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솔린과 항공유 같은 석유 정제품과 원유를 합친 기준으로 세계 5대 석유 중개 업체의 일일 거래량은 2,400만 배럴에 달한다. 세계 하루치 석유 수요의 25퍼센트에 맞먹는 양이다. 또한 세계 곡물과 유지작물(기름을 얻기 위해 재배하는 작물 옮긴이) 거래의 거의 절반을 세계 7대 곡물 중개 업체가 책임진다. 전기 자동차의 필수 원자재인 코발 트cobalt는 글렌코어 Glencore라는 회사가 세계 공급의 3분의 1을 차지 한다. 절대적 수치 자체도 어마어마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숫자 이 상이다. 그들은 지구 어떤 업계와 비교해도 가장 민첩하고 공격적으 로 일하며, 자원의 가격을 결정한다.
- 원자재 중개 업체의 포트폴리오는 단순하다. 한마디로 '수급 불균 형'으로 돈을 번다. 특정 장소와 시간에 원자재를 사들인 다음, 지역 과 시간을 달리하는 과정에서 차익을 얻기 위해 그 원자재를 되파는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원자재의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산, 농장, 유전의 대부분은 구매자와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생산자 모두가 자재를 직접 팔기 위 해 세계에 지사망을 깔 처지도 아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원자재시 장은 공급의 과잉과 부족을 왔다 갔다 한다. 민첩성과 융통성이 장점 인 원자재 중개 업체는 생산자로부터 언제든 원자재를 사들여, 기꺼 이 값을 치르려는 구매자에게 공급할 준비가 항상 돼 있다.
2020년 국제 유가 폭락 사태가 그 좋은 예다. 코로나19 팬데믹으 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봉쇄 조치로 사람들은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움직일 일이 줄다 보니 유가는 끝없이 추락했고, 한 때 마이너스 가격에 거래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매의 눈을 가진 원자재 중개 업체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 은 거저 수준으로 석유를 쓸어 담아 얌전히 보관했다. 석유 수요가 회복될 때까지 말이다. 심지어 어떤 업체는 석유를 마이너스 가격에 사들이는 횡재도 겪었다. 즉, 생산자는 프리미엄을 얹어 석유를 넘겼고, 원자재 중개 업체는 석유를 '돈 받고 얻었다는 뜻이다.
원자재 중개 업체가 중요시하는 건 딱 하나, '가격격차다. 지역별 로, 원자재의 품질이나 형태별로, 인도 날짜별로 생기는 가격 차이 말 이다. 이 격차를 파고들어 이익을 취하기 위해 원자재 중개 업체는 시 장이 더욱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하고 가격신호(재화나 서비스 가격이 변 할 때 소비자 수요와 생산자 공급을 변동시키는 신호_옮긴이)에 반응해 자원을 효 용 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옮긴다. 원자재 시장을 연구하는 어떤 교 수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주장한 '보이지 않 는 손'의 '보이는 손'이자 산증인이다.
- 업계의 성장으로 국제무역상 그들에게 중요한 미션이 추가됐다. 일명 금융 도관체 Conduit (투자나 금융의 매개 회사_옮긴이)로서의 역할이다. 예컨대 원자재 중개 업체는 원자재 대금을 선불로 치르고, 그 원자재 를 신용, 즉 외상으로 공급하는 '섀도 뱅킹 shadow banking'(은행과 비슷한 기 능을 수행하지만 중앙은행의 감독을 받지 않는 자금중개 기관_옮긴이) 역할을 한다. "석유는 화폐 그 자체죠."
마크리치앤드코의 석유 중개 부문을 이끈 짐 데일리 Jim Daley의 한마디가 금융 도관체로서의 역할을 명확해 말해 준다.
- 이 책의 줄기는 네 갈래다. 세계경제를 원자재 중개 업체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끈 네 가지 변화가 그것이다.
첫 번째 줄기는 '시장 개방'이었다. 개방 중에선 석유 시장 개방이 단연 으뜸이었다. 1970년대 중동에서 자원 국유화 바람이 거세게 불 었고, 그동안 석유 시장을 가지고 놀던 일명 '세븐시스터스'(1980년대 이 전 기준 앵글로이란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 캘리포 니아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 of California, 걸프오일 Gulf Oil, 텍사코rexaco, 뉴저지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of New Jersey, 뉴욕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 Corporation of New York_옮긴이)의 시장 장악력이 줄어들었다.
유전에서 주유소까지 단일 기업의 공급망에 예속됐던 석유가 자 유롭게 거래되기 시작하니 유가도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동과 중남미 국가는 원유 수출을 통제했고, 원자재 중개 업체는 그들과 무 차별적으로 거래를 맺었다. 원자재 중개 업체가 새로운 형태의 국제세력 등장을 도운 셈이다. 일명 석유국가(석유를 국유화했으나 제도가 부실해 부와 권력이 소수에 집중된 작은 산유국_옮긴이), 바로 페트로스테이트라고 도 불리는 존재다.
두 번째 줄기는 1991년 소련 붕괴다. 소련 붕괴는 세계의 경제 관계와 정치 동맹의 지형을 한순간에 바꿨다. 원자재 중개 업체는 이 변화에 적극 편승했고, 계획경제 체제였던 국가에 시장의 법칙을 주 입했다. 체제 변화로 인한 혼란의 한복판에서 원자재 중개 업체는 자 금난에 빠진 광산과 공장에 생명줄 역할을 했고, 심지어 국가 정부의 생존을 지탱하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역할에 대한 대가는 천연자원을 터무니없을 만큼 유리한 조건으로 원자재 중개 업체에 넘기는 것이었다.
세 번째 줄기는 21세기 초반, 10년간의 중국 경제다. 중국이 공 업화·산업화됨에 따라 원자재에 대한 막대한 수요가 열렸다. 1990년 중국의 구리 소비량은 이탈리아와 어깨를 견줬지만 오늘날엔 중국이 세계 구리 소비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27 중국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대거 이주함에 따라 식료품과 연료유에 대한 수입 수요도 생겼다. 원 자재의 국제 교역을 늘리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이는 원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원자재 중개 업체가 어떤 행동을 했 을지는 뻔하다. 중국의 원자재 수요를 위해 온 세계를 샅샅이 뒤졌다.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의 자원 부국이 중국과 새로운 경제 관계를 맺은 데는 그들의 역할이 컸다.
마지막, 네 번째 줄기는 1980년대에 시작된 세계경제의 금융화 (금융 부문 비중이 비금융 부문보다 급속히 커지는 현상_옮긴이)였다. 그간 원자 재 중개 업체는 계약을 맺은 원자재를 선적하기 전에' 대금을 내야 했 으므로 현금 확보의 필요성을 항상 느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원자 재 중개 업체는 보유한 현금 대신 차입금과 은행 보증을 활용했다. 그 렇게 대량 거래와 대규모 자금 조달의 시대가 열렸다.
이 네 가지 변화의 결과는 무엇일까? 세계 원자재 중개 시장을 지배하는 소수의 기업과 개인에게 흘러가는 부와 힘이 폭발적으로 늘 어났다. 원자재 거래의 법칙은 거래를 많이 하되 이윤은 적게 남기는 저마진 형태다. 그러다 보니 원자재 거래량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 다. 2019년 기준 세계 4대 원자재 중개 업체(비톨, 글렌코어, 트라피구라, 카길)의 거래액을 전부 합치면 약 7,250억 달러다. 일본의 2019년 총수출액을 넘어선다.
마진이 적더라도 거래량이 워낙 많으니 원자재 중개 산업의 이 익도 놀라운 수준이다. 마크리치앤드코의 경우 1979년 2차 오일쇼크 당시 얼마나 돈을 쓸어 담았는지 수익성 높은 10대 미국 기업에 들어 갈 정도였다(그것도 상장회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또한 중국발 원자재 수 요 증가로 글렌코어, 비톨, 카길의 순이익을 모두 합치면 애플Apple과 코카콜라 Coca-Cola의 순이익을 앞지르는 수준이었다(자료 2 참고). 여기 서 놀라기는 이르다. 이 엄청난 이익은 극소수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아직도 대부분의 원자재 중개 업체는 비상장 체제다. 회사 이익의 대부분을 몇몇 창업자나 동업자가 가져간다는 뜻이다. 그들이 얻은 부는 환상적인 수준이다.
- 비상장 회사인 비톨은 회사의 모든 지분을 직원끼리 소유한다.
지난 10년간 트레이더이자 주주인 몇몇에게 100억 달러 이상이 배당 됐다. 농업 부문의 카길은 어떨까. 카길은 두 가문의 동업 체제인데,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회사로 그 수는 무려 14명이다. 29 루이드레퓌 스는 드레퓌스 가문이 거의 모든 지분을 소유하며, 글렌코어는 2011 년 기업공개로 억만장자 일곱 명을 배출했다.
- 바이서와 제셀슨 말고도 또 있었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도 회사의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존 H. 맥밀런 주니어 John Hugh MacMillan Jr. (이하 맥밀런 주니어_옮긴이)라는 곡물 트 레이더였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가족회사가 바로 전설의 카길이다. 훗날 카길은 미국 내 최대 비상장 회사로 성장했고 맥밀런 주니어의 후손은 세계 갑부 리스트에 줄줄이 이름을 올린다.
