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는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 시대가 끝나고 영상이나 음성 시대에 돌입. 일반대중도 쓰기의 시대가 끝났다고 믿었다. 근대가 서적의 시대라면 현대는 음성, 영상의 시대. 아마 그 상징물이 휴대전화인지도 모른다. 유선전화와 달리 언제 어디서나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페라리스는 이런 맥루한의 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맥루한의 예언과 달리 현대는 쓰기 붐이 일 것이라고 예상. 오늘날 휴대전화는 단순히 말하기 위한 용도로만 쓰이지 않는다. 문자를 작성하거나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인터넷 정보를 읽거나 영상과 음악을 올리거나 내려받기 위해 사용됨
- 파놉티콘은 탑의 맨 꼭대기에서 탑을 원형으로 에워싼 죄수용 감방을 감시하는 건축물을 가리킨다. 상대의 눈에 띄지 않고 중앙에서 일체의 상황과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 권력은 존재하되 모습을 감추고 두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 하나의 시선이 무수한 눈의 역할을 하는 데 거기에서 권력이 확산된다. 현대의, 그것도 모델로 손꼽히는 최신 형무소조차 대개는 이런 원리로 세워짐. 푸코에 따르면 형무소만 아니라 근대사회전체가 이런 파놉티콘 형태를 띤다. 현대의 세금제도, 정신병원, 정보파일, 텔레비전망, 기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기술이 파놉티콘을 응용하여 구체화된 것이다. 푸코의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사회뿐만 아니라 현대도 파놉티콘 사회라 부를 수 있다. 파놉티콘 사회를 이해할 때 알아야 할 중요한 특징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자의 비대칭성. 감시받는자는 늘 그 행동이 낱낱이 기록됨. 그에 비해 감시하는 자는 모습을 감추고 있어 상대에게 보이지 않음.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늘 감시의 눈길을 의식하며 생활하게 됨. 또 하나의 특징은 감시로 인해 사람들이 규율훈련을 받는다는 점.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에 지배당해 질서를 파괴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함. 그런 행동을 하면 사회에서 배제되기 때문. 사회에서 잘 지내기 위해 순종적인 '주체=신민'이 되는 것이다.
- IT가 낳은 자동감시사회. 푸코의 감시사회 개념은 발표되었을 당시(70년대) 아주 참신해 보였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에 비추어 보면 낡아서 군데군게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보임. 그중 하나가 디지털화 문제임.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생활이 완전히 디지털화되었다. 그런데 푸코가 제시한 감시기술은 말하자면 아날로그적이어서 기록도 문서로 축적됨. 미국 미디어학자 마크 포스터는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정보화사회론에서 슈퍼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을 내놓음. 푸코의 파놉티콘을 현대에 맞게 다시 읽은 셈이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 유통이나 그것이 만들어내는 데이터베이스는 일종의 슈퍼 파놉티콘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벽과 창, 탑, 간수가 없는 감시 시스템이다. ... 개인은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도서관카드 등을 이용하며, 늘 쓸 수 있게 준비해놓고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거래는 데이터베이스에 코드화되어 기록으로 남음. ... 모든 개인은 정보의 원천인 동시에 정보기록자이기도 함. 홈네트워킹은 이 현상의 최적화 상태이자 정점이다."
- 푸코가 파놉티콘 개념을 도입할 때, 그에게는 역사적 도식이 있었다. 그는 독일의 감옥개혁론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견해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고대는 구경거리 문명이었다.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대상을 감찰할 수 있게 한다는 과제에 부응하는 것이 사원, 극장, 원형경기장의 건축이었다. ... 그런데 근대가 제기하는 것은 이와 반대되는 문제다. 즉 대다수가 소수자에게, 나아가서는 유일한 자에게 그 모습을 즉석에서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이 도식은 너무 유명하다. 이 견해를 토대로 많은 연구자가 근대는 소수자가 다수자를 감시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사회학자 토마스 매티슨에 따르면 이런 해석에는 결정적 오류가 있었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넘어간 점도 있다. 푸코는 '고대=구경거리', '근대=감시'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대비는 역사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이 같은 역사 이해는 분명 잘못되었다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은 다음과 같다. 파놉티콘적 시스템은 과거 2세기 동안 눈에 띄게 발전했지만 그 뿌리는 고대에 있다. 단순히 개인의 감시기루만이 아니라 파놉티콘적 감시 시스템 모델도 초기 기독교 시대 혹은 그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푸코가 강조하듯이 감시기술은 근대만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이다. 나아가 또 다른 측면에도 주의해야 함. 근대사회에서는 감시기술만이 아니라 구경거리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푸코는 이 측면을 완전히 무시했다.
