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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사의 진실

저자
윌리엄 엥달 지음
출판사
| 2007-10-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은 저널리스트인 ...
가격비교

- 달러화의 위력과 미국 군사력은 1차세계대전 전부터 세계경제성장 원동력의 기반인 한 상품과 유일하게 얽히게 되었음. 그 상품은 바로 석유로서, 그것을 사용하게 되면서 영, 미, 독, 프,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병사들에게 전쟁을 요구하기 시작. 언젠가 헨리 키신저는 석유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석유는 소련이 붕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 냉전기간 동안 세계 많은 곳에서 석유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규정했음. 그리고 석유는 냉전이 종식된 이후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미국의 군사행동들을 규정했음.
제1장 대영제국의 세 기둥
-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분할한 1814~15년 빈 회의이후 영국 외무장관 캐슬레이 경의 외교적 책략에 힘입어 대영제국은 제해권을 행사했는바, 그 대가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와 나머지 유럽대륙 열강들에게는 자국에 유리하게 양보했음. 그 결과 중부유럽대륙을 분열된 상태로 약화시켜 영국의 세계적 팽창에 맞서지 못하게 만들었음. 그렇게 세계 해운무역의 통제와 더불어 영국의 해상지배력은 워털루 전투에 이후 새로운 대영제국을 떠받치는 세 기둥 가운데 하나로 드러나게 되었음. 영국을 제외한 유럽대륙과 그 외 나라의 제조업자들은 대부분 로이드 해상보험과 런던의 은행연합이 정한 거래조건에 응할 수 밖에 없었음. 세계 해상 무역금융에는 대부분 런던시티 은행들이 발행한 신용장과 환어음이 필요했음. 금융지구 명칭인 런던시티의 베어링사, 햄브로사, 로드차일드사 등 일류 금융회사들이 만든 민간 잉글랜드 은행은 경쟁시장 어디든 마음대로 영국의 수출품을 무자비할 정도로 대량유입시킬 속셈으로 세계의 최대 금 통화 공급을 조작했음. 1815년부터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영국의 국제금융 지배가 대영제국 힘의 두번째 기둥이었음. 세기가 지날수록 점점 더 중요해진 세번째 기둥은 바로 세계의 원자재, 즉 면화, 금속, 커피, 석탄과 19세기가 끝날무렵부터는 새로운 검은 금이라 불리던 석유의 지정학적 지배였음.
- 미국의 경제학자로 영국의 자유무역을 강력히 반대한 페샤인 스미스는 1850년대 대영제국의 자유무역 패권이 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 "대영제국의 입법을 여전히 좌우하고 있는 정책이 바로 그랬다. 그 정책으로 보면 국가는 사실상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사용하기 위한 상품이 아닌 팔기위한 상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러한 상품들을 상대판매상보다 더욱 저렴하게 팔기 위해 생산비를 낮추려고 노력하는 거대 무역업자로 간주되었음. 그래서 자국민에게 지불되는 임금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잠식하는 손실이라고 생각했음."
- 1880년대에 새로 깔린 철도덕분에 아르헨티나의 제품, 특히 쇠고기와 밀이 수출을 위해 항구로 운송되었음. 아르헨티나의 수출은 배로 늘었고, 주로 런던 은행들에 진 대외채무는 700퍼센트나 증가. 아르헨티나는 어느 논평가가 이름 붙였듯이 '저렴하게 구축된 제국주의'인 대영제국에 부채로 묶인 속국이었음. 이러한 피보호국들과의 관계에서 강력한 자주 산업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영국 정책의 목적은 분명히 아니었음.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경쟁국들이 누구나 탐내는 원자재나 경제력이 될 만한 다른 재화들을 얻지 못하게 하면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투자만 하는 것이었음.
- 19세기 대영제국의 자유무역주의와 그에 대한 맬서스식 합리화는 실패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음. 자유무역주의는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세계의 점증하는 지역의 경제를 집어삼키는 데 기초하고 있었음. 곡물법이 폐지된 지 불과 25년만에 대영제국은 그로 인해 자국 역사상 최악의 장기 불황에 빠딤. 1873년 이후 영국발 질병 즉 애덤 스미스가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범세계적 모델이라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려는 영국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음. 독일이 이끄는 유럽대륙의 나라들이 과거 2백년간 가장 눈부신 산업성장율을 기록할 수 있게 만든 일련의 국민경제 보호주의적 조치를 발동했기 때문. 이러한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계에서 제국과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두고 영국 지배층 사이에 새로운 논쟁을 야기했음.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은 1882년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 도입되었음. 이제 그 논쟁은 영국의 제해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음.
제2장 점점 다가오는 전선
- 대략 1850년대까지 독일정부는 겉보기에 성공적인 것 같은 영국경제모델을 모방하는 정책을 펴고, 독일대학에서는 애덤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영국 경제학자들의 자유무역 경제학을 성스러운 복음으로 떠 받든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음. 그러나 1870년대에 이르러 영국이 장기불황에 빠져든 이후로 점차 독일은 영국식 모델을 충실하게 고수하는 데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 독일이 국가산업과 농업생산을 일으키면서 일종의 국민경제 전략쪽으로 점차 전환하여 영국식 자유무역을 고수하는 데서 멀어지자 그 결과는 괄목할 만했음.
제3장 석유 장악을 위한 세계의 다툼이 시작되다
- 독일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유럽대륙에서 강대국이 된 이후로 영국은 자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해군 우위력에서 다른 어느나라보다도 독일에게 위협을 느꼈음. 그 시점부터 영국-독일간의 불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어떤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이 하나도 없었음.
