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낙시만드로스가 최종적으로 생각해 낸 '지구는 허공에 떠 있다'는 결론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해서 진부한 소리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아웃풋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 반면 아낙시만드로스가 보여 준 지적 태도와 사고 과정, 즉 당시 지배적이었던 대지는 물이 지지하고 있다'는 정론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대지를 물이 지 지하고 있다면 그 물은 무엇이 지지하고 있을까?'라는 논점을 세워 끈기 있게 사고하고 규명해 나간 태도는 우리에게 매우 큰 시사점을 던져 준다.
- 아낙시만드로스 외에도 프로세스에서 배울 점은 풍부하지만 아웃풋에서는 배울 게 거의 없는 철학자들이 많다. 데카르트가 그 전 형적인 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아무리 옳은지 그른지 의심한다 해도, 지금 여기에서 사고하는 나의 정신이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 다'는 의미인데, 현대 사회에서 평범하게 시민으로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아, 그거야 그렇죠”라는 심심 한 반응 정도밖에 보일 수 없다. 이와 같이 아무리 유명한 데카르트 의 말과 생각이라 해도 아웃풋에서는 그다지 얻을 만한 배움이 없을 수 있다.
- 르상티망ressentiment 을 여느 철학입문서에서처럼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 한마 디로 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가 제시한 르상티망은 우리가 시기심이라고 여기지 않는 감정과 행동까지도 포함한 조금 더 폭넓은 개념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가 있다.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이 닿지 않았다. 결국 이 여우는 “이 포도는 엄청 신 게 분명해. 이런 걸 누가 먹겠어!”라며 가 버렸다. 이는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을 보여 준다. 여우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에 대한 분한 마음을 '저 포 도는 엄청 시다'라고 생각을 바꿈으로써 해소한다. 니체는 바로 이 점을 문제로 삼아 우리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인식 능력과 판단 능력 이 르상티망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개인은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예속, 복종한다.
·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판단을 뒤바꾼다.
- 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를 얻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부를 얻게 되면 그들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은 없다.(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 수상록)
- 페르소나는 원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하는데, 융은 페르소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는가에 관한, 개인과 사회적 집합체 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정의했다. 즉,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면이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제 타협의 범위가 그다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어디까지가 가면이고 어디까지가 얼굴인가 하는 물음이 따라다닌다.
- 에드워드 데시 교수의 연구에서는 대가를 약속하면 피험자의 성과가 저하되고, 예상 가능한 정신 측면에서의 손실을 최소한도로 억제하거나 또는 성과급이 기대되는 행동만을 하도록 만든다는 사 실이 드러났다. 즉 대가를 약속받으면 높은 성과물을 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대가를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스스로 과제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전적 인 과제가 아니라 가장 많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과제를 선택하게 된다. 이들 실험 결과는 통상 비즈니스 세계에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과급 정책이 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과를 유도하기 위해 제공하는 '당근'이 조직의 창조성을 높이는 데 의미가 없을뿐더러 되레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대가와 학습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가령 로버트 아이젠버거 교수와 J. 캐머런처럼 대가가 자발적 동기를 저하시킨다는 경고는 대부분 틀렸다고 주장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예고된 대가가 자발적 동기를 저하시킨다고 분석한 데시의 논고에 관해서는 1970년대부터 지속적인 논의를 거쳐 거의 결말이 나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영학 세계에서는 아직도 대가가 개인의 창조성을 자극해 높인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 '노력 →→ 결과 → 평가 → 대가는 기업의 인사 평가가 전제하고 있는 기본 구조다. 얼핏 매 우 합리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이 인과관계가 왜 수십 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여전히 불협화음을 만들고 성숙하게 정착하지 못했을까? 인사 평가 제도를 설계할 때는 노력한 사람과 성과를 낸 사람이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고, 즉 인과응보의 가치를 추 구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추구했던 대로 잘 실현되고 있는 가? 아마도 많은 사람이 부정할 것이다. 오히려 인사 평가의 결과를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는 사람보다 승진하거나 출세하는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심지어 인과응보 를 부정하는 예정설이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 다면, 우리는 무얼 위해서 막대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들여 인과응보를 실현하려는 인사 평가 제도를 설계하고 운용하고 있는리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심지어 인과응보 를 부정하는 예정설이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 다면, 우리는 무얼 위해서 막대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들여 인과응보를 실현하려는 인사 평가 제도를 설계하고 운용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 자신의 노력이 정확히 평가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알기 쉬운 체계라면 인간은 열심히 일한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 고용 문제를 다룬 책을 읽어 보면 대개 그렇
