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해 살아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허망하고 뒤죽박죽인 것이다.
- 배우자나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부처가 출가할 때 아내인 야소다라 공주와 부모인 슈도다나 왕이 좋아했을까? 아니다. 아내나 남편, 부모가 하는 이야기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그 사람들은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 부모는 자기 나름의 어리석은 생각 속에서 자식이 오직 안전하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자식을 해탈시키지 못한다. 공자처럼 위대한 분도 아내 눈에는 짜증스런 남편일 뿐. 그러니 내가 보는 아내, 내가 보는 남편, 내가 보는 자식, 이것만으로는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부모가 보는 자식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부모니 말씀을 다 들으면 바른길로 가기 어렵다. 남편 말도 다 들을 수 없고, 아내 말도 다 들을 수 없다. 무조건 듣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갈 때는 자기가 깨쳐야 한다는 뜻. 깨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자기 인생의 문제를 자기가 단도직입으로 살펴서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인생살이가 절대 복잡하지 않다. 죽을 때까지 애써도 해결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이면 해결하고 나머지 인생은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수행해서 죽기 전에야 깨닫는 것이 목표가 되면 안된다. 단박에 깨닫고 나머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은 누군가가 세상을 창조했다는 데 전제를 두고 묻는 질문이다. 세상을 창조했다는 근거가 없는데도 그것을 이미 무조건 전제해 놓고 출발하는 것.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몰라서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잠꼬대 같은 소리이기 때문.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렇게 잘못된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
- 생각의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절벽에 이르렀을 때 한발을 더 내디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백척간두 진일보'이다. 앞을 가로막는 관문을 차고 나가야 삶이 자유로워짐. 이렇게 되면 비록 경계에 부딪혀 순간순간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는 자기를 알아차리고 있기에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게 됨.
- 우리들은 각자 자기의 허상 속에서 살고 있다. 착한 사람이 무섭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나에게서 착하다는 소시를 듣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 그 옳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다. 생각을 돌이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원래 엄벙덤벙하고 남의 비난을 종종 듣는 사람은 자기가 잘났다고 고함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가 문제라는 걸 조금은 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서 착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는 언제나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기를 돌이켜볼 힘이 약하므로 어떤 한 생각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종교적 맹신에 빠지는 사람들 대부분이 착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착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악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착하면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의미. 그래서 지혜로워야 한다. 자기의 우물에서 나와야 한다.
- 참선을 하는 데는 세가지가 중요. 첫번째로 큰 믿음이 있어야 함. 부처님의 말씀, 스승의 말씀에 대한 깊은 믿음인 신심이 있어야 함. 다음으로 큰 의문인 의심이 일어나야 함. 마지막으로 이것을 몰랐음을 분하게 여기고 알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일어나야 함. 쉽게 말해 '내가 여태껏 이것도 모르고 살았다니. 어떻게든 밝혀서 알고야 말겠다'라는 분심이 있어야 함. 누가 미워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몰랐다니'하는 큰 분발심이 일어나야 수행의 힘이 된다.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대신심, 대의심, 대분심 이 세가지가 삼발이처럼 있어야 함.
- 쓰고 있는 줄도 몰랐던 색안경을 적어도 한번은 벗어봐야 한다. 도로 끼고 살더라도 한번은 벗어봐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가 꿈속에서 헤매는지 모른다. 꿈을 꾸고 살더라도 꿈인 줄은 알아야 한다. 연극을 보면서 울고불고 하더라도 진짜가 아니라 연기인줄 알고 울어야한다. 우리는 인생을 마냥 뜬그룸처럼 산다. 꿈속에서 헤매듯이 몽롱하게 산다. 그러니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매일 죽느니 아우성을 칩니다.
