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서 돈이 쏟아져 들어와 미국은 금리를 낮게 유지. 절약을 모르는 미국 소비자들은 빌린 돈으로 흥청망청 소비를 즐겼다. 머리좋은 월가 금융공학자들은 부동산과 관련된 기기묘묘한 상품을 만들어 놓고는 리스크를 줄였다며 희희낙락했다. 돈은 부동산으로 몰렸고, 시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경제에 공짜점심은 없는 법. 버블이 꺼지면서 발생한 것이 08년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 중국의 과도한 무역흑자와 미국의 적자라는 불균형이 위기를 낳은 것. 세계공장 중국의 WTO체제 등장. 이것이 바로 금융위기의 태동이 된 셈. 97년 우리나라 서민들의 삶을 할퀴었던 아시아 외환위기때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 위기의 원인이야 많지만 좀더 길게 세계 경제흐름을 추적하다 보면 역시 중국이라는 요인을 만나게 됨. 94년 1월 중국은 환율시스템을 개방. 정부고시 환율과 시장환율의 통합으로 위안화 환율은 달러당 5.8위안에서 8.7위안으로 뛰었다. 또 다른 위기의 태동이었다. 수출경쟁력이 높아진 중국상품은 세계시장을 파고 들었따.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이 상품이 먼저 밀려남. 이들 동남아 국가는 무역부문에서 적자를 보기 시작. 어설픈 자유주의 정책이 이들 국가의 위기를 자초. 달러 유입이 줄어들자 이를 보충하고자 자본시장을 열었던 것. 그러나 투기성 자금유입으로 자본시장에 거품이 생겼고, 그 버블이 꺼진 게 바로 아시아 외환위기. 태국에서 시작된 위기는 동남아 국가를 차례로 강타하더니 홍콩을 거쳐 결국 한국까지 건너옴. 중국의 부상에 따른 아시아 지역 파워시프트가 위기를 부른 것.
- 아시아 위기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 중국의 부상이 그것이다. 중국은 98년 시자으이 평가절하 압력에도 불구하고 위안화 가치를 지켜냈다. 주변국들은 중국이 버텨준 덕에 결과적으로 위기의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200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세계경제의 전반적 침체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는 10%를 넘나드는 성장을 지속. 그 기간 아시아 지역의 전통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겪어야 했던 일본은 2000년대 들어서도 또 다른 고난의 10년을 헤매야 했다. 아시아의 경제리더였던 일본은 중국의 부상을 바라만 봐야하는 신세였다. 그 사이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의 따거로 행세. 중국으로 인해 야기됐던 위기, 그 윅를 딛고 아시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중국, 위기의 패러독스였다. 오늘날 경제위기에서도 그 역설이 감지된다. 세계는 지금 중국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중국에게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자국의 국채를 사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전세계 모든 기업들은 서방의 경제위축으로 야기된 소비공백을 중국 소비자가 메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중국 중산층 구제론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중국이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하기 시작한 90년대 말과 다르지 않은 구도다. 당시 아시아 외환위기의 구원자였던 중국이 지금은 세계 경제위기의 구원자라는 게 달라졌을 뿐이다. 08년 말 중국은 국내총생산의 약 17%에 해당하는 약 700조원 규모에 달하는 부양대책을 실시했고, 덕택에 질식상태에 빠진 세계 경제에 숨통을 틔워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11년 발발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각국은 중국에 SOS신호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위기를 조장한 나라가 그 위기를 통해 위상을 높이는 위기의 패러독스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의 건설투자는 세계경제에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했다. 98년 도로건설은 중국의 내수를 부추기는 힘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들은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는 힘을 중국에서 얻기도 했다. 08년말의 철도경네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세계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었다. 서방언론도 중국은 세계경제의 구원투수라는 찬사를 보냈다. 서방언론들이 중국을 G2의 반열에 올려놓고 박수를 친 것도 이때쯤이다. 곳간이 텅빈 유럽국가들은 달러 부자의 나라 중국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위기를 틈타 맹주로 등장하는 위기의 패러독스가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도 재연되고 있는 셈
- 90년대 동아시아 지역이 가장 먼저 차이나 사이클의 영향권으로 편입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일본, 한국, 대만 등 인접국들은 중국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기지 역할을 했다. 고부가 부품은 일본, 한국 등지에서 생산하고 조립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이 담당하는 분업구조. 아시아 지역 내 교역이 중간재 위주로 이루어진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아시아 주요 국가의 대중국 수출 중 부품이나 반제품 등 중간재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만 74%, 한국 72%, 일본 60%에 달함. 이들 국가들은 세계공장이 된 중구에 고부가 부품을 수출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짐. 중국은 03년 한국의 최대수출 대상국이 된 데 이어 05년에는 일본이 최대수출국으로 부상. 중국이 기침을 하면 인접국들은 독감에 걸리는 구조가 됨. 한국의 전체 수출의 약 30%(홍콩 포함)는 중국으로 향함. 차이나 사이클에 편입된 것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두번째 편입대상국은 자원부국이다. 심지어 미국과 함께 서방질서를 만들고 있는 유럽도 중국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음. 중국이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매입에 관심을 보이면서부터. 지금 중국은 그 어느때보다 유럽에서 환영받고 있음. 유럽의 위기를 해결해줄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 중국은 그럴 뜻이 있어 보인다. 달러에 편중된 외환 보유액에서 유로화 비중을 높이는가 하면 유럽 기업의 매입에도 적극 나서고 있음.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지도자들은 시도때도 없이 유럽국가들을 자주 방문한다.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유럽 각국 정상들은 맨발로 뛰어나와 허리를 굽힌다. 유럽이 중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돈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게 중국의 입장. 유럽도 차이나 사이클의 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기업 역시 중국시장에 목을 매야 하는 실정. 중국이 세계의 백화점으로 부상하면서 다국적기업의 명운을 좌우할만큼 중요한 나라가 됐기 때문.
- 중국의 실질 GDP가 1%포인트 하락할 경우 한국은 0.22~0.38%포인트, 대중국 수출은 2.0%포인트, 전체수출은 약 1.7%포인트로 떨어짐. 중국이 감기기운을 느끼면 우리는 몸살을 앓는 구조. 게다가 중국은 노동자 임금을 앞으로 5년내 두배 올릴 계회깅다. 중국에 진출한 국내업체들의 사업환경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브라질, 호주 등 자원부구깅 느끼는 압박은 그 성격이 다르다. 이를 대변하는 말이 네덜란드 병. 특정 자원부국이 자원수출에 따른 외국자본 유입으로 일시적 호황을 누리다 물가와 통화가치 상승으로 인한 제조업 쇠퇴로 결국 경기침체에 빠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59년 유전발견으로 잠시 호황을 누리던 네덜란드가 제조업 낙후로 60~70년대에 침체에 빠졌던 사례에서 유래. 지금 브라질이 그런 상황. 브라질은 2020년 중국과의 교역에서 52억 달러 흑자를 기록. 그러나 자원을 제외하면 235억불 적자. 자원을 팔아 번 돈으로 다시 중국제품을 수입한 셈. 자원수출-->달러유입-->자국화폐 평가절상-->제조업 경쟁력 악화의 악순환 구조의 반복이다.
