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뭔가 해야한다는 압박은 우리가 실질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목도하고 있을 때 뭔가 제스터를 취하려고 하는 미신적 강박과도 같음. 우리 행위는 종종 그러한 제스처가 아닌가? 말만 하지 말고 뭔가 행하라는 옛말은 상식의 낮은 기준에 비추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말에 속함. 오히려 근래의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자연에 개입하거나 환경을 파괴하거나 하는 등의 너무나 많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다. 물론 우리는 종종 무엇을 행하는 대신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기를 회피하려고 그것을 행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억불을 쏟아붓는 것처럼
- 위기들은 사람들을 뒤흔들어 자족성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근본원리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강제하는 게 사실이나 가장 자발적인 최초의 반응은 패닉이며 이는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이어진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전제들은 의문에 붙여지기는 커녕 훨씬 더 극렬하게 재언명된다. 그러므로 위험스러운 점은 현재 진행되는 붕괴가 나오미 클라인이 말한 충격원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용될 것이라는 데 있다
- 닷컴 거품이 터져버린 후 초당적으로 내려진 결정은 경제를 살리고 불황을 막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용이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붕괴는 수년전 미국에서 불황을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에 따르는 대가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진정한 위험은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대신 우리가 계속해서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할 서사가 그 붕괴에 관한 지배적 서사가 되리라는 데 있다. 우리가 염려한 것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붕괴의 경제적 결과들뿐만 아니라, 경제의 모터가 계속 돌아가게 하기 위해, 아니면 적어도 위기를 이용해 구조조정의 가혹한 조치들을 더 밀어붙이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과 미국의 개입주의에 다시 불을 지피고자 하는 명백한 유혹이 문제인 것이다.
- 범상치 않은 폭도인 녹색당원들은 자연을 인류보다 상위에 놓는 새로운 종교의 사제들이다. 생태운동은 사랑과 평화의 점잖은 압력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혁명세력이다. 많은 현대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신이 지정하는 악, 즉 지구온난화, 동식물의 멸종, 생물다양성의 소실, 슈퍼잡초 등을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비난하는 모양새를 취함. 이런 모든 위협들은 사실상 녹색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다. 녹색당원들은 자기들의 용어를 과학에서 빌려오면서 과학의 합리성을 자기들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방법은 새롭지 않다. 맑스와 엥겔스 역시 당대의 과학인 다윈주의를 자기들 세계관의 원천으로 삼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쏘르망은 생태운동이 21세기의 공산주의라는 친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의 주장을 수용한다. "생태주의는 공산주의의 재창조이자 반자본주의의 실제(형태)라는 점은 분명하다. ... 그러나 생태주의의 다른 반쪽, 거기서 다시 반은 맑스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이교도적 유토피아 혹은 자연숭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주의와 이교도 전통을 지닌 독일에서 생태주의가 그토록 강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주의는 반기독교적 운동이다. 자연이 인간에 우선한다. 생태주의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4분의 1은 합리적인 부분으로서 여기에는 진짜 문제들이 있고 그에 대해서는 기술적 해결책들이 있다.
-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는 그것의 성공자체가 충분한 정당화가 되기 때문.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매뉴얼이 있는 사회주의와는 정반대다." "자본주의는 철학의 시늉을 내지 않는 체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하는 말은 오로지 이것이다. 자 이건 제대로 작동한답니다. 만일 사람들이 더 잘 살기를 원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텐데 이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효율성이다."