제4장 석유는 무기가 되고, 근동은 전쟁터가 되다
- 1914~18년 1차세계대전과 관련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비밀 가운데 하나는 영국이 독일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1914년 8월 전야에 영국 재무성과 대영제국의 재원이 사실상 파산상태에 있었다는 사실. 전쟁 당사국들의 실질적인 재정관계에 대해 고찰해보면 전쟁후에 전 세계, 특히 막대한 석유자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던 오스만 제국지역이 원자재와 물리적 부를 재분배하려는 상세한 계획과 결부된 비밀차관의 특별한 배경이 드러남.
- 이미 1914년 이전에 영국의 전략적, 지정학적 목표는 최대의 산업경쟁국이 독일을 분쇄하는 것뿐 아니라 전쟁의 전리품을 통해 귀중한 자원을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게 영국이 확고히 장악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었음. 1919년 무렵 그 귀중한 자원인 석유는 향후 경제발전의 전략적 원자재로서 그 존재가치가 입증됨. 이것은 20세기 나머지 기간동안 도전받지 않는 헤게모니를 장악할 전지구적 신 대영제국의 창설, 즉 영국 주도의 신세계질서를 겨냥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음.
- 1919년 영국이 베르샤유 평화회담을 통해 국제연맹을 창설한 것은 노골적이 제국의 영토강탈에 국제적 정당성이라는 허울을 부여한 수단이 됨. 런던시티의 금융기관들을 위해 수십만의 영국인의 목숨을 희생한 일은 원자재, 특히 새로운 자원 석유의 장악을 통해 향후 세계 결제발전을 지배하기 위해 치러야 할 작은 대가에 불과한 것 같았음.
제5장 협력과 갈등의 목표
- 영국이 베르사유 회담의 영토상 승리자로 부각되었다면,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강대국은 영국이 아니라 자국이라고 확신하는 미국, 적어도 미국의 강력한 국제금융 및 산업계가 1920년대 초에 부상. 그후 몇년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국제 이해관계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짐. 20년대 초 무렵, 대영제국 원동력의 세기둥(세계 해상로 장악, 세계 은행과 금융지배, 전략적 원자재 통제)은 새롭게 형성된 미국 국제주의자 체계로부터 각기 위협을 받고 있었음. 런던에 의해 수십년 동안 훈련 받았고 한때 친영파였던 이 미국인 집단은 이제 더는 영국에 고분고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정. 그후 10년이 넘게 영국과 미국의 공통되면서 모순된 목표들 사이에 심각한갈등이 빚어짐.
- 1917년 8월 연방준비은행은 미국 정부의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자유공채와 채권판매에 돌입. 애국심을 동원한 이러한 작전에서 민간 투자가들에게 팔린 미국 재무부 발행 채권은 모건사와 뉴욕의 다른 유수의 투자회사를 통해 판매됨. 이러한 자유공채와 채권의 총발행액은 1919년 6월 30일 무려 214억 7800억 달러라는 경이적 액수를 기록. 역사상 그렇게 단기간에 그렇게 막대한 금액이 동원된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음. 이 사업에서 모건사가 책인 수수료는 실로 막대했음.
- 유럽의 전쟁부태 원리금 규모는 너무나 커서 세계 금융기관에 대한 연간 부채원리금 상환 요구액이 1920년대 미국의 연간 총 대외무역액보다도 컸음. 뉴욕의 국제은행계는 이 어마어마한 부채원리금을 상환하는 쪽으로 세계자본의 흐름을 바꿈. 전쟁 부채 원리금 상환을 이행하느라 전쟁으로 파탄한 유럽경제를 재건하고 근대화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투자가 희생됨
- 모건사는 황폐해진 유럽경제 덕분에 경쟁적 우위를 누렸고, 뉴욕 금융계는 자신들 마음대로 여신조건을 정할 수 있었음. 유럽에 대한 대출에서 얻은 이익이 전후 미국 경제 확장에 투자한 데서 얻은 수익보다도 훨씬 컸음. 모건과 모건사의 스트롱이 지배하는 뉴욕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뉴욕 금융계는 일부러 미국의 금리를 낮게 유지. 그 결과 전후 미국의 차관은 자본이 국내보다 훨씬 높은 고위험 할증 이자를 벌어들이는 미국의 차관은 자본이 국내보다 훨씬 높은 고위험 할증이자를 벌어들이는 유럽과 세계 나머지 지역으로 흘러들어간 반면 런던과 잉글랜드 은행의 신임 총재 몬커규 노먼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시장에 미국 금융이 침입하는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았음.
제6장 영-미의 결속이 굳어지다
- 영국과 약화된 프랑스는 27년 미국인들을 중동에 들이기로 동의했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전시에 은밀하게 맺었던 협정을 변경했음.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아래로는 팔레스타인을 거쳐 예멘까지, 위로는 페르시아만까지 지나는 레드라인이 그려짐. 레드라인은 터키, 시리아, 레바논, 사우디, 요르단, 이라크, 쿠웨이트를 둘러쌌음. 레드라인 안에서 세나라의 석유업계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완벽한 영토분할을 결정했음. 이라크 내에서는 록펠러 그룹과 함께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회사, 로열더치셸 그룹, 1914년 도이치 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터키 국영 석유회사의 지분을 받았던 프랑스 석유회사가 이라크 석유에 대해 75년 동안 독점적으로 채굴할 수 있는 잇권을 얻었음. 쿠웨이트는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회사와 미국 멜런가문의 걸프 석유회사가 차지했음.
- 잉글랜드 은행의 노먼과 뉴욕 연준이 의장인 해리슨과 모건사와 월스트리트 친구들이 계속된 은행위기, 경제공황, 그와 관련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비극적인 사태발전을 사실상 문자 그대로 지휘했음. 아마 명목상으로 최소한의 롤오버 조치만 취했더라도 이 위기를 통제불능 상태 전에 초기단계에서 중지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독일에 대한 모든 여신을 차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음.
- 해리슨은 루커 제국은행 총재에게 독일 자본시장에 강력한 예금 긴축과 억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만이 해외자금의 이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 그런데 실제로 뒤이어 일어난 일은 독일은행체제와 산업을 최악의 공확으로 몰아놓은 총제적 붕괴였음.
