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10.24 무역전쟁

무역전쟁

경제 2014. 10. 24. 20:41

 


무역전쟁

저자
CCTV 경제 30분팀 지음
출판사
랜덤하우스 | 2011-10-2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강대국들은 어떻게 경제 전쟁에서 승리하고 패권을 거머쥐었나? [...
가격비교

- 바스코 다 가마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유럽에서 출발해 아프리카를 돌아 동방에 이르는 항해를 완수. 그는 동방과 서양 사이의 최단 해상항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해외무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음. 그가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와 기타 인도산 물품의 가치는 원양항해에 소요된 전체 경비의 무려 60배에 이름. 다 가마의 성공적 항해는 훗날 포르투갈이 해외영토 확장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원동력이 됨. 또 향후 일상적 무역활동이 추진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함
- 스페인 상인들은 식민지의 목화를 자국에 운송한 다음 다른 국가의 방직업자에게 판매. 이어 외국 방직업자들로부터 방직물을 구매해 자국에 운반했다가 다시 식민지 국가에 판매. 따라서 스페인 식민지 수입품 중 90% 이상이 스페인 이외의 국가에서 제조한 물건이었음. 포르투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음. 리스본을 거쳐 브라질에 수출되는 제품 중 대부분이 포르투갈 제품이 아니었음. 이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내산업은 크게 쇠퇴하여 급기야 몰락의 비운에 직면.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처음 10년 동안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당하지 않음. 투자자들이 돈을 조선, 건축 및 아시아의 무역왕국 건설에 투자했기 때문. 회사는 10년 후부터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당하기 시작. 이는 필요할 때 수시로 주식거래소를 통해 수중의 주식을 바꿀수 있었기 때문.
- 역사학자들은 네덜란드인들이 현대상품 경제제도의 창시자라는 사실에 공감. 또 은행, 증권거래소, 신용 및 유한책임 회사를 상호연계가 가능한 하나의 유기적 상업금융체제로 통일시켰다는 공로도 인정. 이런 선진적 운영모델로 인해 네덜란드가 스페인 및 포르투갈보다 더 먼 곳으로 무역촉수를 뻗치고 폭발적 자금의 증가를 가져옴. 이렇게 해서 17세기 중엽 네덜란드는 글로벌 무역패권을 확고하게 장악. 이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만 5000개의 지부를 두고 전세계 무역액의 절반이상을 차지. 17세기 네덜란드의 인구는 100~200만에 불과 그럼에도 보유한 상선은 1만 6000척을 초과했음.
- 영-스페인 해전(1588)은 17세기 영국 해상 군사력의 부상을 상징하는 획기적 사건. 이때부터 영국은 스페인을 대신해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 무적함대의 참패이후에도 스페인은 50년 동안 여전히 대국의 위치를 유지. 그러나 그 근간이 뚜렷하게 흔들리기 시작. 이로써 오랜기간 유럽의 주류문명에서 소외됐던 섬나라 영국은 사상 처음으로 강국의 자세로 유럽대륙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됨. 더불어 세계 해양패권과 무역패권 쟁찰의 중심무대에 빠르게 등장.
- 산업혁명이후 영국의 면사 생산력은 빠른 속도로 과잉상태에 직면. 영국의 면직물 생산량은 1785년 4000만 야드에서 1850년에는 무려 50배나 증가한 20억 야드에 이름.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면직물 생산량이 다른 모든 국가의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음. 인구가 2000만명도 되지 않는 영국이 이렇게 많은 천과 의류를 생산해 내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판매한단 말인가? 이때 한 영국인이 장장 300년 동안 유럽국가를 지배했던 중상주의 보호무역정책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섬. 그는 바로 애덤 스미스였음. 그는 영국이 보호무역주의, 영지쟁탈 및 독점적 지위 유지 등 고유의 방식으로 계속 돈을 벌 가능성이 높으나 만약 자유무역을 선택한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역설. 더불어 영국이 다른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다면 그 국가들이 영국산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할 것이라고 강조. 와트의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촉매제가 됬다면,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산업혁명 이후의 새로운 글로벌 무역질서 확립을 위한 기초를 닦음. 그 이전까지 세계무역대국들은 모두 보호무역 정책과 무력을 이용한 독점무역을 통해 부를 얻음.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호혜평등의 기조와 상대적 경쟁에 입각한 자유무역만이 이익극대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음.
