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전 세대까지는 자연이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상하고 받아들였다. 의사들은 패배의 징후를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려 했고, 그것을 부정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덜 오만하게 굴었다. (셔윈 눌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의료인들의 책임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번 죽는다. 생이 끝나가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업다.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은 차마 꺼내기 어려운 대화를 기꺼이 나눠 줄 의사와 간호사를 필요로 함.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아무도 원치 않는 창고 같은 시설에서 잊혀 갈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미국 의료 전문가들은 개인의 신체 기능에 등급을 매기는 형식적인 분류체계를 갖고 있다. 이 체계에 따르면 8가지 일상활동을 스스로 해내지 못할 경우 기본적인 신체 독립성이 결여된 것으로 판정. 거기에는 화장실 가기, 밥먹기, 옷입기, 목욕하기, 머리손질 등 몸단장하기, 침대에서 일어나기, 걷기 등이 포함됨. 또한 일상생활의 8가지 독립활동, 즉 쇼핑, 요리, 가사일, 빨래, 약 복용, 전화사용, 외출, 재정관리 등을 혼자 못하면 독립적으로 안전하게 살 능력이 결여된 것으로 판정한다.
- 과거에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흔치 않았고,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은 전통과 지식, 역사의 수호자로서 특별한 기능을 했음. 그러면서 죽을을때까지 집안의 우두머리라는 지위와 권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사회에서 노인들은 존경과 복종의 대상일 뿐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을 주도하고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나이든 사람에 대한 존중이 두터웠기 때문에 대개 나이를 밝힐 때는 어린 척하기보다 나이든 척하곤 했다. 인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나이 반올림이라 부르며, 인구조사시 이런 거짓말을 바로잡아 올바른 통계를 내기 위한 온갖 종류의 조정장치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 그런데 학자들은 18세기경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나이에 관한 거짓말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 요즘 사람들은 인구조사원에게 자기 나이를 깎아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반면 과거의 인구조사 결과는 당시 사람들이 나이를 보태 말하곤 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예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위엄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 매년 35만명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음. 그중 40%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가고, 20%는 다시 걷지 못했다. 넘어지는 데는 세가지 주요 원인이 있음. 균형감각 쇠퇴, 네가지 이상의 처방약 복용. 그리고 근육 약화다. 이런 위험 요인을 가지지 않은 노인이 1년 사이에 낙상할 확률은 12%다. 반면 이 요인들을 가진 노인의 낙상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다.
-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방식을 잃는다는 것이 두렵다는 것.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필립 로스는 소설 에브리맨에서 이를 더 비통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대학살이다"
- 우리가 만들어낸 시설과 제도들은 여러가지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병원 입원실을 비우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고, 노년층의 빈곤을 극복하려는 목적 말이다. 그러나 그 시설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듯하다. 우리가 병들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도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말이다.
- 삶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우선순위가 급격히 변함. 대부분은 성취와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는 데 들이는 시간을 줄임. 관심 범위가 좁아지는 것이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경우, 가령 젊은이들은 형제자매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선호. 하지만 노인들은 정반대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 적은 수의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음. 무엇을 하는 것보다 존재하는데, 그리고 미래보다 현재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톨스토이도 이 점을 간파했다. 이반 일리치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자 이전까지의 야망과 허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는 그저 안식을 원했고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러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내가 돈을 들여 데려오는 저명한 의사들도 말이다. 톨스토이는 생명의 덧없음과 씨름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점 사이에 얼마나 깊은 틈이 있는지를 본 것이다. 그는 특히 그런 사실을 혼자서 감당해야 만 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이해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통찰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죽게 되고 말거라는 생각에 우선순위가 바뀐다 해도, 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반일리치의 가족, 친구, 의사들 중 그누구도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알지 못했지만, 그의 하인 게라심은 이해한다. 게라심은 일리치가 고통스럽고, 두렵고 외롭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를 가엾게 여긴다. 언젠가 자신도 주인과 같은 운명을 겪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를 피하지만, 게라심ㅇㄴ 그에게 말을 붙인다. 게라심은 일리치가 여윈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릴 때만 통증이 가라앉는다는 걸 알게 되자 밤새 같은 자세로 앉아 그의 고통을 덜어준다.
-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빈 삶이다.
-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망률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70년대 초, 심리학자 주디스 로딘과 엘렌 레인저 박사는 코네티컷의 한 요양원에 사는 주민 모두에게 화분을 하나씩 주는 실험을 했다. 주민 절반에게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 어떤 혜택을 주는지에 관한 강의를 듣도록 했음. 나머지 절반의 경우 다른 누군가가 대신 화분에 물을 주게 했고, 환자의 복지는 직원들의 책임이라는 강의를 듣게 했다. 1년 반이 흐른 후,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진 그룹은 더 활동적이고 정신이 맑았으며, 더 오래 살았다.
- 죽음을 의미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러 여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로이스는 말한다. 충성심은 "우리 같이 평범한 존재가 겪는 역설적 상황을 해결해줌. 우리 밖에 전력을 다해야 할 대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그 일을 기꺼이 해내고자 하는 의지, 그 일을 하면서 좌덜하고 꺾이는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해지고 더 스스로를 드러내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더 최근에는 심리학자들이 이와 같은 개념을 초월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슬로의 욕구위계 중 자아실현 단계보다 초월단게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에게는 다른 존재가 잠재력을 성취하도록 돕고자 하는 초월적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변서 우리는 모두 단순한 기쁨이 주는 안락함을 찾게 된다. 동료애와 우정, 규칙적 일상, 맛있는 음식,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의 온기 같은 것 말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 축적하는 것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서 얻는 행복감에 더 관심을 갖게 됨. 하지만 야망이 줄어드는 걸 느끼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남기고 갈 것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함. 그리고 산다는 것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느끼도록 해주는 목적을 우리 밖에서 찾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갖게 됨.
