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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탄생

인문 2014. 11. 9. 19:25

 


부자의 탄생

저자
김범 지음
출판사
동녘 | 2011-02-0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부자병’에 걸린 ‘가난한’ 한국 사람들시대의 부자란 무엇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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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타고난 재능보다 후천적 노력이 재산을 불리는 데 훨씬 중요한 요소인 양 교육받은 덕에 특별한 조건이나 제약이 없으면 쉴 틈없이 피땀흘려 노력하기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함. 주변 부자들이 들려주는 노력을 기반한 성공신화들도 거기에 한 몫 보탬. 그런데 그낭 부자가 아니라 한 시대 최고의 부자도 과연 피땀 흘려 노력만 하면 가능할까? 이책은 부와 시대상에는 어떤 연결점이 있다고 판단해 큰 부는 그 시대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가설하에 시대를 망라한 최고의 부자들의 성공비결을 파헤치고 있음

1. 이병철과 삼성가

- 기업은 시대와 사회의 순리를 좇아 사업을 벌이고 능력과 한계를 알아 무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 시대적 상황변화를 읽어내는 경영을 강조

- 사업의 성공은 기술이나 상품의 혁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새로운 신흥시장에 뛰어드느냐에 달려 있기 대문에 시장이 충분히 개척되지 않은 상태에서 환경의 수요에 맞추는 새로운 사업들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음. 30~40년대 당시 한국 경제의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에 근거한 투자는 시기상조였음. 대신 이병철은 현실에 맞는 새로운 상품을 찾고 이런 상품을 개발해 구매자의 요구가 상승하게 되면, 생산라인을 빨리 증가시키고 대규모 투자를 하는 방식을 선택.

- 공제욱 상지대 교수는 50년대 대기업가가 되가는 요인과 패턴을 분석하여 6가지로 정리. 부모재산의 영향, 귀속기업체 및 국유기업의 불하, 불하된 귀속기업체의 인수, 원조자금 및 정부달러의 배정, 은행융자, 정권과의 밀착을 꼽음. 지난 30년간 유명한 대자본가이자 기업가인 이병철, 구인회, 정주영은 이러한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임. 그럼에도 위의 6가지 요인에는 기업가 정신, 또는 사업 통찰력 같은 요인이 포함되지 않음. 또한 50~70년대까지 정권과 밀착하여 대기업을 키운 경우 오늘날 남아 있는 기업은 그다지 많지 않음. 일제가 철수하고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경제사정에서 정부가 기업가를 도와 경제부흥을 이루는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잘할 수 있는 기업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음. 식민지 기간 동안 한국인 기업가들이 클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해방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일본인 소유의 공장 운영에 필요한 자질을 가진 경험있고 적당한 한국인 경영자를 찾기 어려웠음. 그리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기업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들을 육성하는 것이 부득이했음. 자본시장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귀속자산을 시장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귀속기업체와 국유기업은 50년대 시장가격 이하로 매각됨. 또한 정부에게 불하받은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공장의 운영을 위해 운영자금을 우선 대부해 줌. 해방 이후 일본 기계류와 원자재 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장비의 수입과 부족한 원자재를 메우고자 불하받은 기업인들에게 외환을 배당하는 것은 당연했음. 마지막으로 일본의 한국경제 침투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국내 생산품과 경쟁이 될 수 있는 물품의 수입을 제한해 맹아적으로 한국 산업을 보호해야 했음. 당시의 독특한 기업가 지원책은 그때 경제상황의 부산물임.

- 한국반도체 산업 성공요인

(1) 초창기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을 위한 연구, 개발, 설비에의 과감한 투자

(2) 제조업자들의 메모리 장치와 같은 몇몇 전략적 품목의 선택과 집중

(3) 동일 재벌그룹 내에서 금융을 포함하는 다른 그룹 계열사의 지원. 다른 회사를 통해 초기손실을 완화시키면서 대담한 투자를 결정.

(4) 한국 기업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인적자원.

2. 김연수와 토착자본가

- 1910년대 조선인 지주, 상인들의 대응은 크게 네가지 방식으로 나타남. 첫째, 금융/상업자본에서 금융자본 혹은 산업자본으로 전환을 모색했거나, 둘째, 지주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전환. 셋째는 지주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사레이고, 넷째는 전통적 상업자본에서 근대적 상업자본으로 성장. 김연수 집안은 지주자본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모색한 대표적 사례.

- 김연수 집안의 재산형성 과정은 한국 근대 경제사의 척도라 할 수 있음. 개항이후 식민지기에 걸친 시기 동안 미곡무역, 지주경영, 산업자본으로의 전환, 해외진출 등 시대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고 이를 잘 이용. 물론 성공의 배경에는 권력 및 금융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도 간과할 수 없는데, 이것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전형적 모습이었음. 그리하여 이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자본, 지주자본으로 성장하게 됨. 그러나 해방과 함께 그동안 축적해온 부의 상당부분을 상실했고, 이후에는 이전의 위상을 찾지 못함. 그 요인으로는 권력과의 관계가 이전에 비해 소원해진 탓도 있겠지만, 새롭게 진출한 사업분야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음. 하지만 개인의 명망을 바탕으로 김연수는 한국 경제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할 수 있었음.

3. 임상옥과 중인거부들

- 박지원은 임상옥이 태어난 바로 이듬해의 중국 무역의 실상과 의주상인에 대해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음. 당시 중국으로 은을 가지고 가서 비단과 같은 상품을 수입하는 모든 권한은 의주상인들이 독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역관에게도 일부 상품의 무역권한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무역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평양상인이나 개성상인에게 그 무역권을 팔기도 함. 그런데 평양상인이나 개성상인은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의주상인에게 무역을 대행시킬 수 밖에 없었음. 따라서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의주상인에게 달려 있었음.

4. 윤선도와 해남윤씨 가문

- 종손의 계보가 분명하고 가문의 구성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윤홍중 이후 4대에 걸쳐 재산을 크게 축적하고 유지할 수 있었음. 다시 말해 한번 종손을 중심으로 모여든 재산이 크게 분산될 겨를이 없었음. 이 점이 바로 해남 윤씨 윤선도 가문이 국부라는 지목을 받을 정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임. 윤선도 가문에서 재산을 늘려나간 치부방식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연해안 간석지를 간척해 농경지를 확보한 것.

5. 한명회와 훈구대신들

- 조선시대 전체를 규정한 기본원리는 신분제도였음. 그 신분제도는 강고하고 누층적 혈연과 혼인관계를 통해 광범하게 재생산되어왔음.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방대하고 정교한 족보와 보학이 웅변하듯이, 조선시대의 가문의식은 매우 투철했음. 그렇다면 고관에 오르고 공신에도 책봉되는 뛰어난 경력을 가진 자신의 조상에 대해서 그 후손들은 그 조상이 반역과 같은 결정적 과오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일정한 흠결이 있다고 해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라는 것이 좀더 합리적 판단일 것임.

6. 여말 권문세족과 고려 후기의 풍경

- 정치권력의 최정점인 왕의 빈번한 교체는 귀족들에게는 기회이자 위기였음. 줄을 잘 선 사람들은 일약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줄을 잘못 서서 유력한 귀족임에도 몰락하기도 함. 그렇지만 당시 가장 좋은 줄은 바로 원나라였음. 대표적인 예가 기황후의 형제들인 기씨 일파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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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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