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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노예 그 반란의 시작

저자
앤드류 니키포룩 지음
출판사
황소자리 | 2013-08-16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지금 우리는 일인당 200명이 넘는 에너지 노예를 부리며산다....
가격비교

- 모든 에너지 혁신이 그러하듯이 로마의 노예제도도 잠정적인 존중으로 시작해서 부주의한 낭비로 끝을 맺었다. 처음 시골의 지주들이 노예를 부릴 때는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여 식구나 진배없는 대접을 했음. 하지만 사유지가 늘어나고 노예가격이 싸지면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달라졌음. 18세기 몽테스키외는 유명한 저서 법의 정신에서 이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 "로마인은 스스로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이제 그들의 노예는 더 이상 노동을 같이 하는 동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부와 자만심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노예가 도덕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법이 필요했다. 그것도 가장 끔찍한 법이어야 했다." 로마의 법령중에는 하인이 주인을 살해한 경우 그 집안의 모든 노예를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도 있었음
- 로마의 에너지 소비에 관한 가장 재미있는 의견은 노예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음. 자유를 얻은 에픽테토스는 여생동안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음. 그는 로마제국의 에너지 소비가 극에 달해 더이상 노예를 얻기가 어려워진 때 글을 썼음. 에픽테토스에게 진정한 자유는 생각없이 소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었음. 자유는 원하는 바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욕망을 없애는 것에서 얻을 수 있따.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은 이 말이 사실임을 안다. 그러니 이제 부터 욕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라. 나를 자유롭게 해줄 의견을 구하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말라. 부유한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철학자의 비위를 맞춰라. 그리고 나중에 쓴 다른 글에서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음. 물건을 가지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이며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마음을 쓰는 사람을 데리고 오라.
- 조지프 테인터를 비롯한 학자들은 로마가 노예 에너지에 의존하면서 약탈경제를 구축하게 되었다고 지적. "전쟁에서 진 사람들이 경제의 기반이 되고 나아가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것은 높은 경제적 수익을 내는 전략이었다." 로마제국에 에너지와 현금이 더 많이 필요해지자 예멘 시골 지역 농부들을 차출해 군인이 되도록 유도한 후 다른 나라를 로마에 복속시키라는 임무를 내렸음. 이런 농부들이 버리고 간 토지는 시골 지주가 냉큼 집어삼켰고, 그렇게 확장된 사유지에 에너지원을 공급하기 위해 노예를 사들임. 승리를 거둔 군대는 수만명의 노예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옴. 드베이어와 들레아쥬, 에머리가 지적했듯이, "모든 군사적 모험은 도시 귀족의 재산을 불리고, 민간경제에서는 노예노동력의 절실함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기저기서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결국 더 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이런 에너지 체계는 수세기 동안 로마제국을 잘 지탱해왔다. 로마는 가까운데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침략을 통해 입수. 그리고 에너지 수익성을 높이는 대신 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으로 국토를 넓혀 잉여에너지를 착취하는 데 집중함. 시장에 노예공급이 늘어나자일반 로마공민들은 내국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음. 훔쳐온 금과 노예에게 부과하는 세금만으로도 국가운영이 가능했음. 하지만 곧 손쉬운 영토합병의 기회는 줄어들었고, 켈트족이나 게르칸족과 같이 호전적 부족과 맞부딪치는 일이 빈번해짐. 결국 로마제국의 에너지 수익과 잉여에너지는 점차 줄어들음. 국경선을 수비하고 수많은 군사들을 원조하는 일은 국고를 고갈시켰음. 로마의 지도자들은 이런 혼란에 대해 간단한 처방을 내림. 내전과 외세의 침략이 일어날 때마다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는 군대 규모를 더 키우거나 통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낮춤. 아니면 관료를 늘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도록 함. 초기 로마제국 군대 규모는 13만명이었음. 하지만 제국 멸망이 가까워질무렵의 무장군인 수는 65만명에 이름. 그러나 이런 규모로도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고, 세금을 올려도 노예 에너지로 창출했던 초기의 잉여에너지를 대신할 수 없었음. 이리하여 로마제국의 지난한 붕괴과정이 시작됨. 테인터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함. "전체적으로 복잡성(조직내 분화의 정도, 여기서 분화란 전체 과업을 더 작은 과업단위로 세분화한 것)이 크게 증가했다. 그에 대한 해법으로 로마제국은 초기 소련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이런 식의 대응은 제국의 붕괴를 2세기 동안 지연시켰다. 하지만 그로 인해 로마제국 붕괴가 불가피해진 측면이 있다. 로마제국은 능력밖의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그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다. 로마가 사라지면서 제국의 주요 에너지 체계였던 노예제도도 함께 사라짐. 로마제국의 국경선이 축소되고 노예수가 줄어들면서 인간가축의 가격은 상승. 노예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증가하고 토양침식으로 인해 시골 대농장에서 얻는 수익은 감소하면서 경제위기가 연이어 닥침. 대규모 사유지는 아예 방치되거나 적은 노동력으로 일부만 경작되곤 했음. 노예와 독립 자영농민이 야만족 침입자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었음. 부자들은 도시생활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사유지를 자급자족 공동체로 바꾸어 나감. 로마경제가 붕괴하자 노예를 보유하기보다 자유민을 고용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힘. 노예는 차츰 농노가 되었다. 로마에서 농노는 자신이 태어난 땅의 노예라 여겨졌다.
