회적 인정이라는 상징을 제공했다.
- 1997년에서 199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이후, 경제 위기에 타격을 입은 건축 부문과, 주택 시장의 상황은 중대한 도전이었다. 2000년 11월 현대건설의 심각한 재정난이 야기한 충격과 한국 재벌기업을 대표하던 이 회사의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기울였던 노력이 이를 입증한다. 그 러면서 주택 시장을 지원하는 대책들이 줄지어 강구됐다. 특히, 수입이 줄어들어 중도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된 주택 취득자들을 위해, 저금리의 융자 제도가 마련되기도 했다(윤주현 1998; 2000). 주택 시장 위기에 뒤따른 사태와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아 파트의 성공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994년에서 1999년 사이, 주택 가격 지수의 변화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체 도시에서(1995년을 100으로 했을 때) 모든 형태의 주택을 포괄하는 주택가격지수는 1997년에서 1998년 103.5에서 91 이하로 하락했으나, 1999년과 2000년을 거치면서 곧바로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러한 상황의 호조는 서울과 중간 규모의 도시에서 가장 현저했다. 대한주택공사 1999, 162), 이후 조사에 따르면, 건축 부문의 중 소기업들이 잇달아 파산하면서 한국의 주택 구입자들이 중소기업에 대 한 신뢰를 잃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대기업의 아파트 시장이라는 것이며 여기서 현대건설의 에피소드가 빚어졌다. 따 라서 경제 위기는 건설 분야 대기업들이 건설한 아파트단지의 품위를 더 욱 확고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과 2001년 주택정 책의 목표를 통해 표현됐다. 50만 호 건설 목표 중 3/4이 아파트였고, 2002년 주택보급률 100퍼센트를 겨냥했다(장성수 2000).
-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프랑스인들은 대단지 아파트에 흥미를 잃 었다. 물론 1960년대 처음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될 당시에는 중간 계층 의 젊은 부부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거 환경이 진정으로 개선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아파트단지 입주자들과 건축가, 도시계획 전문가들에게 대단지 아파트는, 오늘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삶의 상징이었다. 대단지 아파트의 지위가 실추되기 시작한 것 은 1970년대(1974년 1차 오일쇼크)에 들어서면서였다. 결국 1960년대 그곳에 이주한 젊은 부부들에게 대단지의 장기임대아파트(HLM)는 개인 소유의 단독주택이라는 목표를 위해 거쳐가는 하나의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간계급이 대단지 아파트를 떠났고, 주로 이민 자 출신의 하층민들이 유입되었다. 이 시기부터 도시근린지역의 대단지 아파트는 점점 주변화되었고 생활 시설이 낙후되고 잠재적인 사회문제 를 안고 있는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이렇듯 2005년 가을 이 지역에서 발 생한 폭력 사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 새로운 초고층 아파트단지 건설에 따른 건폐율의 감소는 지역의 조밀화를 수반하며 용적률의 경우 거의 세 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밀화가 도시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가구 수 는 12퍼센트 정도 증가할 것이지만, 가구당 가족 수의 감소로 인해 단지 전체 인구수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 평수의 증대는 재건축 사업이 가져오는 사회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잠실 3단지의 경우 구단지에 거주하던 주민의 25퍼센트만이 소유주였고 75퍼센트는 세입자 였던 만큼, 아파트 평수가 커지고 전세가가 급등하면 그중 극히 적은 세 대만이 단지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이 지역을 더욱 상층 중산층화하는 것이다. 전세가의 상승이 재건축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3~4년에 걸쳐 진행 되는 재건축 사업은 그 과정을 통해 사실상 해당 지역의 주택 시장에 엄청난 압력이 된다. 주민의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전세 수요는 그대로 있는 반면 전세 주택의 공급량은 재건축으 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해당 지역뿐 아니라 송파구 전체와 인접 구의 전세가는 전체적으로 상승했다. 광범위한 재개발계획과 대규모의 주택 수요가 연동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좀 더 부유한 계층이 이주해 오 고 빈곤한 계층이 이 지역을 떠나게 됨으로써 고전적인 사회 변화의 경 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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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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