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크노크라트적 환상으로 인해 기술적 전문가들은 새로운 권력과 정당성을 무심코 국가에 안겨준다. 그들에게 국가는 그저 기술적 해결책을 실행하는 기관일 뿐이기 때문. 테크노크라트적 접근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권력을 바라보는 태도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함. 권력이란 것이 자신을 제한하는 견제가 약해지거나 없어지더라도 전과 다름없이 저절로 호의적이고 인자할 것이라 여김. 오래전 왕권신수설이 통하던 시절의 국왕들이 신의 권력을 휘둘렀다면, 요즘 우리 시대의 독재자들은 발전의 권력을 휘두른다. 오늘날의 발전이 묵시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기술적 전문가들을 자문가로 거느린 호의적 독재자다. 이 책에서는 이런 지향을 권위주의적 발전이라 명명. 테크노크라시라는 말 자체는 전문가들의 지배를 뜻하는 20세기 초의 신조어다.
- 사람들이 정말로 권리를 침해당해도 이를 묵과하고 기술적 해결책으로 눈을 돌리는 약삭빠른 속임수는 오늘날의 발전이 처해 있는 도덕적 비극.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는 그 자체로 윤리적 목적이다. 가령 우간다 농민들은 멀쩡한 자기집을 불살라 버리는 만행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는 그 자체로 윤리적 목적이다. 빈곤에 대처하는 일에서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접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든 간에, 발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식이 있고, 반대로 침해하는 방식이 있다. 이 윤리적 선택을 피할 방도는 없다. 증거에 바탕을 두는 비이데올로기적 정책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해서 이 선택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하이에크는 새로운 사회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려는 테크노크라트들의 야심에 질겁했다. 그는 기술적 문제에 대한 집착이 빈 서판 사고방식의 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집착은 오늘날의 발전에서 여전히 횡행하는 사고방식을 일찌감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빈곤을 척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그 답을 자연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순수하게 기술적인 해법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발전이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테크노크라시는 자연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사고습성을 무비판적으로 사회문제에 대입하는 꼴이었다. 테크노크라트들은 올바른 기술적 해법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과 맞지 않으면, 사회에 대한 과거의 연구결과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로운 사회시스템에서는 아무도 시스템을 통제하지 않고 분산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와 달리, 엔지니어는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기술적 문제를 전자와 후자는 닮은 구석이 없다.
- 빈서판은 발전에서 개인의 자유가 수행하는 역할에 두가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빈서판은 개인의 자유가 과거의 발전에서 얼마나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말해주는 긍정적 증거들을 내다 버렸다. 역사적 증거를 거부하니 발전에서 자유의 역할을 부정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둘째, 빈서판식 접근을 밀어붙이려면 그 자체로 더욱 독재적 강압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개인들로 하여금 이전의 제도를 포기하고 전문가들의 새로운 해법을 받아들이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서방의 경우, 민주적 제도 덕분에 사람들이 보존하고 싶어하는 제도를 지키고 전문가들의 대안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방에서는 테크노크라시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스웨덴 사람들은 뮈르달 부부가 병리적이라고 했던 전통적 가족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양육할 하나의 커다란 국가적 가정을 수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통을 대체로 지켜가면서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방식은 강압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다.
- 전문가의 해법을 고집하는 사고방식과는 다른 대안, 즉 시장경쟁을 통한 자생적 해법이 존재. 다양한 행위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참여하는 시장에서는 특정 필요를 해결해 줄 방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소비자들에게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음. 소비자들은 최소비용으로 자신의 필요를 최대한 충족해주는 해결책을 선택. 우리가 아쉬워하는 것들이 생산될 거라고 여기는 근거는 독립적이고 서로 경쟁하는 다수의 노력에 대한 우리의 신뢰라고 하이에크는 말했다. 그는 이것을 시적인 어구로도 묘사. 심지어 우리가 무얼 원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생적 시장경쟁은 우리가 막상 보게되면 원하게 될 것들을 생산해 낸다.
- 의도적인 지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인들에게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자신들이 당사자들보다 더 잘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지능으로 충분히 사회전체를 경영할 수 있으며, 빈곤탈피를 위한 사회진부의 저해요인을 식별하고 경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주의가 견지하는 자생성과 겸허함은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즉, 개인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과정을 겸허한 태도로 대하며,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도 관용적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사회적 과정을 포괄적으로 지휘하자고 요구하는 태도의 근원에 있는 지적 오만과는 정확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 국가냐 시장이냐는 논쟁은 세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논쟁임. 첫째, 국가와 시장은 서로 보완적임. 하이에크 본인도 정부가 공급하는 상품영역이나 시장이 담당하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국가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만큼, 이점을 인정. 하이에크가 의문의 여지없이 국가가 나서야할 광범위한 행동이라고 언급한 분야에는 도로, 공해, 위생, 법적체계, 사기방지, 사회적서비스가 들어감. 둘째, 정부 서비스 자체도 자유사회의 자생적 질서가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함. 셋째, 의도적 설계나 자생적 해법이냐의 논쟁을 국가냐 시장이냐의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는 시장 우호적 독재자를 보면 분명히 드러남. 이런 독재자는 국가냐 시장이냐의 논쟁에서 어느쪽에 위치하는 것일까? 독재자와 그의 자문가들은 시장 우호적 정책을 표방하면서 발전을 의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 논리면에서나 증거면에서나 권위주의적 발전의 새 경제학을 뒷받침해줄 근거는 별로 없다. 그러나 어찌 됐든 권위주의 쪽이 자유로운 발전을 물리쳤다. 왜냐하면 권위주의 쪽에 권력이 있었고, 권위주의적 발전의 핵심집단들이 자기 권력을 합리화했기 때문.