-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경제자유화가 영국이 산업분야에서 절대적으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이후에 실현되었다는 사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된 다음 비로소 자유무역 시대에 들어섰음.
- 국가를 진흥시키고 강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끊임없는 혁신이라는 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글로벌 무역경로를 장악해 부를 축적. 네덜란드는 비즈니스 모델 혁신을 통해 부국을 실현. 이에 반해 영국은 제도혁신을 통해 역사적으로 결정적 시기에 항상 선도적 지위에 설 수 있었음. 영국의 정치변혁과 산업혁명, 중상주의 및 그 이후의 자유무역 등은 모두 그 시대에 세계를 선도했음.
-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이미 서서히 지고 있었음. 한편 1870년대부터 시작된 2차 산업혁명을 통해 독일이 새로운 강국으로 급부상. 1870년을 전후해 세계의 과학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이룩. 다양한 신기술과 새로운 발명품이 계속해서 나타나 빠른 속도로 산업분야에 응용되면서 경제발전을 크게 촉진. 이것이 바로 2차 산업혁명임. 당시 과학기술의 발전은 네가지 분야에서 두드러짐. 여기에는 전력의 광범위한 응용, 내연기관관 새로운 교통수단의 발명, 새로운 통신수단의 발명 및 화학산업의 발전 등이 속함
- 영국이 여전히 자유무역을 고집하는 와중에 미국산 저가 밀이 대량으로 영국시장에 밀려들자 영국 농산품 가격은 하락을 거듭. 궁지에 밀린 농민들은 경쟁적으로 농사를 포기. 그 결과 경작지에는 잡초만 무성해짐. 실제로 1872~1895년 영국의 밀파종 면적은 60%가 줄어듬.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정부 개입아래 관세장벽을 쌓기 시작. 1930년대 무렵에 영국은 결국 자유무역이라는 경제모델을 완전히 포기. 이처럼 경제발전과 식민지 분배의 불균형이 산업강국간의 갈등을 절정으로 끌어올림. 각종 마찰과 충돌이 잦아지고 강도가 세지면서 급기야 1차대전이 발발.
-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바로 영국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의미.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에게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뜻함.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는 이를 상징하는 것과 다름 없음
(2)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는 사실상 수출 촉진을 위한 조치였음. 영국이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관세인상, 파운드화 평가절하 등의 조치를 취하자 똑같이 수출증대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도 뒤질세라 달러화를 평가절하함. 이렇게 되자 세계 각국간 화폐전쟁이 불가피해짐
- GATT는 어느국가를 막론하고 멋대로 관세를 인상하거나 비관세 장벽을 설치해서는 안된다고 규정. 이 규정을 어길 경우 다른 국가의 경제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 GATT의 설립 취지는 각국이 상호 이익과 혜택을 전제로 관세 및 기타 무역 장벽을 줄이고 국제무역에서 차별대우를 없애 무역 자유화를 추진하자는 것이었음. 이로써 각국이 공동으로 지켜야 하는 국제적 규칙이 마련됨. 다시 말하면 다른 국가의 시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국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것. 이는 모든 국가가 상호 위-윈하는 좋은 방법이었음. GATT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다각 무역체제에 관한 조약문으로 무역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조적 메커니즘을 구축하여 무역마찰로 인한 전쟁유발 가능성을 크게 줄임. GATT는 비록 잠정 적용 의정서의 형태를 취했으나 채택 이후부터 95년에 세계무역기구가 설립될 때까지 47년 동안 꾸준히 적용되었음. 이 기간동안 세계의 평균관세율은 40%에서 4%이하로 크게 낮아졌고 수백개의 회원국을 유치했으며, 여덟차례의 다각무역 협상을 개최하고 100여건의 무역분쟁을 해결. 나아가 상품무역 규칙을 보완, 발전시키고 서비스 무역과 지적재산권 무역을 두루 포함하는 법률 및 제도적 기틀을 성공적으로 마련.
- 방직제품을 둘러싼 미일 무역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렴한 인건비, 혁신적 과학기술의 성과 등 특유의 장점에 힘입은 바 큼.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신비한 조력자가 일본 방직업을 도왔기 때문. 이 신비한 조력자는 고정환율제였음. 달러화와 엔화의 환율이 장장 22년간 1달러=360엔 수준을 유지한 덕분에 일본은 미일간 무역전쟁에서 우위를 점함. 고정환율제 도입이후 일본기업들은 20여년 동안 환위험에 노출되지 않은채, 노동생산성과 신제품개발, 제품수출확대 등의 분야에 총력을 기울이면 되었음. 한마디로 고정환율제는 일본경제성장의 밑받침이 되었음.