바이서와 제셀슨 그리고 맥밀런 주니어는 현대 원자재 중개 산업의 기틀을 놓은 시조였다. 그들 이전 세대 트레이더는 지역 틈새시장 에 집중했던 반면 바이서와 제셀슨, 맥밀런 주니어는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리라 내다봤다. 그들에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상품 이었고 잠재적 구매자는 세상 어디든 있었다.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 어가 되기 수십 년 전부터 그들은 세계화에 토대를 놓는 사업을 짠셈 이다. 국제무역이 확대되고 현대 경제의 중심부를 차지함에 따라 그 들이 이끌던 원자재 중개 업체는 경제의 최전선에서 활약했고, 그 경 제에서 이익을 취하는 동시에 현대 경제의 모습을 정립했다. 또한 향 후 수십 년간 원자재 중개 산업을 규정지을 포트폴리오가 탄생했다. 그 이후 20년간, 원자재 중개 산업은 '구멍가게'의 모습에서 벗어 나 변신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의 하나가 됐다. 바이서, 제셀슨, 맥밀런 주니어 같은 트레이더는 새로운 경제 질서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됨과 동시에 천문학적인 부를 쌓았다. 이제 그들은 세계 국가 지도자가 두 팔 벌려 환영할 손님이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천연자원의 권위자가 됐다.
이러한 변화는 대다수 정치인조차 거의 모르게 진행된 혁명이었 다. 정치인도 모르는데 일반 대중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수십 년간 원자재 중개 산업이 '조용하면서도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 뒤에야 세상은 원자재 중개 업체가 세계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는지 알아챘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그 현실을 깨달은 세계 여러 부국은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제껏 자신과 같은 공기를 나눠 마 시는지조차 몰랐던 집단이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에너지, 금속, 식량에 대해 전례 없는 막강한 힘을 쌓았다는 사실에 눈을 뜬 셈이다.
- 이렇듯 원자재 중개 산업의 개척자 셋은 소리 소문 없이 세계경제 질서 재편을 도왔다. 서방과 철의 장막 뒤 공급자를 잇는 무역로를 개척했고 과거 독과점 업체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변화의 파급효과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개척자 트로이카가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것 못지않게 트로이 카가 이룬 중요한 업적이 또 있다. 현재 원자재 중개 산업 포트폴리오 의 기초를 만든 것이다. 과거엔 특정한 지역이나 시장 안에서만 활동 했다면, 트로이카를 통해 세계시장을 석권하겠다는 대담한 목표를 세 울 수 있었다.
-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 필리프브라더스를 포함해 금속 중개산업은 크게 두 가지 포트폴리오에 집중했다. 첫 번째, 매수자 확보 후 일괄 거래 진행하기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어떤 고물상이 중개 업체에 고철 수백 톤을 팔고 싶다고 제안한다. 제안을 받은 중개 업체는 다른 중개 업체에 전보를 쳐서 구매자를 찾고, 자신이 차익을 거둘 수 있는 가격으로 고철을 사려는 이가 나타나면 매수·매도 계약 을 거의 동시에 추진하는 식이다. 25 두 번째는 톤당 수수료를 받고 위 탁판매를 하는 방식이다. 후자의 경우 사업상 안전하지만 이익이 크 진 않다.
필리프브라더스는 경쟁자와 달랐다. 제셀슨의 지휘 아래 기존 업계보다 한층 거래에 대담해졌다. 먼저 대규모의 장기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가끔은 자금을 융통해 주는 조건까지 붙였다. 이 거래의 의미 는 무엇일까? 세계 곳곳에 안정적인 원자재 공급원을 확보했음이다. 또한 시장 디스로케이션Dislocation (공급과 수요의 어긋남으로 일어나는 수급 혼 란 상황_옮긴이)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거나 급락할 경우 필리프브 라더스가 엄청난 수익을 챙긴다는 뜻이다. 필리프브라더스에서 구리, 납, 아연을 취급했던 트레이더 에른스트 프랑크Ernst Frank는 “팔 만한 무언가를 항상 갖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늘 시장에 발을 담가야 합니다. 살다 보면 무언가가 정말로 부족해지는 때가 옵니다. 필요한 물건을 가지면 큰돈을 법니다. "
- 원자재를 대량으로 거래하려면 장기 계약은 필수고, 원자재의 공급자와 구매자를 최대한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다. 중개 '제국'의 시조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사업 네트워크를 쌓는 데에 막대한 시간과 돈을 퍼부은 이유다.
사적 네트워크와 친분에 대한 그들의 집념은 차츰 집착 수준으로 발전했고, 일부 업체의 경우 전통적이고 고풍스럽다는 이미지까지 얻 었다. 이메일과 화상회의가 일상인 시대에도 직접 만나 식사를 하는 접근법을 고수한다는 뜻이다. 금속 중개 업체 트랜스아민Transamine 에 는 불문율이 있다. 회사에 금전적 손해를 입히는 것보다 고객과의 점 심 약속을 망치는 게 더 나쁜 짓이라고.
- 오펙의 출현을 시작으로 일어난 석유 산업의 대변혁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산유국은 오펙의 비호하에 점점 목 소리를 높였고 원유의 국유화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외국 기 업은 중동 지사를 계속 운영하도록 허가받아도 전보다 더 많은 이익 과 세금을 뱉어야만 했다.
그렇게 석유 산업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은 오펙, 최대 수혜자는 원자재 중개 산업이었다. 그렇게 오펙은 석유 시장과 세계경제를 완전히 뒤엎었다. 또한 석유 메이저의 시대 를 끝냄과 동시에 그 힘을 원자재 중개 업체에 넘겨줬다. 산유국이 자 원을 국유화함에 따라, 그 석유를 세계시장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원 자재 중개 업체가 맡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력의 균형은 세븐 시스터스에서 원자재 중개 업체로 기울었다. 석유의 구매자나 판매자 를 결정하는 권한이 원자재 중개 업체로 집중됐고 중동, 아프리카, 중 남미 등 신흥 석유국가의 존재감도 덩달아 올라갔다.
- 그동안 미국의 막강한 과점력 아래서 질서 있게 통제되던 세계경제는 무한 경쟁 체제를 향해 고삐 풀린 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 후 10 년간 유가는 미친 듯 요동쳤고, 미국부터 이란까지 세계 모든 곳이 정 치적 격변에 휘말렸다. 그렇게 유가는 세계경제 지형을 재편했다. 이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하고 악착같이 붙잡은 한 사람이 있었다. 훗날 마크리치앤드코를 창업하는 리치였다.
당시 필리프브라더스 트레이더였던 리치는 1950년대 중반에 바 이서가 증명한 한 사실을 떠올렸다. 원유는 거래 가능한 '상품'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사실을 적용하기 위한 실습 장소는 이란의 은밀한 지 원으로 이스라엘이 건설하던 에일라트-아쉬켈론 송유관이었다.
- 1971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대통령은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그전까지는 금과 미국 달러 가치가 연계됐다. 닉슨 대 통령이 금본위제를 폐지한 이유는 석유와 거의 무관했고, 오히려 경 제 부양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는 엉뚱하게도 석유 시장에 극적 효과를 가져왔다. 미국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자 원 유를 미국 달러로 팔던 중동의 이익이 저평가된 것이다. 오펙 회원국 은 새로운 요구에 직면했다. 서방 기업으로부터 자국 자원에 대한 통 제력을 되찾는 것.
알제리부터 이라크까지 많은 산유국은 석유 메이저가 장악했던 이익에서 더 많은 몫을 요구했다. 그 목소리는 더욱 강경해졌고 급기야 석유의 국유화로 이어졌다. 18 오래전부터 국유화를 반대했던 사우디아라비아마저 태도를 바꿨다. 사우디아람코Saudi Aramco를 통해 미국 기업이 지배하던 자국 유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한 국가씩 석유의 국유화가 진행되면서 석유 메이저의 아성도 무너졌다.
그러다 보니 석유 메이저는 유가를 인상하는 것 외엔 다른 선 택지가 없었다. 1971년 아랍라이트 가격은 배럴당 2.24달러였는데 1972년에는 2.48달러, 1973년에는 3.29달러로 인상됐다. 이는 예고 편에 불과했다.
- 세계경제와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지각변동이었다. 수십년에 걸쳐 석유는 세계경제의 건전성을 좌우하는 절대적 원자재로 조 용히 자리 잡았다. 석유 시장은 수년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했지만 이젠 옛말이 됐다. 하룻밤 사이 서너 배가 뛰어올랐고, 세계는 유례없 는 유가 변동의 시대를 맞이했다(자료 4 참고).
2차 세계 대전 후 이어진 세계경제 호황은 유가 급등으로 급제동 이 걸렸다. 경제학자들은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내놓 기 시작했다. 경제 불황 속 물가 상승, 즉 경기 침체 상황에서 물가가 계속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은 모든 세대에 고통을 안겨 줬다. 특히 미국에 주는 충격파가 매우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서 자동차를 가장 숭배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하루아침에 미국인은 주유소에 서 긴 줄을 서야만 했다.
중동의 석유 국유화는 지난 수십 년간 세븐시스터스가 신중하게 개척하고 다진 과점 체계를 뒤흔들었다. 오펙 회원국은 자국의 원유를 통제하면서 세븐시스터스 금고의 오일머니를 자국의 금고로 가져 왔다. 서방은 중동산 석유에 대한 의존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이런 우려는 향후 50년간 서방 외교정책에서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세븐시스터스 통제권 바깥에서 매매되는 석유는 갈 수록 늘었고, 이는 마바나프트와 필리프브라더스 같은 원자재 중개 업체의 무대가 점점 넓어졌다는 뜻이다. 게다가 세븐시스터스는 시장 점유율이 갈수록 낮아져 유가 결정권까지 내놓아야 했다. 대신에 매 도 측과 매수 측의 입장이 크게 대립하는 경쟁 시장에서 유가가 결정 됐다. 석유 시장의 왕관은 자연스럽게 원자재 중개 업체로 넘어갔다.