- 19년 상반기 내내 1차대전을 끝내기 위한 베르사유 협상이 진행되다가, 마침내 19년 6월 참가국들이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 27개국이 베르사유 협상에 참여했지만, 대세를 좌우하던 열강은 미, 영, 프였다. 이때 세가지 결정이 중국 및 여타 지역에서 발전사상의 역사에 지속적 영향을 미침. 첫번째 결정은 패전국의 식민지 등 여러지역에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을 설치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인종평등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 세번째는 중국 산둥성의 통치권을 독일에서 일본으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 발전이 49년 해리 트루먼의 연설에서 갑자기 태어났다는 것이 공시적 발전의 전설이다. 하지만 전설과 달리, 그 이전 20년 동안 중국은 테크노크라트적 발전 모델이 형성되는 장소중 하나였다. 테크노크라트적 사고방식은 문제를 중국 개인들의 존업성과 권리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 그렇게 문제를 돌리는 것이 이민이나 치외법권을 주관하는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도 좋았고 중국의 지도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열망했던 장제스에게도 좋았다. 하지만 권리가 짓밟힌 중국의 개인들에게는 좋지 못했으며, 중국이 발전하는데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49년 1월 해리트루먼이 가난한 나라들을 위한 미국의 대담하고도 새로운 발전 프로그램을 공표하던 날, 마오쩌둥의 전차들은 베이징을 포위. 이때 20년이 넘도로 중국에서 추진해 온 미국의 대담하고조 새로운 발전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장제스를 위시한 민족주의자들은 푸젠성의 항구도시 취안저우에서 타이완으로 가는 해협을 건넜다. 중국 국내외에 사는 중국인들의 발전은 IPR과 록펠러 재단 그리고 퐁이 제시했던 방식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49년 시점에 그들은 권위주의적 발전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 62년 헤일리 경이 90세에 이르렀을 때, 아프리카 독립국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대영제국은 확실한 몰락의 길로 들어섬. 권위주의적 발전관으로 제국을 구하려 했던 헤일리경의 시도는 실패. 영국이 직접 인자한 독재자로서 지배하는 그의 구상은 장기적으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 주요 이유는 식민지에서 등장한 민족주의적 지도자들이 그들 스스로 인자한 독재자 역할을 맡으려 했기 때문. 한편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동맹세력을 얻으려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새로 태어난 민족주의적 독재자들 편에 섰다. 인자한 독재자의 임무교대는 예상외로 일찍 일어났지만 무소불위와 다름없는 국가권력을 발전노력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헤일리 경의 주장은 그보다 훨씬 오래도록 지속됨.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협하는 엄청난 국가권력의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헤일리 경이 활동하던 시절, 영국이들과 미국인들은 여전히 인종주의적 태도로 아프리카인들을 대했다. 그러니 그들 머릿속에는 아프리카인들의 권리라는 관념자체가 생기기 어려웠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인종주의가 더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전과 같은 변명은 있을 수 없다. 헤일리 경이 남긴 권위주의적 발전사상은 냉전에 맞서야 하는 미국에도 유용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마침내 이 단계에서 권위주의적 접근이 공식화되는 최종적 도약을 달성하게 된다.