게 쓰여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노동과 대가가 정확하게 수직적 상관관계를 보인다면 인간은 아마도 일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설렘도 기쁨도 없을 테니까.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우치다 다쓰루, 일본의 배경과 상황)
- 프롬은 나치 독일에서 발생한 파시즘(fascism에 주목했다. 왜 비싼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자유의 과실'을 맛본 근대인이 그것을 내던 져 버리고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날카로운 고찰 은 언제나 예리한 질문에서 탄생한다. 이 의문에 대한 프롬의 대답 또한 우리의 가슴을 찌를 듯이 날카롭다. 프롬의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이 따른다. 이 고독과 책임을 감당하고 견디면 서, 더욱이 진정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는 자유를 끊임없이 갈구함으로써 비로소 인류에게 바람직한 사회가 탄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로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폐부를 찌르는 듯 한 고독과 책임의 무게에 몹시 지친 나머지 그들은 비싼 대가를 치 르고 손에 넣은 자유를 내던지고 나치의 전체주의를 택한다. 특히 나치즘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에 소상인, 장인, 사무직 근로자들로 이루어진 하층 및 중산계급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프롬은 자유로부터 벗어나 권위에 맹종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격 특성에 관해서도 언급했 다. 프롬은 하층 및 중산계급 중에서 나치즘을 반기며 맞이한 이들 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쉬운 성격이며 자유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 로운 의존과 종속을 추구하는 성향임을 밝히고 이를 '권위주의적 성 격' 이라고 명명했다. 프롬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권 위를 따르기 좋아하는 한편, 스스로 권위를 갖고 싶어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거만하게 구는 인간'이다. 이 권위주의적 성격이 파시즘 지지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프롬은 강조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마 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이 이상으로 여기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자신을 분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매사를 생각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 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용기와 강인함을 지니고 자아를 철저하게 긍정하는 일이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소셜미디어가 사람에게 주는 대가는 바로 도파민이다.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메시지 수신 을 알리는 표시가 뜨면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이러한 행위를 '도파민의 조화'라고 한다. 도파민은 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아르비드 칼손과 과학자 닐스 오케 힐라르프가 1958년에 발견한 물질이다. 오랫동안 도파민은 쾌락 물질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도파민의 효과는 사람에게 쾌락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찾게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파민은 각성, 의욕, 목표 지향 행동 등을 유발하며, 그 대상에는 물질적 욕구만이 아니라 음식이나 이성 등 추상적인 개념, 즉 근사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식견도 포함된다. 한 가지 덧붙이 면 최근 실시된 연구에서 쾌락에 관여하는 물질은 도파민보다 오피 오이드opioid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미시간 대학교의 생물 심리 학자 켄트 베리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욕구계 도파민과 쾌락계 오피오이드는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사람을 제어하는 엔진과 브 레이크 역할을 한다. 욕구계인 도파민이 특정 행동을 촉진시키는 반 면 쾌락계인 오피오이드는 만족을 느끼게 함으로써 추구 행동을 정지시킨다. 중요한 점은, 일반적으로 욕구계가 쾌락계보다 강하게 작용하 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항상 무언가 느끼고 추구하는 행동을 하 게 된다는 사실이다. 도파민 시스템은 예측하지 못한 일에 직면하면 자극을 받는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란 스키너 상자 실험에서 네 번 째 조건이었던 변동비율 스케줄에 해당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문 자 메시지는 예측할 수 없다. 이들 미디어는 변동비율 스케줄로 움 직이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을 강화하는, 즉 반복해서 행동하게 하는 효과가 매우 크다. 왜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 빠지는 것일까? 다름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의 연구가 제시하는 해답이다.
