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기억

경제 2020. 11. 3. 19:55

- “재벌에 면죄부를 줘 경제위기를 미봉한 정책이었다."
8·3 사채동결 조치는 국민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해 대기업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관점에서 훗날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 당시 사채시장 참여자 중에는 자녀교육비와 주택자금 마련을 위해 쌈짓돈을 굴리던 주부와 상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체 건수의 90%가 300만 원 이하 소액 사채였고 금액으로는 32%를 차지했다. 영세 채권자 보호 명목으 로 소액 사채의 경우 상환 기간을 줄이거나 조정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실로 많은 가계가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강화도 대표적인 부산물로 꼽힌다. 큰 기업은 정부가 살려준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만들어내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낳았다. (박정희 정부는 이 같은 비판을 의식 해 1973년 4월 '반사회적 기업인' 73명의 명단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위 기대응능력을 상실한 경영 방식의 확산과 안일한 금융시스템 관리가 25년 뒤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 서울 명동의 사채시장은 8·3 사채동결 조치로 한때 존폐의 기로에 섰으나, 감시를 피해 다시 번성했다. 1982년 금융실명제 도입,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20 등 사금융 폐해를 막기 위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의 사채 의존도는 1990년대까지 전체 차입의 10%를 넘나들 었다. 규모별, 용처별 다양한 자금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금융시스 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생활고에 빠진 가계와 영세 자영업자를 겨냥한 사금융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불법추심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부가 소규모 가계대출업자들을 양성화하기 위해 2002년 대부업 제도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이자제한법(2019년 기준 최고 연 24.0%)을 피하려는 미등록 고리대금업 관련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등록 대부업자는 2019년 6월 말 기준 약 8,300곳으로 이용자 수는 201만 명이다. 사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자본시장 활성화도 미완의 금융개혁 과제로 남아 있다. 국내 공모 회사채시장의 중소기업 참여 비중은 2019년 기준으로 2%에도 못 미친다.
- 5·29 강제상장 조치는 압축 성장이 만든 한국 대기업그룹 특유의 지 배구조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기도 했다. 해방 후 대기업그룹을 일군 창업자들은 대부분 더 많은 회사를 세워 사세를 불리는 일에 전념 했다. 부족한 돈으로 기업들을 거느리려다 보니 계열사 간 상호출자 (A→B→A)와 순환출자(A→B→C →A)도 성행했다. 오너 일가 관점에 선 돈을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옮기는 일만 반복함으로써도 경 영권 방어벽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성장 역사를 자랑하는 대기업그룹일수록 이러한 가공자본'을 많이 활용했고, 오너 일가의 실질 소유 비중은 미미해졌다. 이와 같은 지배구조는 상장과 함께 이른바 '대리인 문제 Agency Problem’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극히 적은 지분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총수 일가(대리인)가 대다수 지분을 보유한 일반주주(주인)보다 자신의 사익 · 특권을 위해 회사 자원을 활용'하는 폐해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한국 주식의 저평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1년 출범한 공정거래위원회는 가공자본'을 활용한 무분별한 확장을 막기 위해 1987년부터 대기업그룹을 지정하고 계열사 상호출자 를 전면 금지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활발한 기업 인수와 경영권 승계 과정을 밟으면서 급증한 순환출자는 2014년 7월부터 제한했다. 상호·순환출자의 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다. 공정거래위원회 의 2019년 발표에 따르면, 총수가 존재하는 국내 자산총액 5조 원 이 상 대기업그룹은 모두 51곳으로 2,10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총수 일가의 지분율은 3.9%, 계열사 지분율은 50.9%다.