-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으로 합의가 굳어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하나는 44년 브레턴우즈에서 세계은행 협정문의 특정 조항 하나가 승인되었다는 점. 그 조항은 비정치 조항으로 불리게 된 제4조 제10항인데, 이 조항 덕에 냉전기 중 미국의 반 소련 동맹국 가운데 꼴사나운 독재자들을 눈감아주기가 쉬워졌다. 세계은행과 직원들은 회원국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세계은행의 의사결정은 회원국이나 그 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 결정에서는 오직 경제적 사항만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비정치 조항에는 44년 상황의 정치적 동기가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동기는 당초 소련에 대한 지원을 허용하기 위한 것. 전시였던 그 때는 소련이 연합국이었기 때문. 동시에 이 조항은 테크노크라트적 관점을 완벽하게 반영. 중요한 것은 국가가 수행할 기술적 해법이었지, 국가가 권위주의적이냐 하는 정치적 성격이 아니었다. 이 조항 덕분에 테크노크라트적 수단으로 세계의 빈곤에 대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정치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44년의 동기는 전시에 소련과 동맹을 다지는 것) 사이의 동맹이 가능해짐
- 기막힌 아니러니는 정치에 반대하는 조항 덕에 정치를 추구하는 일에 세계은행을 이용하기가 더욱 쉬워졌다는 점. 맨 처음에는 44년 소련의 독재자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은행을 이용하는 명분으로 이 조항을 이용했다. 50년에는 콜롬비아 독재자들과 동맹하여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은행을 이용하는 명분으로 이 조항을 이용. 그로부터 60년이 흐른뒤, 세계은행이 자신들의 차관을 받는 나라의 권위주의적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을 눈감아 주는 명분으로 세계은행 대변인은 나에게 4조 10항을 제시했다. 이 6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세계은행이 지원한 독재자들은 공교롭게도 테러와의 전쟁에 가담하는 미국의 동맹국들이었다.
- 시기순으로 보면 첫째, 중국에 대한 서방의 반식민주의적 이해가 중국인들의 개인권리를 억압하는 중국 독재자의 이해와 일치했다. 둘째,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의 식민주의적 이해가 아프리카인들의 개인권리를 억압하는 식민지 해방후의 아프리카 통치자들의 이해와 일치했다. 그리고 셋째로, 콜롬비아에 대한 냉전기 미국의 이해가 콜롬비아인들의 개인권리를 억압하는 콜롬비아 독재자의 이해와 일치했다. 이런 과정이 50년대가 끝나기 전에 완성됨. 이때가 발전사상이 시작된 시기라고 간주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 전에 끝나버렸다.
- 게이츠와 블레어는 빈서판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한 탓에 몇가지 잘 알려진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짧은 기간동안 단일국가를 관찰한 결과는 심각한 통계문제로 인해 신뢰하기 어려운 증거임. 게이츠는 5년에 걸친 어린이 사망률 향상을 정확한 성공의 척도로 취급하고 있지만, 중요한 문제는 어린이 사망률이 부정확한 측정으로 악명이 높은 통계라는 점. 어린이 사망률의 측정오차는 너무 커서 5년정도의 단기간에 걸친 변화는 오차 크기에 가려 통계의 의미를 상실함. 문제는 가난한 나라의 정부통계청이 그 나라의 출생과 사망을 전수조사로 폭넓게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 통계전문가들이 그런 작업을 감당할 여력이 없거나, 아니면 열심히 작업하지 않는다. 게이츠도 이전에는 정부가 에티오피아 촌락에서 발생하는 아동의 출생과 사망을 기록한 공식자료가 전혀 없었다고 인정. 중요한 기록이 결여된 상태인지라, 어린이 사망률은 이런 저런 부정확한 자료조각을 토대로 지볘됨. 이를테면 아이가 최근에 사망했는지 또 몇살에 죽었는지 엄마들에게 물어서 답변을 얻는 식이다. 게이츠의 희망적 주장대로 정부가 이제는 그런 지표를 정확하게 추적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님. 왜냐하면 90년 자료는 자료의 부정확성이 엄청나게 커서 이때부터 2015년까지 사망률을 3분의 2만큼 줄이겠다는 정확한 목표의 출발점이 될 수 없기 때문.
- 최근에 이러 경제학자들은 빈서판을 내다버리기 시작. 가까운 시점의 단기에서 장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그들은 정말로 아주 긴 장기를 관찰했다. 그들은 수백년에 걸친 경제적 자료를 진단했는데, 이를테면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점부터 시작된 개인주의적 가치의 출현이 오늘날의 번영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 개인주의적 가치가 어떤 성질의 것이며, 그런 가치가 왜 끈질기게 존속하는지 좀더 깊게 이해하려면 제노바 사람들을 12세기의 다른 집단 마그레브 사람들과 비교해보는 것이 좋다. 마그레브인들은 개인의 이해보다 집단의 이해를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 집단주의적 가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방어적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장기적 성공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 신뢰의 부재와 타인에 대한 존중의 부재는 위계적 사회의 대표적 특징.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을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간주. 그리고 본능은 근시안적이고 해로운 방향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여김. 그러한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믿을게 못되고 억압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게 아무것도 없다고 보기 때문. 좋은 사고란 그저 강압의 결과라고 간주된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은 시민이 잘 행동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 자유가 신장되던 17~18세기에 걸쳐 먼저 네덜란드에서, 그리고 뒤짜라 영국에서 경제가 흥성했다. 1650~1800년 런던, 암스테르담, 글래스고는 나중에 교역이 장점을 설파하는 애덤 스미스를 배출하게 됨. 1800년에 이르자 대서양 무역상들의 근거지들이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것들이 됨. 이 무역도시들은 1600년에 아시아와 동일한 도시화 수준에서 출발했지만, 그후 아시아 및 동유럽을 큰 폭으로 앞섬. 이와 같은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왕의 세력권 밖에서 성장한 상업적 이해집단들이 통치자의 권력에 대한 견제를 요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권력제한 덕에 상업적 이해집단이 재산과 이익을 몰수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상거래 진입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왕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물론 왕권의 득을 보는 기성 경제 엘리트들은 이런 변화에 저항. 그러나 이익은 정치적 힘을 동반한다. 대서양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은 신생무역상들이 오래된 이해집단과 맞서 승리하는 데 충분했다. 그러자 자유로운 제도가 자유의 가치를 만들어냈고, 반대로 자유의 가치가 자유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의 되먹임이 일어났다.