- 노먼과 잉글랜드 은행은 31년 중대한 고비에 처한 독일에 단 한품의 차관제공조차 매몰차게 거절했던 반면(그래서 독일의 지도층이 절박하게 히틀러 같은 대안조차 생각할만큼 실업위기가 촉발됨), 33년 초에는 히틀러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섭게 그 장본인 노먼은 히틀러 정권의 사활이 걸린 잉글랜드 은행의 차관제공을 황급히 서두름. 노먼은 새로운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추가 금융지원을 비밀리에 주선하려고 34년 5월 베를린을 특별방문함. 히틀러는 노먼의 친한 친구 샤흐트를 제국은행 총재겸 경제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그에 보답했음. 샤흐트는 39년까지 그 직위를 유지.
제7장 석유와 브레턴우즈의 신세계질서
- 2차대전의 결과로서 영국 금융파워의 기초를 형성했던 제국의 무역 메커니즘이 완전히 붕괴됨. 막대한 해외투자는 전쟁비용을 지출하기 위해 이미 오래전에 팔린 상태였음. 영국의 국가부채는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치솟음. 내부적으로 영국의 설비와 장비는 부식되고 낡아빠져서 심지어 전기공급조차 믿을 수 없었음. 가계물품들은 헐어 빠지고 국민들은 기진했음. 전쟁이 끝날무렵, 영국의 수출은 전쟁전 수준의 겨우 31퍼센트로 축소되었음.
- 브레턴 우즈 체제는 세 기둥으로 수립됨. 세기둥이란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국제수지 균형이 위기에 처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준비금을 조성하는 국제통화기금, 대규모 공공프로젝트를 위해 회원국 정부에 차관을 공여하게 될 세계은행, 자유무역의 조정된 의제들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을 말함. 그러나 전후 영-미의 세계 통화 및 무역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케인즈경과 그의 미국 협상 상대가 교묘하게 기획한 몇몇 조항들이 있었음. 첫째,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내에서 실질적인 표결 통제권은 미국과 영국에게 주어졌음. 둘째, 브레턴우즈 체제는 이른바 금본위제를 출범시켰음. 이 체제하에서는 각 회원국의 자국통화가 미국 달러화가 연동되었음.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전쟁기간 세계의 공식 금 준비금의 대부분을 축적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경제에 힘입어 미국 달러화가 전쟁의 폐허에서 가장 강력한 통화로 등장했기 때문에 전후 미국 달러화 본위제나 다름없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위치에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음.
- 마셜플랜으로 더 잘 알려진 전후 유럽부흥계획에서 석유의 역할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음. 이 계획이 47년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유럽부흥 계획을 받아들인 서유럽 국가들의 가장 큰 단일지출 항목은 마셜플랜자금을 이용한 석유구입이었는데, 이 석유는 주로 미국계 석유회사들이 공급한 것이었음. 국무부 공식 기록에 따르면 마셜 원조자금 총액의 10퍼센트 이상이 미국의 석유를 구매하는 데 쓰였음.
- 미국 회사들은 워싱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마셜플랜 자금이 유럽의 자생적인 정유시설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지 못하게 막아 전후 유럽에 대한 미국 거대 석유회사들의목조르기를 더욱 강화했음.
-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50년대 초 전후시기 뉴욕의 소수은행들과 기업들과 관련 법률회사들에게로 경제력과 금융력이 집중되고 있는 현상이 내포하는 불길한 의미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던 반면, 런던 시티의 영국인 동업자들은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음. 미국 사회는 이제 기술 및 산업발전이라는 미국의 전통적 기반에서 탈피하여 금융과 원자재의 지배와 국제무역조건의 통제를 기반으로 금융과 원자재의지배와 국제무역 조건의 통제를 기반으로 한 영국식 비공식 제국 노선을 따라 가속적으로 재편되가고 있었음.
- 미국 중앙정보국은 AJAX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53년 영국의 비밀정보부와 전격적으로 협력하여 모사데크를 전복했음. 영국과 미국은 젊은 왕자 팔레비를 지원하여 모사데크에 맞서게 했음. 왕세자가 돌아오자 경제제개가 풀렸음. 결국 영-미 석유대기업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은 전후에 자신들의 권한에 도전하려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영미 석유기업들은 25년 뒤 팔레비에게 등을 돌리게 됨.
제8장 스털링화 위기와 아데나워-드골 위협
- 50년대말 무렵 미국의 기득권 세력은 미국의 도시들을 재건하고, 더욱 숙련된 노동력을 교육하고, 점더 현대적인 공장생산과 국가경제 개선에 투자하는 데서 멀어졌음. 오히려 서유럽, 남미나 아시아 신흥경제권에서 이미 가동중인 산업회사들을 값싸게 장악하기 위해 미국에서 달러화가 빠져나갔음.
- 57년 위기 이후 미국의 거대 산업계와 은행들은 산업정책에서 점점 영국식 모델을 따랐음. 제품품질에 대한 체계적인 속임수가 널리 성행했음. 밀턴 프리드먼과 다른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통화주의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1846년 이후 영국의 싸게사서 비싸게 팔기 방식이 미국의 생산기반에 대대적으로 적용된 것에 지나지 않음.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산업발전에 대한 헌신보다 회사주주들을 위해 3개월마다 산출되는 목표인 회사 재정의 bottom line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
- 뉴욕의 국제은행가들이 그다지 홍보하고 싶지 않은 것은 바로 미국의 미래에 대한 투자를 회피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 67년 1월 의회에 제출한 대통령 보고서에 따르면 62년에서 65년 사이에 서유럽에 있는 미국기업들은 12퍼센트에서 14퍼센트의 수익률을 올림. 그런데 똑같은 미국달러를 미국 산업에 투자했을 경우 반도 안되는 수익률을 기록했음. 은행들은 자신들의 게임이 지속될 수 있게 워싱턴 정계에 조용히 로비를 벌임. 그들은 유럽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미국의 발전에 투자하기 위해 본국에 송금하기보다는 달러화를 유럽에 그대로 보유. 이것이 바로 유로달러시장으로 알려지게 된 것의 시초였음. 70년대말 그것은 전체숙주(국제 통화체제)의 파멸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가 되고 있었음.