- 아렌트가 의도한 것은 우리가 흔히 '악'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 즉 악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특별한 것이 라는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대 민 족에 대한 증오나 유럽 대륙에 대한 공격심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그 무 서운 범죄를 저지른 경위를 방청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의했다.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아렌트는 '평범' 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우리도 누구나 시 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경종을 울 렸다. 다른 말로 바꾸면 보통 악이라는 것은 악을 의도한 주체가 능 동적으로 저지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렌트는 오히려 악을 의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저지르는 데에 악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 우리는 신념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인과관계는 그 반대라는 사실을 인지 부조화 이론은 시사한다.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이 일어나고, 나중에 그 행동에 합치되도록 의사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합리적인 생물이 아니라 나중에 합리화를 도모하는 생물이라는 것이 페스팅어가 내놓은 답이다.
- 사실과 인지 사이에 발생한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인지를 바꾸는 일은 인간관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좋아하지도 않는 이 성이 이것저것 염치 좋게 부탁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도와주다가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인지 부조화가 빚은 결과로 생각할 수 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지와 이것저것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은 부조화 를 발생시킨다. 자신이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은 변경할 수 없으니 대신에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좋아하지 않는 감정을 조금은 호의가 있을지도'로 바꿔 버린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상대에게 이것저것 부탁받아 성가셔 하던 사람이 그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주위의 영향을 받아 생각이 바뀌고, 그 결과 행동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믿는다.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의식으로 행동 을 다스리는 자율적 이상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페스팅어는 인간 에 대한 이러한 관념을 뒤엎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압력이 행동 을 일으키고 행동을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과 감정을 적응시 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다른 국가를 정복할 때는 “필요한 개혁을 단번에 과감히 단행하여 날마다 계속해서 원망을 받지 않도록 하라” 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 지적은 구조조정을 할 때 초기 단계에서 대규모로 단행해 버리는 편이,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고통을 주는 소규모 구조조정보다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기업 재생의 철칙에도 부합한다. 즉 마키아벨리는 부도덕하라고한 것이 아니라 냉철한 합리자가 되라고 조언한 것뿐이며, 때때로 합리성과 도덕성이 부딪힐 때 합리를 우선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
- 어떤 의견이 어떠한 반론에도 논박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와, 애초에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미리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반증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이것 외의 방법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인 보증을 얻을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 어떤 사람의 판단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경우, 그 사람이 신뢰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대한 비판을 항상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가능한 한 받아들였으며, 잘못된 부분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를 스스로도 되짚어 보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하기를 습관으로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제라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다양한 의견을 두루 듣고 사물을 모든 관점에서 살 펴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이외의 방법 으로 진리를 얻은 현인은 없으며 지성의 특성을 보더라도 인간은 이 이외의 방법으로는 현명해질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 레빈에 의하면 어떤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정착되어 있는 조직은 '해동-혼란-재동결’과정을 거쳐 변화한다. 여기서 이 프로세스가 '해동'에서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해동이라는 것은 바로 '끝낸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 앞으로의 일을 시작하는 데만 초점을 맞 춘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쿠르트 레빈의 지적은 새로운 것을 시 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방식을 잊는' 것, 즉 이전 방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 "권력 거리가 좁은 미국에서 개발된 목표 관리 제도는 부하 직원과 상사가 교섭 자리에 대등한 위치로 나올 것을 전제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상사와 부하 모두 교섭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국가, 즉 권력 거리가 큰 문화권에서는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호프스테더)
- 호프스테더는 권력 거리가 큰 국가에서는 상사에게 이견을 제 시하길 꺼려 하는 부하 직원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부하에게 상사는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이므로 얼굴을 맞대고 반대 의견을 피 력하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 권력 거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현재 일본의 상황을 고찰해 보면 두 가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준법 감시compliance에 관한 문제다. 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도의적으로 잘못된 의사 결정을 내릴 경우 부하 직원들이 “그 건 말도 안 됩니다”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없을까? 호프스 테더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데 저항감을 느끼는' 정도가 다른 선진국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 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둘째, 혁신에 관한 문제다.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할 과 학자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키는 인물의 특징으로 “연령이 아주 낮거나 그 영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는 점 을 꼽았다. 이는 조직 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아이디어를 내기 쉽다는 점을 암시한다. 따라서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야 기술 혁신이 가속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의 권력 거리 는 상대적으로 커서 조직 내에서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의견은 묵살당하기 십상이다.