- 집단의 이해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면 집단구성원들이 자기집단에 대해서는 건전하게 행동하는 반면, 외부자들에 대해서는 대놓고 사기를 치고 악용하는 내부자와 외부자간의 차별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행동하면 그 사회의 평균적인 신뢰와 존중이 떨어지기 마련. 그리고 서로를 불신하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가치관은 다시 독재적 통치를 촉진. 체제를 지지하고 그 덕에 후견을 받는 내부자들은 체제가 외부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해도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음. 외부자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재의 역사와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지역을 좀더 민주적 역사와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지역과 비교해보면, 오늘날에도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난함. 가장 대표적 사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카탈루냐 지방은 예외)이고, 당연히 남부 이탈리아도 해당됨.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민주적 역사를 배경으로 번영을 누리는 가장 긍정적 사례는 영국과 네덜란드, 북부 이탈리아다.
- 유럽인이 소수파인 남미 사회와 유럽인이 다수파인 북미사회의 차이 또한 주로 지리적 차이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즉 사탕수수와 금을 둘러싼 경제가 유럽인 엘리트의 소수파가 흑인과 원주민의 다수인구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탕수수는 남미와 카리브해에는 존재했지만, 북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지리적 사건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 멕시코와 남미 안데스지역의 인구밀도가 북미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 유럽인이 옮긴 질병으로 인해 사망률이 재앙적으로 높아진 뒤에도 중남미 인구밀도는 북미보다 훨씬 높았다. 원주민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유리한 전략도 상이. 즉, 유럽인들이 다수인구를 이루어 정착하는 것보다 소수의 지배자로서 다수의 원주민을 착취하는 것이 훨씬 유리. 왜냐하면 남미 원주민을 몰아내고 유럽인들이 다수가 되어 정착하는 데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려면 엄청난 군사력이 필요한 반면 당장 얻을 혜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반면, 소수의 정착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둬 이득을 보는 데는 작은 군사력이면 충분했다.
- 1700년대 말 콜롬비아에 살던 유럽인 후손들의 인구는 나라 전체의 26%에 불과했는데, 미국에 있는 유럽인 후손들의 인구는 나라전체의 81%였다.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 등에 설탕농장을 경영하던 소수파 유럽인들은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사회발전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장악은 장기적 발전에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7~18세기 흥성하던 설탕산업이 장기적 침체로 들어선 뒤 이를 상쇄할 만한 새로운 산업의 성공이 충분히 일어나지 못했다. 즉 엘리트 집단의 억압이 너무 드센 나머지 새 산업을 일으킬 만한 기업가 집단이 생겨나지 못한 것. 이에 더하여,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한 남미 다수의 인구에게는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투자와 혁신을 일으킬 동기가 없었음. 정부를 장악한 유럽계 엘리트 외부의 평균적 콜롬비아인들은 새로운 산업에 투자할 동기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 산업을 일으켜 봐야 엘리트 집단의 정부에게 몰수당하면 그만이기 때문. 그래서 유럽인들이 소수파였던 사회는 결국 유럽인들이 다수파였던 사회에 비해 소득수준도 낮고 불평등도 심해졌다.
- 대략 18세기의 시점에는 북미와 남미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임. 이렇게 보면 북미에 살았던 백인들에게는 남미의 사악한 억압자들과 달리 성자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있었다고 강조하는 견해를 교정할 필요가 있음. 17~18세기 북미와 남미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북미의 앞날이 남미보다 훨씬 좋지 못했다는 점. 네덜란드 인들은 1667년 전쟁에서 뉴욕을 영국인들에게 다시 빼앗았지만, 영국인들에게 그 땅을 다시 매각. 네덜란드인들은 그 대가로 네덜란드령 기아나(지금의 수리남)의 설탕농장을 받았다.
-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의 천재성은 가치관이 거의 정반대인 집단들을 만족시키는 능력을 계속 발휘한다는 점. 테크노크라트적 발전은 타민족을 적대시하는 부자나라 사람들을 대할 때는 이민제한을 정당화해줄 뿐 아니라, 바로 그 타민족을 걱정하는 부자나라의 인도주의자들을 대할 때는 그 타민족 국가의 발전을 선물로 내놓는다.
