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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13 경영은 사람이다

경영은 사람이다

인문 2015. 4. 13. 17:57

 


경영은 사람이다

저자
이병남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14-12-1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이윤은 기업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가치인가? 생산과정의 요소인 ...
가격비교

- 세포의 자기조절 능력 중에는 스스로의 활동을 멈춘 채 죽음을 자초하는 생명의 기제가 존재. 예를 들어 줄어드는 일조량을 대비해 나무는 특정 세포의 기능을 차단시켜 먼저 단풍이 들고 결국 제 몸의 이파리들을 떨으뜨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겨울을 버틸 수 없기 때문. 또 방사선이나 화학약품과의 접촉, 감염 등에 따라 유전자가 심각하게 변형될 조짐이 나타나면 사전 경보장치를 발령시켜 세포자살(apoptosis)을 감행. 이런 과정이 원활치 않을 경우 무한성장과 무한번식은 생명의 특성이 아니라 공멸을 자초하는 반생명적 위험신호인 셈. 요즘은 암세포의 무한증식을 멈추게 하는 세포자살의 기제를 응용해 암을 치료하는 연구들도 진행되고 있음
- 시장이해의 변천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관점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 시대에 따라 인간도 변하겠지만,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이해방식 또한 달라졌다는 것이 중요. 중상주의 시대에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보았고, 엄격하게 관리할 대상으로 여겼음. 반면 고전경제학의 아버지가 된 아담 스미스가 이해하는 인간은 합리적일 뿐 아니라 공감할 줄 하는 사회적 존재였음. 한편 30년대 대공황으로 무너진 시장 경제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케인즈가 파악했던 인간은 변덕스럽고 감정적인 심리적 존재였다. 그에 비해 오늘날 신자유주의하에서의 전 지구적 경제위기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세태에 휘둘리며 쩔쩔매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이미 보유하고 또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음에도 시스템 전반의 핵심적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권한은 아예 인간의 손을 벗어난 모양새이다. 우리의 주인노릇을 하며 무기력상태인 인간을 조종하고 부리는 건 다름 아닌 이 시대의 세태가 되어버렸다.
- 내가 젊고 철이 없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피던 시절,
내 꿈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내가 조금씩 나이가 들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면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시야를 좁혀서 우리나라만 바꿔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임을 곧 알게 되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도 바꿔보는 것에 만족하려 했다.
아!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문득 깨닫게 되었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런 나를 보고 내 가족이 바뀌었을 것이다.
또한 가족의 변화가 영향을 주어 우리나라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묘지에 쓰인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문, 1100)
- 우리말에서 배움, 배우다라는 말에는 헝겊이나 종이에 물감이 배어들다, 스미다, 젖어들다라는 의미가 있음. 어떤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젖어들어 익숙해지고 어느새 버릇이 되는 것이다. 영어에서 배운다는 의미의 learn이라는 동사는 그 어원에 해당하는 인도유럽어의 원형이 leis인데 의미는 흔적을 따라 길을 찾아간다는 뜻. 독일어에서는 이 낱말이 배우다(lernen)와 가르치다(lehren)로 나뉘어 쓰이게 됨.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중요한 고전 중 하나인 예기에서 교학상장이 실려 있어, 가르침의 길과 배움의 길은 함께 우리를 키운다고 했는데, 결국 무엇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함. 이렇듯 배움은 원래 기능적인 게 아니었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오히려 삶 그자체라고 할 수 있음.
- 18세기 과학혁명과 이어지는 산업혁명 시기에는 감성을 배제한 이성적 사유가 막강했으나, 20세기 초 세계 정상의 물리학자들이 그 기초가 모순임을 깨닫고 실존의 위기를 겪는 사건이 있었음. 이 세상 모든 물질의 기계적 운동법칙을 밝혀냈다는 자부심에 충만해 조만간 모든 물질적 현상에 관한 예측가능성까지도 획득하리라 자신했는데, 빛의 세계를 연구하며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소립자의 내부세계를 엿보기 시작하자 이성의 논리만으로는 도통 납득할 수 없는 모순들이 드러나기 시작. 당시 정상급의 물리학자에게 사물의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는데, 그토록 당연했던 자연법칙이 소립자 세계에서는 자꾸 삐거덕거렸다. 하나를 정하면 나머지 하나는 곧 틀어져버리는, 말 그대로 모순이 계속됨. 양자역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상황을 접한 과학자들이 사실은 '하늘이 무너지고, 발밑의 땅이 거지는 듯한 충격'을 겪었다고 이야기함. 그들 중 한명이었던 비엔나 출신의 물리학자 파울리는 그런 혼란을 정리하려 정신과를 찾는데, 그를 상담한 의사는 카를 융이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면면에 대한 프로이트식의 기계적 해석을 포기하고 좀더 통합적인 이해의 길을 찾고 있던 융은 마침 주역 연구에 몰두해 있던 차라, 모순처럼 보이는 양자들의 행태가 동아시아 전통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보면 실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논하며 파울리의 혼란을 정리해줄 수 있었다. 그런 모순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새로운 안목을 수용하고자 기존의 사유법을 포기했던 일은 그 자체가 공포에 가까운 충격이었노라고 하이젠베르크는 고백한다. 이는 과학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지만, 모두 공감하며 함께 즐거웠던 그런 경험이 결코 아니었고, 당사자들에게는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시련이었음. 이런 혼란은 고전물리학의 전통을 깨고 양자물리학이라는 새지평을 열어보인 당시의 위대한 과학자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임. 기존 가치관을 포기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나의 시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겪는 혼란과 절망 혹은 분노, 이는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으레 나타나는 일이다. 쉽지 않은 내적 변모를 이루려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다. 사소한 일이어도 만약 반복되는 어떤 골칫거리가 있다면, 그건 아마 해소해야 할 나의 오래된 타성이나 고정관념에서 비롯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런 불화를 정신적 성장과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는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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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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