- 브레턴 우즈 규정아래서 미국은 자국내에서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통해 달러화를 팽창시킴으로써 유럽과 다른 교역국들이 달러화 약세의 형태로 사실상 미국의 이 전쟁비용을 삼킬 수 밖에 없게 만들었음. 미국이 44년 이후 자국의 경제성장 악화를 반영해서 금에 대한 달러화 가치의 평가절하를 거부하는 한 유럽은 20년 전과 같은 환율로 달러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비용을 고스란히 지불해야만 했음.
- 60년대 동안 자신의 위대한 사회계획과 베트남 군비증강으로 발생한 막대한 적자를 메우려고 세금을 올리면 유권자들의 표를 잃게 될까 두려워했던 존슨은 적자분의 자금조달을 위해 재무부 발행 장기채권을 더 많이 판매함으로써 그저 달러화를 찍어내기만 하고 있었음.
- 유럽 중앙은행들은 이 기간 동안 막대한 달러화 예금을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이것을 공식적인 지불준비금으로 이용. 이른바 해외 유로달러의 축적이었음. 아이러니하게도 61년 미 정부는 유럽 동맹국과 일본, G10국가들이 브레턴우즈 협정에 규정된 대로 미국의 달러화를 금으로 바꾸는 대신 늘어나는 미 달러화 보유고를 유지함으로써 미국 금 준비금의 고갈을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음.
- 60년대 기술적으로 정체된 산업기반때문에 무역적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처럼 영국도 나머지 세계에 대한 금융자금 순수출국이었음. 유럽대륙 경제는 기술에 대한 강력한 투자로 생산성이 호전되고 새로운 유럽 공동시장 내 교역이 증가한 덕분에 활발하게 성장. 그렇게 영국의 결함과 새로운 기술투자부족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져갔음. 런던의 강력한 금융계는 또다시 60녀대 중반 내내 주요 산업국가중 가장 높은 이율을 유지함으로써 세계 금융의 흐름을 런던은행으로 끌어들이는 데 골몰했음. 산업은 침체되었고 근본적으로 기술을 혁신하기 위해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었음.
제9장 세계 경제 역행시키기
- 세계 달러 보유자들에게 이제 더는 달러를 금으로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닉슨은 세계 경제의 숨통을 끊어놓아 전례없이 세계를 뒤흔들게 될 일련의 사건들이 요동치게 만듬. 미국이 달러화를 좀더 실질적인 수준으로 조정했더라면 매우 효과적인 해결책이 되었을 것임. 프랑스에서는 드골의 경제정책 자문관이었던 자크 뢰프가 미국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는 온스당 35달러를 70달러로 바꿀 것을 계속 요구했음. 이렇게 하면 세계의 투기를 진정시킬 수 있어 미국은 국내 경제를 심각한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도 해외의 불안정한 유로달러 수지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뢰프는 주장. 적절하게 시행되기만 한다면 이로 인해 미국 수출의 외화 표시가격이 하락할 것이므로 미국 산업은 막대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음. 그러나 이번에도 상식이 통하지 않았음. 월스트리트가 내세운 명분이란 설령 경제생산이나 미국의 번영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금융부문 권력은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음.
- 닉슨의 전략을 실질적으로 구상한 사람들은 런던 상업은행계 인물들이었음. 지그문트 워버그 경, 에드먼드 드 로스차일드, 조슬린 햄브로와 그 외의 사람들은 71년 여름 닉슨이 브레턴우즈 금본위제를 와해한 것을 절호의 기회로 보았음. 런던은 다시한번 차입금, 이번에는 미국의 유로달러화를 토대로 한 세계 금융중심지로 발돋움했음. 71년 8월 이후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 특별보좌관이 좌우하는 지배적인 미국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것이었음. 미국의 정책관리들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을 신맬더스 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음. 기술이전과 산업성장 전략보다는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 사고로의 또 다른 역행인 개발도상국의 인구억제가 70년대 동안 주요 급선무가 되었음.
- 71년 8월 달러화 본위 화폐 사용 폐지는 런던-뉴욕의 금융계가 귀중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이용한 것이었으나 정책 내부자들은 대담하고도 새로운 통화주의적 구상을 준비했는데 이는 일부 사람들이 명명했듯이 패러다임의 변환이었음. 막강한 영-미 금융계 특정인사들은 결정적 참패에 빠진 것처럼 보인 바로 그때 다시 한전 강력한 달러를 만들어내고, 다시 한번 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인 정치권력을 증강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
- 빌더버그의 연례 모임은 54년 5월 볼, 록펠러, 요세프 레팅거 박사,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 왕자, 조지맥기(당시 미 국무부 소속이었다가 나중에는 모빌 석유회사의 고위 임원이 됨)가 포함된 친영파에 의해 극도로 비밀리에 시작됨. 이 빌더버그 모임은 전후 영-미 정책 형성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됨
- 빌더버그 주변에 모인 권력자들은 세력균형을 영-미 금융세력과 달러화에 유리하게 되돌리기 위해 그해 5월 세계의 산업성장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격을 시작하기로 확고히 결정함. 이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세계 석유흐름 통제라는 가장 귀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 빌더버그 정책은 세계 유가를 극적으로 인상시키기 위하여 세계적으로 석유수출 공급을 제한하는 것이었음. 45년 이후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전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국제 관행상 세계의 석유는 달러화로 값이 매겨졌음. 그러므로 세계 유가가 급격하고도 가파르게 상승하면 그 필요한 석유값을 지불하기 위해 미국 달러화 수요도 그만큼 극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었음.