- 지금까지 발전은 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올바른 국가적 행동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찾으려고 했음. 이것은 방향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었다. 물어야할 질문은 올바른 국가적 행동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떠한 정치, 경제적 권리의 체계를 갖추어 놓아야 다수의 정치, 경제적 행위자들이 국경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들 자신의 발전을 위한 올바른 행동에 나설 것인가이다.
-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어떤 요인들때문에 나라 사이의 성장률이 달라지는지 설명하느라 이십년을 보냈다. 그들은 수많은 국가적 정책을 비롯해 갖가지 특징들을 따져봤지만 그중 성장률 차이를 견고하게 예측해주는 요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견고한 예측력을 보이는 중요한 예외적 요인이 국가적 특징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발견은 지금까지 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견고한 예측력을 보여주는 그 국가적 특징이란 나라가 어떤 지역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 그러니까 나라가 사하라 이남에 위치하는가 아닌가는 나쁜 성장을 예측해주는 좋은 지표가 됨. 라틴 아메리카에 속한다는 사실은 세계 평균미만의 성장을 예측해주고, 동아시아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세계평균 이상의 성장을 예측해줌. 이처럼 지역적 위치의 영향은 서로 다른 성장률 자료 집합에서도 유효함.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1%포인트 떨어지는 성장률을 보이며, 아프리카 국가들은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2%포인트 떨어짐.
- 푸젠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국외 중국인들은 아시아의 유대인이라 불림. 토머스 소웰은 유애딘들을 유럽의 중국인들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한바 있다. 이 대목에서 20년대 중국인 학자와 미국인 학자들이 어울리는 와중에 시작된 국가주의적 발전관을 상기해 보자. 국가주의적 발전관은 중국인 이민을 제한하는 미국의 인종주의적 태도를 은폐하고 다른 데로 시선을 따돌리는 편리한 도구였다. 미국이 이민을 가로막았던 중국인들이 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이민자들이었으니, 아이러니 아닌가.
- 국가의 특권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하는 논쟁에서 전자는 주로 나라차원에서 일어나는 발전을 근거로 삼았던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는 발전 커뮤니티에서 주장하는 것만큼 중요치 않음. 국가가 정말로 중요할 때는 알레포 질병과 무역을 붕괴시키는 국경처럼 때때로 나쁜 방식으로 중요하다. 나라차원의 고도성장을 숭배할수록 이러한 성공을 밀어붙일 더 많은 권력을 국가에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았다. 나라의 성장실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왜냐하면 그래봐야 그만한 혜택이 성장으로 돌아온다는 증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장률 측정 자체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나라를 강조하는 전략이 정말로 그만한 값을 하는지 아닌지조차 알 방법도 별로 없다. 늘 그렇듯, 피해를 보는 것은 집단적 성공을 추구하는 국가적 명분으로 억압되는 개인의 권리다.
- 스미스가 탐욕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오해임. 이 오해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좌파 측의 거부감을 촉발하는가 하면, 우파측에는 스미스가 기성 사업가들의 이익을 모조리 좋은 것으로 치켜세운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 스미스는 부자와 사업가 둘다를 좋지 않게 보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첫번째 고전 도덕감정론에서 스미스는 부자들을 일컬어 이기적이고 탐욕적 본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칠줄 모르는 허황된 욕망에 사로잡힌 소수의 거만한 양반들이라 불렀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사업가들을 언급하면서 상인과 제조업자의 천박한 욕심과 뭐든 독차지하려는 정신상태를 지적. 그가 글래스고에서 직접 목격한 모습도 그와 비슷했다. 스미스는 자신의 저술 전체를 꼴사나운 독점정신을 겨냥하는 맹렬한 공격이라 설명했다. 스미스의 또 다른 유명한 언급에 이 점이 좀더 자세히 나옴. 같은 업종의 상인들은 좀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같이 웃거나 즐기는 일조차 없다. 그들이 만다면 한다는 이야기가 대중을 골탕먹이는 음모나 가격을 올리는 술수다. 스미스는 욕심많은 상인들이 일반적 복지의 향상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보았다. 