- 서울 명동의 사채시장은 8·3 사채동결 조치로 한때 존폐의 기로에 섰 으나, 감시를 피해 다시 번성했다. 1982년 금융실명제 도입,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등 사금융 폐해를 막기 위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의 사채 의존도는 1990년대까지 전체 차입의 10%를 넘나들 었다. 규모별, 용처별 다양한 자금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생활고에 빠진 가계와 영세 자영업자를 겨냥한 사금융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불법추심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부가 소규모 가계대출업자들을 양성화하기 위해 2002년 대부업 제도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이자제한법(2019년 기준 최 고 연 24.0%)을 피하려는 미등록 고리대금업 관련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등록 대부업자는 2019년 6월 말 기준 약 8,300곳으로 이용자 수는 201만 명이다. 사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자본시장 활성화도 미완의 금융개혁 과제로 남아 있다. 국내 공모 회사채시장의 중소기업 참여 비중은 2019년 기준으로 2%에도 못 미친다.
- 5·29 강제상장 조치는 압축 성장이 만든 한국 대기업그룹 특유의 지 배구조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기도 했다. 해방 후 대기업그룹을 일 군 창업자들은 대부분 더 많은 회사를 세워 사세를 불리는 일에 전념했다. 부족한 돈으로 기업들을 거느리려다 보니 계열사 간 상호출자 (A→B→A)와 순환출자(A→B→C →A)도 성행했다. 오너 일가 관점에 선 돈을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옮기는 일만 반복함으로써도 경 영권 방어벽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부신 성장 역사를 자랑하는 대기업그룹일수록 이러한 가공자본'을 많이 활용했 고, 오너 일가의 실질 소유 비중은 미미해졌다. 이와 같은 지배구조는 상장과 함께 이른바 '대리인 문제 Agency Problem’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극히 적은 지분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총수 일가(대리인)가 대다수 지분을 보유한 일반주주(주인)보 다 자신의 사익 · 특권을 위해 회사 자원을 활용'하는 폐해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한국 주식의 저평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1년 출범한 공정거래위원회는 가공자본'을 활용한 무분별한 확 장을 막기 위해 1987년부터 대기업그룹을 지정하고 계열사 상호출자 를 전면 금지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활발한 기업 인수와 경영권 승계 과정을 밟으면서 급증한 순환출자는 2014년 7월부터 제한했다. 상호·순환출자의 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다. 공정거래위원회 의 2019년 발표에 따르면, 총수가 존재하는 국내 자산총액 5조 원 이 상 대기업그룹은 모두 51곳으로 2,10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총수 일가의 지분율은 3.9%, 계열사 지분율은 50.9%다.
- CP의 매력은 다른 금융 상품의 추가적인 금리 자유화 이후에도 꺾이지 않았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신경제 5개년 계 획'56을 발표하고 그해 곧바로 모든 대출금리를 자유화했다. 은행들은 설립 후 처음으로 서로 다른 대출금리를 제시하며 경쟁 체제로 들어 갔다. 공금리'란 표현도 1993년 3월 인하 발표(일반대출 기준의 기존 연 9~11%를 8.5~10%로 인하)를 끝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창구지도로 대출금리를 억누르려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고, 중견 기업들이 접근하기에 은행 대출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은행과 달리 단자회사들은 각종 규제를 제거하는 신경제 조치에 힘입어 부실 기업 CP 영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무더기로 종합금융회 사 인가를 얻어 업무 영역도 국제금융까지 확대했다. 사채시장과 큰손들까지 합류한 CP 시장의 성장은 급기야 부도 직전 기업까지 살려내는 마술을 부렸다. 정태수 전 회장이 언급한 자금 조성비는 단자회사와 사채시장의 깊은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기업은 뼈 까지 곪아 썩어 들어가는 부실에도 CP 발행이라는 모르핀 주사로 버텼다. 고금리에 취한 투자자는 발행 주체들이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통계의 장막 뒤편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사태를 보지 못한 금융감독당국은 관련 규제를 계속 완화했다.
- 정부는 자본시장 개방에 발맞춰 금융의 경계를 허문다는 취지로 1994년 9곳, 1996년 15곳의 단자회사에 종금업 '날개'를 달아줬다. 59 새내기 종금사들은 앞다퉈 국제금융을 맡을 직원의 채용공고를 냈다. 미래 '외환위기 태풍'을 일으키는 날갯짓의 시작이었다.