-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노예제도는 유럽과 중동지역에서 간헐적으로 명맥을 유지. 노예를 의미하는 슬레이브는 슬라브족을 노예로 삼는 로마시대 이후 풍습에서 나온 말. 하지만 이제 노예제도는 독점적 에너지 체계가 아님. 중세에 들어서면서 물레방아나 풍력과 같은 에너지 혁신이 일어나고 토지 소유 규모가 작아지면서 노예제의 매력은 감소. 하지만 이 추악한 재생에너지 시스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음. 그리고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신세계를 정복하면서 다시 전면에 등장. 천연두와 같은 구세계 질병 때문에 대륙에서 토착민이 사라지게 되자, 정복자들은 새로운 땅을 개간할 인력이 없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음. 에너지 부족 사태에 직면한 유럽인들은 인간의 근력이 풍부하게 비축된 아프리카로 시선을 돌렸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에너지 시스템으로 꼽히는 것을 만들어냄. 바로 대서양 노예 무역. 거의 모든 유럽국가가 여기에 참여했지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이 사업의 패권을 거머쥠. 1750년대 후반에 풍력을 이용한 노예선 90척이 대서양을 횡단해서 실어나른 노예의 수만 해도 3만 5천명에 달했음. 수백만명의 노예가 수입되자 유럽인들은 금광을 채굴하고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세워서 설탕, 인디고, 쌀, 커피, 담배, 면화를 재배
- 오늘날 식자층에게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절약이 당연한 일이듯, 제국주의 시대를 살던 부유한 권력층에게 공짜 노동력이라는 개념은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일이었음. 카리브해 연안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가 없다면, 영국인은 어떻게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해결한단 말인가? 영국의 통계학자이자 농업감정사인 아서 영은 1772년에 세계인구 7억 7500만 명중 자유민으로 사는 사람은 3300만명에 불과했다고 전함. 군주제 아래 예속되는 것은 전세계적인 규범이었음. 인간의 근력에 의존하는 에너지 시스템은 중앙집권형 통제와 조직화를 필요로 했음.
- 노예무역은 유럽사회 전반을 지탱하는 에너지 시스템이 됨. 영국인들이 즐기는 홍차의 찻잔 속에 떨어지는 설탕 한덩어리 조차 족쇄를 채운 인간의 근력이 만들어낸 것. 저명한 자유추의 철학자 존 로크는 모든 소유물로 인두에 낙인을 찍었던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었음. 볼테르는 노예를 짐승처럼 다루는 걸 경멸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노예선박을 소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음. 바베이도스의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은 옥스퍼드댁 올소울스 칼리지의 도서관 기읍에 도움을 주었음. 유명한 박애주의자들조차 재산형성 과정을 추적해보면 노예무역과 연관되어 있을 정도였음. 조부가 노예사업을 통해 모은 돈에 힘입어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기번은 노예들을 불행한 처지의 사람이라고 묘사하면서 사회의 혜택은 공유하지 못한 채 무거운 부담만 감당했다고 기록. 영국 국교회도 플랜테이션 농장을 소유했었고, 유명한 순회목사 조지 화이트필드는 더운 나라의 개간은 니그로 없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음. 사업가들은 당연히 이 에너지 운송을 지구상 모든 교역의 중심축이라고 보았음. 신세계에서 일어난 제1의 에너지 붐이었던 노예는 자유민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했음.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노예무역상 및 소유주들은 호화롭고 윤택한 삶을 살았음. 낭트의 노예상인들은 더러워진 빨랫감을 아이티섬까지 보내 산골자기 시냇물에서 비벼빨게 했음. 아이티의 물이 브르타뉴의 물보다 모든 것을 더 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었음. 특히 카리브 연안 노예 소유주들의 방종과 낭비는 악명 높았음. 