- 키신저의 73년 오일쇼크가 세계 산업성장에 막대한 충격을 가했던 반면 특정 기득권 세력, 즉 뉴욕과 런던의 주요 은행들, 미국과 영국의 세븐 시스터즈 다국적 회사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줌. 74년 엑슨사는 순익면에서 GM사를 추월했음. 모빌, 텍사고, 셰브런과 걸프를 비롯하여 다른 석유회사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음. 키신저가 명명한 재순환되는 석유달러인 석유수출국기구의 막대한 달러수입은 국제석유거래는 물론 달러화를 취급하던 런던과 뉴욕의 주요 은행들에 예치됨. 체이스맨하튼, 매뉴팩처러스하노버, 뱅크오브아메리카, 바클레이스, 로이즈, 미들랜드 은행 등 이 모든 은행들이 석유위기라는 뜻밖의 횡재로 생긴 이익을 향유했음.
- 전후 시기에 핵에너지는 19세기말 피셔경과 처칠이 영국 해군의 동력을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당시 석유가 석탄에 대해 우위를 보였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기술상의 진보를 보였음. 70년대가 19세기 말과 다른 주요한 차이점은 영국인들과 그들의 사촌격인 미국인들이 이번에는 세계 석유공급을 단단히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음. 핵을 상업적인 용도로 쓰는 초고속 증식로뿐만 아니라 핵 융합 계획이 실현된다면 핵기술은 무한대의 에너지 가능성을 열 위험이 있었음.
제10장 유럽, 일본과 오일 쇼크에 대한 반응
- 산업국가들이 75년 첫 오일쇼크에서 느리긴 해도 확실히 회복을 할 수 있었던 반면 개도국의 경제의 전반적 입지는 원유가가 4배로 인상된 결과 점점 악화됨. 모든 개도국의 총 경상수지 적자는 70년대 초 연평균 60억달러에서 74년 260억 달러(이번에도 역시 유가상승에 비례하여 4배가 됨), 76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7배나 증가한 420억 달러가 됨. 이러한 적자의 대부분은 일인당 국민소득 수준이 세계에서 최하위권인 개도국에서 발생.
- 세계 은행과 산업국가들의 민간은행에서 더 차입을 하지 못하게 될까 우려한 이 저개발국가들은 산업 및 농업발전에 쏟아야 할 귀중한 자금을 이렇게 단순히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는 데 전용하는 수 밖에 없었음. 그들의 석유 수입은 달러로 지불되어야 했던 반면, 그들의 원자재 수출 가격은 74년에서 75년 세계 경제 후퇴 당시 급격히 하락했음.
- 400퍼센트 유가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정치적 이벤트를 조작한 바로 그 영-미 세력이 다음에는 그러한 공격의 희생양이 된 국가들에게 시선을 돌려 값비싼 석유와 다른 중요한 수입품들을 구입할(물론 막대하게 인상된 이자비용을 붙여) 자금을 대기 위해 그들에게 석유달러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함. 저개발 지역에서 살아가는, 세계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참된 산업 및 농업 박전은 영미의 석유정책 때문에 심각하게 손상됨. 석유달러는 농업을 원조하거나 세계 인구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새로운 인프라 창출에 자금을 대기보다는 단순히 적자를 메우기 위한 재융자로 쓰임.
- 카터의 대통령 직위가 대중에게 소개된 이미지는 제3세계를 위한 인권, 대립이 아닌 타협이었음. 그는 자신을 워싱턴 기성권력에 대한 국외자로 표현했지만 그의 자동 선발된 기득권 출신 자문단과 더불어 카터치하 미 정책의 내용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미국의 시대를 지속시키는 것이었음. 미국의 대외정책을 구질서 개혁이라는 겉모습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가운데 카터 행정부는 국가안보회의 연구비망록 200을 지침으로 키신저가 국가안보회의에서 추진했던 영미의 신맬서스주의 기본전략을 지속함. 달러화 제왕권이라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3세계 발전은 봉쇄되었고 성장제한 탈산업정책이 강요됨. 카터의 인권이란 미국의 표적이 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전례 없는 내정간섭을 정당화하기 위한 곤봉이 되었음.
- 53년 모사데크에 대한 쿠데타처럼 이란 국왕에 대한 쿠데타도 영미 정보부가 주도했는데, 이번에도 부패한 이란왕을 제거하는 공적은 허풍쟁이 미국인 브레진스키가 떠안게 한 반면 영국은 그들답게 안전하게 배후에 남아 있었음.
- 이란의 호메이니 쿠데타를 실제로 계획한 런던과 미국이 자유주의 기득권층 내 고위급 인사들은 카터 대통력이 그 정책과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대체로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로 결정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있음. 그 정책이 빚은 미국 내 에너지 위기는 1년후 카터의 선거패배를 초래한 주요 요인이었음.
- 런던시티와 뉴욕에 기반을 둔 정책 전략가들은 당시 세계발전의 균형이 상대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울도록 석유위기가 최고조일 때 맬서스 식의 통화충격을 가하기로 결정했음. 79년 10월 볼커는 연방준비제도의 급진적 새 통화정책을 발표했음. 그는 자신의 급진적인 통화주의적 구제책이 통화체제에서인플레이션을 뿌리뽑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충격에 빠진 의회와 절망적인 백악관을 속였음. 그것은 정치권력과 금융권력의 흐름을 달러화 절대권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미국의 달러화를 세계에서 제일 열렬히 사고 싶어하는 통화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산업성장을 고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음.