- 이제 밀, 커피, 구리 등 여타 원자재 시장과 석유 시장이 서로 닮기 시작했다. 기존 원자재 시장에서 업체의 역할은 중간상이자 국제무역의 흐름을 돕는 조력자였다. 또한 가격 급등은 막대한 이익을 거 둘 기회와 같다는 뜻이었다. 필리프브라더스 같은 전통적 업체는 돈 냄새 하나만은 기막히게 맡았다. 수십 년간 금속 거래로 벌어들인 돈 보다 석유가 더 중요한 수익원이 될 것을 안 것이다. 심지어 필리프브 라더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 영역을 곡물과 커피, 설탕 중개로까 지 확대했다.
다른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의 '곡물 대탈취' 사건으로 한몫 크게 챙긴 곡물 중개 업체도 다른 원자재 시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 했다. 카길은 1972년 금속 중개 업체 시테넌트선스앤드코C. Tennant, Sons & Co. 를 595만 달러에 인수해 금속 중개 시장에 입성했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카길은 철강과 석유에까지 손을 댔다. 그렇게 에너지, 금속, 곡물 세 부문을 동시에 거래하는 역량을 갖춘 최초의 국제적인 원자재 중개 업체가 탄생했다.
석유가 가져온 효과는 또 있었다. 원자재 중개 업체를 권력에 더 욱 가까이 데려다줬다. 정부는 금속, 광물, 곡물을 전략적 민감성이 큰 자원이라 '종종 생각했다. 하지만 석유는 차원이 달랐다. 석유는 워낙 액수가 크기에 공급자, 트레이더, 소비자 모두의 이해관계가 첨 예하게 얽힌다. 산유국은 오일머니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한 반면, 서방 정부는 석유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길 원했다. 이 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원자재 중개 업체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원자재 중개 업체의 한 손에는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의 산유국 위정자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서방 정부가 있었다.
그렇다면 서방에 공급할 석유는 어디서 가져올까? 이 질문에 답 할 이는 국제금융과 세계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원자재 중개 업체뿐 이다. 물론 그 '영업 비밀'을 순순히 털어놓을 리 없다. 두 번의 오일 쇼크가 덮친 1970년대 고유가 시절에 필리프브라더스의 고위 임원을 지낸 어떤 이는 "우리가 뭣 하러 꿀단지로 벌을 데려가겠어요?"라고 반문했다.
"그냥, 세계에서 석유를 사서 세계에 석유를 공급한다고 치죠.”
- 창업 이후 리치는 20년간 원자재 중개 산업을 호령할 뿐 아니라, 1980~1990년대 원자재 트레이더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 된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마크리치앤드코는 훗날 두 곳의 업체를 낳는다. 바로 글 렌코어와 트라피구라다. 어찌 보면 마크리치앤드코는 필리프브라더스 '왕조'의 방계로 출발해 원자재 중개 산업의 황제로 군림한 셈이다.
어찌 보면 리치는 필리프브라더스의 가장 이상적인 아웃풋이었다.
그는 영리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데다 세상 물정에도 밝았고, 매력적인 성품에 워커홀릭이었다. 라이벌마저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쪽에서의 성공 비결은 추세를 포착하는 능력이에요. 리치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추세를 빨리 포착하고 읽습니다."
다만 필리프브라더스와 리치는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리치가 보기에 필리프브라더스는 너무나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이었다. 반 대로 필리프브라더스가 보기에 리치는 지나치게 적극적이었고 위험 앞에 쓸데없이 용감했다. 몇 년 후 리치는 회사 내 어떤 트레이더에게 자신의 사업 철학을 들려준 적이 있다. 칼을 꺼내더니 칼날 위에 자신 의 손가락을 똑바로 세우면서 "트레이더로 일하다 보면, 이렇게 칼날 위를 걷는 식의 상황이 많을 거야. 잘못된 방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게" 라고 말한 것이다.
- 1979년 2월 1일, 비행기 한 대가 이란 테헤란에 착륙했다. 눈처럼 하얀 수염에 검은색 긴 겉옷을 입은 노인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남 자승무원의 부축을 받아 조심히 걸음을 내딛은 그 노인이 바로 아야 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Kuhollah Khomeini다. 15년간의 망명 생활후 호메이니의 귀국은 이란혁명의 정점이자, 세계 석유 시장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메이니는 쩌렁쩌렁 단호한 목 소리로 지지층에게 "우리의 승리가 코앞입니다. 하지만 이건 첫 번째 단계일 뿐입니다"라고 선언했다. 1차 오일쇼크에서 나온 오일머니로 호화판 파티를 즐긴 것으로 악명 높았던 이란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Mohammad Reza Pahlavi는 호메이니 귀국 몇 주 전에, 휴가를 핑계 로 이란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석유 시장에 이란혁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마디로 초강력 벼 락이었다. 이란은 오펙 내 원유 생산량 2위였다. 호메이니가 귀국하 기 몇 개월 전부터 석유 위기론은 이미 무르익었다. 1978년 초부터 이란 남동부 지역에서 석유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연초 550만 배 럴을 맴돌던 이란의 일일 원유 생산량은 연말엔 바닥 수준으로 급감 했다.
이란혁명이 석유 시장의 모든 이에게 똑같은 영향을 미친 건 아 니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이었다. 이란혁명전까 지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은 이란과의 계약을 통해 다른 정유사에까지 공급할 정도로 원유를 충분히 확보했었다. 하지만 호메이니 세력은 브리티시페트롤리엄 주재 직원을 강제 추방했고, 이란 내 브리티시페 트롤리엄의 모든 자산은 이란 소유가 됐다.
하루아침에 석유 공급이 완전히 끊긴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은 자 신들의 정유 공장에 필요한 석유마저도 남에게 사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현상은 도미노 효과를 가져왔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을 포함해 이란산 원유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 정유사에도 위기가 왔고, 미국의 일부 정유사까지 위기에 휘말렸다.
이란의 감산을 메우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에 나섰지만 1979~1980년 내내 오펙 석유 공시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배럴당 달러가 28달러까지 치솟았다. 아무리 올라도 공시가는 공시가일 뿐, 실제 거래 가격은 훨씬 높았다. 지급과 인도가 계약 성립과 동시에 이 뤄지는 스폿 시장에서의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이상이었고, 심지어 50달러까지 거래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불과 몇 해 전 유가가 10년 연속 배럴당 2달러 선이었는데, 그때 기준으로는 마치 외계 문명의 숫자처럼 보였을 법한 가격이었다.
세븐시스터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석유 시장의 새로운 주인은 리치와 데우스 같은 트레이더였다. 여전히 세계는 목마른 사슴마냥 석유를 갈망했다. 하룻밤 사이 이란의 석유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를 지켜본 석유 업체는 매우 절박해졌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고, 원산 지를 따지는 것은 정말로 한가한 소리였다.
-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해엔가 소련에 10억 달러 어치의 곡물을 수출하던 이들이 이제 유가까지 통제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정치계가 상황을 파악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원자재 중 개 업체의 영향력에 대해 정치계는 어떤 대응을 할지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정치계가 고심 끝에 꺼낸 카드는 투명성을 높이는 조치였다. 미 국 농무부는 국제 곡물 시장의 수급 추정치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국 제에너지기구 IEA도 국제 석유 시장의 수급 추정치를 발표하기 시작했 다. 이 두 조직이 발표하는 수급 예상 보고서는 오늘날에도 원자재 중 개 업체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지표이긴 하다.
- 하지만 정치계는 정작 원자재 중개 업체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일에는 멍청했다. 1979년, 주요 7개국정상회담 G7, Group of Seven Nations 에 참석한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영국, 캐나다, 미국 정상은 석유 중개 업체와 오펙 회원국을 향해 스폿 현물시장 거래를 줄이라 촉구함과 동시에 '국제 석유거래 등록제' 도입을 고려했다. 이는 원 자재 중개 업체를 하나의 세력으로 받아들이는 사상 첫 시도임에'만' 의미가 있다. 시장 규제 노력의 성적표는 옹색했다. 가시적 성과가 전혀 없었고, 화려한 베일로 가려진 로테르담 '하우스'는 연중무휴 손님 으로 북적였다.
- 10년간의 지각변동을 겪은 석유 시장은 이런 근본적인 변화로 인 해 에너지에 대한 세상의 접근법을 다시 설정했다. 예전에는 세븐시 스터스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를 사실상 식민지 유전으로 거느리 며 석유 계약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제 석유 시장은 세븐시스터스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됐고, 세븐시스터스의 자리는 리치 같은 트레이더가 차지했다.
- 새로이 자리를 차지한 트레이더들은 지켜야 할 역사나 평판도 없었으니 도덕심까지 버릴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현대 세계의 지정학적·경제적 혁명을 촉진했다. 산유국은 자국 원유에 대 한 통제력을 되찾았고, 오일머니는 국제금융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 다. 그리고 석유국가가 국제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 고 유가는 자유의 몸이 됐다.
이제 런던이나 뉴욕에 있는 석유 메이저가 미국과 유럽 정부와의 우정 속에 품위 있게 유가를 결정하던 시대는 끝났다. 무한 경쟁의 글 혹은 도박장과 같은 로테르담 마켓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자 재 가격을 결정하는 권한을 이어받았다.
이런 변화는 단지 석유 시장에만 해당되진 않는다. 금본위제 폐지로 달러의 가치가 시장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시장 안에서 결정되기 시작했다. 서방 정부와 제도가 세계경제에 미치던 영향력이 모든 부 문에서 약화됐고, 더욱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만드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다. 한마디로 원자재 트레이더의 시대가 찾아왔다.