"푸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근대의 감시 시스템에 관해 우리의 이해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크게 기여했다. ... 그러나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반대 프로세스를 무시했다. 즉, 감시 시스템과 동시에 발생해 똑같이 기하급수적 속도로 발전한 과정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매스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을 꼽을 수 있다. 그것은 다수자가 소수자를 볼 수 있게 만든다"
매티슨은 이런 해석을 토대로 파놉티콘에 맞서는 개념을 만들어냄. 동시라는 뜻의 syn을 써서 시놉티콘이라 명명. 감시뿐만 아니라 다수자가 소수조를 구경하는 측면까지 동시에 갖추었다는 뜻. 다시 말해 우리는 감시받는자인 동시에 구경하는 자이기도 함. 매티슨은 구경거리라는 측면을 매스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에서 보자면 오히려 스마트폰을 떠올리는 편이 적절할 듯함. 우리는 끊임없이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페이스북에서 본 정보에 좋아요를 누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정보를 검색할 때, 우리의 동향도 빠짐없이 감시받고 있다. 화면을 보는 동시에 감시당한다. 이 두가지는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 원래 개인이란 '분할이 불가능'하다는 의미. 그런데 통제사회에서는 개인이 매번 세분화되고 기록됨. 우리 일상생활을 돌아보면 다음에 나오는 들뢰즈의 말이 현실로 느껴질 것이다.
"통제를 위한 언어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숫자가 나타내는 것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집단과 개인의 대치가 아니다. 분할이 불가능했던 개인은 분할을 통해 그 성질을 변화시키는 가분성을 띠게 되었다. 집단도 표본이나 데이터, 혹은 마켓으로 데이터뱅크화 된다"
다시 말해, 개개인은 단편적 정보로 분할되고 분할된 정보는 끊임없이 기록된다. 카드로 쇼핑을 하고, 내비게이션을 작동해 차를 운전하고, 교통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구글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트위터로 의견을내고, 메일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 각각의 행동이 하나하나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관리를 받고 있다고 의식하지 않는다
- 후쿠야마와 스톡 양측은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스톡 또한 현대의 바이오테크가 포스트휴먼(인간 이후)을 불러올 거라 예상. 예를 들어 스톡이 쓴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현대의 상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로 대변되는 영장류의 진화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두드러진 생물학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으며 현재의 모습과 성질을 초월하는, 새로운 상상력의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음을 눈치챈 인간은 여전히 수수에 불과하다. ... 우리는 인류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우리 자손은 느리지만 점진적 자기변혁을 통해, 현재 통용되는 의미에서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현 인류와 다르게 변할지도 모른다. ... 호모사피엔스는 그 진화를 급속도로 앞당김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를 낳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조는 생식세포계열의 유전자 개조를 가리킴. 구체적으로는 수정란에서 유전자를 조작한다는 말이다. 이 기술로 유전자가 개조되면, 그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런 개조가 몇 세대에 걸쳐 반복되면 머지 않아 전혀 다른 생물(포스트휴먼)이 탄생할지 모른다
-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세상을 바란다면, 누구나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 한 타인의 희망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인간복제 문제도 이와 같다. 인간 복제를 바라는 사람이 나왔을 때, 이를 금지하는 사람은 인간복제가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명시할 책임이 있다. (도킨스)
-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은 자명한 대립항이었다. 그런데 이제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우리가 직감적으로 하던 구별에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버마스는 이 혼란이 "결국에는 인격체가 자신의 실체적 실존에 대해 갖는 자기관계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다." 라고 보았다. 이 말을 할 때 하버마스가 마음속에 떠올린 개념이 있다. 출산을 통해 인간의 자기 독자적 생명이 시작된다는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출산성. 하버마스가 생각하기에 복제 인간에게는 이 출산성이 없었다. 하버마스의 논의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탄생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사고방식이 전복될 거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자명했던 자연-기술의 대립항이 현대에서 비구분화되며 혼란을 야기한다는 말이다. 특히 인간이 기술의 대상이 될 때, 이 비구분화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기술이 향하는 지점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그 기술이 인간을 향하기 시작했다. 자연을 변화시켜온 기술이 이제 인간이라는 본성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황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우리에게 도래하는 현실을 똑똑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복제인간 문제는 이제 막 현대의 역사적 상황을 비추기 시작했다.