- 볼커는 자신의 두가지 목표를 전부 달성했음. 유로달러 시장에서의 미국 이자율은 10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치솟앗고, 깜짝 놀란 세계가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가운데 불과 몇 주만에 20퍼센트 수준까지 올라갔음. 세계 경제가 30년대 이후로 가장 심각한 불황에 빠지면서 인플레이션은 정말로 뿌리 뽑히고 있었음. 그리고 달러화는 이례적인 5년 동안의 상승기로 진입하기 시작했음.
제11장 신세계질서 강요
- 1846년 이후 보호적인 곡물법을 폐지하게 만들어 그로 인해 값싼 곡물수입의 빗장을 파괴적으로 풀어놓았던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19세기 자유주의 무역정책의 골자는 대다수 영국시민들이 예상가능했던 빈곤화와 상류계층으로 불리는 극소수 집단의 수중에 사회적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낳았음. 이른바 영국식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러한 경제적 불공정 과정을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했음
- 1957년 미국 경기후퇴의 전환점 이후 뉴욕에 집중된 소수의 국제은행들과 관련 다국적 석유기업들의 거대권력은 19세기 영국 제국주의 모델에 대한 적응을 토대로 점차 미국식 자유주의의 개념을 정의했음. 이렇게 계몽된 자유주의 모델의 미국식 버전은 태생에 의한 명문귀족보다는 돈에 의한 귀족으로 형성될 것이었음. 그러나 자유주의 성향의 동부 기득권 세력(그들의 권력 중심지가 뉴욕 금융계와 석유 거대 복합기업을 중심으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이 경제정책을 결정하면서 미국은 점덤 더 변질되었음. 한때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자유의 이상형이었던 미국은 조금씩 조금씩 정반대로 변형되었고, 해방과 자유라는 화려한 허울을 간직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더욱 급속히 변질됨.
- 대처의 경제개혁은 그릇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릇된 약을 처방했음. 그러나 영국의 전략적 세력균형 계산이 그랬듯이 런던시티의 국제금융계와 셸, 브리티시석유회사와 그들의 협력자들을 중심으로 뭉친 강력한 석유기업들을 이러한 정책의 진정한 수혜자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 대처는 그녀를 후원하는 냉소적인 세력이 자기들의 좀더 원대한 지정학적 계획을 수행하도록 도구로 내세운, 식료품상의 딸에 불과했음.
- 영국에서 시작되어 그 다음에는 미국으로 옮겨가고, 다시 영-미 세계 바깥으로 확산되고 있던 대처와 볼커의 과격한 통화주의는 정부지출 삭감과 세금인하, 산업규제완화, 조직화된 노조세력의 분쇄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암처럼 퍼져나갔음. 전 세계적으로 전에는 결코 가능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수준으로 금리가 상승했음.
- 장기간에 걸쳐 정무가 자금을 대는 인프라 건설과 철도, 고속도록, 교량, 하수도, 발전소 건설 같은 자본투자는 1980년대 초 대처-볼커의 이러한 공격적 정책으로 유린되었음.
- 대처와 볼커의 급진적인 통화충격 정책만 아니었다면 80년대에 제3세계의 외채위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도 전혀 과장은 아닐 것임. 미 달러화로 표시된 제3세계의 석유수입 평균가격이 79년초 이란 오일쇼크 이후 140퍼센트나 상승하면서 개도국은 이 무렵 자시들의 통화로 환산한 달러화 역시 볼커의 정책으로 야기된 미국의 높은 금리 때문에 아폴로 로켓처럼 치솟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엄청난 타격을 입은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74년 석유위기로 생긴 석유 적자를 메울 차입금을 융통할 수 없었던 것만이 아니었음. 80녀 무렵에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유로달러 차입금에 대한 널뛰는 금리였음.
- 국제통화기금이라는 처방, 융자조건이라는 치료약은 언제나 똑같았음. 희생자인 채무국은 만약 외국 은행의 자금을 단 한푼이라도 맛보고 싶다면 국내수입을 철저히 삭감하고, 대부분의 경우 식량과 다른 생필품에 주는 보조금 등 국가예산 역시 무자비하게 감축해야하며, 자국의 수출품이 산업국에서 구미가 당기게 만드는 반면 동시에 선진 공업제품의 수입가격은 거의 수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싸게 만들도록 자국화폐를 평가절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음. 이 모든 것이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경화를 확보하게 해줄 처방이라고 그들은 주장. 이같은 국제통화기금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오로지 1단계로서 후보국이 2단계 조치에 적합하도록 만듬. 즉 자신들의 전체 외채 또는 상당부분의 외채 상환 일정을 재조정하기로 채권은행들과 협정을 맺는 것임. 이 두번째 단계에서 은행들은 총 액면채무액에 지연된 연체이자를 더하므로 채무국들에 대한 막대한 미래의 권리를 넘겨받는 계약을 하는 셈임
- 국제통화기금은 역사상 가장 가혹한 내핍을 강요하며 고리대금적인 채무상환을 종용하는 세계의 경찰이 되었음. 영-미가 주축이 되어 단단히 장악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의 결정적 투표단과 함께 이 기관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영-미의 통화 및 경제적 이익을 전 세계에 강요하는 기관이 되었음.
- 80년대 채무위기의 훨씬 놀라운 측면은 많은 돈이 실제로는 단 한번도 뉴욕이나 런던 은행들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임. 대부분의 돈이 라틴아메리카로 들어가지도 않았음. 76년에서 81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가 빌린 2700억 달러 가운데 실젤 현금화한 돈은 8.4퍼센트에 불과. 이 돈은 생산적인 투자에 사용되었을 수 있음. 나머지는 라틴아메리카로 돌아가지 않은 채 회계 장부상에서만 바뀌었을 뿐 모두 은행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음.
