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미래경제학

경제 2019. 7. 25. 08:27

- 경제학자들은 공리(유용성)의 개념으로 사람의 행위를 설명. 마약 중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해서 마약을 하기로 한 결정의 유용성이 마약을 끊기로 한 결정의 유용성보다 큼. 결정 유용성의 상대적 개념으로 경험 유용성이 있음. 이것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희열과 고통을 가리킴. 처음으로 공리개념을 사용한 영국 철학자 벤담이 가리킨 공리는 바로 이 경험 유용성이다. 이 밖에 기억 유용성이라는 개념도 있음. 사람은 본인이 경험했던 희열이나 슬픔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는 잊힌 유용성이라고함. 이렇게 서로 다른 종류의 유용성은 어떤 상황에서는 불일치함. 예를 들어, 당신이 등산을 할 때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피로하고 발바닥에 물집까지 생겼따고 해보자. 이때 당신의 경험 유용성은 부정적인 것임. 그러나 하산한 뒤 몸이 건강해지고 의지도 강해지는 좋은 경험을 했다면 당신의 경험 유용성은 긍정적인 것이 됨. 다음에 등산을 다시 할지 말지 결정할 때 만약 등산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는 등산을 하기로 한 결정 유용성이 등산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유용성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
- 사람의 행복도는 보통 주위 사람들의 상황에 따른 상대적인 것. 만약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매우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다면 당신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임. 이런 이유로 안정적 경제성장도 사람들의 장기적 행복감을 높여주기 힘들다. 반면 당신의 소득이 장기적으로 주위 사람들보다 높아진다면, 당신은 장기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 사람의 행복감은 매우 빨리 극도의 슬픔 혹은 극도의 희열을 주는 사건을 통해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반년의 슬픔은 그 다음 반년 동안 회복된다.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를 잃은 슬픔은 보통 2년 후에 없어지며, 이혼한지 2년 후에 느끼는 스트레스와 초조감은 이혼 전 2년의 초조감보다 낮고, 이혼한 지 2년 뒤의 행복도는 이혼전 2년 동안의 행복도보다 높았다. 또한 결혼을 한 뒤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사람은 행복도 역시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01년에 학자들은 이 수치를 통해 결혼한 지 5년이 된 사람의 행복도는 평균적으로 볼 때 결혼 4년 전의 행복도보다 낮다는 연구결과를 발표. 이는 사람들이 결혼 생활 중 발견하는 7년의 고통을 설명해준다. 좋은 결혼은 미혼보다 좋지만 초조함을 주는 결혼은 미혼만 못하다. 만약 자녀가 부모의 뜻을 잘 따르는 효자라면 자녀가 있는 것이 자녀가 없는 것보다 좋지만, 만약 자녀가 속을 썩이기만 한다면 부모에게 주는 고통이 행복보다 크기 때문에 자녀가 없는 것만 못하다.
- 총명한 광고제작자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늘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약을 처방한다. 그들이 하는 한두 마디의 말은 당신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일이 당신이 정확한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악의 컨설턴트가 아니고서야 버블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주식을 사라고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들은 당신의 감정에 파고들어 나쁜 선택을 조장하며, 강한 시장경기 순응성을 갖고 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소비자들을 속이는 것을 당신이 통제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광고가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는 매우 적거나 심지어 아무것도 없기 때문. 그들 역시 소비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지 '강태공은 낚시를 하고, 원하는 자는 낚인다'는 식일 뿐이다. 그들은 게임을 하며, 이러한 심리게임은 거대한 상업적 가치를 갖고 있다.
- 광고제작자들은 또한 소비자가 부가기능 또는 별도의 설명이 있는 제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가기능과 별도의 설명이 이 제품 자체와 무관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한 회사가 캐주얼 재킷 광고에 알파인 수준이라고 써놓으면, 이 재킷은 이 문구가 없는 같은 제품보다 더 잘 팔린다. 이는 소비자들이 알프스 산 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동선수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만들어, 모르는 사이에 소비자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때문.
-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 신문의 기능은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고, 신문의 품질은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의 품질에 좌우되며, 정보의 정확도와 발간부수 역시 신문의 품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됨. 신문시장의 운영은 다른 시장과 마찬가지로 가격과 품질에 의해 결정됨. 그러나 경제학을 벗어나는 순간 이 기준으 모두 사라짐. 매체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에게 신문이란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와 진술, 스토리가 있고 독자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이들은 독자의 성향에 맞는 기사를 게재하고, 이를 통해 고정적인 발간부수를 확보하려 한다.