- 이른바 '제3세계'로 불리는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는 자원 국유화 바람을 타고 자국이 생산하는 원자재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했다. 이렇게 된 이상 힘과 권력의 이동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과거 미국과 유럽의 석유 메이저, 광산 업체가 가진 힘과 권력은 제3세계 정부로 옮겨 갔다. 이런 변화는 원자재 중개 업체에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 줬고, 그들은 그 기회를 냉큼 붙잡아 원 없이 달콤히 빨아먹었다. 게 다가 원자재 중개 업체는 강경한 목소리를 가진 많은 원자재 생산국 에 '귀한 손님'이 됐다. 그들 국가와 국제금융 시스템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천연자원이 유일한 수익원인 정부와 위정자에게 달러가 흘러갈 수 있게 도왔기 때문이다.
- 마크리치앤드코 그리고 훗날 사명을 바꾸고 배턴을 이어받은 글렌코어에 자메이카는 30년 가까이 돈줄 역할을 했다. 2000년대 중반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을 때, 글렌코어는 자메이카 정부와 맺었던 계약을 통해 시세에 절반 이하 가격으로 알루미나를 사들였다. 만약 자메이카 정부가 알루미나를 현물시장에 직접 팔았다면 2004~2006년 간 3억 7,000만 달러의 추가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33 즉, 글렌코어가 해당 거래로 거둬들인 이익이 그 정도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이에 대한 대가로 마크리치앤드코와 글렌코어가 자메이카에 거의 30년간 제공한 차관 액수는 무려 10억 달러에 가까웠다.
"우리에게 은행이란 글렌코어, 그 이전에는 마크리치앤드코뿐이 었죠. "
자메이카 공직인사처 수장을 지냈고, 마크리치앤드코와 협상에 자주 관여했던 칼턴 데이비스Carlton Davis의 회상이다.
마크리치앤드코와 자메이카와의 거래는 원자재 중개 업체가 새 로 획득한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최고의 교과서다. 그들 은 한 손엔 유례없는 막강한 재정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시장을 지배 함으로써 자메이카 같은 국가의 경제적 약점을 이용했다. 서방 석유 메이저와 광산 업체가 빠져나갔고, 규제와 감시가 거의 없었으며, 월 스트리트가 이머징 마켓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틈새에서 원자재 트레 이더들은 무제한의 자유를 즐기며 활개 쳤다
- 이머징 마켓에서 원자재 트레이더의 활약을 얕잡아보면 안 된다. 그저 이름처럼 원자재만 사고판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너무나 순진 한 것이다. 그들은 이머징 마켓에서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여신/수신 을 제외한 투자와 어음 및 증권 발행 등을 취급하는 금융기관_옮긴이) 업무와 사모 펀드(소수 투자자로부터 돈을 모아 주식, 채권, 기업,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비상장 펀드_옮긴이) 영역으로까지 업무를 확대했고, 하루는 나이지리아 정부 에 돈을 빌려주거나, 다음 날에는 페루의 앤초비Anchovy (청어목 멸치과 어 류_옮긴이) 가공 공장에 투자한다. 한마디로 자본차익 거래 세상에 모 든 발을 담근 존재다. 선진국의 돈을 이머징 마켓에 투자하는 과정에 서 그들은 매우 두둑한 차익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 차익이 나오는 곳은 온통 지뢰밭 수준인 위험한 곳이 다. 정치적 불안에 따른 위기가 끝나지 않았고, 외환 통제가 사사건건 업무를 방해하며, 부패하기까지 한 관료들의 형식주의가 걸림돌이 됐 다. 그래도 시기와 기회가 잘 맞으면 잭을 터뜨릴 수도 있었다. 그 예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선 투자 후 채 2~3년도 지나기 전에 차익을 실현했는데, 선진국에서 투자했다면 최소 10년 이상 걸려야 가능한 수준이었다.
원자재 중개 업체는 단지 무모한 도박을 한 것이 아니라 보상을 받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다. 원자재 중개 업체가 없다면 원 자재 상품을 수출할 수 없고, 당연히 귀중한 경화 Hard Currency (국제금융 상환관리를 받지 않고 금이나 각국 통화와 바로 교환 가능한 화폐. 미국 달러와 유로 화 등이 해당된다_옮긴이)를 손에 넣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리치처럼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이 강하고, 어디 누구와도 거래 가능하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트레이더에게 그 지뢰밭은 매우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사회주의 정부가 자원을 국유화한다면 트레이더는 언제든 그들이 원자재를 수출하도록 도울 준비가 됐다. 그러다 예전 정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면? 그들도 정치를 위해 돈이 필 요하다. 그들도 결국 원자재를 수출하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하다. 자메이카의 상황이 딱 이랬다.
자메이카에 사회주의 계열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일이다. 자메이카 는 자국의 보크사이트를 소련이 생산한 자동차로 맞바꾸는 계약을 맺 었다. 이들 계약에 마크리치앤드코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 물류와 운 송에 도움을 줬다. 그리고 사회주의 반대파가 새 정부를 구성했을 때 도 마크리치앤드코는 역할을 찾아냈다. 자국의 보크사이트와 미국산 밀과 분유를 교환할 때도 가교 역할을 맡았다.
- 석유 시장의 금융화는 새로운 거래 방식을 탄생시켰다. 모기지Mortgage와 정크본드Junk Bond 시장에서 혁명을 이끈 월스트리트는 1980년대 말이 되자 석유 시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금융 도구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면서 석유 시장 참여의 문턱을 낮췄다.
이때 석유 시장에 진입한 새로운 참가자로는 연기금 같은 기관투 자자를 포함하는 재무적 투자자(경영 대신 투자 수익이 목표인 투자자_옮긴 이), 항공사나 해운업체처럼 유가 상승에 대비할 보험이 필요했던 최종 이용자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원유 현물을 직접 볼 필요가 없었고, 명목상 거래만으로도 목적은 충분했다. 이렇게 가상으로 거래되는 석유는 '명목석유 Paper barrel'라는 이름을 얻는다.
명목석유 거래자의 경우 선물과 옵션 그리고 유사 금융 상품을 도구로 썼다. 하지만 그 상품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런던금속거래소에서는 구리와 주석의 선물거래가 이뤄졌다. 곡물 역시 시카고상품거래소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선물거 래가 이뤄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1697년부터 쌀을 매개로 한 선물거 래가 이뤄졌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 선물거래로 여겨진다. 하지만 석유부문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서야 형성됐다.
- 석유 선물시장의 탄생은 트레이더에게 이제껏 없었던 다양한 실험을 가능케 했다. 무엇보다 현물을 즉석에서 사고팔 필요가 없어졌 다. 몇 주, 몇 달, 몇 년 후에 인도·인수할 석유를 현재 시점에서 매매 할 수도 있었다. 트레이더는 실제 인수일보다 몇 개월 전에 계약을 사 고팔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만기일까지 계약을 유지해 현물 을 인수하지 않았고, 그 대신 인수하기로 한 현물과 같은 분량의 선물 을 매매했다. 무슨 뜻일까? 진짜 석유 없이 시장의 움직임만으로 돈 을 거는 게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 석유 거래에서 선물은 다양한 역할을 했다. 선물을 이용한 투기가 등장했는가 하면, 유가 변동에 따른 위험을 덜기 위해 선물을 활 용하는 이도 있었다. 예를 들어 1개월 후 매도해야 할 석유가 있다 치 자. 유가 상승을 기대하며 1개월을 보내는 대신 곧바로 선물 계약으 로 팔아 현 시가에 묶는 식이다. 이러면 가격이 상승하든 하락하든 큰 위험이 제거된다. 물론 유가가 떨어지면 선물 가치도 떨어진다. 하지 만 더 낮은 가격으로 선물 계약을 되살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대로 유가가 올라가면 계약상으로는 손해지만 현물 가치는 올라가 니 손실액과 같은 액수를 버는 셈이다.
옵션은 선물보다 더욱 유연하다. 옵션에서 트레이더는 수수료(프리미엄Premium)를 대가로 사전에 정해진 가격과 시기에 선물 계약을 사고 팔 선택권을 획득할 수 있지만 이는 권리 사항이다. 즉, 계약 이행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선물과 옵션을 통틀어 파생상품이라 하는데 그 가치가 기초자산, 즉 원자재의 가치에서 '파생하기 때문이다.
- 석유 선물 계약의 시작은 원자재 중개 업체에 날개를 달아 줬다. 현대에 들어 거래 위험을 회피할 길이 처음 열렸기 때문이다. 이젠 위험을 감내할 필요 없이 대규모 계약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현물과 금융 모두에 참여하는 원자재 중개 업체가 다양한 시도를 해 볼 무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비유하면 월스트리트 '도박장'이 석유 시장에 침투한 셈이다. 이 두 문화의 충돌에서 돈벼락을 맞을 준비가 가장 잘된 이가 바로 홀이었다.
- 예전에는 가격격차를 이용한 거래는 도박에 가까웠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격이 움직이기를 기대하며 피 말리는 시간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선물시장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판도는 바뀌었다. 1990년 봄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홀은 원유를 사들인 당일에 선물 계약을 이용해 6개월 후 석유 인도 가격을 고정 시킬 수 있었다. 이러면 6개월 후의 선물 가격이 현 공시가보다 더 높았으니 이익이 확보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석유 선물거래에도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인도 전까지 원 유를 저장할 공간을 찾는 일이었다. 당시 육상의 석유 탱크는 원유를 저장하기엔 그 수가 부족했다. 그런데 홀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30만 톤 이상의 초대형 원유운반선 VLCC를 빌려 탱크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원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을 바다에 정박시켜서 탱크로 쓰 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유조선이 정박한 일수대로 체선료(계약 기간을 넘겨 정박할 경우 청구되는 비용_옮긴이)를 계산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홀의 아이디어는 예전에도 시도됐었다. 하지만 독립 중개업체가 원유의 대규모 저장을 위해 시도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 홀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거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약 200만 배럴을 옮길 초대형 유조선 십여 척을 임 대했다. 그리고 홀은 원유를 '진공청소기처럼' 사들이는 동시에 원유 매입가보다 비싼 선물 계약을 매도했다. 즉, 이익을 고정시켰다.