- 채무국들은 채무덫에 걸려들었고, 뉴욕과 런던의 채권은행들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채무국의 경제, 특히 멕시코의 석유국가 독점권 같은 귀중한 자원에 대한 국가의 주권적 통제권을 넘겨주는 것이었음. 이것을 은행들은 만기 채무와 자산의 교환이라 불렀는데, 이는 채무국의 매력적인 자원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
- 86년 유가붕괴는 27~29년 투기거품에 비견될만한 사태를 야기했음. 뉴욕 증권시장에서 한몫보려고 돈들이 유입되면서 금리는 더욱 급격히 떨어졌음. 새로운 금융왜곡이 월스트리트에서 유행하여 차입자본을 이용한 기업매수가 성행했음. 자금조달비용이 떨어지고 주가가 계속 오르는 것처럼 보였으며 레이건 행정부가 자유시장이라는 종교를 조장하면서 모든 것이 허용되었음. 예를 들면 보수적으로 운영되면서 타이어나 기계류, 섬유를 생산하던 100년역사의 건전한 산업회사가 월스트리트 청소부가 부르는 대로 새로운 기업 사냥꾼들의 표적이 될 수 있었음. 분 피켄스, 마이크 밀켄, 이반 보에스키 같은 화려한 인물들은 경영권 탈취의 앞잡이로서 서류상으로 억만장자가 되었음. 시장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광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하버드 경영대학원 같은 위엄있는 기관에서 새로운 기업 경영 철학을 주창했음.
- 87년 폭락은 70년대초 이후 영-미의 세기를 떠받쳐온, 규제가 철폐된 금융투기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음. 다가온 88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언 조지 부시는 유권자들의 마음속에 레이건-부시 경제회복에 대한 환상이 계속 살아 있게 하기 위해 87년 주가폭락의 함축된 의미에도 불구하고 외국자본이 계속해서 미국 채권과 증권시장에 유입되게 하려고 전 선거전 지휘자이자 막영한 친구인 베이커 재무장관과 미 기득권층의 막강한 한 분파에게 도움을 청함.
- 대처와 부시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미국과 영국이 세계와 특히 중부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을 틀어막을 수 있는 지점에 직접적인 군사주둔을 허용해줄 날조될 구실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했음. 90년대초 영국과 미국 양측은 경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어려운 국내상황 때문에 그 계획에 특별히 열중하게 되었음. 87년 10월 증권시장 폭락과 영국의 금리 상승 때문에 전후 시기 최악의 부동산, 산업, 은행 위기가 닥친이후 대처의 경제개혁은 급속히 붕괴하고 있었음. 미국에서는 백악관 일부에서 30년대의 대공황에 은밀히 비유되었던 총체적인 불황에 직면했음.
- 영-미의 목적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 폭발하게 만들어 이란과 이라크 양측이 서구의 무기수출을 대거 흡수하도록 충분한 긴장전략을 세우는 것이었음. 그러나 90년 봄 쿠웨이트의 임무가 바뀜. 쿠웨이트는 86~87년의 폭락 이후 세계 유가를 안정시키기위해 합의되었던 석유수출국 기구의 생산 상한제를 어기고 자국의 석유를 석유수출국 기구 시장에 넘치게 공급하라는 명령을 받음. 90년 여름 쿠웨이트는 배럴당 19달러 정도의 불안한 가격에서 배럴당 13달러 이하로 유가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했음. 이라크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은 이라크와 경제적으로 심각한 압박을 받는 다른 석유수출국기구 산유국에 대한 고의적인 경제압력을 중단하도록 셰이크 알사바 쿠웨이트 왕과 알리 칼리파 알사바 석유장관을 설득 당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계속했음. 그런데 그러한 호소가 전혀 먹히지 않았음.
- 동맹국의 모든 전쟁 분담금을 계산했을 때 미국은 걸프전을 다 치르고도 아마 190억 달러의 순익을 냈다고 보는 것이 자세한 정보에 의한 추산임. 91년 초반 몇 달동안 독일이 현금으로 지급한 총 66억 달러를 비롯한 외국자본의 막대한 유입으로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전후 가장 낮은 수준인 1.46독일마르크에 불과했던 미 달러화에 대해 강력한 상승압력이 일었음. 더구나 중동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공세적인 무기계약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조인되기 시작하여 유럽의 많은 무기업체들의 분노를 샀음. 부시 행정부는 세계에서 미국이 가장 강력한 강대국임을 입증했다고 승리에 차서 선언했음. 그의 자랑은 계속 길어지기만 하는 실업대열에 서 있는 미국내의 많은 사람들이나 인프라를 재건하고 경제를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수십억 달러의 서구자본을 차입할 가능성을 차단당한 동유럽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울렸음.
- 사막의 폭풍 작전과 90년 후반 이라크에서 공급받기로 한 석유협정의 와해로 국제유가가 초기에 배럴당 30달러 이상 급등한 여파로 동유럽의 경제는 황폐해짐. 91년 1월 이전까지만 해도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과의 무역관계를 통해 소련의 산업제품과 자국의 농산품을 물물교역하는 형태로 원유를 수입하는 데 필요한 대금을 지불했음. 그러던 것이 1월1일 이후 그러한 시스템은 끝이 났고 러시아의 원유를 사려면 서구의 달러가 필요했음.
제12장 악의 제국에서 악의 축으로
- 50년대에 냉전과 아이젠하워 독트린 아래서 미국은 국제공산주의의 후원을 받는 침공에 저항하기 위해 어느 중동국가라도 도움을 요청하면 필요할 경우 무력을 써서라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스스로 공표했음. 이 독트린은 45년 이후 40년 동안 모사데크에서 나세르에 이르기가지 수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적색분자로 매도함으로써 워싱턴이 즐겨 써 먹은 구실이었음. 공산주의라는 오명은 군사행동이나 다른 조치를 정당화했음. 90년 이후 미 정부는 중요한 문제에 봉착. 사악한 공산주의의 위험을 더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 마당에 앞으로는 그러한 외교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악의 세력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10년이 더 지나 새천년이 되어서야 나타나게 됨.