샘 도밍그에는 4만명의 유럽인에 50만명의 노예가 살고 있어서, 노예 주인들은 다양한 여흥거리를 끊임없이 즐겼음. 오케스타라와 도박장에다 이동 밀랍 박물관도 있었음. 방문객들의 증언에 의하면 프랑스인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삶은 욕조와 식탁, 화장실 그리고 애인 사이를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 프랑스 귀족이자 뛰어난 사회평론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1831년 미국을 방문했다가 노예제도가 사람들의 습관과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음. 제조업을 하는 북부는 석탄과 자유민의 노동에 의존한 반면 남부는 노예의 에너지에서 부를 얻음. 담배와 면화경작은 부단한 근력이 필요했음. 박식한 토크빌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의 30년간 노예제도는 남부지역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따는 걸 이해했음. 토크빌은 노예나 하인없이 자란 대다수 북부인은 "참을성 많고 생각이 깊고 인내심이 있으며 신중하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진취적이라고 설명. 그에 반해 노예들은 남부인 대부분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즉각적으로" 공급해줌. 따라서 "미국 남부사람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것을 선호하고, 평판을 중시했다. 또 여흥과 오락을 즐기고 무엇보다 빈둥거리기를 좋아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북부인들이 부와 안위를 추구하는 일을 마음의 즐거움이나 쾌락보다 더 우위에 놓을 때, 남부인은 400만명 가까운 노예들이 제공하는 에너지를 통해 얻은 부를 군사게임, 여흥, 오락에 썼음. 남부인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그래서 더 화통하고 더 솔직하며 더 재기발랄했다. 미국 북부인이 중산층의 장단점을 두루 갖추었다면, 남부인은 귀족계층의 편견과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노예제도는 백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약화시켜 버린 것
- 벨기에 태생 물리학자 알프레드 르네 우벨로데는 55년, 영국의 증기기관 발명이 노예제도 때문에 1700년 가량 미루어졌다고 주장. 피스톤과 증기의 강력한 힘은 고대인들도 익히 알고 있었음. 하지만 기존 에너지 시스템으로도 충분히 건전한 수익을 거두는 상황에서 노예 소유주들은 대체기술 개발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 이런 무관심은 세계사에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 무생물 에너지 개발의 경제적 인센티브는 고대 생물 에너지(노예)의 손쉬운 이용으로 상쇄되었음.
-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한 평론가 토머스 칼라일은 기계론적 사고가 대변동을 일으켜 파탄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 칼라일은 공장환경과 도시 슬럼가의 상황도 노예제도가 있던 때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보았음. 유명한 소론 시대의 표적들에서 상류층 출신인 이 역사가 겸 평론가는 기계만능시대를 큰 소리로 규탄. "사람들의 손뿐만 아니라 마음과 머리도 기계적으로 변하고 있다. 개인의 노력과 자연의 힘 등 모든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이 바라고 찾아다니는 것은 내면적인 완벽함이 아니라 외적인 조화와 배치, 시설과 규칙 즉 이런저런 기계장치들이다. 모든 노력과 애착, 생각이 기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기계적 특성을 띠게 되었다."
- 1차 대전 직후 1921년, 프랑스 석유부 장관 앙리 베랑제는 석유의 변형능력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 "석유를 소유한 사람이 세상을 소유할 것이다. 중유로 바다를, 정유로 공기를, 등유와 조명용 석유로 땅을 다스리게 된다. 나아가 금보다 더 가치있고 인기가 높은 물질인 석유에서 얻은 엄청난 부를 이용해 경제적인 면에서 사람들을 지배할 수도 있다." 나중에 쿨리지 대통령은 "세계의 패권은 활용가능한 석유와 그 산물의 소유에 달려 있다"고 단언했음.