- 니체와 푸코는 인간의 종언과 인간의 극복을 말했다. 이때 상정한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념으로서의 인간이었다. 그 점에서 그들의 사상은 지극히 추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그 사상이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 르네상스이후 근대사회에서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서적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주의(휴머니즘)와, 인간을 중심에 둔 인간주의(휴머니즘)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 이런 근대 휴머니즘이 종언을 맞이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서적을 기반으로 한 인문주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생명과학과 유전자공학의 발전으로 인간주의가 끝나려 한다. 근대를 지배하던 서적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가 이제 곧 막을 내리려 하는 것이다
- 격차(불평등)가 왜 나쁠까? 이런 질문을 하면 당연하다며 질타를 받을지도 모른다. 혹은 차별주의자로 규탄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격차(불평등)는 악이다고 전제하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격차(불평등)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피케티도 라이시도 격차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격차 자체가 부당한 것처럼 보인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격차를 해소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미국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의 '불평등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그는 '개소리에 대하여'의 저자로 유명함. 많은 사람들이 격차를 시정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프랭크퍼트의 논의는 우리에게 귀중한 관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격차 해소와 같은 세간의 평등주의적 감정을 역이용하듯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한다.
"경제적 평등은 그 자체로, 특히 도덕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자면 누구나 같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사안은 아님. 각자가 충분히 소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 만일 누구나 돈이 충분하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있는지 아닌지는 특별히 고려해야할 관심사가 아니게 된다"
프랭크퍼트는 이런 생각을 평등주의와 대비해 충분성의 학설(충분주의)라 불렀다. 즉, 그의 학설에 따르면 '돈에 관해서는 누구나 충분히 소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때 소득의 많고 적음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빈곤층)이 있으면 도덕적으로 그 사람을 구제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격차가 아니라 빈곤인 셈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프랭크퍼트의 논의가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경제적 격차를 논할 때, 처음부터 경제적 평등이 온다는 전제를 내세운다. 그러고 나서 격차가 확대되면 옳지 않으니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런데 격차는 그 자체로 부당할까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의 소득이 달라도 각각 생활하는 데 충분한 돈이 있으면 수입격차를 바로잡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물론 생활하는 데 충분한 돈이 어느정도인지, 또 그것을 보장하려면 어떻게 할지 등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수없이 많다. 프랭크퍼트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원리적 문제라서 그 부분까지 자세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격차시정인지 빈곤구제인지에 따라 구체적 정책도 달라진다. 따라서 격차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옳은지 다시 묻지 않으면 안된다.
-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경제학 이론이 네오리버럴리즘이라 불린 계기가 있음. 대처수상과 레이건 대통령이 그들의 이론을 기반으로 정책(민영화 규제완화, 작은정부, 시민주의 등)을 펼쳤기 때문. 영국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네오리버럴리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
"70년대 이후, 정치 및 경제의 실천 사상에 있어 네오리버럴리즘으로 뚜렷한 전환이 곳곳에서 일어났음. 사회복지 영역의 대거축소, 규제완화, 민영화 같은 현상이 너무나도 일반적이 되었다. 소련이 붕괴한 뒤에 새로 태어난 나라부터, 뉴질랜드와 스웨덴부터 오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때로 자발적으로, 때로 강제적 압력에 대응하는 형태로 네오리버럴리즘을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정책과 실천을 통해 적응하고 있다. ... 게다가 이제 네오리버럴리즘 노선의 창도자들이 교육의 장에서(대학이나 수많은 싱크탱크), 미디어에서, 기업의 임원실과 금융기관에서 국가의 중요한 모든 기관(재무성과 중앙은행)에서, 세계의 금융과 무역을 규제하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나 세계무역기구 같은 국제기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네오리버럴리즘이 지배체제가 된 것이다."