- 한때 세계 태양광업계를 주도하던 에버그린솔라는 11년 중국이 저가공세를 이기지 못해 파산을 신청. 대신 생산시설을 중국 우한으로 대거 이전하고로 함. 800여명의 매사추세츠 공장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내몰릴 처지가 된 것. 한국도 삼성과 LG가 중국에 차세대 LCD공장을 세우기로 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분야 일자리를 중국에 넘겨야 할 처지. 심지어 삼성전자는 핵심제품인 반도체 공장까지 중국 시안에 지을 계획. 한국에 짓는다면 전문대졸 이상 학력의 구직자들에게 돌아갈 일자리를 중국 노동자들에게 뺏긴 셈. 거대 중국시장은 이제 첨단분야의 글로벌 기업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하고 있다. 한국, 대만, 일본 등 주변국들은 중국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자국에 두었던 부품을 중국으로 옮기고 있다. 고급 일자리의 중국이동이 시작된 것. 중국과의 거대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됐다.
- 브레진스키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략적 비전'에서 포스트 아메리카 시대 미국과 중국은 결국 공생의 틀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현재의 미국을 대체할만한 힘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쇠퇴는 곧 세계적 혼란을 가져와 결국 중국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진단. 중국이 오히려 미국의 빠른 쇠퇴를 바라지 않는다는 이야기. 미국이 중국을 외면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미국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도움 없이는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지 않았던 냉전시대의 미국, 소련과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함. 중국이 갖고 있는 1조달러의 미국국채가 이를 상징한다.
- 중국인들은 내심 자신에 차 있다. 그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섰던 78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지만, 서방경제가 금융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은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다. 중국은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 서방의 경제 스탠다드에 대해선 노라고 외친다. 체제경쟁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 도대체 무엇이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을까? 하계에서는 중국모델이 뜨거운 연구과제로 등장. 신자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빗대어 중국 고유의 성장방식을 담은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새로운 용어도 등장.
-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중앙 국자위가 관할하고 있는 117개 중앙기업. 이들은 중국 국유체제의 뼈대. 2010년 이들 중앙기업의 매출액은 약 19조위안으로 전체 국유기업 매출액의 65%에 달함 117개 중앙기업이 중국 국유 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이들 중앙기업을 더 크고 더 강하게 만들 계획. 관련 기업간 인수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워 국제경쟁력을 높이고자 한다. 중앙기업은 03년 196개에 달했으나 지금은 117개로 감소. 그러나 이 기간 총자산은 8.3조위안에서 28조위안으로, 매출액은 3조위안에서 19조 위안으로 오히려 증가. 더 크고 더 강하게 전략이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줌. 중국이동통신, 차이나알미늄, 이치 자동차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대형기업들이 대부분 여기 속함.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에 38개 기업이 포진해 있다. 중앙기업은 산업을 장악하고 있음. 중국은 핵심산업은 국가독점산업으로 지정해 놓고 민영기업의 참여를 차단. 석유화학, 군사, 전력, 통신, 자원, 항공, 해운 등 7대 국가독점산업에 속한 중앙기업은 약 46개. 이들이 각 산업에 매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5%,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9%에 이름. 중앙기업이 핵심 국가독점산업을 장악하고 있음.
- 국자위가 국유기업을 지휘한다면 CIC는 국유은행 및 국부펀드의 해외투자를 총괄. 이를 위해 산하에 중앙후이진공사와 해외투자공사를 두고 있음. CIC가 운용하고 있는 자산의 총규모는 2010년말 현재 약 3,743억 불. 이중 1,351불은 해외에서, 나머지 12개 주요은행 및 증권사의 주식으로 보유. 특히 중국 금융자산의 69%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4대 국유상업은행을 거느리고 있음. 국가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셈. 이로써 국가(공산당)-중앙기업-CIC로 연결되는 국가자본주의 삼각펴대가 형성. CIC가 탄생한 것은 2007년. 외환보유액 중 2000억불을 투자해 설립. 재정부가 당시 환율을 감안해 1억 5500억 위안의 특별채권을 발행하는 형식으로 설립. CIC역시 국가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투자를 결정함.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에너지가 가장 큰 투자대상이고, 금융상품은 그 다음이다.
- 개도국이 중진국(중등수입국)수준에 도달하기는 오히려 쉽다. 농촌의 잉여인력을 도시로 이동시켜 제조업에 종사하게 하면 됨. 도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주민들의 소득수준도 늘어날 것. 60~70년대에 우리가 이미 경험했고, 중국에서는 아직도 진행중. 그러나 제조업에 유입되는 인구가 줄고 임금이 높아지면 상황은 달라짐. 노동력 투입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직면하기 때문. 제조업은 더이상 일자리를 만들지 못할 것이고 서비스업에서는 임시직 등 허드레 일자리만 창출될 것. 이 과정에서 잠복해 있던 사회적 불만까지 폭발하면 성장이 발목을 잡힌다. 이것이 중진국 함정이다.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1인다 GDP가 5000~10000불 되면 오는 현상.
- 중국기업인들은 천생적으로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권력바라기들이다. 게다가 장쩌민 시절 공산당은 돈 있는 사람도 대표한다는 3개 대표론을 제시하면서 공산당과 기업인은 더 가까워짐. 공산당이 정권과 지식, 금권을 모두 쥐고 있는 것. 이는 공산당을 대체할 만한 정치적 실력을 가진 정당은 앞으로 탄생하기 어렵다는 의미.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연일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고 민주화 시위가 벌어져도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구호는 여전히 인민들의 마음에 살아 있음. 그들은 당의 분열은 곧 국가의 분열이라 교육받았다. 산간벽직까지 깊숙이 뻗어 있는 모세혈관같은 당 조직으로 볼 때 일당독재 체제가 쉽게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 12년 봄, 세계는 중국 정계를 뒤흔든 보시라이 사태를 주시했다.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와 그의 심복 왕리쥔 부시장과의 갈등으로 시작된 사태는 결국 중국의 정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권력투쟁 양상으로 발전.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 후진타오, 리커창 등이 소속), 태자당(혁명원로나 당 고위 인사자제로 구성된 정치세력, 시진핑, 왕치산 등이 소속), 상하이방(상하이 관료그룹. 장쩌민 계열)등 중국 공산당 내부 정파의 힘겨루기가 보시라이 사태를 매개로 폭발한 것. 89년 천안무 사태 이후 벌어진 가장 큰 공산당 권력투쟁이었다.
- 학계의 노선투쟁이 정책방면으로 옮겨붙은 것은 바로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의 대립이었다. 태자당의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가 주도한 충칭모델의 핵심은 대정부와 분배였다. 그는 정부가 사회동원력을 발휘해 소외계층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정책을 추진. 빈곤층을 위한 서민주택을 건설했고, 농민공들에게는 도시 후커우를 발급해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게 했다. 전형적 포퓰리즘이었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민생이야말로 최고의 도리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마오쩌둥 시대의 군중노선을 연상케 하는 홍색 열풍을 일으킴. 그의 정책은 신좌파 학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에 비해 공청단 소속 왕양 광둥성 당서기가 이끈 광둥모델은 분배보다는 개혁을 통한 지속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또 정부의 간섭보다는 사회자치를 강조. 예산공개, 인터넷을 통한 정책개발 등이 추진됨. 그는 민주야말로 최고의 도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자유주의 성향의 우파 경제학자들이 광둥모델로 모임. 광둥으로 갈 것인가, 충칭으로 갈 것인가의 논쟁은 공청단과 태자당 상하이방 세력간 힘겨루기의 표현이기도 했다. 시진핑, 저우용캉 정치국 상무위원 등 태자당, 상하이방 소속 지도자들은 충칭을 방문해 보시라이를 치켜세웠다. 9명의 상무위원 중 충칭을 방문하지 않은 지도자는 후진타오, 리커창 등 공청단 소속 지도자와 원자바오 총리뿐이었다. 그들은 광둥편이었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광둥을 수시로 방문해 왕양의 민주시장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태자당, 상하이방 연합세력은 충칭모델로, 공청단은 광둥모델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셈. 이같은 권력암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시라이 사태가 터졌다.