새 종금사들 진짜 겁납니다. 우리는 엄두도 못 냈던 자산에 투자하고....(어느 선발 종금사의 임원)
고위험 투자에 익숙한 '미꾸라지'의 대거 출현은 건전한 영업에 집중 했던 종금산업의 유전자를 빠르게 바꿔나갔다. 국내외 저리 자금으로 설비를 구입한 뒤 기업에 빌려주는 리스사업은 쇠퇴하고 국제금융과 고위험 CP 할인 분야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국제금융 업무의 초점도 갈수록 위험한 분야로 이동했다. 새 종금사 들은 낮은 이자로 빌려온 달러를 훨씬 높은 이자를 받고 장기로 대출 하는 영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1997년 10월 말까지 종 금사의 외화조달 잔액은 약 200억 달러로 불어난다. 이 중 60%는 1년 미만의 단기 조달이었다. 일부는 일본 엔화를 단기로 빌려 태국과 러 시아, 인도네시아 등 신흥시장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에 장기로 투자 하는 위험천만한 도박도 일삼았다. 종금사 해외 증권투자는 1996년 22억 달러로 전년 대비 8배로 급증했다. 국제금융을 통해 얄팍한 마 진만 남기는 데 익숙했던 선발 종금사들은 후발 경쟁사들의 무모한 영 업 행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외화 유동성 관리 등에 대한 감독 기능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으로 출범한 재정경제원에는 제2금융권을 감시할 전문 조직이 없었다. 외화 단기차입은 사전 보고나 물량 규제 대상도 아니어서 얼마든지 영업을 확대할 수 있었다. 단자회사 시절부터 전문적으로 취급해온 CP 할인 대상도 위험 대기업그룹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은행과 제2금융권에 대한 비대칭 규 제와 1991년 CP 금리의 자유화는 CP의 발행 및 판매를 취급하는 종 금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다. 1996년 말 종금사 자산총액은 약 156조 원으로 일반은행(342조 원)의 절반에 가깝게 팽창했다. 새내기 종금사들은 두 가지 위험만 조심하면 종금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느꼈다. 하나는 대출해준 대기업이 한꺼번에 망하는 일, 다른 하나는 사업자금을 단기로 빌려준 쪽에서 만기 연장을 거부 하는 일이었다. 전자를 걱정하기엔 '대마불사'의 신화가 건재했다. 후자는 원활한 자금 조달을 위해 억대 연봉을 주고 채용한 전직 재무부 관료들의 '영업력'에 맡겼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위험은 1997년 거짓말처럼 동시에 찾아왔다.
- 시가평가 시행은 한국 채권시장 역사에 혁명적인 전기를 만들었다. 신용평가사들은 2000년 봄부터 '민간 채권평가 3사(현 한국자산평가, NICE피앤아이, KIS채권평가)'를 잇따라 설립하고 채권 대형마트 점원 처럼 매일 체계적으로 모든 상품의 가격을 공시하기 시작했다. 시가평가 적용 이후 매일 바뀌는 채권 펀드의 실적은 그동안 채권을 원금보장 상품으로 받아들였던 일반인의 인식도 바꿔놓았다. 펀드 가 치를 훼손할 수 있는 부실 채권의 매입도 급격히 줄었다. '누가 얼마에 사고파는지 정보의 대가이기도 했던 사채시장의 자금 조성비는 갈수 록 얄팍해졌다. 매매가격의 신뢰성을 확보한 제도권 채권 유통(매매) 시장은 급성장했다. 다만 인터넷 메신저 등을 활용하는 점두거래(장외거래) 방식은 여전 히 '은밀한 거래'의 유혹을 낳고 있다. 채권은 워낙 방대한 종목 수 때 문에 전화나 채팅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양쪽이 결탁 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나스닥은 2002년 1,300선이 무너지면서 결국 그린스펀이 비이성적 과열을 경고한 1996년 12월보다 낮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코스 닥지수는 2000년 말 525로, 같은 해 3월 사상 최고(2,834)와 대비해 81.5% 떨어져 거래를 마감했다. 