일반적 복지와는 정반대로, 그들의 관심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이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미스의 자유시장은 기존의 상인들을 더 부자가 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독점권과 특권을 박탈해서 그들의 부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스미스가 제시하는 방향은 소수의 거만한 양반들을 더 부자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그의 취지는 오히려 빈곤층을 위한 저렴한 식량의 수입을 촉진해 그러한 거대지주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기업의 자기 잇속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자기 잇속이 작동되는 힘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항상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장 저렴하게 파는 사람들에게서 사려는 대다수 사람들의 이해이며, 그럴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명분에서 스미스는 국내시장이나 국외시장에서 특권과 독점의 철폐를 주창. 또 바로 이러한 명분에서 국내시장과 국외시장을 아우르는 자유무역을 주창. 스미스는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주로 부자를 이롭게 하는 생각으로 간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볼때도 시장인가 정부인가 하는 논쟁은 잘못된 논쟁이다. 한쪽은 시장실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기고, 반대쪽은 정부실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긴다. 이 논쟁의 초점은 정부와 민간에 걸친 각 유형이 행위자들에 대해서 사적인 보상과 사회적 보상을 좀더 효과적으로 조응시키는 문제여야 한다.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시장의 올바른 혼합을 찾기 위한 논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올바른 논쟁은 개인의 권리인가 국가권력인가 하는 문제다.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권리는 민간 및 정부의 공급자 모두가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하는 힘이다. 테크노크라트적 접근, 즉 전문가에게 해결을 맡기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최악의 해법이라는 것.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은 시장의 시험도 민주적 제도의 시험도 치르지 않는 행위자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 전문가들은 잘못된 지식을 동원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아무런 불이익을 겪지 않음. 그들이 낸 해결책이 어쩌다 효과를 보더라도 그들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전문가들에게는 커다른 성공을 고무할 유인이 없을뿐더러 실패를 철저히 제거할 동기도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은 전문화와 체험학습 그리고 교환의 이득이 어우러지는 선순환을 통해서 발전을 촉진. 보이지 않는 손은 비전문가들을 그들이 잘하는 일로 인도함. 그 일의 산출물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비전문가들은 체험학습이 늘어나 그 일을 더 잘하게 된다. 또한 교환은 그들이 계속해서 선순환의 규모를 키워 가도록 길을 열어줌. 즉 계속해서 판매량이 늘어남에 따라 더 잘하는 방법을 배우고, 결국 세계시장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룰때까지 선순환이 지속될 수 있음.
- 시장에서의 성공은 대단히 변덕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한데, 이에 대해 언급할 것에 세가지 있다. 첫째, 변덕스러운 것은 시장이 아니라 삶이다. 시장은 빠르게 변화함으로써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적응. 변화하지 않고 적응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시장의 변화는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둘째, 이러한 변덕스러움이야말로 기업권력이 너무 크다고 우려하는 걱정을 일부나마 경감시켜주는 요소다. 힘센기업들은 단지 잠시동안만 힘이 셀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기업들도 시장의 힘에 휘둘리고 그로 인해 시장점유율을 빼앗기거나 심하면 파산하기 때무니. 기업의 수장들은 더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심각한 문제가 불거지는 첫신호가 나타나면 회사가 잘 버티는 상황일지라도 최고경영자는 해고될 것이기 때문. 셋째, 변덕스러운 시장의 변화에는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오르막일 때는 계속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긴다. 이럴 때 열심히 일하고 계속 노력하면 고대하던 성공이 조만간 찾아올 것이다. 그러다 내리막길을 만나면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상황이 변하고 기업이 버티기 어려워지면 피고용자들이 커다란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예전 일자리가 사라지더라도 새로운 기업이 새 일자리를 창출함. 보이지 않는 손은 항상 최적의 국내적, 국제적 거래기회를 찾아냄으로써 작동한다. 그 최적의 기회란 딱 맞는 시장에 딱 맞는 상품을 딱 맞는 시점에 공급할 딱 맞는 나라의 기업의 딱 맞는 개인의 등장이기도 하다.
- 세계를 인터넷으로 연결해 빈곤을 해결하자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유행을 타지 않는 기술중 빈곤층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간과하고 있다. 발전에 주목하는 청중들은 외진 마을이라도 인터넷에 연결되기만 하면 실시간으로 작물가격을 조회할 수 있는 농민의 모습에 환호함. 하지만 그들은 인터넷을 조회하는 바로 그 농민들이 그 가격을 받고자 시장까지 자기 차량으로 작물을 실어나를 여건이 되는지는 묻지 않음. 상부주도로 일을 추진하려는 지도자들과 기술전문가들은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지식과 동기가 없다. 광대역으로 빈곤을 해결하겠다고 장담하던 그들은 청년들이 포르노를 구경하는 세상을 실현해 주었다.