- 미국은 단기간 내에 산업경쟁력을 제고하거나 거액의 무역적자를 호전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달러화의 패권적 지위를 이용해 환율이라는 백전백승의 무기를 꺼내듬. 그러나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 교수는 미국의 이 조치가 급한 김에 독이 든 술을 마시고 갈증을 푸는 격이라고 지적. "달러화 평가절하 조치의 유일한 수혜자는 생산능률으 낮은 미국 제조업체이다. 달러화를 평가절하하면 미국 제조업체들은 정부의 지원에만 매달리고 발전과 아예 담을 쌓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점차 잃을 수 밖에 없다."
-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일본의 원자재 수입가격도 함께 내려갔음. 따라서 정작 수출품 가격변동은 크지 않았음. 게다가 저렴한 가격으로 미국의 석유, 목재와 다른 자원을 수입할 수 있어서 일본산 제품의 국제경쟁력은 오히려 강화됨. 당시 일본은 반도체와 전자산업의 핵심기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일본산 반도체와 전자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대단히 높았음. 엔화가 상승하면 일본산 가격도 올라가지만 다른 나라들이 일본산 반도체와 전자제품을 수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일본은 엔화가치 상승 이후 한동안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음. 엔하가 평가절상된 후 한동안 일본경제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음. 오히려 국가, 기업 및 국민의 자산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 일본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킴. 대량의 부가 축적되자 일본인들은 해외사장에 눈길을 돌려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하기 시작.
- 엔화의 평가절상은 일본의 경제버블과 버블 후의 고통만 초래한 것이 아님. 일본 수출기업들은 엔고로 인해 원가상승, 경쟁력 하락 등 난제에 부딪힘. 일본 자동차 산업의 경우 플라자 합의 이후 10년 동안 수출량이 20% 감소. 일본 기업들은 수출난 해소를 위해 경쟁적으로 공장을 해외로 이전. 일본기업의 해외생산비중은 85년 3%에서 99년 14%로 급등. 이로 말미암아 일본에는 산업공동화 현상이 나타남.
- 서독은 다른 나라에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무역행위를 하지않음. 또한 무역장벽을 설치하거나 무역전쟁을 도발하지도 않음. 서독은 어떻게 윈윈효과를 얻었을까? 우선 가급적 수출품목을 분산시킴. 87년 서독의 수출상품 중 단일 품목이 전체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를 초과하지 않음. 그러나 같은 해 일본은 전기, 기계 제품 수출량이 전체 수출량의 74%를 차지. 서독의 이런 수출방식은 일본보다 무역마찰을 유발할 가능성이 적음. 또한 서독은 무역마찰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많은 국가에 자국제품을 수출. 예컨대 서독기업은 대미수출비중을 10%미만으로 제한했으나 일본기업들은 오랫동안 수출량의 50%이상을 미국시장에 수출. 이밖에 서독은 자국산 제품을 대량으로 수입한 국가의 반감을 사지 않기위해 이 국가들로부터 필요한 제품을 대량으로 수입. 반면 일본은 미국에 대량의 제품을 수출한 다음 필요한 물자를 개도국으로 부터 대거 수입해 미국의 불만을 크게 샀음. 서독은 한마디로 똑똑한 무역전략을 실시해 무역제재를 최대한 피할 수 있었음.
- 개도국의 1차상품 교역조건은 장기적으로 악화되는 추세에 있음. 전통적으로 중심구 국가들은 주변부 국가들의 희생을 대가로 많은 혜택을 누림. 프레비시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아시아, 아프리카 및 남미의 수많은 개도국들은 앞다퉈 수입대체 정책을 실시. 우선 관세보호, 수입쿼터 등의 조치로 선진국 공산품의 수입을 규제하고 다양한 지원정책으로 자국 민족산업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수입대체를 실현. 다음에는 공산품 수입원가를 낮추고 외화부족 압력을 줄이기 위해 자국 통화가치를 평가절상.