- 남부 캘리포니아는 무질서한 교외개발의 전형이었음. 게다가 이런 식의 난개발은 미국 교외지역 대부분으로 펴져나감.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네명중 한명이 자동차를 소유했고, 고속도로 4킬로마다 주유소가 들어섬. 캘리포니아는 민자도로를 건설해서, 석유 소비 증가를 촉진시키는 석유산업의 능력을 몸소 보여주기도 함. 고속도로에 부과하는 세금의 수익률이 좋았기 때문에 정부는 사실상 대중교통 개념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음. 40년대까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는 트롤리 전차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 하지만 거대 석유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음. GM과 엑슨, 파이어스톤 타이어가 재원을 대는 자금조달 플랫폼이 샌프란시스코의 송전 시스템을 샀다가 되팔면서 가혹한 조건이 덧붙여짐. 바로 트롤리 전차를, 엑슨 휘발유와 굳이어 타이어를 사용하는 제너럴 모터스 버스로 대체하는 것이었음. 제너럴 모터스와 캘리포니아의 스탠다드 오일, 파이어스톤도 이와 비슷하게 LA의 전차운행을 서서히 폐지시킴. 이에 대해 저널리스트 칼 솔베르그는 76년 석유권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 "이런 식으로 거대 기업들은 45개 도시에서 100개의 전차 시스템을 없애나갔다.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세인트루이스, 솔트레이크시티 등이 이에 해당된다. 49년에 이들은 범죄공모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주모자인 제너럴 모터스의 회계담당자 그로스만은 1만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해안지대 시추작업을 반대하는 여론과 임해지역으로 시추작업을 확장하기를 원하는 석유회사들을 동시에 달래기 위해 캘리포니아는 유정사용료로 공공해변과 삼나무 공원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석유의 주요 시장을 이루는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 석유와 그 무생물 조력자는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 때에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 미국인들은 자국의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맹신했지만 석유수입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은 합성액체연료를 연구하고 미국에서 수입한 원유를 비축해두었음. 팽창주의를 표방하던 이 두나라는 석유부족이 자국의 정치, 경제적 야망을 제한하게 되리라는 걸 인식했음. 그래서 외국의 에너지를 입수하는 독특한 군사전략에 희망을 걸었음. 독일의 잠수함 유보트는 대서양에서 유조선을 침몰시켰고,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취하자 진주만 공습을 감행. 세계대전을 벌이는 동안 일본과 독일은 석유부족을 엄청난 규모의 인간노예로 메웠음. 일본은 수백만명의 한국, 중국인 노동자를 강제징용했고 나치는 동유럽과 소련에서 수백만명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다. 미국은 자국의 석유소비를 군사장비에 집중시켰음. 석유자원이 거의 없던 독일은 석탄 액화 공장에 크게 의존. 사실 나치의 주요 군사전략인 전격전은 저렴한 석유를 공급 받지 못한데서 시작되었음. 노르웨이와 프랑스, 폴란드를 속전속결로 점령하면서 독일은 더 많은 석유를 확보. 하지만 이 전략은 러시아 대평원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해서 러시아 최대 석유 생산지역 두곳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감. 석탄으로 만든 저급 합성액체연료를 쓰는 독일의 비행기는 고옥탄 연료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비행기에 비해 기동성과 속도면에서 뒤떨어졌음. 결국 전쟁의 주도권 다툼은 얼마나 많은 전투용 기계노예를 동원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됨. 많은 양의 에너지를 잡아먹는 투기적 잠수함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음. 양측은 잠수함대를 이용해서 서로의 석유공급을 차단하려 했음. 성능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20억 달러짜리 독일의 유보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연합군은 철과 석유, 선박에 총 206얼 달러를 소비. 일본이 태평양에서 벌인 잠수함전에는 1조달러의 비용이 들었음. 종전 후 일본의 군사령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는 "일본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두가지 요소인 함선과 석유가 부족했다"라고 인정. 46년 미국에서는 비밀리에 독일 최고위급 장교들과 면담을 진행하면서 전쟁의 패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한명도 빠짐없이 연료의 질과 공급량 부족을 거론
- 미합중국은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와 유럽/일본의 인프라 재건에 석유를 이용. 이로 인해 석유 연료 기계가 산산이 부수어버린 석유기반 산업은 다시 부활할 수 있었음. 나아가 석유는 막강한 석탄동맹이라는 고비를 넘기게 됨. 미정부는 납세자들의 돈으로 마련한 130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야심찬 유럽 부흥정책인 마셜플랜을 가동했고, 여기서 유럽과 일본이 석탄대신 석유를 주원료로 사용한다고 약정했기 때문이었음. 마셜플랜 기금은 도로를 만들고 미국자동차를 구매했으며 유럽의 자동차 제조업체를 매수하기도 했음. 마셜플랜 기금중 6분의 1은 미국 석유회사가 중동에서 퍼올린 석유값으로 채워졌음. 마셜플랜의 내용에 의하면,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세상에서 가장 값싼 석유를 텍사스 원유보다 40%나 더 비싼 가격에 팔았음. 유럽부흥을 기치로 내건 마셜 프로제트가 이뤄낸 또 다른 석유경제의 기적은 일본과 유럽의 경제 르네상스임. 47년 이후 유럽의 GNP는 32.5%나 상승했고 산업생산량은 전쟁이전과 비교해 40% 증가. 농업생산량은 11% 신장. 유럽은 이를 가리켜 고도성장이라 지칭했음. 60년에 이르자 유럽에서 소비하는 에너지 중 석유 비중은 종전 10%에서 30%로 늘어나 있었음.