- 좀더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이 그대로 화두이다. 언제나 삶에서 부딪히는 일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타성적으로 보지 말고 새로이 돌봐야 한다. 그렇게 해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수 있다. 울고 있어도 슬픔에 빠지지 않고, 웃고 있어도 기쁨에 빠지지 않고, 병이 나고, 늙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안심입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어차피 결혼한 김에, 어차피 자식 낳은 김에, 어차피 부도난 김에, 어차피 암에 걸린 김에, 어차피 늙은 김에 괴로워하지 말고 깨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는 게 좋다. 늙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병이 났을 때만 깨칠 수 있는. 이혼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배신당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일이 있다.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을 마셨다가 토했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원효가 해골바가지가 물을 미시고 토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하면서 왜 못깨치는가 물으면 '아직 해골 바가지 물을 못 마셨어요. 요새는 무덤이 없쟎아요. 무덤이 있으면 저도 들어갈래요' 이런다. 이건 잘못된 생각. 깨달음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님. 마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에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 육도를 윤회하며 헤맬수도 있고 단박에 깨달아 해탈할 수도 있다.
- 극장표를 보기 전에는 남편이 그렇게 좋았는데 극장표를 보고 나니 철천지 원수가 되었어요. 그러면 극장표를 보기전의 마음과 본 뒤의 마음 중 어떤 것이 본래 나의 마음일까?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셨을 때도 마찬가지. 어제 해골바가지인줄 모르고 마셨을 때는 그 물이 너무 달콤했는데 오늘 해골바가지인 줄 알게 되니 똑같은 물인데도 더러움을 참지 못하고 토해버렸다. 결국 다 내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육조 혜능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조금 후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어떤 것이 너의 본래 면목인고?" 이렇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하루에도 몇번씩 찾아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다 놓치고 원효의 해골바가지를 찾아 헤맨다. 해골바가지 물을 마실 기회가 없엇 깨치지 못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늘 현재 직분을 놓치고 산다. 무언가를 배우러 와 놓고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러 왔는데 그걸 방임하는 사람도 있고, 도움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도와준 사람을 욕하기도 한다. 지금, 여기, 왜, 이 세가지에 늘 깨어있으면 삶에 후회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 우리 나름대로 잘한다고 한 행동의 결과가 대개는 원치 않는쪽으로 갈 때가 많다. 그래서 괴롭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살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 우리는 모두 자기 나름대로는 수년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따. 누울 때는 눕는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누웠고, 앉을 때는 앉는 게 더 나아서 앉았고, 먹을 때는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먹었고, 말 안들을 때는 안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안 들었고, 말 안들을 때는 안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안들었고, 이렇게 다 그 순간순간은 자기 나름대로 잘한다고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다른 누가 만든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거짓말 할 때 거짓말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 순간은 거짓말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불법은 어찌 보면 굉장히 어렵고 고상한 것 같지만, 이렇게 진실을 알고 보면 우리 삶의 일상적 이야기, 지금 당장 내가 겪고 있는 괴로움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고상한 언어를 쓸 이유가 없다. 내가 옳다, 네가 옳다 이렇게 시비하는 것이 색이다. 옳다 그르다 하지만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다. 이쪽저쪽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 그냥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른 것이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공이다. 이 동네에서는 동산이라 하고 저 동네에서는 서산이라고도 하지만 이 동네와 저 동네를 떠나서 바라보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게 공이다. 그러니 색은 색이 아니라 곧 공이다. 공이지만 이 동네 가면 동산이라고 하고 저 동네 가면 서산이라 하듯이 또 색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한다. 금강경의 표현을 따르면 상이 상이 아니다고 한다. 공이라는 이야기다. 옳다 그르다 하지만 사실은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없다. 모두가 마음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일체유심조다.