이제 홀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원유를 팔 때까지 금융기관으 로부터 최소 6개월 동안 대출을 트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81년 인수, 합병을 통해 피브로에너지가 월스트리트의 유명 투자은행인 살로몬브라더스와 한 지붕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1980년대 거의 전반에 홀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유가가 정점이었을 때 홀이 사재기한 원유의 총 가치는 6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물량으로는 3,700만 배럴이 넘는 수준이었다. 홀이 원 유 구매에 엄청나게 돈을 쓰자, 평소에는 피브로에너지 업무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던 살로몬브라더스의 최고경영자 존 거트프런드John Gutfreund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홀은 재차 확신했다. 자신의 거래가 완벽함을 말이다. 선물시장에서 가격을 고 정시킨 덕분에 피브로에너지는 유가가 어떻게 바뀌든 무조건 돈을 벌 었다.
- 1960~1970년대 트레이더는 입사 후 우편실에 배치돼, 리치와 데우스 같은 위험 사냥꾼의 대담한 방식을 모방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렇게 성장한 이들 앞에 새로운 트레이더가 등장했다. 그 '주니어' 트레이더는 월스트리트 언어에 능통한 데다 수학의 귀재였다.
이제 트레이더는 두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먼저 '사업 개발이 전문 분야고 먼 외국까지 날아가 현지 '거물'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데 익숙한 부류다. 그 반대쪽에는 스스로를 '트레이더'라 부르는 일당이 있었다. 그들은 전화기, 컴퓨터 화면과 한 몸처럼 움직였고, 사업 개 발자가 맺은 현물거래를 기초로 금융 상품을 사고팔았다.
이제 월스트리트도 직접 석유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 기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자금과 석유 산업에서 쓰는 금융용어 에 대한 능통함이었다. 그렇게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같은 금융기 관은 신속하게 석유 중개 업체로 성장해 '월스트리트정유사Wall Street Refiner'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 주니어급 트레이더는 현물시장에서 획득한 정보를 활용해 금융계에서 초대형 도박을 감행했고, 반대로 새로운 종류의 현물시장 기 법을 구현하기 위해 금융계를 활용했다. 특히 피브로에너지의 홀, 골 드만삭스의 스티븐 셈리츠stephen Semlitz와 스티븐 헨델stephen Hendel, 모건스탠리의 닐 시어Neal Shear와 존 셔피로John Shapiro 같은 트레이더 는 석유 현물시장과 금융계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줄타기가 가능한 전 문가가 돼 이익을 창출했다.
기존 질서를 고수하던 원자재 중개 업체는 힘겹게 버텼지만 여의치 않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석유 시장은 돈 벌기가 아주 쉬웠고, 이는 새로운 선수를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유인책이 됐다. 물론 이젠 옛말이 됐다. 시장에서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졌다.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새로 진입한 월스트리트 금융기관과 경쟁이 가능한 원자재 중개 업체는 거의 없었다. 월스트리트 금융기관이 자사 트레이더에게 '총알을 막대하게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가장 전설 적인 원자재 중개 업체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얄궂게도 홀이 몸담았 던 필리프브라더스였다. 오랜 전통으로 존경받던 이 업체는 1980년 대 전반 영욕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월스트리 트의 한 은행으로부터 처절히 굴욕을 맛봤다. 당시 필리프브라더스는 이란혁명으로 석유 시장이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이자 그 틈을 공략해 1979년과 1980년에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그 두 해의 이익을 합치면 10억 달러를 상회했다.
- 1980년대 말, 중앙집권 체제의 소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간 삐걱거리던 소련 체제는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가 실시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 재건) 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공개) 프로그램 주도로 민간 기업에 서서 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87년, 소련은 사업가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에게 소기 업을 운영할 권리를 부여했는데, 해당 기업을 협동조합이라 불렀다. 이들 중에서 훗날 러시아의 신흥 재벌, 일명 올리가르히oligarch가 여 럿 탄생한다. 이 협동조합은 컴퓨터 제품 수입, 복권 운영, 공연 입장 권 판매처럼 행정부가 해소해 주지 못하는 필요를 충족시켰다. 또한 그들은 잉여 물자를 똥값으로 사들이고, 할당 예산을 집행할 방법을 찾아야 했던 관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무너지는 체제의 비능률 과 무능을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가끔은 이들 기업가가 어렵사리 원 자재를 확보하거나 원자재 수출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소련 기업가와 원자재 중개 업체가 만난다.
- 소련의 와해는 다수의 신생국뿐 아니라 올리가르히라는 이들도 탄생시켰다. 소련의 붕괴로 인해 세계지도는 다시 그려졌고, 이후 수 십 년간 세계 돈의 흐름도 바뀌었다.
한편 데이비드는 체르노이와의 약속을 성공적으로 지켰다. 두 남 자 모두 천문학적인 부자가 됐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영향력은 개인 적인 부를 훨씬 초월했다. 트랜스월드는 독립 경영을 하는 회사가 느 슨하게 연결된 형태의 거대한 복합기업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주니어 엘리트를 양성하는 일종의 교양 학교 역할까지 했다. 여기서 미래의 올리가르히가 나오는 셈이다. 체르노이가 2004년 한 인터뷰에서 자 랑스럽게 했던 말이 허풍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재계 엘리트 중 거의 절반이 내 제자입니다."
올리가르히의 '인큐베이터'는 트랜스월드 말고도 또 있었다.
- 1990년대에 글렌코어의 모스크바 지사장을 지낸 제노베세에 따르면, 글렌코어 역시도 여러 올리가르히를 후원했다면서 오늘날 러시아 갑 부 리스트에 포함된 이름을 쭉 나열했다.
“그들이 몇몇 회사를 소유하기 시작했고, 우린 그들에게 돈을 댔 습니다. "
원자재 중개 업체와 러시아의 지도층이 될 이들과의 만남은 거대 한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올리가르히에게 원자재 중개 업체는 사업 의 '멘토'이자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준 조력자였다. 자신의 상품을 수출하는 방법을 '친히' 보여 줬을 뿐 아니라 훗날 러시아 경제가 민영화됐을 때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자본을 미리 준비하도록 도와줬으니 그렇다.
올리가르히와 서방 금융계를 잇는 가교 역할도 원자재 중개 업체 의 몫이었다. 심지어 초기 올리가르히들은 가끔 조세피난처와 역외회 사(조세피난처에 설립되는 회사_옮긴이)를 이용하는 편법을 '최고 전문가'에 게 배울 수도 있었다. 원자재 중개 업체야 그런 수법을 수십 년 전부터 썼으니 말이다.
- 1960년대부터 소련은 석유와 설탕 맞교환으로 쿠바를 지원했다. 소련은 이런 구상무역을 통해 쿠 바 석유 수입량의 90퍼센트 이상을 책임졌고, 그것도 대부분은 쿠바 정부의 부담을 덜어 주려 보조금 포함 가격으로 수출했다. 한마디로 쿠바는 소련산 석유를 저렴하게 수입해 썼단 소리다. 이에 대해, 당시 세계 최대 설탕 수출국이던 쿠바는 설탕 수확량의 거의 대부분을 러시아에 수출했다. 이런 물물교환 방식은 정치적 측면에선 완벽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비논리적이었다. 소련의 석유는 지리적으로 유 럽의 정유 공장과 훨씬 더 가까웠고, 쿠바도 인접국에서 석유를 공급 받는 게 더 쉬울 수도 있었다. 설탕 교역도 똑같다.
- 1980년대 말 마크리치앤드코는 쿠바와 러시아 간 직접무역의 비효율성을 해소할 계획을 짰다. 한마디로 중개무역이었다. 즉, 마크리 치앤드코가 베네수엘라와 멕시코산 석유를 쿠바에 수출하고 대신에 러시아산 석유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지중해의 어딘가로 운송했다. 설 탕도 비슷했다. 쿠바의 설탕은 아메리카 대륙에 수출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의 설탕 수요는 쿠바보다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공급자가 충족 하면 그만이었다. 이러면 쿠바도 소련도 수백만 달러의 운송비 절약 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마크리치앤드코는? 당연히 그 거래의 수혜 자다. 해당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했던 어떤 사람에 따르면 마크리치앤드코는 단단히 '한몫' 챙겼다고 한다.
- 소련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1990년대는 창조적인 일부 원자재 중개 업체 입장에선 기회의 시간이었을지언정 업계 전체엔 힘든 시기 였다. 세계경제는 쭉 뻗은 포장도로가 아닌 비포장 자갈길을 달렸고, 경제가 그 모양이니 원자재 가격은 약세였다. 한마디로 업계는 큰돈 을 만지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원자재 중개 업체의 투자금이 많이 몰 린 몇몇 국가에 경제 위기가 연이어 들이닥쳤다. 1994년 멕시코를 필 두로 1997년부터는 동남아시아가 경제 위기에 휩싸였고 1998년에는 러시아가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 사태에 직면했으며, 이듬해엔 브라 질이 재정 위기의 수렁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도 원자재 중개 업체 운 영비는 줄어들 줄 몰랐다. 왜 그랬을까?