- 로마의 노예주인들은 노예를 부리는 데 필요한 칼로리 계산을 위해 그램단위까지 신경씀. 반면 일반적인 현대인들은 기계 하인들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함. 그렇지만 정확한 수치를 듣고나면 정신이 번쩍 들 것임. 캐나다 최고의 에너지 분석가라 할 수 있는 데이비드 휴느는 '11년에 석유 1배럴에 약 6기가줄, 즉 1700킬로와트의 에너지가 담겨져 있다고 추정. 신체 건강한 사람이 1시간 동안 자전가나 트레이드 밀을 돌려서 발생시킬 수 있는 전기에너지는 100와트 전구를 밝힐 수 있는 정도로 이를 에너지 단위로 환산하면 약 36만 줄. 휴즈의 추산에 따르면 주말과 공휴일에 쉬고 하루 8시간 동안 상식적인 수준의 노동을 한다는 전제로 석유 1배럴의 에너지와 맞먹는 일을 한 사람이 자전거나 트레이드 밀을 돌려 만들어내려면 7.37년을 일해야 함. 만일 하루 12시간, 휴일없이 일주일 내내 노동한다면 석유 1배럴의 에너지 생산기간은 3.8년이 됨. 평균적인 북미인 1명이 매년 소비하는 석유량을 23.6배럴이라고 보면, 1인당 174명의 가상노예를 거느린 셈. 이를 5인가구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900명의 노예를 부리는 꼴. 인구 3억명의 국가라면 5000억 명이라는 믿기 힘든 숫자의 석유기반 기계 노동자를 통제하고 있는 셈. 이탈리아 인류학자 알베르토 안젤라는 고대 로마인의 24시라는 책에서 담담한 어조로 50명의 노예가 2시간 동안 피아트 자동차를 끄는데 사용하는 에너지는 석유 한컵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 문명화된 사회에서 물질적 부와 안위를 누리는 자리로 올라가는 방법은 두가지 뿐이다. "하나는 사람들을 종속시켜 자신이 착복할 잉여에너지를 생산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텍사스의 지질학자 얼 쿡이 76년에 출간한 통찰력 넘치는 책의 한구절. 다른 방법은 잉여에너지가 생산되도록 천연에너지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 연료는 더 많은 기계에게 동력을 공급해서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한다. 쿡은 노예제도가 없었따면 산업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예제도는 주요 에너지 흐름을 통제해서 관리자가 잉여물을 보장받는 기반을 조성해 놓았음. 인간노예에서 무생물 노예로 바뀐 것은 그야말로 호쾌한 슬램덩크 슛이었을 뿐임
- 모든 에너지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의 의존적 성향과 예상치 못한 역학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노예의 목에 쇠사슬을 씌우면 그 쇠사슬의 다른 끝이 우리의 목을 조인다." (랄프 왈도 에머슨)
- 미국 작가 리처드 매닝의 설명에 따르면 "농업은 식량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부의 축적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에너지 혁명은 성역할을 바꾸어놓기도 했음. 특히 쟁기를 사용해서 밀, 보리, 호밀 등을 수전농경으로 재배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음. 육중한 근육과 폭발적 힘을 요구하는 도구는 남성의 체격에 유리했음. 쟁기로 땅을 개간하는 농업지역에서 남자들이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가정을 돌보았음. 반면 순수한 에너지로 생각할때 훨씬 더 우수한 접근방식이라 할 밭 경작지역에서의 성역할은 많이 달랐음. 괭이와 호미로 땅을 일구는 이 지역에서 여성들은 들에 나가 작물을 키우는 일을 훨씬 가치있게 생각했음. 눈여겨볼 사실은 그 지역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수전농경을 하던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양성평등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 정치나 노동계, 기업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율도 훨씬 더 높음. 쟁기의 사용으로 인해 모계사회는 부계사회로 바뀌어감.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전능한 모계여신의 치세"가 끝나고 "수메르와 바빌론에서 우세했던 남신과 사제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함