네오리버럴리즘이 왜 네오가 들어갈까? 일단 리버럴리즘이라 말의 역사적 변화를 확인하기로 하자. 먼저 19세기까지의 리버럴리즘은 고전 리버럴리즘으로 경제활동의 자유방임을 원리로 정부의 시장개입을 배제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자 경제불황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복지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리버럴리즘이 영국(케인즈 경제학)과 미국(뉴딜 정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롤스의 리버럴리즘도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70년대가 되면 이런 정부개입형 리버럴리즘, 즉 케인스 경제학에 근거한 리버럴리즘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 이 세력은 20세기형 리버럴리즘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새로운 리버럴리즘을 주장. 이것이 20세기 말에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네오리버럴리즘이다. 하지만 요즘 네오리버럴리즘도 나오미 클란인의 쇼트 독트린에서 보듯이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 시장원리주의에 따라 격차를 확대하고 부유한 사람들과 기업과 국가를 우대하는 정책임. 네오리버럴리즘의 폐해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자 네오리버럴리즘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오늘날 다시 검토할 필요가 생겼다.
- 비트코인을 통화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펠릭스 마틴이 쓴 Money가 참고가 될지도 모름. 마틴에 따르면 화폐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표준적 오류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바로 물물교환의 효율성이 떨어져서 지불수단으로 다른 어떤 것(금과 은 등)이 널리 쓰였다는 가정이다. 이런 가정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근대 철학자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돈은 재화, 즉 상품세계에서 교환수단으로 쓰기 위해 선택된 상품으로 간주됨. 하지만 이런 화폐론으로는 최근의 비트코인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그 이전에 고작 종이쪼가리가 어떻게 돈으로서 의미를 갖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해 마틴이 생각하는 통화의 본질은 전혀 다른 측면에 있다. 그는 통화를 실체적 증거가 없는 표상적인 것으로 정의하고, 그 밑바탕에 있는 신용과 정산 메커니즘이야발로 통화의 본질이라고 설명. 그리고 표준적 화폐론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강조
"또 한가지 화폐론의 중심에 있는 것, 원시개념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 신용이다. 돈은 교환수단이 아니라 세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된 사회적 기술이다. 기본요소 중 첫번째는 추상적 가치단위 제공이다. 두번째는 회계시스템이다. 거래에서 발생하는 개인이나 조직의 채권 혹은 채무잔고를 기록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그리고 세번째는 양도성이다. 원채권자는 채무자의 채무를 제삼자에게 양도하고 다른 채무결제에 관여할 수 있다." 이런 세가지 기본요소를 만족한다면 통화가 굳이 금이나 은 같은 실체적 요소일 필요가 없다.
-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2부의 제목으로 삼음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가 죽기 전날 밤까지 쓴 논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슘페터가 거듭 묻기 때문이다. 슘페터는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는 2부 첫머리에서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극단적으로 답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테제를 내놓는다
"내가 확립하려는 논지는 이러하다. 즉 자본주의체제의 현실적이고 전망적인 성과는 자본주의가 경제상의 실패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한다는 개념을 부정할 정도로 훌륭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엄청난 성공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회제도를 전복하는 동시에 불가피하게 그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또 그 후계자로서 사회주의를 강력하게 지향하는 사태를 만들어낸다."
이 논지의 전반부는 "자본주의는 실패하고 붕괴한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에 반대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성공을 주장. 그럼에도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는 실패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예언했다면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성공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없다"고 예언한 것이다. 슘페터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엔진은 기업가가 부단히 단행하는 혁신이다. 이것이 오늘날 유명해진 창조적 파괴다. 그는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
"자본주의의 엔진을 움직이고, 그 운동을 지속할 수 잇는 기본적 충동은 자본주의적 기업의 창조와 새로운 소비재, 새로운 생산방법 혹은 새로운 수송방법, 새로운 시장, 새로운 생산조직의 형태에서 나온다. ... 이 창조적 파괴 과정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실현이다. 모든 자본주의적 기업은 이 안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엔진인 혁신도 머지 않아 일상적 업무처럼 변해 차츰 자동화될 거라고 예상. 혁신을 추진하던 기업도 성공을 거두면 관료화된다는 것. 슘페터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림
"자본주의 기업은 다름 아닌 자신이 쌓아올린 실적에 의해 자동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즉 스스로 성공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분쇄되는 경향이 있다고 우리는 결론 내릴 수 있다."
- 헌팅턴의 문명충돌론, 나아가서 문명관 자체에는 숱하게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의 문명개념이 본질주의적이고 경직되어 있으며, 다른 문명과의 대립만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이런 비판을 한 이가 프랑스 철학자 마크 크레퐁이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기만'에서 크레퐁은 헌팅턴의 문명개념을 검토하는 동시에 문명의 대립도식도 비판했다. 그는 헌팅턴의 논의가 테러리스트와 같다고 단언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서로 닫힌 두개의 전체로서 교착도 교류도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게 아니다. 두 문명은 다양한 모습을 띠며 조우했고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기억의 흔적을 남겼지만 실제로 서로 침투했다. 헌팅턴은 서양의 무언가가 이슬람 문명의 일부가 되었듯이, 이슬람 세계의 무언가가 서양문명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무시하고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무언가가 통과하는 것이 테러리스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문명이 섞인 것이 역사의 진실임에도 테러리스트는 그것을 테러라는 수단으로 봉합해버렸다."