-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은 크게 3개분야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임. 우선 정부운영 시스템 개혁에 관한 차이. 충칭은 기존 공산당의 권위주의 통제 시스템을 지키려 했고 또 강화했다. 정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하려 했다. 기존의 운영시스템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의미. 이것이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반면 광둥은 시스템 개혁을 부단히 추구했다. 정부예산을 공개했고, 인터넷을 통한 정책개발 등에 나섰다. 이들의 개혁은 덩샤오핑이 주창안 사상해방을 통한 개혁을 연상케 했다. 두 지역 모두 민생을 강조했지만 그 방법은 상이. 충칭은 강한 정부였다. 빈곤층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민주택을 의욕적으로 건설하고 정부가 부를 분배하겠다며 직접 나서기도 했다. 국가의 시장개입이었다. 그러나 광둥은 시장지향적 정책을 중시.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사업을 벌이거나 빈곤층 우대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중국 최고의 개방지역인 광둥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따. 민간 역량을 중시하는 정책이었따. 선전 부분도 달랐다. 충칭은 포퓰리즘에 호소.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케 하는 노래를 부르며 군중의 단합을 유도했고, 조직폭력배 단속으로 민심을 사려했다. 반면 광둥은 민주를 선택. 언론간섭을 줄여 사상에 대한 통제수준을 낮춤. 이런 민주적 정치의식은 남방주말과 같은 자유주의 성향의 매체가 나올 수 잇는 이유가 됨. 광둥성 우칸에서는 직접선거가 치러지기도 했따.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었다.
- 신좌파 학자들이 충칭을 칭송한 반면 우파 학자들은 광둥을 지지. 이렇게 중국의 학계와 정계는 좌우로 나뉘어 힘겨루기를 해왔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충칭 모델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개혁이 보수를 이겼고, 시장이 정부를 이겼고, 민주가 포퓰리즘을 이겼다는 의미. 중국의 경제노선에 대한 이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보시라이 사태는 향후 중국의 경제발전 방향이 충칭모델보다는 광둥모델쪽으로 흘러갈 것임을 시사. 우징롄 교수는 시진핑 시대 중국경제는 시장화, 법치화의 큰 물결을 탈 것이라고 단언했다.
- 충칭모델을 사실 경제발전 모델이라고 할 수 없음. 붉은 깃발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투입에 의존한 기존의 성장패턴을 답습. 보시라이 개인의 열망이 낳은 정치쇼일수도 있따. 보시라이 몰락이 중국 경제에 주는 함의는 이제 우리는 모두 광둥으로 간다는 것. 한때 충칭 모델을 찬양했던 태자당, 상하이방 소속 지도자들은 이제 충칭에서 벗어나 옛모습 그대로 다시 시장화, 개방화의 길로 접어들 것. 브루킹스 연구소의 리청 박사가 말했듯, 보시라이 사태는 개혁에 다소 미온적이었던 공청단 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았다. 이번사태가 시장화, 법치화를 바라는 중국경제에 오히려 보약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의미. 광둥모델은 중국이 중진국 함정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창신을 통한 산업고도화, 인터넷을 통한 인민들과의 소통, 다양한 언로를 통한 민주화, 시장에 대한 믿음 등이야말로 중구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들. 앞서 언급된 국가자본주의의 연성화 같은 맥락이다. 이번 보시라이 사태는 이 당위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차 퇴색해가고 있는 지금 중국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갈수록 민족주의에 의존하고 있음. 한 나라가 민족주의에 호소하거나, 대중이 민족주의에 끌려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중은 세계를 바라보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나라의 균형된 이익도 주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존심만을 내세우며 자국의 명예가 모욕당했다고 생각되면 분기탱천한다. 08년 올림픽 이후 중국인들은 여러면에서 그런 성향을 보였다. 일본과 센카쿠열도 문제로 충돌할 때면 여지없이 극렬한 반일 시위가 중국 전역에서 발생. 이같은 민족주의는 아시아 질서에 대한 제국주의적 인식과 결합해 이웃국가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의 바이블리라는 자본론을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자치통감, 25사, 수호지 등 왕조시대 제왕들의 통치술과 권력투쟁에 관한 책이 그의 서재를 가득 메웠다는 점은 분명함. 세계적 마오쩌둥 연구가인 하버드대 로스 테릴 교수는 "마오쩌둥은 20세기 세계 지도자 중 최고의 독서가이자 저술가였지만 과학기술이나 경제경영, 정치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을 포함한 서구의 정치사상 서적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밝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마오쩌둥은 과거 왕조 역사에서 신중국의 경영을 배운 것이다.
- 마오쩌둥이 그랬듯, 중국인들은 과거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살아간다. 현실의 문제해결을 위해 전통에서 지혜를 구했다. 그들은 국가보다 오히려 문명을 중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이란 생각대신 용의 후손이라 여긴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성장을 새로운 슈퍼파워의 등장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옛 영광으로의 부흥이라 생각. 그들이 꿈꾸는 과거의 영광, 그것이 바로 아시아의 맹주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힘이 강해질수록 아시아는 원래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권여이라는 옛 왕조시대의 조공 패러다임을 되살리고 싶어함
- 원교근공. 먼 곳에 있는 나라와는 친하게 지내지만 가까이 있는 나라에게는 공세를 편다. 춘추전국 시대에 등장했던 중국의 외교술이다. 역대 중국의 전략가들은 힘의 영역이 닿을 수 없는 곳은 외교적 방법으로 친구관계로 만들어 놓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근접국가는 힘으로 제압해야 나라의 안녕을 얻을 수 있다.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이 같은 힘의 외교는 아시아 지역의 가장 큰 불안요소가 될 것
- 중국은 그동안 서방세계가 구축했던 자유시장 체제에 수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장 체제에 따르고 순응하는 것은 곧 13억 인구의 밥그릇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 중국은 서방의 이념 공격에도 수세적 입장을 보여왔다. 경제력이 약했고, 경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안정적 환경이 필요했기 때문. 덩샤오핑이 국제문제를 언급하면서 절대로 우두머리가 되지 마라고 한 이유다. 그러나 이제는 수렴이 아닌 발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문제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문제가 동아시아 주변국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어진다.
- 78년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중국은 돈도, 기술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지천에 깔린 사람뿐이었다. 덩샤오핑은 화교를 대상으로 자본유치에 나섰다. 그리고 호소했다. 여기저기 저임금 노동력이 넘쳐나고 있으니 와서 공장을 세워라. 이 과정을 통해 홍콩과 대반, 동남아 화교자본은 중국 땅으로 갔고, 이어 일본, 한국 등이 뒤를 이었다. 80년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재봉틀 공장(소규모 임가공 공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제대로 된 굴뚝을 지어야 했다. 그 일환으로 80년대 말부터 유행한 말이 시장으로 기술을 바꾼다였다. 이말은 시장을 줄테니 기술 다오 였다. 진출기업에게는 중국 내수시장 진입 특혜가 주어짐. 특히 자동차. 자동차 회사를 유치해 그들을 통해 기술을 배운다는 속셈. 86년 폭스바겐이 중국으로 진출 90년대에는 가전, 정보기기, 화공, 철강 등에 이르는 수많은 서방기업이 그 뒤를 따름. 실제 이 과정에서 일부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감.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학계를 중심으로 기술과 시장을 바꾼다는 전략에 비판적 시각이 제기됨. 외국기업은 시장은 다먹으면서 핵심기술은 이전하지 않는다는 지적. 자동차가 특히 그랬다. 업계에서는 엔진 등 핵심기술은 모두 해외 본사에서 개발하고, 중국에는 하급기술만 넘긴다는 불만을 터뜨림. 게다가 모델도 구닥다리였다. 이제 믿을 것은 우리뿐이라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 그 연장선상에서 02년 집권한 후진타오 주석이 내놓은 것이 바로 자주창신 전략.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의지. 정부와 기업은 대대적으로 기술개발 투자에 들어감. 지난 10여년동안 연구개발 투자는 매년 20% 안팎으로 증가. 2000년 GDP대비 0.9%에 그쳤던 연구개발 투자는 현재 1.5%까지 높아졌고, 15년에는 선진국 수준인 2.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 해외투자를 받아들이는 조건도 기술을 얼마나 넘겨줄 것이냐에 초점을 맞춤. 시장을 무기로 구미에 맞는 서방기업만 골라받고 있음.