- 인류학자 제라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을 자신의 논평 제목과 같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했음.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식습관은 단조로워졌고 당뇨병과 관상동맥성 심장질환, 비만과 같은 문명의 질병이 생겨남. 농업은 소수의 왕과 파라오의 손에 부, 즉 잉여에너지를 집중시킴. 나아가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태양을 받아 자란 식물을 인간의 연료로 바꾸는 일에 종사하도록 했음. 초기 농업으로 윤택해진 식량사정 덕에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는 가축이 옮긴 전염병이 퍼지기도 했음. 질이 떨어지는 밀을 단일재배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얻으려 하다보니 오히려 인간수명을 짧아졌고, 치아는 약해졌으며 골밀도는 낮아짐. 사람들의 키도 작아짐. (대부분의 수렵채집인들은 초기 곡물재배자들에 비해 23~30센티 정도 키가 컸음) "인구를 제한하거나 식량생산을 늘리려는 시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지만 결국 기아와 전쟁, 폭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87년 다이아몬드가 발표한 소론의 한 대목임. 하지만 다이아몬드의 생각은 과장된 것이었음.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음. 중국은 8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독특한 농업 에너지 제국을 구축하고, 자연적인 에너지 흐름을 이용해 1억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먹여살림. 태양에너지를 신중하게 통제해서 북쪽에는 수수와 밀을 집중적으로 기르고 남쪽에는 쌀을 기르는 방식. 인공적으로 땅을 물에 잠기게 하고 다모작을 하는 벼농사의 혁신은 평균적인 농가에서 산출하는 곡물의 양을 3배로 늘려놓음. 세심하게 관리한 1평방마일(약 2.6제곱킬로) 면적의 농지에서 생산한 곡식은 225명의 농부를 먹여살렸음. 농부들은 영양가 높은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 훌륭한 정원을 가꾸듯 괭이질을 하고 비료를 주고 물을 끌어대었음. 거름은 사람의 똥을 이용. 프랑스 에너지 역사학자 장 클라우드 드베르와 장폴 드레아주, 다니엘 에머리는 다음과 같은 언급. "중국이 장기적인 에너지 부족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에너지 구조의 성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월등히 성공적이었기 때문. 역사상 유례없이 역동적인 에너지 구조였다." 지속성 있는 태양에너지 기반 농업 덕분에 중국의 농부들은 자급자족하는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음.
- 천연가스로 인공비료를 마음껏 만들어내면서 (949입방미터의 메탄가스가 있으면 무수 암모니아 비료 1톤을 만들어낼 수 있음) 작물수확량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인구폭발이 일어났음. 1900년에 대부분의 밀밭과 옥수수밭은 거름과 조분석, 질산칼륨에 의존해서 질소성분을 강화시켰음. 대기이 80%가 질소지만 식물이 쉽게 사용할 수는 없었음. 어떤 문명이든 토양에 질소가 부족해지면 기근을 겪거나, 산림을 베어낸 뒤 새로운 농경지를 개간해야 했음. 하지만 하버-보슈법 때문에 이런 한계는 사라짐. 2000년에는 밀에서 대두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작물 수확량이 3배나 많아졌음. 넉넉한 질소장려금 덕분. 석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제초제 사용과 농작물의 과학적 조작이 결합되면서 그 생산성은 더욱 높아짐. 오늘날 하버-보슈법은 전세계 인구의 35%의 식량을 책임지며, 동시에 모든 사람몸속 질소의 절반 정도를 책임짐.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식물생장을 빠르고 활발하게 유도하면서 인간과 지구의 신진대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남. 지금 우리가 먹는 대다수 채소와 곡물의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함유향은 100년 전보다 적음. 많은 학자들은 식물의 생장 속도를 빠르게 한 것이 양질의 영양분 흡수능력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음. 비료를 많이 사용한 농작물은 질소 순환과정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함. 매년 콩류 식물과 비료, 트랙터를 비롯한 연소기관에서 방출하는 산화질소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반응성 질소보다 훨씬 더 많은 반응성 질소가 생겨나고 있음. 비료를 주면 그 중 30%만 농작물이 흡수하고 나머지는 씻겨 내려감. 과학자들은 현대 농업방식을 통해 바다와 수로, 대기로 누수되는 질소가 농사로 흡수하는 양보다 3배 더 많다고 추정. 이렇듯 독성 있는 물질이 누출되면서 지하수는 질산염으로 오염되고 바다와 호수, 강에는 죽음의 수역이 생겨남. 고정질소가 배가되면서 온실효과는 심해지고 오존층은 약해졌으며 스모그층은 더 두터워짐. 산성비도 더 많이 내리고, 남중국해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는 거대한 수역에 산소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질소를 사랑하는 생물들이 창궐하면서 바다는 오염되고 있음.