새롬기술 주가는 같은 해 고점 대비 50분의 1로 추락했고, 골드뱅크는 주가 부진을 겪다 2009년 상장폐지 됐다. 닷컴 버블의 붕괴와 기업인의 각종 횡령·배임에 따른 충격은 코스닥시장을 긴 침체의 터널로 밀어넣었다. 2001년 다소 반등했던 코스 닥지수는 2002년 말 다시 443으로 추락했다. 코스닥에 상장했던 엔씨소프트, 아시아나항공, 교보증권 등은 부실 기업 낙인 효과'를 우려해 유가증권시장으로 이사했다. 이후 정부와 거래소는 코스닥시장의 신뢰를 개선하기 위해 수많은 방안을 쏟아냈지만 버블 붕괴 20년을 넘긴 지금도 코스닥은 기준지수인 1,000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2017년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의 후신인 카카오가, 2018년에는 코스닥 대장주인 셀트리온이 유가증권 시장으로 둥지를 옮겼다. 투자자들에게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닷컴 버블이 붕 괴한 2000년 말 코스닥시장 시가총액은 29조 원이었다. 1999년 말 98조 7,000억 원에서 1년 만에 70조 원이 사라졌다.
- 카드산업의 급격한 부실화는 2003년 3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를 촉매로 금융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발전했다. 당시 SK 글로벌 사태 대책반장이던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국장은 SK그룹 관련 채권의 환매 동향을 확인하다가 뜻밖의 현상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투자신탁회사(자산운용사)들이 환매 대금을 마련하 려 90조 원에 달하는 카드채 매물을 헐값에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매물을 싸게 주워 담으려는 기관투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연체율 폭증으로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카드사는 영업 자금 조달을 전적으로 카드채 발행에 의존한다. 만기 도래 카드채를 상환할 새 카드채의 발행 실패는 모든 카드사의 즉시 부도를 뜻했다. 김 국장은 긴급회의를 요청하고 비상조치를 준비했다. 며칠 뒤인 3월 17일 정부는 신용카드사의 자구 노력을 전제로 자금 을 지원하겠다는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발 먼저 사태 수습에 나섰던 삼성카드는 삼성생명으로부터 5조 원의 금융 지원을 약속받아 부도를 피했다. 국민카드는 독자 생존을 포기하고 모기업인 국민은행의 사업부로 흡수됐다. 외환카드와 우리카드도 2004년 모은행에 흡수합병됐다.반면 1,400만 회원을 둔 업계 1위 LG 카드는 그룹 지원만으로 회생이 불가능했다.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그룹과 채권단이 씨름을 지속하던 2003년 11월 21일에는 예고 없는 현금서비스 중단이라는 초유의 'LG카드 사태'로 이어졌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2003년 말 LG카 드 및 LG카드의 최대주주인 LG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 지분을 모두 채권단에 담보로 맡기면서 금융업과 결별 수순을 밟았다. LG 카드는 나중에 산업은행의 단독 관리를 거쳐 2006년 신한금융그룹으로 넘어간다.