- 상해 주변에는 노트북 클러스터가 형성됨. 쿤산, 쑤저우, 항저우 등 상하이 일대는 전세계 노트북의 80%를 생산. 삼성전자 노트북은 100% 이곳에서 생산됨. 삼성전자 쑤저우 공장 관계자는 약 2000개에 달하는 노트북 부품 중 약 70%를 주변에서 조달한다고 함. 컴퓨터 관련 부품업체들은 이제 상하이로 넘어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단순조립에서 시작된 중국 컴퓨터 산업이 이제 고부가 부품을 생산하는 체제로까지 발전.
- 중국은 전통산업 분야에서는 선진국 기술을 단순히 추격하는 모습만 보여왔다. 그러나 태양광, 녹색산업, 바이오 등 신흥산업 분야에서는 발달과정을 서너단계 뛰어넘어 일약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는 비약을 이뤄냈다. 구글을 중국땅에서 몰아낸 바이두, 09년 말 뉴욕증시에 상장된 줄기세포 전문업체 차이나코드블러드 등이 대표적. 시장을 미끼로 해외 첨단기술을 끌어들이고 그 기술을 중국산업에 이식시키던 중국이 이제는 신흥산업을 중심으로 기술적 비약을 이루고 있는 것.
-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피해자는 고스란이 중소민영 기업의 몫. 중소기업은 은행문턱이 높아 은행돈 구하기가 쉽지 않아 지하금융에 의존. 저장성, 푸젠성 등 민영기업이 발전한 곳에서는 지하금융이 성행. 중국의 지하자금 규모는 GDP의 약 20%에 달하는 10조위안에 달할 것으로 추산. 이중 절반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불법 사금융 형태로 운영됨. 지하금융은 신용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대부분. 한번 흔들리면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됨. 11년 하반기 원저우에서 벌어진 주요 민영기업이 야반도주는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 정부는 땅을 팔아 부를 챙긴다. 원래 국가소유였던 땅을 부동산 개발명목으로 기업에 파는 것. 2000년 이후 전국 토지의 민간 양도규모를 보면 거의 매년 두배씩 증가. 토지판매는 지방정부 예산수입의 절반이상을 차지. 정부가 땅장사로 돈을 모은 것. 땅값이 하락세를 보이면 여지없이 정부의 재정위기가 언론에서 제기되는 것도 이때문. 부동산 개발업체는 업계 폭리구조의 핵심. 업체는 우선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지방정부로부터 개발부지의 토지사용권을 매입. 일단 땅을 사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다. 그 땅은 개발용지로 형질이 변경되면서 땅값이 뛰기 시작. 물론 지방정부가 형질변경을 도와줌. 기업은 그 부지를 담보로 다른 은행에서 다시 돈을 대출받아 은행 빚을 갚는다. 그래도 돈이 남는다. 그러면 그 돈으로 아파트를 건설. 아파트를 3분의 1정도 지으면 분양에 들어가고 개발업자의 주머니에 다시 돈이 들어어고 시작. 아파트 값이 오르면 주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집을 사야한다고 마음 먹음.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다. 하지만 주택가격은 소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높다. 도시지역 평범한 샐러리맨이 30년동안 월급 전부를 모아도 만들기 어려운 돈. 이 구조를 통해 부동산 시장의 개인자금은 부동산 개발업체로 들어가고 다시 지방정부로 몰림. 이 과정에서 소외된 개인들은 부동산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란의 투기과정에 마음이 아플수 밖에 없다. 경제의 분절구조가 낳은 현상임. 중국 경제는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이 서로 분절되어 있고, 같은 도시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어 있다. 산업 내에서도 국유기업과 민영기업 사이에 칸막이가 쳐 있다.
- 중국 각지 농민들이 키우는 돼지수는 약 4억 5천만 마리. 세계 전체 돼지수의 절반 수준. 돼지는 곡물을 먹는 기계다. 돼지 몸무게 1킬로를 불리기 위해서는 약 3~5키로의 곡물을 먹여야 함. 특히 대형 기업영농이 늘면서 중국에서도 사료먹는 돼지 비율이 증가세. 최근 수년동안 사료수요는 연평균 20% 넘게 증가. 돼지고기값이 오를 수밖에 없음. 이는 중국 물가지수에 고스란이 반영됨. 인플레가 기승을 부렸던 11년 6월, 소비자물가 상상률 6.5% 중 1.5%가 오로지 돼지고기때문. 돼지가 중국, 나아가 세계 인플레의 주범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 농민공이란 말이 생긴 것은 80년대 초. 당시 중국 농촌에서는 5000년 농업 역사에 일대 혁명이 벌어진다. 종촌에 기업이 들어선 거. 이들은 향진기업이라 불림. 농민들은 쟁기르 버리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기 시작. 언론에 농민공이란 말이 등장. 농민이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란 의미. 80년대 농민공은 비록 토지를 버렸지만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는 토지도 버리고 고향도 떠나는 현상이 벌어짐. 중국 동부 연해도시에 대거 설립된 개발구 농장들이 농민을 산업현장으로 끌어낸 것. 특히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 기업들이 중국으로 밀려들면서 노동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90년 약 1000만명에 그쳤던 농민공은 95년 6000만명, 2012년 현재 2억 3000만명을 넘어섰다.
- 60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4-2-1 가정이 사회전체로 퍼짐. 중국은 부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늙어가는 미부선로의 시대.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8.3%에 진입한 해의 각국별 1인당 GDP수준을 보면 일본 1만 7480불(78년), 미국 1만 2065불(49년)이었따. 이에 비해 중국은 6382불(10년)에 그쳤다. 소득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의미
- 중국의 인터넷을 발전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의 탄압. 공산당이 89년 6월 천안문 민주화 시위를 탱크로 진압했고 그로 인해 미국에 남게 된 유학생들이 10년후 귀국길에 오르면서 실리콘밸리의 정보혁명을 중국으로 전파. 중국정부는 인터넷을 행정의 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 상부의 지시를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안성맞춤. 그러나 인터넷은 속성상 정보의 독점을 용납하지 않음.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따.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창출해 내면서 권력의 정보독점을 깨기 시작한 것
- 흔히 중국 비즈니스의 성패는 현지화에 달려 있다고 한다. 제품의 현지화, 유통의 현지화, 인사/조직의 현지화, 자금조달의 현지화 등이 그것. 현지화에 관한 한 IBM이나 GE등 다국적 기업은 달인이다. 그들은 현지인을 해당지역법인의 CEO로 채용. 본부에서는 돈줄만 관리함. 현지인이 CEO를 맡으니 현지 사정에 밝고 시장을 빠르게 파고든다. 이는 레귤레이션의 힘이다. 다국적 기업은 해외진출시 레귤레이션도 함께 보냄. 현지 CEO는 레귤레이션에 따라 자기역할만 하면 됨. 그만큼 업무가 모듈화 되었다는 의미. 본부 임직원들은 현지 CEO를 인정하고, 존중. 그들은 그렇게 해외시장을 열어가고 있다.