- 1500년의 기술이 오늘날의 기술(1인당 소득)을 예측해 준다. 실제로 오늘날 유럽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소득 차이의 78%는 1500년에 이미 존재했던 기술에 의해 설명됨. 기술의 역사적 뿌리는 이보다 더욱 깊다. 우리에게는 기원전 1000년의 기술과 서기 1년의 기술에 관한 아주 개략적인 자료가 있다. 그 자료를 보면 기원전 1000년의 기술과 서기 1년의 기술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며, 서기 1년의 기술과 서기 1500년의 기술 사이에도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 이로부터 곧바로 기원전 1000년의 기술과 서기 1500년의 기술사이에도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함
- 경제사가 조엘 모키르는 계몽의 경제에서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중시하는 새로운 계몽사상 덕에 영국 산업혁명이 성공했다고 보았다. 이따금 아주 괴상한 사람들이 터무니 없는 생각을 떠벌리더라도 이단이나 변절이라고 공격하는 격렬한 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넉넉한 관용의 사회에서만 지성이 충만한 혁신이 일어난다. 모키르는 혁신을 뜻하는 이노베이션이라는 말이 예전에는 욕설의 하나였음을 지적. 혁신가들은 두로 공경을 받는 관념, 제도, 사상가, 통치자를 향해 모욕적 경멸을 선사했다. 계몽주의 시대를 겪고 나서 혁신은 칭찬의 말이 되었다.
- 오늘날 기술과 소득에서 장소가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중요한 것일까. 앞에서는 장소를 기준으로 서기 1500년 시점의 기술을 측정해 보았다. 사람을 기준으로 기술적 유산을 측정하려면, 오늘날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그들의 조상이 서기 1500년 시점에 가지고 있던 기술을 측정해야 한다. 즉 그 조상들의 후손인 오늘날의 사람들이 1500년 이래 장소를 바꾸었는지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장소인가, 사람인가 두가지 기준의 설명력을 보면, 서로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큰 차이가 난다. 오늘날 기술과 소득을 설명하는 일에서 1500년 이래 기술적 유산을 사람을 기준으로 측정하는 쪽이 장소를 기준으로 측정하는 쪽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함. 이런 결과는 역사적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발전연구에서도 여러번 반복적으로 검증되었다. 즉, 중요한 것은 장소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다.
- 알 수 없는 지식문제에 대한 해법은 있다. 어떤 해법들이 있는지 보자. 첫째, 폴 카가메 같은 사람이 지휘하는 뛰어난 전문가 집단에 큰 역할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둘째, 아주 많은 독립적 개인들이 아주 많은 서로 다른 해결책을 시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혁신이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개인들이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중요한 지적을 했다. 이성의 성장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개인들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를 예측할 수는없다. 어느 견해들이 이성의 성장에 도움이 되며 또 도움이 되지 않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 누구나 아는 것이 극히 작을 뿐더라 우리중 누가 가장 잘 아는지 좀처럼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독립적이고 서로 경쟁하는 다수 참여자들의 노력을 신뢰한다. 그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뭔지는 몰라도 막상 보게 되면 원하게 될 것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해법은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수의 독립적 노력이다. 혁신과 개인주의는 서로 같이 가는 관계지만, 혁신과 순응주의는 같이 갈 수 없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순응하려고만 하는 내 생각을 모욕하는 짜증스런 반대자들이 있어야 한다. 셋째, 서로 경쟁하는 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손을 다시 상기시킨다. 서로 다른 다수의 혁신가들은 대중의 호감을 얻으려 경쟁. 시장은 어느 혁신이 인기를 얻고 어느 혁신이 쓸모없는지를 시험한다. 달리말해, 우리 소비자들은 어떤 신제품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지를 선택한다. 우리 소비자들은 무엇을 원하게 될지 미리 알지 못할 때가 많고, 막상 보았을 때나 그것을 원하게 된다고 언급한 하이에크의 말은 옳다.
- 세상 사람들은 인자한 독재자가 자국민들에게 발전을 안겨준다고 믿는다. 세간에 떠도는 그같은 이야기의 전통은 아주 강력함. 그리고 기적을 이룩한 독재자들의 목록은 과연 끝이 없을 정도로 길다.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폴의 리콴유는 물론, 한국의 박정희, 대만의 장제스가 이 목록에 오른다. 칠에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도 이 목록에 오름. 독재자들이 고도성장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인자한 독재자들이 정말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증거와 대적해야 한다. 그러한 증거는 자생적 해법보다 의도적 지휘가 낫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전문가들이 전횡이 발전을 가져온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꼭 보이는 모습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사실 이장에서는 그러한 고도성장이 일어난 것이 독재자들 덕분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굴레를 이겨낸 결과다.
- 우리의 심리적 편향 때문에 성장의 기적은 대부분 독재자하에서 일어난다는 진술을 독재자들은 대부분 성장의 기적을 이룩한다는 진술과 혼동함. 이것은 곧 우리가 인자한 독재자 가설의 강한 변종과 약한 변종도 혼동한다는 것을 의미. 우리는 약한 변종, 즉 기적을 이룩하는 독재자들이 있다는 증거를 보면서, 그것이 강한 변종 즉 독재자들은 전부 혹은 거의 다 성장의 기적을 이룩한다는 증거라고 해석함. 우리의 심리적 편향이 대세를 장악하면 강한 변종의 오류를 지적하는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전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실패보다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들을 때 편향적 인식은 더 악화됨. 뉴욕타임즈는 1960~2008년에 실패한 독재국가보다 성공한 독재국가를 4배 더 많이 언급. 다른 발간물들도 그러한 경우가 많다. 이게 어떤 음모라는 것은 아니나 매체는 단지 독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보도하며, 독자들은 실패보다는 성공에 대해 더 많이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앙드레 콜링바(81~93년 집권했던 성공적이지 못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독재자)보다는 리콴유에 대해 훨씬 많이 듣고 싶어할 것이다.