- 과거에는 보통 죽어간다는 것이 급격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조기에 질병을 찾아내는 정밀촬영, 생명을 연장시키는 처치 등 현대 의학의 개입없이도 본래 투병기간이 길어지는 질병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결핵이 대표적인 예.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며칠에서 몇 주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미국 대통령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해보자. 조지 워싱턴은 1799년 12월 13일 목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을 안 다음 날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존 퀸시 애덤스, 밀러드 필모어, 앤드루 존슨 등은 모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이틀안에 죽음을 맞이. 러더 포드 헤이스는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 3일 후 숨을 거뒀다. 이보다 시간을 더 끈 대통령들도 있다. 제임스 먼로, 앤드루 잭신은 점진적으로 시간을 오래 끌며 몹시 두려움에 떨다가 목숨을 잃었다. 결핵 때문이었다. 율리시스 그랜트는 구강암으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삶의 종말에 관해 연구하는 조앤 린 박사의 연구결과처럼 사람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란 대개 나쁜 날씨를 만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별 경고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이었기 때문. 이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겨내거나 무릎을 꿇거나 둘 중 하나였다.
- 예전에는 죽어가는 과정을 미리 규정된 관습에 따라 경험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는 기술, 즉 아르스 모리엔디에 관한 안내서가 큰 인기를 끌 정도였음. 1415년 라틴어로 출판된 중세 판은 유럽 전역에서 100쇄 넘게 인쇄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도, 자기연민도, 신의 용서 외에 다른 희망도 품지 말고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회개하는 한편 세속적인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안내서에는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기도와 마지막 순간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담겨 있다. 임종은 경의를 표하는 특별한 자리가 되도록 했다. 오늘날 비참한 질명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건 예외적인 일이 됐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올때까지 오랜 의학적 투쟁을 벌인 끝에 죽음을 맞는다. 말기암, 치매, 파킨슨병, 장기부전, 혹은 너무 나이들어 나타나는 노환의 축적 등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경우의 마지막 단계는 죽음이라는 것이 확실함. 그러나 그 시기는 확실치 않다. 우리 모두는 이 불확실성과 싸우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걸 언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임종의 말은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기술은 의식이 없어지고 신체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각 기관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따. 게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질 때까지 의학적 처지를 해 대는 마당에 환자가 생각하는 바와 바라는 바를 돌볼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말기 암, 치매, 혹은 불치의 심장질환을 가진 사람이 정확히 죽는 것은 어느 시점인가?
- 우리가 풀 수 있는 생명의 실타래가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길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실제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싸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의사들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시들에게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효과가 밝혀지지 않은 독성약품을 줄 수도 있고, 종양 일부를 제거하느 수술을 할 수도 있고, 환자가 먹지 못하면 영양 공급관을 삽입할 수도 있다. 언제나 무언가 할 일은 있다. 우리는 선택 가능성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님. 대신 우리는 대부분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 자동 모드를 켜고 그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자동모드는 이렇게 설정되어 있다. 뭔가를 하라, 뭔가를 고쳐라,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라.
- 우리 의사들은 병사들을 진군시키면서 계속 '멈추고 싶으면 알려줘'라고 말하는 장군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의사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전면적 치료과정을 두고 언제라도 하차할 수 있는 기차라고 말한다. 언제든 멈추고 싶을 때 말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너무 큰 요구사항이다. 그들은 의혹과 두려움과 절박함에 휩싸인 상태고, 일부는 의학이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의료인들의 책임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번 죽는다. 생이 끝나가는 걸 경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은 차마 꺼내기 어려운 대화를 기꺼이 나눠줄 의사와 간호사를 필요로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아무도 원치 않는 '죽음을 기다리는 창고'같은 시설에서 잊혀갈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나이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함.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대가 너무도 많다는 점. 오랫동안 나는 이게 단지 불확실성 때문에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어려우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데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를 가진 듯 하다. 하나는 매 순간 동일한 비중으로 견뎌내는 경험하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흐른 후 최악의 시점과 종료 시점 단 두군데에만 거의 모든 비중을 실어서 평가하는 기억하는 자아다. 기억하는 자아는 심지어 마지막 순간이 완전히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할 때조차도 정점과 종점에 고착하는 경향을 보임. 30분 넘게 극심한 통증이 없었다면 환자의 전체 통증 평가지수가 극적으로 낮아졌다. 따라서 이 경우 환자들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반면 마지막 순간에 통증을 심하게 느낀 경우 평가지수가 극적으로 높아졌다.
-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제어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제안한다는 것은 보통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물리학과 생물학, 그리고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아도 된다는 사실. 용기란 이 두 가지 현실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에게는 행동할 여지가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범위가 점점 더 좁아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려면 몇 가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첫째, 우리가 병들고 노쇠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서 가장 잔인하게 실패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들이 단지 안전한 환경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우선순위와 욕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
둘재,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나갈 기회를 갖는다는 건 삶의 의미를 지속시키는 데 매우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셋째, 우리에게는 삶의 마지막 장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바꾸기 위해 제도와 문화, 그리고 대화방식을 변화시켜 나갈 기ㅗ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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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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