- 지식인들의 진정한 역할은 글쓰기와 교학을 통해 사상의 종자를 뿌리는 것. 종자가 발아하느냐, 꽃을 피우느냐, 과실을 맺느냐는 많은 외부조건, 즉 토양, 온도, 강수량 등에 따라 결정됨.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상이 주류가 되고 진정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 정치 분위기와 경제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함. 30년대 실업률이 25%에 육박해 민심이 흉흉했을 때, 케인즈 이론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나타나 새로운 정책운동과 완전히 새로운 경제정책을 이끌었음. 이로인해 케인즈는-적어도 20세기에-가장 위대한 경제학자가 되었다.
- 분쟁해결을 위해서는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함. 코언교수는 이를 위해먼저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 이를테면 이러한 문제들이다. 미국은 왜 2차대전 이후 조어도를 타이완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중국으로 반환하지 않았는가? 왜 청일전쟁 이전에 조어도를 행정 관할구역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않았는가? 일본은 청일전쟁 전후 조어도를 무인도로 여겨 점유했는가 아니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도 점유했는가? 이것도 아니면 조어도를 타이완의 일부로 여기고 자기관할로 귀속시켰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자료를 찾와보아야한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조어도를 점유해 60년대 말까지 관할해왔음. 당시 중국은 왜 미국의 이런 행태에 대해 전혀 반대를 하지 않았는가? 왜 주권반환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았나? 법적 정의의 측면에서 분쟁 중 한쪽이 일정기간 내에 타국의 영토 점유에 대해 반대하는 의사를 피력하지 않은 경우, 이는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음을 뜻하는가?
- 과학기술과 법률의 발전은 영토분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음. 68년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는 조어도 주변 수역에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힘. 이후 70년부터 중국은 조어도 주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 80년대 말 유엔해양법이 정식 발효되면서 배타적 경제수역 개념이 생김. 이에 따라 조어도 부근의 해양자원 탐사와 귀속문제도 나날이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 덩샤오핑은 72년 중국의 경제성장 환경조성을 위해 전격적으로 "쟁의를 멈추고 공동개발하자"고 제안했고, 이후 불편했던 중일 외교관계가 정상화됨. 코언 교수는 이에 대해 "지금 문제가 다시 불거졌는데, 계속 해서 쟁의를 멈추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의문을 제기. 그는 일본 정부의 입장, 즉 '조어도는 일본령이므로 다툴 필요도 없다'는 주장은 중국에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라 전망. 일본이 조어도를 점유하고는 있지만 조어도의 주권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일본은 한국과도 섬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 독도는 한국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지만, 일본은 2차대전 이전부터 일본령이어다고 주장. 현재 일본은 '한 입으로 두 말하기'의 모순에 빠져 있다.
- 사람은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누구도 전쟁을 좋아하지 않음. 하지만 때때로 전쟁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가공할 만한 규모의 폭격으로 참혹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함. 역사를 보면 전쟁은 모두 외교수단이 고갈될 때 쌍방의 지도자가 할 수 없이 선택하는 하책이다. 중일 양국의 지도자는 현재 위기를 완화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으며 내리기 힘든 상황. 둘 중 누구도 상대국의 압력에 굴복하길 원하지 않음. 아베 신조는 강경한 대중정책, 국방강화, 헌법 9조 수정 등의 공약에 기대어 12년 12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생애 두번째로 일본 총리 자리에 올랐다. 13년 3월 취임한 시진핑 국가주석 역시 중국경제와 군사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지금, 과거 중국을 침략했고 동시에 아시아의 절반을 강점했던 일본에 굴복할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절차가 하나 있는데, 바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 있는 비밀외교다. 어떤 학자는 양국 지도자 사이에 특수한 교량을 설치해 체면을 유지하면서 유연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충돌 대신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고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의 국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 헨리 키신저가 71년 7월 파키스탄을 경유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떤 것이 이런 역할을 했음. 당시 중국과 미국은 두 차례의 군사적 충돌(한국전쟁, 베트남 전쟁)과 장장 20년간의 적대적 관계를 거치면서 그 누구도 먼저 상대에게 손을 내밀기를 원치 않았음. 키신저의 임무는 당시의 국제정세 아래(중소 긴장,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내 반전여론)에서 양국이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이 생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수교를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언론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이 방문의 표면적 목적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베트남, 태국, 인도, 파키스탄을 순방하는 것으로 알렸다. 키신저는 파키스탄에 있을 때 병을 핑계삼아 쉰다고 말하며 언론의 시선에서 이틀간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몇 명의 측근만 대동한 채 파키스탄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 그리고 베이징에서 미중 수교 가능성에 관한 초기교섭을 벌임. 만약 이 교섭이 실패했다면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것. 미국 대통령 측근조차도 키신저가 아시아 방문길에 오른 진짜 목적을 몰랐음. 교섭에 성공한 덕에 그는 죽의 장막을 걷어낸 닉슨 대통령의 공신이 되었고, 미국과 중국은 역사적 수교를 맺을 수 있었다.