1990년대 원자재 중개 시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바로 연결성과 금융화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 연결되고 금융화되는 업계 환경에서는 틈새시장 한 곳만을 공략하는 것으로는 이익을 올리 기 충분하지 않았다. 원자재 중개 업체는 세상 모든 곳에 진출해야만 했는데, 즉 더 많은 지사를 설립하고 직원을 뽑아야 한다는 의미였으니 운영비는 더욱 늘어났다.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자재 중개 업체의 자산 투자 실적도 좋지 못했다. 그동안 유전, 정유 공장, 축산 농장, 광산, 제련소 같은 자산 에 투자했는데, 이머징 마켓의 위기로 원자재 수요가 직격탄을 맞은 탓이었다. 가령 1998년 평균 유가는 배럴당 고작 12달러였는데, 이는 이란혁명 이후 최저점이었다. 원자재 중개 시장에서 이 시기는 '찰스 다윈' 식으로 표현하면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승자 독식의 시간 이었다. 강한 자는 더욱 강해지고 약한 자는 더욱 약해지는 기간이기도 했다.
- 엔론의 몰락은 원자재 중개 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당시 원자재 중개 산업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이었고, 그때는 가 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시기기도 했다. 엔론 제국의 붕괴는 바로 그 시대의 정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 구공산권의 잔해 속에서 만들어진 원자재 중개 산업의 윤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2000년대 초반이 되자 몇몇 거대 원자재 중개 업체는 석유와 금속, 곡물 중개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장악했으며 이 구도는 지금까지 놀랄 정도로 변화가 없다. 가령 곡물 부문에서는 콘티넨탈을 흡수 합병한 카길이 미국 곡물 전체 수출의 약 40퍼센트를차지 중이다.
석유 부문에서는 비톨이 최대 업체의 대관식을 치렀고, 금속 부 문에서는 글렌코어가 그 역할을 했다. 트라피구라는 고속 성장하면서 그들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하지만 각축전이 한창인 분야가 한 곳 있 었다. 엔론이 사라진 북미의 천연가스와 전기 시장이었다. 월스트리 트와 원자재 중개 업체는 이 자리를 차지하려 온갖 싸움을 벌인다. 원자재 중개 업체는 무모하고 위험한 거래로 얼룩진 1990년대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공산주의 정권의 쿠바에서부터 신속하게 성장하는 동유럽 자본주의 국가, 온갖 종류의 독재 정권과 실패한 국가까지 세상 곳곳 온갖 위험천만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1990년대를 관 통했던 잔인한 통합의 시간을 버틴 업체에 주어진 열매는 달콤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업체는 원자재 거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국제화 된 주역으로 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겐 풍요와 부의 새 시대로 들어가는 입 장권이 주어진다. 천연자원을 빨아들이는 새로운 블랙홀이 서서히 정 체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렇게 원자재 중개 산업은 빅뱅의 시간으 로 들어간다. 그 빅뱅의 근원지는 바로 중국이었다.
- 한 국가가 소비하는 원자재의 양은 크게 두 가지 변수와 관계가 있다. 바로 전체 인구와 국민소득이다. 다만 이 요소와 원자재 수요와의 관계는 완벽히 비례하지 않는다. 가령 1인당 국내총생산이 4,000 달러 이하인 상대적 빈국의 경우, 국민은 소득 대부분을 의식주에 소 비한다. 정부는 발전소와 철도처럼 원자재 집약적인 공공기반 시설 에 대대적으로 투자할 여력이 없다. 빈국이 신속하게 성장하더라도 원자재 수요가 곧바로 크게 늘어나지 않는 이유다.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1만 8,000~2만 달러를 넘어서면 각 가정은 더 좋은 교육, 건강, 오락, 여가 등 원자재 소요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서비스를 많이 소비한다. 게다가 공공 기반시설이 대부분 완비된 상태이므로 원자재 집약적 프로젝트를 추진할 필요가 크지 않다.
이 극단 사이에 바로 원자재 수요의 최적 지점, 이른바 원자재 수 요가 경제성장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스위트 스폿sweet Spot'(모든 분야가 최적화된 상태_옮긴이)이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으로 따지면 약 4,000달 러를 초과한 상태다. 이 상황에서 국가의 산업화·공업화·도시화가 시 작되며, 추가적 경제성장과 추가 원자재 수요 사이의 강력한 상관관 계가 형성된다.
- 중국이 원자재 스위트 스폿에 진입한 가장 중요한 국가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국가는 아니었다. 북미,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 을 제외한 세계 많은 국가가 모두 원자재 수요가 급증하는 경제 발전 단계에 도달했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이고 자원 집약적인 경제성장은 경제학자들이 원자재 '슈퍼사이클 supercycle'(공급을 초월하는 수요를 창출할 때 나타나는 장기적인 가격 상승 트렌드_옮긴이)이라 부르는 현상을 초래했다. 원자재 가격이 과거 가격 트렌드를 훨씬 뛰어넘고, 이런 상승세가 통상적 경기변동보다 더욱 오래 지속되는데, 때로는 수십 년간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흉작이나 광산 폐쇄 같은 단발성 공급충격(재화나 서비스의 수요나 공 급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변동하는 현상_옮긴이)으로 생기는 사이클은 대개 단 기간에 해소된다. 가격 상승이 공급 확대를 부추기는 대신에 수요를 억제하면서 다시 균형을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요 증가에서 비롯한 슈퍼사이클은 세계경제의 급속한 산업화·공업화·도시화와 맞물리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근대 첫 번 째 원자재 슈퍼사이클은 19세기 산업혁명에 의해, 두 번째 슈퍼사이클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의 군비 재무장으로 촉발됐다. 그리고 세 번째 슈퍼사이클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유럽과 일본의 전후 복구와 팍스 아메리카나에 따른 경제 호황의 결과로 나타났다. 2000년과 거의 때를 같이한 네 번째 슈퍼사이클은 중국과 여타 신흥 경제국이 원자재 스위트 스폿에 진입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번 슈퍼사이클은 국제 원자재 시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꿨 다. 1998~2018년까지 7대 이머징 마켓(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으로 구 성되는 브릭스BRICS 4개국과 인도네시아, 멕시코, 튀르키예)은 세계 금속 소비 증 가의 92퍼센트, 에너지 소비 증가의 67퍼센트, 식량 소비 증가의 39 퍼센트를 각각 차지했다.
- 1998년 석탄 시장은 더욱 침체에 접어들었는데, 글라센버그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였다. 톤당 석탄 가격이 1980년대 중반 이래 최저 수준이었고, 20 대부분이 돈을 잃으면서 죽는소리를 했다. 하지만 글 라센버그는 석탄 가격이 이제 상승할 일만 남았다고 확신했다. 하지 만 당시 석탄 산업에는 선물시장이 없던 터라 가격 상승에 돈을 걸방 법이 없었다. 방법은 딱 하나, 광산 인수였다. 이후 4년에 걸쳐 그는 호주와 남아공에서 12곳이 넘는 광산을 매입했고 콜롬비아에서도 광산을 인수했다.
1990년대 말, 글렌코어는 발전용 석탄의 세계 최대 판매자가 됐고 2000년 한 해에만 4,850만 톤을 거래했다. 해상 발전용 석탄 시장 에서 거래되는 물량의 6분의 1을 글렌코어가 책임졌다는 뜻이다. 27 여기에 예상치 못한 엄청난 호재도 있었다. 글라센버그가 석탄 광산 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을 당시, 중국 경제의 호황 가능성은 전혀 계산 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2000년 들어 중국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글라센버그의 투자는 이내 '돈 복사기'가 됐다. 심지어 중국 이라는 엄청난 호재가 나타나기 전에도 석탄 광산 투자는 매우 성공 적이었는데, 이 덕분에 글라센버그는 회사 내 여러 라이벌을 전부 제 치고 단숨에 맨 앞으로 치고 나간다.
- 이라크의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머큐리아와 군보르에너지의 성공 신화는 유가 급등이 세계경제의 윤곽을 어떻게 다 시 그리는지를 명확히 보여 줬다. 유가 강세는 산유국 독재자에게 칼 자루를 쥐어 줬고, 그들의 석유를 시장에 공급하는 원자재 중개 업체 의 위상을 드높였다.
하지만 원자재 호황이 커짐에 따라 구소련의 자원만으로는 부족 해졌다. 자연히 원자재 중개 업체는 새로운 변방으로 눈을 돌렸다. 세계 최대의 원자재 공급처 중 하나이자 일하기 가장 힘든 대륙 말이다. 바로 아프리카다.
- 1960~1970년대 황금기가 그랬듯 원자재는 또다시 아프리카 경제에 축복이 됐다. 2001~2011년간 원자재가 강세장을 잇던 10년간, 사하 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경제는 덩치가 네 배로 커졌다.'
원자재 판매에 따른 달러 유입은 당대 아프리카 지도자의 금고를 꽉 채워 줬고, 그들이 노골적으로 부패를 저지르든 인기가 없든 기존 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원자재 중개 업체는 국제금융 시스템에서 새로운 역할을 자청했다. 아프리카 정부와 정치 인이 서방 자본에 접근하도록 하는 가교 역할이었다. 그렇게 아프리 카의 많은 기득권 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방 금융 시스템을 통해 든든한 뒷주머니를 찼을 뿐 아니라, 원자재 거래의 세부 사항이 타결 된 날이면 런던이나 파리 유흥가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다.
- 세계경제엔 중국발 새로운 역학이 등장한다. 이머징 마켓 사이에서 서방을 거치지 않는 무역 흐름의 증가였다. 이러한 역학에 서도 원자재 중개 업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원자재 호황이 중국에 서 시작된 만큼 원자재 중개 업체가 아프리카에서 사들인 원자재 대 부분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는 너무나 뻔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 아 중국은 원자재 중개 업체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간다. 아프리카 에 대한 직접투자였다. 이로써 중국 투자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 다. 그리고 그 단계의 끝에서 중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수많은 지역에 서 가장 중요한 투자 세력에 포함됐다.