- 중국의 예를 보면 정치적 자유의 신장과 경제적 자유의 신장을 달리 바라보는 이상한 비대칭이 있다. 정치적 자유의 신장은 독재자의 공적으로 비치지 않지만, 경제적 자유의 신장은 독재자의 공적으로 치는 경우가 많음. 그러나 정치적 자유든 경제적 자유든. 자유의 신장은 국가권력의 축소와 개인권리의 신장을 의미. 따라서 두가지 경우 모두, 독재자들은 그들이 쥐고 있던 권력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독재자들이 정치적 자유를 확장하는 조치를 취하면, 우리는 보통 저항운동의 압력대문이라고 생각. 그런데 독재자들이 경제적 자유를 확장하면, 우리는 이것을 현명한 독재자가 시장주도적 발전을 고무하려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정책이라고 간주하는 경우가 허다함. 이런 해석이 옳을지도 모르나 독재자들이 저항운동의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경제적 자유의 신장을 허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 중국이 78년 이후 집단농장을 가족농장으로 바꾼 것은 유명한 이야기. 이 변화 역시 덩샤오핑의 의도적 선택 못지 않게 농민들의 저항과 관계 깊다. 농민들은 여러해동안 사적 보상이 매우 작은 집단농장을 위해 생산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고 가족소유 경작지에서 생산을 늘리기 위해 노력. 66~67년 문화혁명이 한창일 때 마오는 무자비하게 집단농장을 밀어붙였지만, 그 대가로 작물생산은 아주 빈약해짐. 마오 통치말기(68~76)에는 정부가 농민들에게 농기계, 비료, 농약, 개량종자를 더 많이 지급했다. 하지만 집단농장의 동기유발은 너무 미약해, 농업생산량은 인구성장을 겨우 따라갈 정도에 불과했다. 76년 마오가 사망하고 나서 중앙에 덜 무지막지한 권력이 들어서자, 농민들은 마침내 출구를 발견. 작업시간 중 일부동안만 집단농장대신 가족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눈감아 달라고 지역당 간부들에게 뇌물을 먹인 것이다.
- 70년대 말 안훙성과 쓰촨성을 비롯해 농민들이 혹독한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지역에서 이런 협상이 많이 일어났다. 지역당 관리중에는 농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고, 농민들 자신과 지역당 관리들 모두에게 득이 되자, 가족농장은 걷잡을 수 없는 분산된 방식으로 확산. 결국 82년 중앙당은 공식문건에서 현장의 실정을 인정하고, 가족농장을 사회주의적 집산경제의 핵심 시스템의 하나로 승인
- 스미스는 정치질서에 관해 그가 계획했던 세번째 책을 완료하지 못했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가 보이지 않는 손과 더불어 자기교정 시스템을 이루듯, 정치적 자유가 자기교정 시스템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살을 붙이는 일은 그의 후계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이미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정의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경제 모두가 개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교정하는 밑으로부터의 상향식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케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는 통치자를 통해 자기교정이 필요없는 완벽한 위로부터의 하향식 정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늘 어리석음과 부정의가 넘쳐나는 세상이니만큼 미래는 케네의 방향이 아니라 스미스의 방향으로 개척되어 왔다. 서구세계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나 서구밖 나머지 세계에서는 케네가 승리했다. 21세기의 발전경제학자들은 여전히 현명한 자문가들을 거느린 인자한 독재자를 꿈꾸고 있다.
- 마틴 루터킹 2세는 미국 흑인들의 빈곤을 가슴깊이 걱정했지만, 빈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동등한 권리라는 문제가 희석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동등한 권리의 원칙이 수용되지 않는 한, 행동을 거론할수도 없고, 원칙을 거론할수도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행동을 이끌어 줄 원칙이 없다면 행동도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의 동등한 권리라는 원칙을 얻어내지 못하는 한, 흑인과 백인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발언을 멈출수도 없으며,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킹은 흑인의 빈곤을 심각하게 염려했지만, 문제의 틀을 흑인의 빈곤을 종식하려면 우리가 무얼해야 하는가로 잡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길이라고 생각. 킹이 꿈꾸었던 것은 흑인의 빈곤을 경감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계획이 아니었다. 킹의 꿈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그러한 신조의 참된 의미를 행동에 옮기는 나라였다. 킹이 꿈꾸었던 것은 흑인들이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애당초 흑인들을 마침내 중산층으로 만들어줄 전문가들의 계획을 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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