- 중국의 국내 정책이 세계의 시험과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중국경제의 성공과 세계화에 대한 대가입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며, 머지 않아 일본을 제치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중국은 수출대국이자 수입대국, 자본유출과 유입대국으로서, 국내정책이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외국인들은 당연히 중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며, 중국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전통의 내정 불간섭 원칙을 완벽하게 실현하기란 불가능함. 따라서 중국은 세계의 간섭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함. 과거에 일본도 이런 간섭을 수없이 참아왔다. 일본은 2차대전 이후 불과 25년만에 세계 7위에서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국내 정책 역시 외국의 시험과 평가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는 단지 성공의 대가이지 객관적 현실일 뿐이다. 이를 반중국이라는 주관적 혐오로 받아들이는 것은 중국에 해가 될 뿐이다
- 정치학자들은 과거 60년을 미국패권의 시대로 부름. 일부 중국 지도자들도 이 단어를 사용해 미국의 지위를 설명. 사실 패권의 정의는 매우 불분명함. 패권이란 무엇인가? 만약 미국 패권을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 단어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군사력에 있어서 구소련이 맞서고 있었던 것 외에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의 적은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한편 미국패권을 국제문제에서 미국이 독단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 단어는 틀린 것임. 우리는 보통 미국이 빠진 협력이나 국제조약은 실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외도 있음. 유엔 해양법, 국제형사재판소, 교토의정서는 미국의 지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합의된 것임. 만약 미국 패군을 미국이 임의대로 다른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표현은 완전히 틀린 것임. 국제협상과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54년 미국이 지지한 유럽방위공동체는 프랑스 상원에서 부결됨. 미국은 58년 영국이 주도하는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희망했지만, 영국은 73년이 되어서야 가입을 허락. 이 밖에 유럽자유무역지역 설립, 67년 케네디라운드 무역협상에서의 관세인하 폭, 71년 스미스소니언 협정의 환율 재조정 등에서 미국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 이와 비슷한 사례도 많다. 미국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한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은 무언가를 제안할 때, 반드시 다른 국가에 이 제안이 자국 외에 여러 국가를 고려해 만든 것이라 설득. 그리고 그 속에서 미국의 이익을 추구함. 어떤 때는 다른 국가를 성공적으로 설득할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실망하고 돌아갔으며, 당초의 제안을 대폭 수정하기도 했다.