원자재 중개 업체 입장에서 아프리카에서의 사업은 어려움의 '결정판'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거래한다는 것은 잔인한 독재자, 부패한 정치인, 탐욕스러운 거물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을 헤쳐 가기 위해 원자재 중개 업체가 찾은 비장의 카드는 일종의 '외주' 였다. 각양각색의 대리인, 해결사, 컨설턴트에게 현지 유력 인사와의 관계 맺기를 맡겼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해결사' 중에 엘리 칼 릴Ely Calil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인맥은 나이지리아에서부터 콩고민주공화국, 세네갈에서부터 차드까지 뻗어 있었다.
이런 해결사의 역할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했다. 석유와 금속 을 계속 거래하기 위해 필요한 뇌물 등의 검은돈을 처리하면서, 원자 재 중개 업체와의 연관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원자재 중개 업체가 검은돈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미리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어 놓기 위함이었다.
-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성숙 단계에 이르렀어도 아프리카엔 또 다른 기회가 있었다. 원자재 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아프리카 대륙 전반 에 경제성장이 촉진되면서 자동차, 텔레비전, 휴대전화를 구입할 경 제적 여력을 갖춘 중산층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세계 원자 재 거래에서 아프리카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된다.
그동안 원자재 중개 업체는 원자재를 구해서 수출하기 위해서만 아프리카로 달려왔다. 이제까지 아프리카가 하던 역할 그대로였다. 업계 용어로 말하면 아프리카 사업은 '출발지' 사업이었다. 아프리카 는 세계시장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원산지라는 뜻이다. 금은 남아공, 커피는 에티오피아, 원유는 나이지리아, 카카오는 코트디부아르, 구 리는 잠비아에서 출발하는 식이다.
하지만 출발지 사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에 '목적지' 사업도 아프리카에 등장한다. 아프리카 경제가 활발해짐에 따라 아프리카 내부의 원자재 수요도 늘어나 새로운 수요가 공급망을 재편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가 케냐 발전소에 공급됐고, 미국산 밀이 탄 자니아 제분소에 도착했으며, 페루산 구리가 나미비아에 등장하고, 태국산 쌀이 나이지리아의 주식이 되는 식이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가 목적지 사업의 매력적인 무대가 됐던 이유 하나는 선진국에 비해 품질 규제가 턱없이 부실했던 까닭이었다. 즉, 서방에서는 기준 이하인 제품을 '털어 낼' 시장이 생겼다는 뜻이다. 경 유를 예로 들어 보자. 유럽에서는 경유의 유황 함량이 10피피엠 ppm, Parts Per Million을 초과할 경우 판매가 금지된다. 하지만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유황 함량이 최대 1만 피피엠이 넘는 경유도 판매 가능하다. 중남미와 러시아의 후진적인 정유 공장에서 저급한 석유 제품이 원자재 중개 업체를 통해 아프리카에 공급되는 이유다.
구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구리 광석 대부분엔 독성 물질인 비소 Arsenic가 소량 존재한다. 많은 국가에서는 구리 제련에서 배출되는 비 소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엄격한 규제를 도입했다. 일례로 중국 정부 는 비소 함량이 0.5퍼센트를 초과하는 구리 광석의 수입을 금지 중이 다. 하지만 나미비아에는 관련 규제가 일절 없다. 아프리카의 이런 사 정에 통달한 원자재 중개 업체 입장에서 아프리카는 유익한 '목적지' 인 셈이다.
2000년대 중반 아프리카는 모두가 기피하는 원자재를 털어 버리 는 시장과도 같았다. 최후의 공급처이자 마지막 소비자인 셈이다. 그 리고 최악의 양심 불량자에겐 쓰레기장과 같았다.
- 원자재 중개 산업에서 투기는 언제나 주요 사업이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많은 원자재 중개 업체는 가격 등락에 대한 도박이 사업의 일부임을 강하게 부인한다. 원자재 중개 업체 중에서도 투기 의존성이 가장 큰 포트폴리오를 따르는 쪽은 곡물이다. 그도 당연한 게 곡물 중개 업체는 19세기에 설립된 시카고 선물시장에서 거래를 했던 베테랑이니 말이다. 그들은 석유 같은 여타 원자재 선물시장이 등장 하기 수십 년 전부터 선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곡물 중개 시장의 독특한 구조도 곡물 중개 업체를 선물의 귀재 로 만드는 데에 한몫했다. 석유나 금속 중개 시장에서는 소수의 큰손 이 있다. 산유국의 정부 기관, 석유 메이저, 대형 광산 업체 등이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 큰손과 대규모로 유리한 계약을 맺는 게 성공의 열쇠라는 뜻이다. 또한 트레이더라고 대단한 정보의 우위를 저절로 얻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 반면 곡물 중개 업체는? 수많은 농민과 개별 거래를 한다. 개별거래를 해야 하니 업무 강도가 높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가 되기도 한 다. 수많은 농민과 거래함으로써 귀중한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빅데 이터'라는 개념이 유행하기 오래전부터 곡물 중개 업체는 수많은 곡 물 재배자로부터 빅데이터를 얻었고, 이를 통해 시장 상황을 실시간 으로 통찰했다. 이렇게 곡물 트레이더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 고 시장 동향에 돈을 걸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농무부가 발표 하는 세계 주요 농작물에 대한 월간 정보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해 줬다.
대부분의 원자재 중개 업체엔 회삿돈으로 투기하는 업무, 이른 바 자기자본거래(수익 창출을 위해 금융기관이 자신의 돈으로 금융 상품을 거래하 는 것_옮긴이)만 전담하는 트레이더가 있다. 현물거래가 목적이 아니라 이익 자체가 목적이다. 곡물 트레이더로 루이드레퓌스를 거쳐 노블그룹 최고경영자에까지 올랐고, 훗날 엥겔하트코모디티스트레이딩파트 너스Engelhart Commodities Trading Partners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를 지낸 브라질 출신의 히카르두 레이만 Ricardo Leiman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몸담던 모든 회사는 자기자본거래로 대부분의 이익을 냈습 니다.
다만 오해하지 마라. 2008~2009년 사이 원자재 가격이 급등락 했던 시기에 곡물 중개 업체만이 돈을 번 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업체가 투기를 했다. 자기자본거래 전담 부서를 운 영하는 업체도 있었고, 자신이 확보한 원자재에 내재된 위험을 언제 어떻게 헤지할지 선택하는 업체도 있었다. 예상대로 가격이 움직일 경우 차익을 실현하도록 현물시장 거래를 하는 업체도 있었다. 콩코 드리소시스Concord Resources의 최고경영자이자 금속 트레이더인 한센 은 “우리는 투기자입니다”라고 말했다.
- 슈퍼사이클의 정점에서 원자재 중개 업체는 막대한 이익을 쓸어담았다. 당시 곡물 중개에서 독보적인 일인자였던 카길이 그 완벽한 사례였다. 2000년 카길의 순이익은 5억 달러에 약간 못 미쳤다. 그런 데 슈퍼사이클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2003년, 카길의 순이익은 역사 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고 2년 뒤에는 20억 달러 고지마저 뛰어넘었다. 제네바 트레이더가 세계경제 침체에 돈을 걸었던 2008 년에는 이익이 무려 40억 달러에 근접하는 신기원이 열렸다.
카길뿐 아니라 원자재 중개 산업 전반에서 원자재 슈퍼사이클 시 기엔 돈뭉치 굴러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000~2011년까지 12 년간, 석유와 금속과 곡물 각 부문의 세계 최대 중개 업체(비톨, 글렌코 어, 카길)의 순이익을 전부 합치면 763억 달러에 이르렀다. 아주 경이 로운 액수였고 1990년대 그들이 번 이익의 10배에 해당한다." 쉽게 비교하면 애플이나 코카콜라의 같은 기간 총 누적 이익보다 더 많았고, 보잉이나 골드만삭스 같은 '주식회사 미국의 거인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였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도 슈퍼사이클은 현대 역사를 통틀어 원자 재 중개 산업 입장에선 가장 행복한 시절임이 분명했다. 필리프브라 더스와 마크리치앤드코가 석유 중개에서, 카길과 콘티넨탈이 곡물 중 개에서 각각 수억 달러를 긁어모은 1970년대의 이익을 훨씬 초월했 다. 그 많은 돈은 극소수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카길은 여전히 카길과 맥밀런 두 집안이 지분을 100퍼센트 소유 한 가족회사다. 이 두 집안을 합쳐 억만장자가 14명이 나왔으니 세계 의 왕족을 제외하고 억만장자 가족 수로는 세계 1위였다. 19 글렌코어, 비톨, 트라피구라도 비슷했다. 이들 업체 모두 직원들이 지분을 소유 했는데 이는 몇몇 고위급이 고스란히 갑부가 됐다는 뜻이다.
- 또한 글렌코어의 기업공개는 그동안 가려진 세계경제의 한 축을 대중에게 노출하는 계기가 됐다. 글렌코어의 기업공개 전까지 원자재 중개 업체의 세계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영역이었다. 분명 그들은 우 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원자재인 에너지와 금속과 식량을 공급했고, 세계 70억 명의 인구 가운데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은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게 사실이다. 즉, 글렌코어의 사업설명서는 자신의 업계 전 체를 환하게 밝히는 전등 스위치라 봐도 된다.