- 1906년, 간디는 저에너지 농업의 이상향을 강력하게 지켜나갈 것을 제의. 간디는 영국에서 일하던 시절 경험했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반대하면서 작은 자급자족 마을이 적절한 생계유지에 걸맞은 지속가능 모델이라고 확신. 간디는 마을이 지역경제를 지키고 물질주의를 멀리하며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음. 선조들 역시 기계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인간이 노예가 되고 도덕성을 잃게 될까봐 몇몇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도 언급. 간디는 인도의 조상들은 진정한 건강과 행복이 손과 발을 적절히 사용하는 데서 온다고 믿었다며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강조. 그러므로 인도의 기계화는 국가적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 "록펠러 같은 사람이 인도에 생겨날 경우, 그가 미국의 록펠러보다 착할거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가난한 인도는 자유로울 수 있따. 그러나 부도덕한 행위를 통해 부자가 된 인도는 그 자유를 되찾기 어려울 것이다."
- 석유의 또 다른 특징인 표준화는 농사를 고도로 전문화된 사업으로 만들고 취약성이 높아진 단일재배 형식으로 바꾸어 놓음. 예전에 옥수수는 지역에 따라 50가지 품종이 생산되면서 특정 해충에 저항력을 지닐 수 있었음. 하지만 기업식 농업에서는 단 6가지 품종만을 선호했음. 한때 3만개의 품종을 자랑하던 밀도 지금은 에이커당 300파운드의 농약을 견뎌내도록 조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3~4가지 품종에 한정됨. 한때 5000가지 품종의 막강한 다양성을 자랑하던 감자는 대개 버뱅크감자로 수렴. 이 덩이줄기 작물은 프렌치프라이 요리를 만드는 데 적합해서 북미의 식당과 전세계 패스트푸드점 수익을 늘려주고 있음. 7000가지 품종이 있던 사과역시 단일 품종으로 정리됨. 다양한 크기와 형태, 맛을 자랑하던 양상추도 현재는 아이스버그와 로메인, 두종류만 남음.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추정에 따르면 다양성 보존을 위한 열정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식용작물에서 나타났던 유전자 다양성 중 4분의 3이 유실되고나 축소되거나 말소됨. 녹병균과 병충해, 해충들이 단일작물 농경지를 신나게 유린했음. 콘월 대학교 생태학자 데이비드 피멘텔은 매년 농약사용에 따른 경비를 350억 달러나 지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연간 곡물수확량의 절반이 7만종의 해충과 식물병으로 황폐해진다고 추산. 가축의 다양성 역시 균질화를 선호하는 석유 때문에 비슷하게 쇠퇴하고 있음. 젖소의 80%는 홀스타인이고, 육우의 경우 60%가 앵거스 종. 양의 40%는 서퍽종이고,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돼지로는 영국 대백종이 선호됨. 지난 100년 동안 지역 기후를 견뎌내도록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사육된 가축종들은 6개중 하나꼴로 멸종. 07년에만 소, 염소, 말, 돼지 중 60개종이 사라짐. 현재 남아 있는 6500개 가축 종중에서 약 1350종은 시골에서 자신들을 돌봐주던 사람들과 비슷한 운명에 처했음. 질병에 저항성을 지니고 가뭄을 견뎌낼 수 있으며 추위에도 살아남는 동물종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생산성이 높도록 단순화된 공장식 상품임. 이것은 백신과 항생제, 인공사료로 구성된 석유 입력 에너지를 만들어짐. 전세계 닭의 약 70%와 돼지, 소의 절반은 땅과 완전히 분리된 공장식 틀에서 사육됨. 수확량이 많은 곡물이 생겨나 가축의 사료로 이용되면서 소위 말하는 가축혁명이 일어남. 60년 이래 지구상에 존재하는 닭과 오리, 칠면조의 수는 4억 1000만 마리에서 150억 7000만 마리로 네배나 증가. 현재 소와 돼지의 개체수는 각각 10억 마리가 넘음. 이런 식의 산업화된 축산업 시스템은 전세계 지표수의 8%를 차지하고, 온실가스의 18%를 배출하며, 전세계 동물적 생물량의 20%를 담당. 또 항생물질의 50%를 소비. 그리하여 450그램의 소고기를 만들기 위해 약 3리터의 석유가 필요하게 되었음.