- 부부가 같이 살면서 남편이 나쁜 인간이다, 아내가 나쁜 인간이다 하지만 사실은 누구도 나쁜 인간이 아님.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인간 자체는 그저 인간일 뿐. 다시 말해 공이다. 그런데 내가 나쁜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고 좋은 인간이라고 볼수도 있다. 나쁜 인간이라고 보면 내가 괴롭고 좋은 인간이라고 보며 내가 행복하다. 다시 말해 색이라 하지만 사실은 색이라 할 게 없고, 색이라 할 것이 없지만 또 한 생각 일으키면 색이 된다. 그러니 이왕이면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게 나한테 이롭다. 온작 교리며 가르침이며 이론이 사실은 아주 간단.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느니, 제상이 비상이라느니 한자를 써서 이야기하면 아주 고상하고 훌륭한 철학같이 여기고, 그냥 일상용어를 써서 이야기하면 모두 같은 이야기다. 우리가 일상적 삶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그 근본에는 다 이런 불교의 세계관이 깔려 있다. 불교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반드시 경전을 읽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님. 매일매일 우리가 접하는 세상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불교의 세계관이다. 이것을 제법실상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란 의미
-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선택에 선택을 거듭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걸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모두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 그런데 닥친 순간에는 잘한다고 했지만 지난 뒹 보면 잘못한게 많다. 순간순간 잘했지만 지난 뒤에 다시 보면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다 싶다. 왜 이럴까. 세상을 바로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눈 감고 살기 때문. 어리석어 그렇다. 잘못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순간순간은 나름대로 잘 살았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잘 살았다. 쥐가 쥐약을 먹고 물고기가 낚싯밥을 물 때는 제 딴에는 잘했다고 한 것이다. 보이지 않아서, 몰라서 그랬을 뿐. 무명, 즉 무지가 바로 모든 고의 원인. 자기가 눈을 떠서 그 무지를 깨뜨리면 고가 일어날 일이 없다. 그러니 자유롭고 행복해지려면 무엇보다 매 순간 깨어 있어서 이런 고를 가져올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한순간 어리석어 그런 행위를 해버렸다면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는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 이것을 인연과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쥐약을 먹어 놓고는 배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며 하늘을 원망하고 전생을 원망하고 사주팔자 타령을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얼굴, 모습, 인격 등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결혼을 한 사람은 결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부모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취직을 했으면 직장인으로서 책임을 져야한다
- 우리가 사람을 만나 함께 할 때는 우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내가 어떤 꽃을 선택할지는 자유. 그러나 그 꽃의 모양과 빛깔 중에 어느 하나만 좋고 어느 하나는 싫다 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한두가지가 좋아서 받아들였다면 그 나머지도 받아들여야 한다.
- 인간은 다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상대가 자기 역시도 귀하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은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가 중요하지 누구와 마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커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한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들은 그렇게 조건을 내거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일 뿐. 그냥 그 사람은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그것을 복잡하게 해결하려다보니 머리가 허옇게 셀 때까지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수행자들의 의식주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음식은 남이 먹다 남긴 것을 먹고 옷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입고, 잠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도록 했더니 평생 의식주 해결하는 데 허비할 시간으로 남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예로 들어보자. 수행자는 옷 한벌로 잠옷, 외출복, 법복을 두루 삼는다. 색도 모양도 하나뿐이니까 무엇을 입을까 고르면서 시간 보낼 일이 없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진 옷의 개수와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구입할 돈을 버느라 시간 보내고, 가서 고르고 사느라 시간을 보내고, 아침마다 옷장에서 골라 입느라 또 시간을 보낸다. 화장하고, 음식먹고, 잠자는 것도 마찬가지. 죽어라 일해 벌어서 집 사고 가구 사느라 다 사용한다. 또 술마시고 담배피고 잡담하고 골프치고... 이렇게 보낸다. 그런데 저는 술마시고 잡담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없어요. 사람들은 저한테 어떻게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느냐 묻습니다. 100시간 중에서 많은 시간을 먹고 입고 노는데 쓰는 사람과 100시간 대부분을 다른 사람 돕는데 쓰는 사람이 하는 일을 비교하면 그만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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