- 반취약성은 내구력이나 강건함을 초월한 의미다. 내구력이 있는 물 체는 충격을 견디고 현상을 유지한다. 하지만 반취약성을 지니면 충 격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 같은 성질은 진화, 문화, 사상, 혁명, 정 치 체제, 기술 혁신, 문화적 · 경제적 번영, 기업의 생존, 훌륭한 레시 피(치킨 수프나 코냑을 한 방울을 떨어뜨린 타르타르 스테이크 등), 도시의 융성, 사회, 법체계, 적도의 열대 우림, 세균에 대한 내성 등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온 모든 것에도 해당한다. 지구상에서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와 같이 살아 있는 것, 유기적인 것, 복합적인 것과 책상 위의 스테이플러와 같은 무기적인 물건과의 차이는 반취약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 시스템에 해를 끼치는 현상의 발생을 예측하기보다 시스템이 취약 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취약성은 측정할 수 있지만 리스크는 측정할 수 없다(리스크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카지노의 세계나 리스크 전문가'를 자칭하는 무리의 머릿속뿐이다). 나는 중대하고 희소한 현상의 리스크를 계산하거나 그 발생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블랙 스완 문제'라고 부른다. 취약성을 측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변동성으로 인해 얼마나 피해를 입기 쉬운지는 측정할 수 있으며, 이는 피해를 일으키는 사건을 예측하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현대의 예측, 예지, | 리스크 관리에 접근하는 방법을 근본부터 뒤엎고 싶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 탈레브가 지적하는 '반취약성'이라 는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 모델이나 성공의 이미지를 바꾸라고 재촉한다는 걸 알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조 직과 자신의 경력을 최대한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성 이 높은 사회에서 겉으로 보기에 강건해 보이는 시스템이 실은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경력에 '반취약성'을 어떻게 끌어들여 활용하느냐가 앞으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 우리는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을 만들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시스템이 원래 있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되레 다른 문제만 더 불거지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 한 경향은 인사 평가 제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최근의 비유를 하나 들자면, 기업 지배구조에 관련된 규제나 규칙도 아마 30년 후에는 불명예스러운 사례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기업 활동에서 윤리적인 측면의 규율은 무엇보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윤리관이나 도덕관에 좌우된다. 이 부분에 관한 조치는 생각 않고 규칙을 정해 그 준수 상황을 외부에서 감시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버리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는 회계 제도를 아무리 정비해도 분식결산이 근절되지 않는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규칙이나 시스템으로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려 고 하면 거기에는 자연히 소외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발적 인 이념과 가치관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 주체적으로 최적의 해답을 구하기 위한 기술인 논리 사고가 강세인 오늘날에는 '무엇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되어 가는 형편대로 결정하자'는 태도가 '포기'로 비칠지도 모른다. 경영 관리 측면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일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쩌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최적의 정답을 스스로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지적 오만이 아닐까? 애덤 스미스는 그러한 지적 태도를 지닌 인물들을 다른 저서인 『도덕감정론』에서 '질서 체계를 신봉하는 인간'이라고 칭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다.
질서 체계를 떠받드는 인간은 자신이 매우 현명하다고 우쭐대기 일쑤인 데다 통치에 관한 자신만의 이상적인 계획이 품고 있는 상상 속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어느 부분 이든 질서에서 조금만 벗어난 일탈도 참지 못한다. 그는 최대의 이익 이나 그와 모순되는 최대의 편견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상적인 계획을 완전하고도 자세하게 규정해 나간다. 그는 마치 체스판 위에서
여러 가지 말을 배열하듯이, 커다란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도 그렇게
관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모양이다. 체스판 위에 놓인 말은 각각 에 부여된 이동 방법 외에는 다른 원칙을 갖고 있지 않지만, 인간 사 회라는 광대한 체스판의 경우에는 각각의 말 모두가 자신의 이동 방법 원칙(입법부가 개인에게 부여하듯이 결정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 독자 중에는 애덤 스미스의 이 기술을 읽고 사회주의를 몽상하 던 옛날 공산권의 엘리트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최근에 는 이 책에서도 다룬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저서 『안티프래질』에서 이 같은 지적 태도를소비에트-하버드 환상’ 이라고 이름 붙이고, 인과관계의 명석한 파악을 전제로 한 과학적 톱 다운 사고법이야말로 시스템을 취약하게 하는 주범 이라고 판단하고 비난했다.모든 일이나 상황의 관련성이 점차 복잡해지고 한층 더 역동적 으로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지적인 톱다운 사고에 의지해 최 적의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지적 오만을 넘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바야흐로 최적의 해답을 최적의 접근법으로 찾으려만 하지 말고 '만족할 수 있는 해답을 휴리스틱으로 추구하는 유연성이 필요한 시대다.