- 플라자 합의는 일본 수출산업에 큰 타격을 입힘. 다른 의미로는 일본 수출업의 글로벌화를 한발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도 있음. 도요타,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다국적 기업들은 이로 인해 기업예산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문제는 해상운임의 증가였음. 이에 일본기업들은 환위험을 피하기 위해 플라자 합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 기타 아시아 국가에 공장을 설립하기 시작. 플라자 합의 는 아시아 경제, 더 나아가 세계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엔화가 평가절상된 후 아시아의 네마리 용도 자국 화폐의 평가절상 압력에 직면. 이러한 화폐 가치조정은 아시아의 네마리 용와 일본이 자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을 외국으로 이전하도록 만듬. 전세계적으로 무역의 문턱이 크게 낮아진 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도래했을까? 자본은 이윤극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세계에서 갖아 저렴한 자원과 노동력을 찾아 배분될 수 밖에 없음. 유엔 통계에 의하면 60년대 후반에 세계에는 276개의 다국적 기업과 2만 7300개의 해외지사가 있었음. 그런데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다국적 기업과 해외지사는 각각 1만여개와 10만여개로 증가했고, 99년에는 그 숫자가 각각 6만 3000개 및 70만개에 이름. 자유무역은 다국적 투자를 촉진하고 국제분업과 산업 이전의 과정을 가속화시킴. 이로써 애덤 스미스의 명제가 분명하게 입증됨.
- 93년 클린턴이 당선되었을 때 미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누적되는 쌍둥이 적자상태가 나타남. 클린턴 행정부는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먼저 화폐정책에 손을 대고 달러화의 평가절상을 추진. 달러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미국 제조업 수출에는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만 국제자본을 대량으로 유치할 수 있어서 금융시장 활성화에는 도움이 됨.
- 달러화가 가파르게 평가절상되자 국제시장의 자금이 순식간에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동남아 국가와 지역들은 위기에 빠짐. 동남아 각국 화폐는 대부분 달러화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달러화의 갑작스러운 평가절상은 이들 국가의 화폐가치도 급격하게 상승시킴. 이로써 수출경쟁력이 크게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 달러화가 평가절상된 지 얼마 되지 않은 95년 2분기부터 인도네시아, 한국, 태국 등의 수출이 급감하면서 거액의 무역적자가 나타남. 또한 동남아 각국에 투자한 외국자본들이 앞다퉈 철수하면서 고작 몇 달 사이에 이들 국가의 외환보유고는 대폭 감소. 96년 인도네시아의 국제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 한국은 5%. 말레이시아는 6%, 태국은 9%에 달함. 이들 국가는 서구 금융투기세력의 공격을 막아낼 힘을 완전히 상실.
- 미국이 거액의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안정적 인플레이션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임. 달러화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결제 및 외환거래, 외환비축 수단임. 따라서 세계 각국의 달러화에 대한 수요는 가히 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미국의 교역 상대국들은 실물상품을 미국에 수출하고 달러화를 받음. 마침 99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생산과잉 현상이 나타나 그 후 몇년 동안 미국에 수출하는 상품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 미국은 이 기회를 틈타 대량의 상품을 수입하면서 국내물가수준을 끊임없이 하락시킴. 한편 미국은 이시기에 고부가가치 공산품 생산과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한 금융서비스업 발전에 총력을 기울임.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은 인플레를 피하면서 고성장을 이룸. 그렇다면 무역흑자국이 벌어들인 달러는 최종적으로 어디로 흘러갔을까? 다름 아닌 미국임. 미국의 몇몇 대표적 무역파트너는 동시에 미국 국채의 최다보유국이기도 했음.
- 전통 산업 강국인 서독의 경우 20년 동안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후 무역마찰과 플라자 합의의 걸림돌에 부딪혀 당시 마르크화의 달러화 대비 가치가 70.5%상흥. 이로 인해 서독의 대외무역은 심각한 타격을 입음. 이때 서독정부는 경기부양책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국가의 경제성장 모델을 재조정. 제조업 위주의 직업교육을 영양, 간호, 금융, 서비스 등 100여개 분야로 확대하고, 아울러 가계소득을 증진시켜 내수규모를 확대. 또 일련의 중소기업 지원정책을 펼쳐 중소기업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경제성장점을 찾고 고용을 증진. 그 결과 3년후부터 서독경제는 안정적 반등을 보이면서 경제성장률이 3.71%에 달함. 9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5%를 초과. 서독경제는 짧은 침체기를 겪은 후 3~5%의 안정적 성장수준 유지.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원음모 하  (0) 2014.10.29
자원음모 상  (0) 2014.10.29
죽음의 계곡  (0) 2014.10.24
경제학 콘서트2  (0) 2014.10.24
푸드쇼크  (0) 2014.10.24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