- 중국 내수시장 공략의 핵심은 유통망. 중국에서 제품유통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중국진출기업 중 실패한 회사를 분석해 보면 상당수 업체들이 중국 파트너에게 유통을 맡겼다가 낭패를 당했다. 한국 투자사는 생산을 담당하고, 유통은 중국 파트너가 맡는 식의 합작사업은 대부분 깨진다. 어렵더라도 내 제품은 내 손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전해준다는 마인드가 필요.
- 90년대 중국에 진출한 1세대 비즈니스맨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싸게 생산할 것인가였다. 2001년 중국의 WTO가입을 계기로 내수시장에 진출했던 2세대 비즈니스맨들은 중국 유통망 구축에 총력을 기울임. 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에 진출해 활발하게 뛰고 있는 3세대 비즈니스맨들은 이제 중국자금을 어떻게 사내자원으로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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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위기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 중국의 부상이 그것이다. 중국은 98년 시자으이 평가절하 압력에도 불구하고 위안화 가치를 지켜냈다. 주변국들은 중국이 버텨준 덕에 결과적으로 위기의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200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세계경제의 전반적 침체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는 10%를 넘나드는 성장을 지속. 그 기간 아시아 지역의 전통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겪어야 했던 일본은 2000년대 들어서도 또 다른 고난의 10년을 헤매야 했다. 아시아의 경제리더였던 일본은 중국의 부상을 바라만 봐야하는 신세였다. 그 사이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의 따거로 행세. 중국으로 인해 야기됐던 위기, 그 윅를 딛고 아시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중국, 위기의 패러독스였다. 오늘날 경제위기에서도 그 역설이 감지된다. 세계는 지금 중국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중국에게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자국의 국채를 사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전세계 모든 기업들은 서방의 경제위축으로 야기된 소비공백을 중국 소비자가 메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중국 중산층 구제론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중국이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하기 시작한 90년대 말과 다르지 않은 구도다. 당시 아시아 외환위기의 구원자였던 중국이 지금은 세계 경제위기의 구원자라는 게 달라졌을 뿐이다. 08년 말 중국은 국내총생산의 약 17%에 해당하는 약 700조원 규모에 달하는 부양대책을 실시했고, 덕택에 질식상태에 빠진 세계 경제에 숨통을 틔워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11년 발발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각국은 중국에 SOS신호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위기를 조장한 나라가 그 위기를 통해 위상을 높이는 위기의 패러독스가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의 건설투자는 세계경제에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했다. 98년 도로건설은 중국의 내수를 부추기는 힘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들은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는 힘을 중국에서 얻기도 했다. 08년말의 철도경네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세계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었다. 서방언론도 중국은 세계경제의 구원투수라는 찬사를 보냈다. 서방언론들이 중국을 G2의 반열에 올려놓고 박수를 친 것도 이때쯤이다. 곳간이 텅빈 유럽국가들은 달러 부자의 나라 중국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위기를 틈타 맹주로 등장하는 위기의 패러독스가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도 재연되고 있는 셈
- 90년대 동아시아 지역이 가장 먼저 차이나 사이클의 영향권으로 편입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면서 일본, 한국, 대만 등 인접국들은 중국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기지 역할을 했다. 고부가 부품은 일본, 한국 등지에서 생산하고 조립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이 담당하는 분업구조. 아시아 지역 내 교역이 중간재 위주로 이루어진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아시아 주요 국가의 대중국 수출 중 부품이나 반제품 등 중간재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만 74%, 한국 72%, 일본 60%에 달함. 이들 국가들은 세계공장이 된 중구에 고부가 부품을 수출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짐. 중국은 03년 한국의 최대수출 대상국이 된 데 이어 05년에는 일본이 최대수출국으로 부상. 중국이 기침을 하면 인접국들은 독감에 걸리는 구조가 됨. 한국의 전체 수출의 약 30%(홍콩 포함)는 중국으로 향함. 차이나 사이클에 편입된 것이다. 차이나 사이클의 두번째 편입대상국은 자원부국이다. 심지어 미국과 함께 서방질서를 만들고 있는 유럽도 중국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음. 중국이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재정위기에 빠진 나라의 국채매입에 관심을 보이면서부터. 지금 중국은 그 어느때보다 유럽에서 환영받고 있음. 유럽의 위기를 해결해줄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 중국은 그럴 뜻이 있어 보인다. 달러에 편중된 외환 보유액에서 유로화 비중을 높이는가 하면 유럽 기업의 매입에도 적극 나서고 있음.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지도자들은 시도때도 없이 유럽국가들을 자주 방문한다.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유럽 각국 정상들은 맨발로 뛰어나와 허리를 굽힌다. 유럽이 중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돈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게 중국의 입장. 유럽도 차이나 사이클의 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기업 역시 중국시장에 목을 매야 하는 실정. 중국이 세계의 백화점으로 부상하면서 다국적기업의 명운을 좌우할만큼 중요한 나라가 됐기 때문.
- 중국의 실질 GDP가 1%포인트 하락할 경우 한국은 0.22~0.38%포인트, 대중국 수출은 2.0%포인트, 전체수출은 약 1.7%포인트로 떨어짐. 중국이 감기기운을 느끼면 우리는 몸살을 앓는 구조. 게다가 중국은 노동자 임금을 앞으로 5년내 두배 올릴 계회깅다. 중국에 진출한 국내업체들의 사업환경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브라질, 호주 등 자원부구깅 느끼는 압박은 그 성격이 다르다. 이를 대변하는 말이 네덜란드 병. 특정 자원부국이 자원수출에 따른 외국자본 유입으로 일시적 호황을 누리다 물가와 통화가치 상승으로 인한 제조업 쇠퇴로 결국 경기침체에 빠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59년 유전발견으로 잠시 호황을 누리던 네덜란드가 제조업 낙후로 60~70년대에 침체에 빠졌던 사례에서 유래. 지금 브라질이 그런 상황. 브라질은 2020년 중국과의 교역에서 52억 달러 흑자를 기록. 그러나 자원을 제외하면 235억불 적자. 자원을 팔아 번 돈으로 다시 중국제품을 수입한 셈. 자원수출-->달러유입-->자국화폐 평가절상-->제조업 경쟁력 악화의 악순환 구조의 반복이다.
- 한때 세계 태양광업계를 주도하던 에버그린솔라는 11년 중국이 저가공세를 이기지 못해 파산을 신청. 대신 생산시설을 중국 우한으로 대거 이전하고로 함. 800여명의 매사추세츠 공장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내몰릴 처지가 된 것. 한국도 삼성과 LG가 중국에 차세대 LCD공장을 세우기로 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분야 일자리를 중국에 넘겨야 할 처지. 심지어 삼성전자는 핵심제품인 반도체 공장까지 중국 시안에 지을 계획. 한국에 짓는다면 전문대졸 이상 학력의 구직자들에게 돌아갈 일자리를 중국 노동자들에게 뺏긴 셈. 거대 중국시장은 이제 첨단분야의 글로벌 기업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하고 있다. 한국, 대만, 일본 등 주변국들은 중국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자국에 두었던 부품을 중국으로 옮기고 있다. 고급 일자리의 중국이동이 시작된 것. 중국과의 거대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됐다.
- 브레진스키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략적 비전'에서 포스트 아메리카 시대 미국과 중국은 결국 공생의 틀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현재의 미국을 대체할만한 힘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쇠퇴는 곧 세계적 혼란을 가져와 결국 중국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진단. 중국이 오히려 미국의 빠른 쇠퇴를 바라지 않는다는 이야기. 미국이 중국을 외면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미국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도움 없이는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있지 않았던 냉전시대의 미국, 소련과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함. 중국이 갖고 있는 1조달러의 미국국채가 이를 상징한다.