- 자연계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에러에 의해 진 화가 이루어지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우리는 종종 ‘우리 회사의 DNA'라는 말을 쓴다. 돌연변이란 분명, 이 '우리 회사의 DNA'를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 전해 주려고 의도 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과실로 인해 잘못 복제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계에서의 적응 능력 차이는 계획과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 종의 우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직이나 사회 운 영도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오만한 사고를 수정해 자신의 의도보다 오히려 '긍정적인 우연'을 만들어 내는 체계를 이루는 데 주력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 주위에서 아직 괜찮다고 안심시키더라도 스스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도망쳐라. 이때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안 테나의 감도와, 도망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다. 사람들은 으레 착각하곤 하는데, 도망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가 있기에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 격차나 차별로 인한 질투의 감정은 사회와 조직의 동질성이 높 아질수록 오히려 구성원에게 상처를 준다.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평등을 이상으로 내건 민 주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그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불평등이 사회 공통의 법일 때는 최대의 불평등도 사람의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의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알렉시 드 토크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토크빌의 지적은 우리가 공정한 조직과 공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을 들추어낸다. 이러한 인식이 성립된 후에 우리는 한층 더 공정하고 공평할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조직과 사회가 공정하고 공평하다면 그중에서 하위 층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도망칠 길이 없다. 인사 제도나 사 회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외모 면에서 남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하위층에 있다고 밖에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열의 기준이 정당하지 않다', 혹은 '기준이 정당해도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믿음 덕 분에 우리는 자신의 열등성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정하고 공 평한 조직에서는 이 자기방어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안이하게 궁극의 이상으로 내건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 는 정말로 바람직한 것일까? 그 이상이 실현되었음에도 '당신은 뒤 처져 있다'고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자기 존재 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회와 조직은 정말로 우 리에게 이상적인 것일까? 공정이라는 개념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 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보드리야르가 말한 대로 욕구가 사회적인 것이라면 마케팅에서 시장창조나 시장 확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 총계의 최대화'다. 이는 당연히 사회에 매우 큰 르상티망을 만들어 낸다. 또한 보드리야르의 차이적 소비'는 소비라는 주제를 크게 넘어 서는 사정거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와 희망을 토대로 자신의 자아실현의 모습을 그린다는 전제 아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바람직한 자신의 모습이 어떤 특정 집단이 배타적으로 갖는 특성에 의해 기술된다면, 그 러한 자신의 모습은 자발적으로 규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 집단과 그 외 집단, 즉 외부 환경과의 차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소비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해 타인과 다른 행동을 하지 만, 이 행동이 차이화의 강제나 어떤 종류의 코드에 대한 복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동시에 차이의 모든 질서를 새로 만들게 되는데, 이 질서야말로 처음부터 사회 전체 가 해야 할 일이며 싫든 좋든 개인을 넘어선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부자가 명품이나 고급차를 구입하는 것과 같은, 과시하기 위한 호화 소비만이 차이적 소비가 아니라는 데 주의해야 한다. 부자가 자신들이 부자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드러내기 위해 페 라리나 포르셰 등 '알기 쉬운 고급차'를 타고 다니거나 고급 주택지로 이름난 지역에 사는 것도 물론 차이적 소비의 한 형태이기는 하 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차이적 소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하이브리드 차량인 프리 우스를 타거나 무인양품을 애용한다거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지내는 일 또한, 그 길을 선택한 주체가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은 타인과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차이적 소비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아무 목적 없이 행했다 하더 라도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음'으 로써 기호가 생겨난다. 이 거북한 진실에서 놓여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는 그러한 '기호의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보드리야르는 강조했다. 뒤집어 말하면, 무언가 기호성을 갖지 않거나 또는 갖더라도 희 박한 상품과 서비스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아실현적 소비는 시장 성장의 최종 단계에서 발현되는 것이 보통 이다. 하지만 이때 자아실현이 자발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 어와 마찬가지로 '타자와의 차이'라는 형태로 규정된다면, 그 상품 나름대로 서비스가 어떠한 차이를 규정하는지를 의식하지 않는 이상 성공할 만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기는 어렵다.