물론 글렌코어가 자신들의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 기업공개를 하 진 않았겠지만 지난 수십 년간 굳이 무대로 나오지 않으려 온갖 노력 을 했던 글렌코어는 무대로 나왔고, 그렇게 글렌코어는 물론이고 원자재 중개 산업 전체에 대중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렇게 언론부터 사회운동가, 원자재 생산 업체와 정부 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자재 중개 업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여기에 글렌코어의 실적은 업계 규모와 수익을 가늠할 기준이 될 터였다. 이 제 원자재 중개 업체는 자신이 행사한 막강한 자금력과 금융 권력을 예전처럼 마음대로 휘두를 순 없었다. 또한 원자재 중개 업체가 외부 로부터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의 시작이기도 했다.
예전의 원자재 중개 업체는 이익의 원천인 동시에 경영상 방해가 될 장기적 요소를 차단하는 게 가능했다. '정보'라는 경쟁 우위가 있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나 신속하고 저렴하게 시장 정보를 얻는게 가능해졌고, 정보의 가용성도 갈수록 커졌다. 과거에 누린 정보 우위의 강점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절차와 정보가 투명해지는 세 상에서 예전처럼 부패나 뇌물을 통해 돈을 벌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주요 원자재 공급망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광산 업체와 석유 메이저 가 인수, 합병을 거쳐 재탄생하면서 원자재 중개 업체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원자재 중개 업체의 전통적인 포트폴리오는 사실 단순하다. 특정 지역에서 원자재를 구입해 다른 지역에다 웃돈을 붙여 파는 차익 거 래였다. 그 방법도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다.
- 분명 대부분의 트레이더는 영국과 미국의 여권으로 세계를 돌아다니고, 유럽과 미국에 근거지를 두고 일한다. 하지만 그들이 반 드시 서방의 이해관계에 발맞춰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다. 비톨이 리 비아 반군에 10억 달러가 넘는 연료유를 공급했던 상황에서는 그들이 자국의 외교 방향과 같이 나아간 것은 확실했다. 이번 카자흐스탄 같은 경우에서는 서방 정부의 묵인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원자재 중개 업체의 거래는 서방 정책과 대치했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르드 지방정부가 독립 국 민투표를 강행한 배경에는 원자재 중개 업체의 돈이 있었다." 세계 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같은 서방 주도의 국제기구가 차드에 엄격한 조 건을 걸었음에도 글렌코어는 차드 정권의 지갑을 자처했다. 러시아가 서방 정책을 거의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도 원자재 중개 업체의 돈이 있었다. 그 돈은 로스네프트와 푸틴이 서방 제재의 파고를 무사히 헤쳐 나오도록 도왔다.
그렇게 서방의 정치인과 규제 당국은 원자재 중개 업체가 국제금 융과 세계 정치 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배역을 소화한다는 사실을 인 식하기 시작했다. 또한 원자재 중개 업체의 경영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턱없이 부실했다는 사실도 알기 시작했다. 원자재 중개 업체가 전례 없는 막강한 금융 권력을 쌓았음에도 그동안 그들의 경영은 규제 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었음이 사실이었다.
2007~2011년 원자재 가격이 급등락을 반복하며 요동친 후 선물 시장에 더욱 엄격한 규제가 추진됐다. 하지만 현물시장에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규제자가 그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해당 문제에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할 법적 권한이나 정치적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 이다. 유의미하게 대응할 만한 자원도 없었다.
물론 규제자가 공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원자재 중개 업체의 약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비교적 소수 은행의 신용에 의존한다는 사 실이다. 무엇보다도 미국 달러로 채운 금고에 대한 접근성이 그들의 생명줄이다.
- 그렇다면 우리에겐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미국 달러의 돈줄을 조이면 무슨 일이 생길까?
- 미국 정부가 비엔피파리바에 제기한 소송은 미국 정부의 변화한 대외 정책을 명확히 보인 계기였다. 자국 외교에 반하는 행동이면 기 소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비록 그 행동이 우방의 대기업을 공격 할지라도 예외는 없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미국 입장에서 그의 지를 관철시킬 무기는 미국 달러였다. 미국 달러가 국제금융에서 차 지하는 위상 하나만으로도 미국 정부 입장에선 강력한 무기를 가진 셈이다. 비엔피파리바도 그랬듯 미국 달러 시스템에서 벗어나 생존할 은행은 세상에 없다. 세계 모든 은행은 사실상 미국의 법 집행의 연장 선에서 첨병 역할을 했고, 미국 정책에 역행하는 행동을 미리 차단하는데 혈안이 됐다.
- 미국 법무부 장관 에릭 홀더 Eric Holder는 비엔피파리바와 합의한 벌금에 대해 발표하면서 "이번 소송 결과는 미국 안에서 사업하는 세 계 모든 국가의 모든 기관에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죠. 미국이 불법행위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그들은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어디서 불법적인 행위가 발각되든,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처 벌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세계 기업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이자, 미국인이 아닌 이가 저지른 불법행위를 외면하지 않고 엄단하겠다는 경고였다.
이처럼 미국의 선언은, 법망을 피해 나가는 데는 세계 최강이었던 원자재 중개 업체 입장에선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온 세상을 제집처럼 누비며 부패 관료와 거래하고도, 국제사회가 기피하 는 불량 국가와 손잡고도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않던 시대가 끝났다 는 신호였다.
다만 비엔피파리바가 받은 천문학적인 벌금은 원자재 중개 업체 에는 간접적 영향을 미쳤을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다른 은행에 거래 유지를 호소한 도팽의 노력은 먹혔고 트라피구라는 살아남았다. 하지 만 앞으로 닥칠 상황이 바뀌지 않음은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 자재 중개 업체도 미국 정부의 십자포화를 받을 뿐 아니라 업계 전체 에 짙은 먹구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사실 많은 원자재 중개 업체는 제재와 금수 조치를 위협이라기보다 기회로 여겼다. 금수 조치 대상 국가는 거래 상대방을 찾기 더욱 어려워지니, 그들과 거래할 방법을 찾은 원자재 중개 업체는 유리한 입장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겼다. 19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를 이유로 남아공에 석유 금수 조치가 내려졌을 때 리치와 데우스가 석유거 래로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 담은 것만 봐도 그랬다.
이처럼 금수 조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조치상의 허점을 노린 덕분이었다. 소수 국가만 금수 조치에 참여하는 상황이면, 제재를 받 지 않는 국가에 세운 자회사를 통해 거래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원자재 중개 업체의 거래 대부분은 어떤 국가의 영토도 아닌 바다, 즉 공해 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그들은 국제금융 시스템의 가장 불투 명한 영역에서 일했는데, 그쪽 사정도 공해와 비슷하다. 한번은 케이 맨제도의 유령회사를 이용했다가, 그다음에는 몰타의 유령회사를 이 용할 수도 있었고, 파나마에서 라이베리아나 마셜제도에 이르기까지 배의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이용할 국가도 차고 넘쳤다.
- 자재 중개 업체의 거래 대부분은 어떤 국가의 영토도 아닌 바다, 즉 공해 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그들은 국제금융 시스템의 가장 불투 명한 영역에서 일했는데, 그쪽 사정도 공해와 비슷하다. 한번은 케이 맨제도의 유령회사를 이용했다가, 그다음에는 몰타의 유령회사를 이 용할 수도 있었고, 파나마에서 라이베리아나 마셜제도에 이르기까지 배의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이용할 국가도 차고 넘쳤다.- 이제껏 테러범과 마약상이 도배했던 미국의 제재 리스트에 원자재 중개 업체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동맹의 이름 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은 글라센버그와 축구 경기를 함께 봤던 '알루미늄 올 리가르히' 데리파스카에게 제재를 내리면서 "데리파스카가 정부 관리 한 명을 돈으로 꼬드겼고, 한 사업가의 살해를 공모했으며 러시아의 조직범죄 집단과 관련 있다는 혐의가 의심된다"고 밝혔다. (물론 데리 파스카는 해당 혐의를 부인했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그다음 제재 후보는 글렌코어의 오랜 사업 파트너였던 다이아몬 드 상인 거틀러였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맺은 불투명하고 부패한 광산과 석유 거래' 혐의로 제재를 내린다. (거틀러 역시 해당 혐의를 부인했다)뿐만 아니라 로스네프트의 무역 부문 자회사 대표이자, 수많은 원자재 중개 업체의 연락책으로 일했던 디디에 카시미로 Didier Casimiro도 미국 정부의 제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미국의 목표물에 들어온 것은 원자재 중개 업체의 사업 파트너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자재 중개 업체 자체도 목 표물이라는 분위기가 뚜렷해졌다. 군보르에너지의 공동 창업자 팀첸 코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인해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됐다. 미국 재무부는 팀첸코를 푸틴의 최측근 중 한 명이라 밝히면서 “에너지 부문에서 팀첸코의 일은 푸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푸틴 은 군보르에너지에 투자했고 그곳 돈에도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 아직도 석유는 세계의 기축통화 가운데 하나고, 원자재 중개 업 체는 아직도 석유 시장을 지배 중이다. 갑작스레 석유를 원하지 않는 수요 절벽의 상황에서도, 그들은 시장에 뛰어들어 천덕꾸러기가 된 석유를 사들일 능력이 있다. 그들 말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석유 10 억 배럴을 누가 가져갈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으로서는 코로 나19 펜데믹으로 촉발된 저유가 트렌드에서 세계 석유 산업이 어떻게 회복할지 예상하는 것은 아직 이른 듯하다.
다만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 원자재 중개 업체가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엄청난 양의 석유를 사들여 쟁일 능력이 없었다 면 시장 상황이 어땠을까? 텍사스의 많은 석유 업체가 파산에 직면하 고, 더 많은 석유 노동자가 거리로 나앉았을 테다. 나이지리아와 앙골 라, 이라크는 숨이 막힐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을 것이다. 원자 재 중개 산업 전체가 유례없는 집중포화를 받는 건 사실이지만 2020 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원자재 중개 업체가 여전히 세계경제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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