- 동료 과학자가 보어의 시골집 문 위쪽으로 말의 편자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쳐 말하기를, 편자가 집에 악령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미신을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보어는 대꾸했다. "나도 믿지 않는다네. 내가 그걸 거기 둔 까닭은 사람이 그걸 믿지 않아도 그게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세" 실로 이것이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아무도 민주주의나 정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런 것들의 본질은 썩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나 정의를 믿지 않아도 그것들은 작동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 유기농 사과를 살 때 우리는 구매하고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즉 우리에게 있는 배려의 능력과 세계의식을 보여주며 집단적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정신의 최신의 과학적 표현은 행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과의 등장이다. 그러나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정의되는 우리의 정신화된 쾌락주의의 시대에 불안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프로이트의 메시지를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적실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과 쾌감의 이러한 자기파괴라는 수수께끼다
- 냉소주의자는 속지 않으나 오류를 범하는 자로서, 그들이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환각의 상징적 효능, 환각이 사회적 현실을 생성하는 활동을 규제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는 대중적 지혜의 입장을 취한다. 전형적 냉소주의자가 당신을 따로 불러 비밀스러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 결국에는 다 (돈, 권력, 섹스...) 문제라는 것을, 고매한 원칙이나 가치라는 건 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은 실제로 이념의 힘을 믿는다. 그들은 이념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는다. 그리고 냉소주의자가 그들은 이러한 죄를 짓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냉소주의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의 순진성이다. 진짜 현실주의자는 철학자들이다. 철학자들은 냉소적 입장은 불가능하고 모순적이라는 것,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원칙을 실제로는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금융붕괴는 세계자본주의의 뻔뻔한 비합리성을 모른 척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은행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에서만 7천억불이 지출된 것을, 부자나라들이 현 식량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들의 농업발전을 원조하는 데 쓰겠다고 약속한 220억불 가운데 지금까지 겨우 22억불만 내놓았다는 사실과 견주어보라. 식량위기의 책임은 제3세계 국가의 부패, 비효율성, 국가개입주의 같은 통상적 혐의자에 돌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개입주의 같은 통상적 혐의자에게 돌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농업의 세계화에 직적접으로 의존하는데, 이 점은 다름 아닌 빌 클린턴 자신이 세계 식량의 날을 기념하는 유엔행사에서 "세계 식량문제에 있어, 우리는 일을 그르쳤다는 시사적 제목하에 식량위기에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분명히 한 바 있다. 클린턴 연설의 골자는 현재의 위기가 식량소출을 세계의 빈자들에게 명백히 필수적 자원으로서보다 상품으로서 다룸으로써 대통령 재임시절의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일을 그르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분명한 목소리로 클린턴은 개별국가나 정부가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이 강요한, 그리고 수십년간 세계은행, IMF, 그밖의 국제기관들이 실행에 옮긴 서구의 장기적 정책들에 책임을 돌렸다. 이 정책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이 비료와 개량종자, 그밖의 농장 투입물에 대한 정부 보조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최상의 토지가 수출농작물의 재배에 이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그럼으로써 이 나라들이 식량생산에 있어서의 자급자족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결과는 지역농업의 세계경제로의 통합이었음. 자국농산물이 더 많이 수출될수록 나라들은 점점 더 수입식량에 의존해야 했으며, 한편 토지를 잃고 쫓겨난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슬럼가로 흘러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열악한 하청업체에서밖에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나라들이 탈식민지적 의존의 상태에 묶여 있으며 점점 더 시장변동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음. 지난 수년간의 곡물가격 급등은 이미 아이티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나라들에게서 기아를 초래해 왔다. 근년에 그런 전략은 더욱 체계화되고 광범위해졌다. 주요한 국제적 기업과 정부들은 이제 자기 나라의 경지부족 사태를 해외에 거대한 기업형 농장을 건설함으로써 해결하기를 기대하고 있음. 가령 08년 11월에 한국의 대우 로지스틱스는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약 320만 에이커의 농지를 99년간 임차하기로 협정을 맺었다고 발표. 이 농지는 마다가스카르 총 경지의 절반에 육박. 대우는 농지 3분의 1정도는 옥수수 재배에, 나머지는 세계 생물연료 시장의 주요상품인 야자유의 생산에 이용할 계획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 지난 2년간 유럽의 몇몇 기업들은 싱걍과 생물연료로 쓰일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땅을 임차해왔는데, 가령 영국기업 썬바이오퓨얼즈는 에티오피아와 모잠비크, 탄자니아에서 생물연료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는 거대한 사막으로 인해 식량 대부분을 수입해야 한느 페르시아만 석유부국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이 부유한 국가들로서는 돈을 주고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세계 식량시장의 동요는 자체 식량공급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를 증대시키는 쪽으로만 작용했다
- 말리와 관련하여 지적듯이, 제3세계 나라들에 농업의 세계화를 강요하는 사이에 서구의 발전된 나라들은 자기네 농부들에게 재정지원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식량자급자족을 유지하는 데는 대단한 신경을 쓰고 있다. 유럽연합 전체 예산에서 절반이상이 농부즐에 대한 재정지원에 할당된다. 서구 자신은 최대한의 자급자족 정책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 식량처럼 다른 것들과 같은 상품이 아닌 생산물과 서비스의 목록은 훨씬 더 길게 이어지는데, 거기에는 국방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물, 에너지, 환경 그 자체, 문화, 교육, 건강 등이 포함됨. 여기서 무엇이 우선인지를(만일 그 결정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다면) 누가, 그리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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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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