- 프린스턴 대학교의 맥나마라 조교수 팀은 '자각적 훈련'에 관한 88건의 연구에 메타 분석을 행하고 “연습이 기량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는 기술이나 능력 분야에 따라 다르며 기능 습득에 필요한 시간 은 정해져 있지 않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구체적으로 이 논문에는 각 분야에 대해 '연습량이 많고 적음에 따른 성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소개되어 있다.
컴퓨터게임 : 26%
악기 : 21%
스포츠 : 18%
교육 : 4%
지적 전문직 : 1%
이 수치를 보면 글래드웰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얼마나 위험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노력은 보상받는다는 주장에는 일종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어 매우 아 름답게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 베이컨이 지적한 네 가지 우상
(1) 종족의 우상 (자연 성질에 의한 우상) 베이컨은 인간성 자체를 근거 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갖고 있는 우상을 '종족의 우상'으로 지칭 했다. 즉 '착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 이 실제보다 크게 보인다거나 단것을 먹은 뒤 귤을 먹으면 시게 느껴지는 것이 전형적인 종족의 우상이다
(2) 동굴의 우상 (개인 경험에 의한 우상) 베이컨은 각 개인의 고유하고 특수한 본성이나 자신이 받은 교육과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서 생 기는 우상을 '동굴의 우상'이라고 명명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독선'이다. 자신이 받은 교육과 경험이라는 편협한 범위의 자료 를 바탕으로 단정해 버리는 오류다. 이를테면 외국인 동료와 '어 쩌다 갈등을 경험한 사람이 '원래' 외국인은 까탈스럽다고 생각 하는 것은 전형적인 동굴의 우상이다.
(3) 시장의 우상 (전문轉聞에 의한 우상) 베이컨은 인류 상호의 접촉과교제에서 비롯된 우상을 '시장의 우상' 이라고 정의했다. 언어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인해 생기는 우상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오류 라고 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하면 거짓말'이나 전해 들은 말'을 진 실이라고 믿고 현혹되는 것이다. 종종 인터넷 게시판 사이트에서 읽은 이야기를 정확한 소식인 양 남에게 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한 사람이 걸려들기 쉬운 것이 시장의 우상이다. 시장이라고 한 이유는, 시장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갖가지 거짓말이 난무하 는 곳이기 때문이다.
(4) 극장의 우상 (권위에 의한 우상) 베이컨은 철학의 다양한 학설이나 잘못 증명된 법칙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온 우상을 '극장의 우상'이라고 일컬었다. 저명한 철학자의 주장 등 권위와 전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믿는 데서 생겨난 '편견'을 뜻한다. 텔레비전이 나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평론가의 주장을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사람은 전형적으로 극장의 우상에 현 혹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틀림없이 '미디어의 우상'에 휩싸여 있다.
- 레비스트로스는 남미의 마토 그로소 Mato Grosso 원주민들을 연구하여 저서 『슬픈 열대』에 소개했다. 원주민들은 정글 속을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 시점에서는 어디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언 젠가 무언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물건을 자루에 주워 넣어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주운 '뭔지 잘 모르는 물건'이 나중에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한 일도 있기에,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 능력이 공동 사회의 존속에 매우 중 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신기한 능력, 즉 주변에서 발견하는 뭔지 잘 모르는 물건을 비예정조화 차원에서 수집해 두었다가 여차할 때 요긴하게 활용하는 능력을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라고 명명하고, 근대적이 고 예정조화적인 도구의 조성과 대비해 고찰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근대적이고 예정조화적인 사상(용도 시장을 명확히 하고 나서 개발에 착수하는 사고관을 지닌 유파)보다 더 기개 있고 유 연한 사상을 내세웠다. 실은 전형적인 근대 사상의 산물로 여겨지는 기술 혁신에서도 브리콜라주의 사고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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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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