- 주식시장에서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 투자자들은 '부동산만 한 자산이 없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2000년대 초 미국의 주택 구매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벌여 서로 다른 두 시장의 놀랍도록 단순한 연결고리를 밝혀냈다. 서울의 아파트값은 2001년 19.3% 뛰면서 대세 상승의 시작을 알 렸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강북 뉴타운' 사업을 구체화한 2002년에는 30.8%나 상승했다. 한국은행은 닷컴 버블 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달아 낮추며 기름을 퍼부었다. 빈 땅에 울타리만 쳐도 청약 수요가 몰리자 건설업계는 잔칫집으로 변했다. 건설사들은 2000년 '래미안(삼성물산)’을 시작으로 '자이(LG 건설)’, ‘푸르지오(대우건설)’ 등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없던 가치까지 만들어 팔았다. 주가도 연일 치솟았다. LG건설(현 GS건설)은 2000년 3,000원대에서 7년 뒤 19만 원까지 상승했다. 1980년대 말 폭등을 기억하는 가계들은 일생일대의 빚을 내며 달리는 말에 올라탔다. 2003년 '도곡렉슬' 청약에는 사상 최대인 9만 7,000여 명이 몰렸다. 1999년 미분양 망신을 샀던 주상복합 타워팰리 스'는 2006년 전용 244m2가 53억 원에 팔렸다. 근로자 가구 연간 소득의 130배였다. 강남 3구(서초, 강남, 송파)'에서 출발한 광풍은 목동, 분당, 평촌, 용인 등 이른바 '버블 세븐’으로 번져나갔다. 노무현 정부가 2005년 판교신도시 공급 카드210를 내놨지만 시장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 이성을 잃은 부동산시장의 불길은 주택시장을 거쳐 오피스빌딩시 장으로 옮겨붙었다. 곳곳에서 초고층 랜드마크빌딩 계획이 잇따랐다. 2008년까지 새로 등장한 100층 이상 마천루 건설 계획만 전국 10여 곳에 달했다. 11 세계에 존재하는 초고층빌딩 수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6명 사망 참사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확산하면서 대규모 개발사업이 줄줄이 좌초 위기에 빠졌던 2009년 1월 20일, 단군 이래 최대인 30조 원 규모의 개발사업을 추진하던 용산 역세권 인근13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 어올랐다. 무모한 개발사업과 철거민의 충돌이 빚은 이 참사는 한반도를 휩쓴 부동산 광풍이 마침내 종지부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건설사와 가계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을 때, 장부에는 광란의 파티가 남긴 산더미 같은 빚이 남아 있었다. 2013년까지 100대 건설사의 절반을 파산으로 내모는 100조 원의 프로젝트파 이낸싱 PF 대출, 그리고 훗날 한국 경제의 최대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700조 원대 가계부채(가계신용)였다.
- 글로벌 금융위기는 원자재시장을 주무르던 선진국 금융회사들의 급격 한 자금 회수를 촉발했다. 모든 상품의 가격이 급전직하했다. 곧이어 선박 운임이 떨어졌고 신조선 주문 가격의 급락이 뒤따랐다. 이어서 선박 운항이 중단되고 신조선 주문이 끊겼으며 발주 취소가 잇따랐다. 곤경에 처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2010~2011년에 원자재 가 격이 반등하자 선박 확충에 다시 한 번 '올인'했다. 이익을 늘려 불 어난 빚을 청산할 마지막 기회라 판단하고 벌인 도박이었다. 하지만 2012년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진 피그스(PIIGS: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 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국채 상환 위기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희망은 치명상으로 되돌아왔다. 닻을 올리는 선 박이 줄었지만 각각 1조 원대 임차료(용선 비용)가 꼬박꼬박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자산을 팔며 버티던 STX팬오션이 2013년에 먼저 기업회생절차(법 정관리)를 신청하며 백기를 들었다. 부도의 공포가 매년 확산하자 금융 당국은 2016년 4월 조선업과 해운산업을 이른바 '취약업종'으로 묶고 수술칼을 잡았다. 이후 현대상선과 대우조선해양은 2016~2018년에 조 단위 빚을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전환을 시행했다. 같은 기간 현대 중공업은 주주들로부터 1조 원대, 삼성중공업은 2조 원대 현금을 수혈 받았다. 한진해운은 한진그룹의 지원을 받다가 2016년에 법정관리를 신청 했다. 그해 2월 발틱운임지수는 290이었다. 2008년 5월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11,793의 불과 2%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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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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