그런데 01년 9/11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난 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짐. 문명의 충돌 2부와 4부의 요약만 읽어도 현대 세계에 대한 헌팅턴의 날카로운 직관을 확인할 수 있음
"2부: 문명간 세력균형은 변화하고 있다. 상대적 영향력이라는 의미에서 서구는 쇠퇴하고 있다. 아시아문명은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힘을 확대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결과, 이슬람 제국과 인근제국은 불안정해졌다. 비서구 문명은 전반적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4부: 서구는 보편주의적 주장을 위해 차츰 다른 문명과 충돌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슬람 제국 및 중국과의 충돌은 매우 심각한 상태다. 문명의 단층선이라 할 수 있는 지역차원의 분쟁은 주로 이슬람계와 비이슬람계 사이에 유사한 나라의 결집을 불러오고, 그것이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낳는다. 그로 인해 핵심국 정부는 전쟁을 막기 위해 고심하게 될 것이다."
헌팅턴이 문명충돌론을 설명할 때 결정적 요인이 되는 것은 종교임. 이슬람 신자와 동방정교회, 서구의 기독교 신자의 관계가 자주 격화되었다. 저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대립했다. 20세기 자유민주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투쟁은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끊임없고 치열한 다툼에 비하면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역사적 현상에 불과했다
- 도킨스와 데닛처럼 21세기가 되어 불거진 종교비판은 일반적으로 신무신론이라 불림. 그런데 종교의 권위가 이런 비판으로 인해 추락할까?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 가브리엘이 쓴 '왜 세계는 존재하는가'를 살펴보자. 가브리엘에 따르면 미국에는 확실히 현대의 신무신론이 비판하는 대상에 들어맞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신이 예수가 탄생한 수천년 전의 어느 시점에 우주와 동물을 창조했으므로 진화론과 현대 우주론은 틀렸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학보다 창조설이 더 자연을 잘 설명한다고 믿음. 가브리엘은 신무신론이 이런 창조설을 두고 '단순히 의문-설명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부분은 옳다고 평가. 하지만 그는 창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창조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과학적 가설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자의적 날조이며, 특별히 오래된 것도 아니다. 그 가설이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19세기로, 특히 영국계 미국인이 믿던 프로테스탄티즘이 부흥하던 때와 겹친다. 다행히도 독일에서는 창조설이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 ... 창조설은 종교의 자연스러운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미신의 한 형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창조설을 신무신론처럼 비판해봤자 그 원조격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되지 않는다는 점. 그 이유는 무얼까? 성경 창세기에는 '처음에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따'고 쓰여 있다. 창조설도 신무신론도 이 문장을 과학적 가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가브리엘에 다르면 이런 해석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초기 형이상항적 해석자들에 의해 이미 거부당했다. 따라서 신무신론이 원리주의적인(창조설을 주장하는) 기독교 신앙을 비판한다 한들, 창조설을 믿지 않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는 영향을 주지 않음. 그뿐만이 아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모든 것을 자연과학의 기준으로 이해하려는 신무신론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 많다. 가령 가브리엘은 그 예로 국가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
"국가는 자연법칙을 침해하는 초자연적 대상일까? 만약 자연적 대상의 기준이 자연과학에 의해 탐구되어야 하는 능력 안에 있다면, 국가는 신이나 영혼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대상에 불과하다. 국가가 존재한다는 가설은 자연과학적으로는 결정되지 않으므로 비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자의적인게 아닐까?"
가브리엘은 모든 것은 자연과학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 국가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자연과학을 토대로 설명하려 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임. 원래 국가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 그렇다면 국가가 존재한다는 가설은 비과학적이고 잘못된 것인가? 물론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님. 사실을 말하자면 창조설과 신무신론은 둘다 종교의 영역을 자연과학으로 설명하려 한 점에서 같은 바탕에 서 있는 셈. 즉 종교문제는 결코 창조설을 비판하는 신무신론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이해될 것이다. 종교에 접근하려면 자연과학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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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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