- 중국인들은 내심 자신에 차 있다. 그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섰던 78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지만, 서방경제가 금융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은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다. 중국은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 서방의 경제 스탠다드에 대해선 노라고 외친다. 체제경쟁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 도대체 무엇이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을까? 하계에서는 중국모델이 뜨거운 연구과제로 등장. 신자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빗대어 중국 고유의 성장방식을 담은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새로운 용어도 등장.
-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중앙 국자위가 관할하고 있는 117개 중앙기업. 이들은 중국 국유체제의 뼈대. 2010년 이들 중앙기업의 매출액은 약 19조위안으로 전체 국유기업 매출액의 65%에 달함 117개 중앙기업이 중국 국유 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이들 중앙기업을 더 크고 더 강하게 만들 계획. 관련 기업간 인수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워 국제경쟁력을 높이고자 한다. 중앙기업은 03년 196개에 달했으나 지금은 117개로 감소. 그러나 이 기간 총자산은 8.3조위안에서 28조위안으로, 매출액은 3조위안에서 19조 위안으로 오히려 증가. 더 크고 더 강하게 전략이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줌. 중국이동통신, 차이나알미늄, 이치 자동차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대형기업들이 대부분 여기 속함.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에 38개 기업이 포진해 있다. 중앙기업은 산업을 장악하고 있음. 중국은 핵심산업은 국가독점산업으로 지정해 놓고 민영기업의 참여를 차단. 석유화학, 군사, 전력, 통신, 자원, 항공, 해운 등 7대 국가독점산업에 속한 중앙기업은 약 46개. 이들이 각 산업에 매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5%,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9%에 이름. 중앙기업이 핵심 국가독점산업을 장악하고 있음.
- 국자위가 국유기업을 지휘한다면 CIC는 국유은행 및 국부펀드의 해외투자를 총괄. 이를 위해 산하에 중앙후이진공사와 해외투자공사를 두고 있음. CIC가 운용하고 있는 자산의 총규모는 2010년말 현재 약 3,743억 불. 이중 1,351불은 해외에서, 나머지 12개 주요은행 및 증권사의 주식으로 보유. 특히 중국 금융자산의 69%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4대 국유상업은행을 거느리고 있음. 국가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셈. 이로써 국가(공산당)-중앙기업-CIC로 연결되는 국가자본주의 삼각펴대가 형성. CIC가 탄생한 것은 2007년. 외환보유액 중 2000억불을 투자해 설립. 재정부가 당시 환율을 감안해 1억 5500억 위안의 특별채권을 발행하는 형식으로 설립. CIC역시 국가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투자를 결정함.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에너지가 가장 큰 투자대상이고, 금융상품은 그 다음이다.
- 개도국이 중진국(중등수입국)수준에 도달하기는 오히려 쉽다. 농촌의 잉여인력을 도시로 이동시켜 제조업에 종사하게 하면 됨. 도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주민들의 소득수준도 늘어날 것. 60~70년대에 우리가 이미 경험했고, 중국에서는 아직도 진행중. 그러나 제조업에 유입되는 인구가 줄고 임금이 높아지면 상황은 달라짐. 노동력 투입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직면하기 때문. 제조업은 더이상 일자리를 만들지 못할 것이고 서비스업에서는 임시직 등 허드레 일자리만 창출될 것. 이 과정에서 잠복해 있던 사회적 불만까지 폭발하면 성장이 발목을 잡힌다. 이것이 중진국 함정이다.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1인다 GDP가 5000~10000불 되면 오는 현상.
- 중국기업인들은 천생적으로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권력바라기들이다. 게다가 장쩌민 시절 공산당은 돈 있는 사람도 대표한다는 3개 대표론을 제시하면서 공산당과 기업인은 더 가까워짐. 공산당이 정권과 지식, 금권을 모두 쥐고 있는 것. 이는 공산당을 대체할 만한 정치적 실력을 가진 정당은 앞으로 탄생하기 어렵다는 의미.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연일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고 민주화 시위가 벌어져도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구호는 여전히 인민들의 마음에 살아 있음. 그들은 당의 분열은 곧 국가의 분열이라 교육받았다. 산간벽직까지 깊숙이 뻗어 있는 모세혈관같은 당 조직으로 볼 때 일당독재 체제가 쉽게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 12년 봄, 세계는 중국 정계를 뒤흔든 보시라이 사태를 주시했다.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와 그의 심복 왕리쥔 부시장과의 갈등으로 시작된 사태는 결국 중국의 정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권력투쟁 양상으로 발전.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 후진타오, 리커창 등이 소속), 태자당(혁명원로나 당 고위 인사자제로 구성된 정치세력, 시진핑, 왕치산 등이 소속), 상하이방(상하이 관료그룹. 장쩌민 계열)등 중국 공산당 내부 정파의 힘겨루기가 보시라이 사태를 매개로 폭발한 것. 89년 천안무 사태 이후 벌어진 가장 큰 공산당 권력투쟁이었다.
- 학계의 노선투쟁이 정책방면으로 옮겨붙은 것은 바로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의 대립이었다. 태자당의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가 주도한 충칭모델의 핵심은 대정부와 분배였다. 그는 정부가 사회동원력을 발휘해 소외계층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정책을 추진. 빈곤층을 위한 서민주택을 건설했고, 농민공들에게는 도시 후커우를 발급해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받게 했다. 전형적 포퓰리즘이었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민생이야말로 최고의 도리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마오쩌둥 시대의 군중노선을 연상케 하는 홍색 열풍을 일으킴. 그의 정책은 신좌파 학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에 비해 공청단 소속 왕양 광둥성 당서기가 이끈 광둥모델은 분배보다는 개혁을 통한 지속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또 정부의 간섭보다는 사회자치를 강조. 예산공개, 인터넷을 통한 정책개발 등이 추진됨. 그는 민주야말로 최고의 도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자유주의 성향의 우파 경제학자들이 광둥모델로 모임. 광둥으로 갈 것인가, 충칭으로 갈 것인가의 논쟁은 공청단과 태자당 상하이방 세력간 힘겨루기의 표현이기도 했다. 시진핑, 저우용캉 정치국 상무위원 등 태자당, 상하이방 소속 지도자들은 충칭을 방문해 보시라이를 치켜세웠다. 9명의 상무위원 중 충칭을 방문하지 않은 지도자는 후진타오, 리커창 등 공청단 소속 지도자와 원자바오 총리뿐이었다. 그들은 광둥편이었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광둥을 수시로 방문해 왕양의 민주시장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태자당, 상하이방 연합세력은 충칭모델로, 공청단은 광둥모델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셈. 이같은 권력암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시라이 사태가 터졌다.
-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은 크게 3개분야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임. 우선 정부운영 시스템 개혁에 관한 차이. 충칭은 기존 공산당의 권위주의 통제 시스템을 지키려 했고 또 강화했다. 정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하려 했다. 기존의 운영시스템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의미. 이것이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반면 광둥은 시스템 개혁을 부단히 추구했다. 정부예산을 공개했고, 인터넷을 통한 정책개발 등에 나섰다. 이들의 개혁은 덩샤오핑이 주창안 사상해방을 통한 개혁을 연상케 했다. 두 지역 모두 민생을 강조했지만 그 방법은 상이. 충칭은 강한 정부였다. 빈곤층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민주택을 의욕적으로 건설하고 정부가 부를 분배하겠다며 직접 나서기도 했다. 국가의 시장개입이었다. 그러나 광둥은 시장지향적 정책을 중시.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사업을 벌이거나 빈곤층 우대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중국 최고의 개방지역인 광둥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따. 민간 역량을 중시하는 정책이었따. 선전 부분도 달랐다. 충칭은 포퓰리즘에 호소.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케 하는 노래를 부르며 군중의 단합을 유도했고, 조직폭력배 단속으로 민심을 사려했다. 반면 광둥은 민주를 선택. 언론간섭을 줄여 사상에 대한 통제수준을 낮춤. 이런 민주적 정치의식은 남방주말과 같은 자유주의 성향의 매체가 나올 수 잇는 이유가 됨. 광둥성 우칸에서는 직접선거가 치러지기도 했따.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었다.