- 전문용어로 제국들의 좀더 야만스러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귀를 기울이면 제국의 지정학적 전략의 3대 명령은 제후들 사이의 공모를 방지하고 안보종속을 지속시킬 것, 예속국가들이 계속해서 유순하고 피보호 상태에 머물게 할 것, 미개인들이 서로 결속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브레진스키, 카터의 국가안보특별보좌관)
- 40년이 넘는동안 워싱턴은 소련에 맞설 완충지대로서 유고와 혼합된 티토모델을 은밀히 지원해 았음. 그런데 모스코바 제국이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워싱턴은 완충지대가 필요없게 됨. 특히 동유럽 주변국가들에게 국제통화기금의 충격요법보다 온건한 중도노선의 가능성을 확신시켜줄 수도 있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민족주의적 완충지대는 더더구나 필요없었음. 워싱턴의 최고전략가들이 보기에는 이 이유만으로도 유고 모델은 분쇄되어야 했음. 또한 유고가 중앙아시아의 잠재적 석유자원에 접근하는 중요한 통로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단지 그 주장에 힘을 실어줄 뿐이었음. 필요하자면 유고를 어르고 협박하여 국제통화기금 방식의 자유시장 개혁으로 끌어내야 했음.
- 전국민주주의 재단,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 국제통화기금을 이용하며 워싱턴은 지정학정책의 수단으로 유고에 경제적 혼란을 야기함. 국제통화기금 정책 아래서, 유고 국민총생산은 90년 7.5% 감소했고, 91년에는 다시 15%가 감소. 산업생산은 21퍼센트나 곤두박질침. 국제통화기금은 국유기업들의 대대적 사유화를 요구. 그결과 90년 1100개 이상의 기업들이 도산했고 실업률은 20퍼센트가 넘었음.
- 코소보 전쟁이 끝날무렵 유일 초강대국에 의한 유라시아 대륙 군사장악은 크게 진일보함. 달러민주화는 다시한번 전진했고, 패배한 유고에는 자유시장이라는 깃발이 단단히 꽂혔음. 2001년 무렵 워싱턴은 대적할 상대없이 발칸반도를 군사적으로 장악함. 부유한 텍사스 석유가문의 아들로 런던주재 신임대사가 된 윌리엄 패리시는 발칸반도에 미국이 개입하는 주요원인으로 카스피해 지역의 막대한 석유자원을 지적.
제13장 석유 지정학을 향한 새천년
- 클린턴시대는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가였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그의 강한달러 정책으로 대변됨. 다자간 협력, 자유시장정책, 국제통화기금을 강조하며 클린턴은 기업의 지구화라는 무자비한 계획을 미국에 유리하게 밀어붙임. 그는 아주 최근까지도 지정학뿐만 아니라 군비지출을 경시했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 기득권 세력내의 막강한 인물들은 이제 역점부문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 클린턴 시대에 재무부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부시시대의 초점은 국방부가 됨. 그리고 대부분의 냉전시기처럼 부시시대의 어젠다는 석유지정학과 직접 관련되어 있음.
- 테러와의 새로운 전쟁의 첫번째 타격인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공격으로 워싱턴은 많은 것을 챙김. 국방부 예산을 연간 약 4천억 달러까지 대폭 증액하고, 옛 소련영토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우즈베티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키르키스스탄에 이르는 상시 주둔 미군기지망을 구축할 구실이 생김. 미군이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고나자 탈레반이 제압했던 옛 군벌들이 아편재배를 시작할 수 있게 되면서 세계에 헤로인이 대량으로 공급됨.
- 세계 석유 및 가스자원 상당량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 그 고갈사태는 21세기 첫 10년대말 대략 2010년이나 2015년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현실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에서 엄청난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일방적 군사작전을 감행했던 이유를 설명해줌. 그것은 또한 부시통치하 미국의 국내 및 대외정책 동기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설명해줌. 만일 이라크와 이라크의 향후 원유 흐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통제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게 된다면 미 정부는 미래의 가능한 모든 경제적 경쟁국들에 맞설 가장 좋은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는 셈이 됨. 전쟁전에 이라크 정부는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과 장기적 석유개발계약을 맺었음. 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향후 석유위기가 발생할 경우 이 3국이 경쟁상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음. 체니가 2001년 에너지 태스크 포스가 가동될 무렵 공개하길 거부했던 문서들 가운데에는 자세한 유전지도 및 외국기업들이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목록도 포함되어 있었음.
- 70년대의 1차 오일쇼크와 이라크 침공이후 사건들 사이의 대비는 정말 극적임. 스웨던의 살트셰버덴에서 결정된 73년 빌더버그 정책은 북해, 알래스카, 비석유수출국기구 지역에서 새로 발견한 유전들이 이익을 낼만큼 유가를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었음. 1차 오일쇼크로 달로화 체제를 위한 시간을 어느정도 벌 수 있었음. 70년대에 빌더버그와 3각 위원회 같은 막강한 집단들은 1차 오일쇼크가 유럽, 일본,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지연시킬 수 있었음. 그들은 대부분의 신흥국가들의 열망에 국제통화기금 체제를 강요하고 경제개발 및 자급자족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함으로써 시간을 벌 수 있었음. 그들은 이것을 지속가능한 성장이라고 불렀음. 그것은 나머지 세계에 성장제한을 강요함으로써 산업국가와 달러화 체제를 갖춘 부유한 국가드을 30년 넘게 떠받쳐 줌. 사업국가들은 자국민의 생활수준을 역사상 전례없이 지탱해준 값싸고 풍부한 석유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30년 넘게 살아올 수 있었음. 그러나 그러한 환상은 아프리카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사아에 이르기까지 한때 개도국이었던 나라의 주민들의 복지를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진 것임. 세계 대부분의 지역의 경제안정 및 성장의 자연스러운 열망을 억누름으로써 미국이 이끄는 소수의 국가들만이 좀더 오랜 번영을 누리리라는 환상을 품을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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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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