- 미국인들은 매우 쉽게 자신의 가치관을 세계의 진리로 생각하며, 미국 밖의 대중이 세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함. 미중관계는 많은 소통과 이해, 양해와 신임을 필요로 함. 그렇게 해야만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따. 200-300년 이후의 역사는 미중관계의 변화가 냉전 이후나 이슬람 국가간의 대립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국제경제학을 가르치는 제프리 프랭클 교수는 11년 강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힘. 그는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84년 발표했던 논문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 크루그먼은 국제통화의 지위는 커다란 관성을 가진다고 본다. 미국 경제 총량은 GNP로 계산했을 때, 1872년 이미 영국을 추월. 그러나 미 달러화는 46년이 되어서야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율에서 영국을 넘어설 수 있었음. 프랭클 교수는 이러한 크루그먼의 30년전 관점은 좌향으로 기운 것이라고 평가. 하나의 화폐가 다른 화폐를 따라잡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1차대전이 끝날 무렵인 20년대, 미 달러화는 영국 파운드화를 위협하는 존재였으며 국제통화였음. 당시 미국 국제 무역총량이 이미 영국을 넘어섰기 때문. 물론 한 국가의 화폐가 국제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역총량 외에도 여러 조건이 필요함. 이 국가가 채무국이 아닌 채권국인지, 화폐가치는 보장할 수 있는지, 금융시장은 개방적인지, 이 금융시장은 넓이와 깊이 측면에서 만족스러운지 그리고 충분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잣대가 됨. 여기서 프랭클 교수는 다음 두 그룹의 어휘를 구별했다. '위협형성, 라이벌 되기와 추월'은 '초월, 대체'와는 다르다는 것. 미 달러화는 20년대에 영국 파운드화의 라이벌이 되었으며, 2차대전 이후 파운드화를 초월함. 이렇게 볼 때, 화폐 초월과정은 크루그먼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 20세기에 미 달러화는 세가지 국제통화 중 하나가 됨. 다른 두가지는 엔화와 마르크화다. 이 두가지 화폐는 70년대 초 브레턴우즈 체제의 해체 이후 국제통화가 되었다. 프랭클 교수는 당시를 회고. 71년 미국 국제수지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 연준의 금 비축량은 급격히 감소. 닉슨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미 달러화와 금의 태환을 정지시킴. 이것이 그 유명한 닉슨 쇼크다. 이 조치로 인해 각 주요 화폐간 환율은 상대적으로 변동하기 시작했으며, 브레턴우즈 체제하의 고정환율은 해체됨. 그 후 유로화가 마르크화를 대체해 국제통화가 되었음. 이어 프랭클 교수는 사람들이 늘 잊어버리는, 화폐 지위의 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90년대 초에 사람들은 엔화와 마르크화가 미 달러화의 라이벌이 되어, 미 달러하를 초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일본경제는 부진하기 시작했고, 잃어버린 10년에 들어서면서 경제력이 약화됨. 결국 엔화는 미 달러화를 초월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화도 90년대에 유로화로 대체되며 사람들의 예상을 비켜갔다. 사후에 보면, 90년대 초에 모든 중앙은행의 엔화와 마르크화 보유율은 초고에 달했고, 그 이후에는 하락하기 시작. 이처럼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던 일(미 달러화 초월)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프랭클 교수는 현재 위안화의 상황과 미 달러화가 파운드화를 초월했던 상황, 엔화와 마르크화가 미 달러화를 초월하지 못했던 상황은 조금씩 다르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정부는 위안화가 국제교역에서 사용되는 것을 장려. 하지만 과거 일본과 독일정부는 자발적으로 자국 화폐의 국제화를 추진하지 않았음. 이들 국가에는 수출 이익이 금융시장을 통한 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 한 국가의 화폐가 국제경화가 된다는 것은 비록 금융부문에서는 이익이 있을 수 있지만, 자국 화폐가 평가절상되어 수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 또함 의미함. 따라서 엔화와 마르크화가 국제화되는 것은 일본과 독일정부의 당초 바람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국정부 역시 20세기 초에 달러하의 국제화를 장려하지 않았음. 14년 이후에 대다수의 미국인은 달러화의 국제화에 무관심했거나 반대했고, 단지 극소수 엘리트만이 국제화를 주장. 그들은 벤저민 스트롱을 대표로 하는 1901년 미국 중앙은행 설립을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미 연준제도는 1913년 설립)
- 07년 중국 관영 CCVV가 연속 방영한 대국굴기는 9개국이 부상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분석. 그중에는 중국 해군을 강화해 국내에서 안정적 통일을 보장하고 해상강국으로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됨. 퍼거슨 교수는 중국이 만약 진정으로 해상권력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미국과 이익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미국의 충돌을 일으킬 또 다른 원인은 타이완이다. 오늘날 타이완은 약 100년 전 벨기에와 같은 상황. 1914년 이전에 영국과 독일은 경제무역관계가 매우 긴밀했음. 당시 그 누구도 양국이 서로 반목하고 혈전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음. 양국은 모두 벨기에의 중립을 존종하고, 만약 벨기에가 침략당하면 반드시 보호할 것이라고 맹세. 그러나 이 맹세도 14년 벌어진 잔혹한 전쟁을 막을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퍼거슨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음. "비록 차이메리카의 경제적 성과, 즉 미국기업의 유례없이 높은 수익과 중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상술한 국가 메커니즘, 인구구조, 환경오염과 정치적 충돌 가능성 등 네가지 원인으로 인해 차이메리카의 앞날은 비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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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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