- 신좌파 학자들이 충칭을 칭송한 반면 우파 학자들은 광둥을 지지. 이렇게 중국의 학계와 정계는 좌우로 나뉘어 힘겨루기를 해왔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충칭 모델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개혁이 보수를 이겼고, 시장이 정부를 이겼고, 민주가 포퓰리즘을 이겼다는 의미. 중국의 경제노선에 대한 이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보시라이 사태는 향후 중국의 경제발전 방향이 충칭모델보다는 광둥모델쪽으로 흘러갈 것임을 시사. 우징롄 교수는 시진핑 시대 중국경제는 시장화, 법치화의 큰 물결을 탈 것이라고 단언했다.
- 충칭모델을 사실 경제발전 모델이라고 할 수 없음. 붉은 깃발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투입에 의존한 기존의 성장패턴을 답습. 보시라이 개인의 열망이 낳은 정치쇼일수도 있따. 보시라이 몰락이 중국 경제에 주는 함의는 이제 우리는 모두 광둥으로 간다는 것. 한때 충칭 모델을 찬양했던 태자당, 상하이방 소속 지도자들은 이제 충칭에서 벗어나 옛모습 그대로 다시 시장화, 개방화의 길로 접어들 것. 브루킹스 연구소의 리청 박사가 말했듯, 보시라이 사태는 개혁에 다소 미온적이었던 공청단 지도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았다. 이번사태가 시장화, 법치화를 바라는 중국경제에 오히려 보약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의미. 광둥모델은 중국이 중진국 함정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창신을 통한 산업고도화, 인터넷을 통한 인민들과의 소통, 다양한 언로를 통한 민주화, 시장에 대한 믿음 등이야말로 중구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들. 앞서 언급된 국가자본주의의 연성화 같은 맥락이다. 이번 보시라이 사태는 이 당위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차 퇴색해가고 있는 지금 중국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갈수록 민족주의에 의존하고 있음. 한 나라가 민족주의에 호소하거나, 대중이 민족주의에 끌려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중은 세계를 바라보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나라의 균형된 이익도 주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존심만을 내세우며 자국의 명예가 모욕당했다고 생각되면 분기탱천한다. 08년 올림픽 이후 중국인들은 여러면에서 그런 성향을 보였다. 일본과 센카쿠열도 문제로 충돌할 때면 여지없이 극렬한 반일 시위가 중국 전역에서 발생. 이같은 민족주의는 아시아 질서에 대한 제국주의적 인식과 결합해 이웃국가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의 바이블리라는 자본론을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자치통감, 25사, 수호지 등 왕조시대 제왕들의 통치술과 권력투쟁에 관한 책이 그의 서재를 가득 메웠다는 점은 분명함. 세계적 마오쩌둥 연구가인 하버드대 로스 테릴 교수는 "마오쩌둥은 20세기 세계 지도자 중 최고의 독서가이자 저술가였지만 과학기술이나 경제경영, 정치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을 포함한 서구의 정치사상 서적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밝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마오쩌둥은 과거 왕조 역사에서 신중국의 경영을 배운 것이다.
- 마오쩌둥이 그랬듯, 중국인들은 과거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살아간다. 현실의 문제해결을 위해 전통에서 지혜를 구했다. 그들은 국가보다 오히려 문명을 중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이란 생각대신 용의 후손이라 여긴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성장을 새로운 슈퍼파워의 등장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옛 영광으로의 부흥이라 생각. 그들이 꿈꾸는 과거의 영광, 그것이 바로 아시아의 맹주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힘이 강해질수록 아시아는 원래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권여이라는 옛 왕조시대의 조공 패러다임을 되살리고 싶어함
- 원교근공. 먼 곳에 있는 나라와는 친하게 지내지만 가까이 있는 나라에게는 공세를 편다. 춘추전국 시대에 등장했던 중국의 외교술이다. 역대 중국의 전략가들은 힘의 영역이 닿을 수 없는 곳은 외교적 방법으로 친구관계로 만들어 놓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근접국가는 힘으로 제압해야 나라의 안녕을 얻을 수 있다.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이 같은 힘의 외교는 아시아 지역의 가장 큰 불안요소가 될 것
- 중국은 그동안 서방세계가 구축했던 자유시장 체제에 수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장 체제에 따르고 순응하는 것은 곧 13억 인구의 밥그릇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 중국은 서방의 이념 공격에도 수세적 입장을 보여왔다. 경제력이 약했고, 경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안정적 환경이 필요했기 때문. 덩샤오핑이 국제문제를 언급하면서 절대로 우두머리가 되지 마라고 한 이유다. 그러나 이제는 수렴이 아닌 발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문제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문제가 동아시아 주변국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어진다.
- 78년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중국은 돈도, 기술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지천에 깔린 사람뿐이었다. 덩샤오핑은 화교를 대상으로 자본유치에 나섰다. 그리고 호소했다. 여기저기 저임금 노동력이 넘쳐나고 있으니 와서 공장을 세워라. 이 과정을 통해 홍콩과 대반, 동남아 화교자본은 중국 땅으로 갔고, 이어 일본, 한국 등이 뒤를 이었다. 80년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재봉틀 공장(소규모 임가공 공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제대로 된 굴뚝을 지어야 했다. 그 일환으로 80년대 말부터 유행한 말이 시장으로 기술을 바꾼다였다. 이말은 시장을 줄테니 기술 다오 였다. 진출기업에게는 중국 내수시장 진입 특혜가 주어짐. 특히 자동차. 자동차 회사를 유치해 그들을 통해 기술을 배운다는 속셈. 86년 폭스바겐이 중국으로 진출 90년대에는 가전, 정보기기, 화공, 철강 등에 이르는 수많은 서방기업이 그 뒤를 따름. 실제 이 과정에서 일부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감.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학계를 중심으로 기술과 시장을 바꾼다는 전략에 비판적 시각이 제기됨. 외국기업은 시장은 다먹으면서 핵심기술은 이전하지 않는다는 지적. 자동차가 특히 그랬다. 업계에서는 엔진 등 핵심기술은 모두 해외 본사에서 개발하고, 중국에는 하급기술만 넘긴다는 불만을 터뜨림. 게다가 모델도 구닥다리였다. 이제 믿을 것은 우리뿐이라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 그 연장선상에서 02년 집권한 후진타오 주석이 내놓은 것이 바로 자주창신 전략.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의지. 정부와 기업은 대대적으로 기술개발 투자에 들어감. 지난 10여년동안 연구개발 투자는 매년 20% 안팎으로 증가. 2000년 GDP대비 0.9%에 그쳤던 연구개발 투자는 현재 1.5%까지 높아졌고, 15년에는 선진국 수준인 2.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 해외투자를 받아들이는 조건도 기술을 얼마나 넘겨줄 것이냐에 초점을 맞춤. 시장을 무기로 구미에 맞는 서방기업만 골라받고 있음.
- 상해 주변에는 노트북 클러스터가 형성됨. 쿤산, 쑤저우, 항저우 등 상하이 일대는 전세계 노트북의 80%를 생산. 삼성전자 노트북은 100% 이곳에서 생산됨. 삼성전자 쑤저우 공장 관계자는 약 2000개에 달하는 노트북 부품 중 약 70%를 주변에서 조달한다고 함. 컴퓨터 관련 부품업체들은 이제 상하이로 넘어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단순조립에서 시작된 중국 컴퓨터 산업이 이제 고부가 부품을 생산하는 체제로까지 발전.
- 중국은 전통산업 분야에서는 선진국 기술을 단순히 추격하는 모습만 보여왔다. 그러나 태양광, 녹색산업, 바이오 등 신흥산업 분야에서는 발달과정을 서너단계 뛰어넘어 일약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는 비약을 이뤄냈다. 구글을 중국땅에서 몰아낸 바이두, 09년 말 뉴욕증시에 상장된 줄기세포 전문업체 차이나코드블러드 등이 대표적. 시장을 미끼로 해외 첨단기술을 끌어들이고 그 기술을 중국산업에 이식시키던 중국이 이제는 신흥산업을 중심으로 기술적 비약을 이루고 있는 것.
-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피해자는 고스란이 중소민영 기업의 몫. 중소기업은 은행문턱이 높아 은행돈 구하기가 쉽지 않아 지하금융에 의존. 저장성, 푸젠성 등 민영기업이 발전한 곳에서는 지하금융이 성행. 중국의 지하자금 규모는 GDP의 약 20%에 달하는 10조위안에 달할 것으로 추산. 이중 절반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불법 사금융 형태로 운영됨. 지하금융은 신용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대부분. 한번 흔들리면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됨. 11년 하반기 원저우에서 벌어진 주요 민영기업이 야반도주는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 정부는 땅을 팔아 부를 챙긴다. 원래 국가소유였던 땅을 부동산 개발명목으로 기업에 파는 것. 2000년 이후 전국 토지의 민간 양도규모를 보면 거의 매년 두배씩 증가. 토지판매는 지방정부 예산수입의 절반이상을 차지. 정부가 땅장사로 돈을 모은 것. 땅값이 하락세를 보이면 여지없이 정부의 재정위기가 언론에서 제기되는 것도 이때문. 부동산 개발업체는 업계 폭리구조의 핵심. 업체는 우선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지방정부로부터 개발부지의 토지사용권을 매입. 일단 땅을 사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다. 그 땅은 개발용지로 형질이 변경되면서 땅값이 뛰기 시작. 물론 지방정부가 형질변경을 도와줌. 기업은 그 부지를 담보로 다른 은행에서 다시 돈을 대출받아 은행 빚을 갚는다. 그래도 돈이 남는다. 그러면 그 돈으로 아파트를 건설. 아파트를 3분의 1정도 지으면 분양에 들어가고 개발업자의 주머니에 다시 돈이 들어어고 시작. 아파트 값이 오르면 주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집을 사야한다고 마음 먹음.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다. 하지만 주택가격은 소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높다. 도시지역 평범한 샐러리맨이 30년동안 월급 전부를 모아도 만들기 어려운 돈. 이 구조를 통해 부동산 시장의 개인자금은 부동산 개발업체로 들어가고 다시 지방정부로 몰림. 이 과정에서 소외된 개인들은 부동산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란의 투기과정에 마음이 아플수 밖에 없다. 경제의 분절구조가 낳은 현상임. 중국 경제는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이 서로 분절되어 있고, 같은 도시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어 있다. 산업 내에서도 국유기업과 민영기업 사이에 칸막이가 쳐 있다.
- 중국 각지 농민들이 키우는 돼지수는 약 4억 5천만 마리. 세계 전체 돼지수의 절반 수준. 돼지는 곡물을 먹는 기계다. 돼지 몸무게 1킬로를 불리기 위해서는 약 3~5키로의 곡물을 먹여야 함. 특히 대형 기업영농이 늘면서 중국에서도 사료먹는 돼지 비율이 증가세. 최근 수년동안 사료수요는 연평균 20% 넘게 증가. 돼지고기값이 오를 수밖에 없음. 이는 중국 물가지수에 고스란이 반영됨. 인플레가 기승을 부렸던 11년 6월, 소비자물가 상상률 6.5% 중 1.5%가 오로지 돼지고기때문. 돼지가 중국, 나아가 세계 인플레의 주범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 농민공이란 말이 생긴 것은 80년대 초. 당시 중국 농촌에서는 5000년 농업 역사에 일대 혁명이 벌어진다. 종촌에 기업이 들어선 거. 이들은 향진기업이라 불림. 농민들은 쟁기르 버리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기 시작. 언론에 농민공이란 말이 등장. 농민이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란 의미. 80년대 농민공은 비록 토지를 버렸지만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는 토지도 버리고 고향도 떠나는 현상이 벌어짐. 중국 동부 연해도시에 대거 설립된 개발구 농장들이 농민을 산업현장으로 끌어낸 것. 특히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등 아시아 기업들이 중국으로 밀려들면서 노동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90년 약 1000만명에 그쳤던 농민공은 95년 6000만명, 2012년 현재 2억 3000만명을 넘어섰다.
- 60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4-2-1 가정이 사회전체로 퍼짐. 중국은 부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늙어가는 미부선로의 시대.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8.3%에 진입한 해의 각국별 1인당 GDP수준을 보면 일본 1만 7480불(78년), 미국 1만 2065불(49년)이었따. 이에 비해 중국은 6382불(10년)에 그쳤다. 소득수준이 낮은 상태에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는 의미
- 중국의 인터넷을 발전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의 탄압. 공산당이 89년 6월 천안문 민주화 시위를 탱크로 진압했고 그로 인해 미국에 남게 된 유학생들이 10년후 귀국길에 오르면서 실리콘밸리의 정보혁명을 중국으로 전파. 중국정부는 인터넷을 행정의 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 상부의 지시를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안성맞춤. 그러나 인터넷은 속성상 정보의 독점을 용납하지 않음.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따.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창출해 내면서 권력의 정보독점을 깨기 시작한 것
- 흔히 중국 비즈니스의 성패는 현지화에 달려 있다고 한다. 제품의 현지화, 유통의 현지화, 인사/조직의 현지화, 자금조달의 현지화 등이 그것. 현지화에 관한 한 IBM이나 GE등 다국적 기업은 달인이다. 그들은 현지인을 해당지역법인의 CEO로 채용. 본부에서는 돈줄만 관리함. 현지인이 CEO를 맡으니 현지 사정에 밝고 시장을 빠르게 파고든다. 이는 레귤레이션의 힘이다. 다국적 기업은 해외진출시 레귤레이션도 함께 보냄. 현지 CEO는 레귤레이션에 따라 자기역할만 하면 됨. 그만큼 업무가 모듈화 되었다는 의미. 본부 임직원들은 현지 CEO를 인정하고, 존중. 그들은 그렇게 해외시장을 열어가고 있다.
- 중국 내수시장 공략의 핵심은 유통망. 중국에서 제품유통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중국진출기업 중 실패한 회사를 분석해 보면 상당수 업체들이 중국 파트너에게 유통을 맡겼다가 낭패를 당했다. 한국 투자사는 생산을 담당하고, 유통은 중국 파트너가 맡는 식의 합작사업은 대부분 깨진다. 어렵더라도 내 제품은 내 손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전해준다는 마인드가 필요.
- 90년대 중국에 진출한 1세대 비즈니스맨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싸게 생산할 것인가였다. 2001년 중국의 WTO가입을 계기로 내수시장에 진출했던 2세대 비즈니스맨들은 중국 유통망 구축에 총력을 기울임. 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중국에 진출해 활발하게 뛰고 있는 3세대 비즈니스맨들은 이제 중국자금을 어떻게 사내자원으로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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