- 과거 소련은 설탕과 오렌지 주스, 니켈을 받는 대가로 쿠바에게 석유의 90%와 식량의 60%를 제공해줌. 하지만 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곧이어 미국이 쿠바에 대해 통상금지령을 내림. 이 두사건으로 인해 쿠바에는 트랙터를 움직일 석유도 없고 설탕과 담배에 뿌릴 비료와 농약도 없어짐. 쿠바는 경제학자들이 비행기 추락 사태에 비유하는 오일쇼크를 경험. 쿠바인들은 이를 가리켜 특별 기간이라 불렀음. 당시 영세농민들은 토지의 12%만 경작할 수 있었음. 외국에서 식량의 대부분을 얻어오던 쿠바 사람들은 극단적 감식을 해야했음. 평균적인 쿠바인이 섭취하는 하루 열량은 2600칼로리에서 1000칼로리로 줄어듬. 이로 인해 13킬로그램 정도 몸무게가 줄어든 사람도 많았음.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은 사람이 수천명에 이르렀고 임산부들은 빈혈에 시달림. 이에 대응하기 위해 쿠바정부는 영세농민과 기업형 오가노포니코, 즉 소규모 도시 텃밭에 의존해 식량부족분을 메우려 했음. 오늘날 8만 1000에이커에 달하는 이 도시텃밭의 농부는 수천명에 이름. 보통 1.7에이커당 25명의 사람이 전일제로 일함. "쿠바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 놀랍다. 쿠바 사람들은 식량안보를 추구했고 그로 인해 영세농업을 우선시 하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라 엔리케즈의 말이다. 석유기반 비료나 농약을 구할 수 없었던 쿠바인들은 170개의 퇴비장을 만들었다. 현재도 이 퇴비장에서는 꿈틀대는 벌레들이 매년 9300톤의 흙을 만들고 있다. 또 버티실리움과 백강균 같은 균으로 배양한 천연 농약 제조시설도 세웠음. 소가 트랙터를 대신했고 사람들은 옥상에 토끼와 닭을 키웠음. 소규모 농경사업은 순식간에 식량위기를 종식시키면서 유기농법으로 키운 시금치와 양파, 쪽파, 마늘, 토마토를 풍부하게 공급. 현재 쿠바 영세농민들은 수도 아바나에서 소비하는 과일과 채소의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음. 쿠바정부는 이 위기상황에서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슬로건 대신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는 슬로건을 내걸음. 그리고 북미 지역의 기업형 농업에 맞먹는 대규모 국영농장이나 사회주의자보다 시골에 사는 농민이 훨씬 더 회복탄력성이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 토지를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영세농민과 단체가 외부의 투입물질이 희귀해진 상황에서도 식량균형이 기여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쿠바의 학자 페르난도 푸네스-몬조테는 보고. 쌀과 콩, 돼지고기가 주를 이루었던 쿠바의 식습관은 좀더 다양해졌고 채소섭취도 많아짐. 피터 로세트와 메지아 벤저민이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으로 인습적인 농업방식을 유기농 및 유사유기농법으로 전환한 사건"이라 부른 이 일은 미국에서 폐기된 토머스 제퍼슨의 미국적 이상, 즉 영세토지 소유자야말로 미국의 가장 소중한 구성원이다는 주장의 정수를 이어받은 것. 마지막으로 20년대 소규모 식량생산을 옹호했던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함. "나무에서 과실을 딴 뒤 가장 신속하고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실을 입에 집어넣는 것이다. 철도여행에 돈을 낭비하지 않는 이가 최고의 경제학자이다. 너무나 효율적이어서 조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가 절대적 효율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사람은 이상적인 단순화의 극치라고 볼 수 있지만, 단순화야 말로 사과나무처럼 믿을 만한 방법이다."
- 지난 400만년 동안 지구상에서 살다가 죽은 인류의 수는 약 800억이라고 함. 이 800억 명 모두가 살았던 시간을 합하면 약 1조 1600만년.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이 시간중 28%가 1750년 이후 기간이고, 20%는 1900년 이후, 13%는 1950년 이후라는 점. 20세기는 전체 인류사의 0.00025%에 불과함에도 모든 인간의 생명주기 중 5분의 1을 차지.
- 처음에 인구통계학자들은 인구급증을 프로메테우스적 진보의 한 형태로 칭송. 지구에 사는 모든 이들이 곧 핵가족을 이루고 평균 1~2명의 자녀를 둔채, 신과 같은 기대수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예견. 하지만 급격한 에너지 과잉은 개체군의 안정성을 해쳤고, 저출산과 장수라는 인구통계학적 이상향은 사회적 난제가 됨. 향후 50년 이내에 남아 있는 석유자원을 다 소비하면 세계인구는 가파르게 감소할 것임.
- 대부분의 인구모델은 자원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할 경우 2030~70년 사이에 인류의 급격한 자연소멸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 이런 식의 도태를 통해 인간 개체수는 70억에서 10억으로 줄어들 수 있음. 하지만 셀리에의 연구를 보면 사회가 화석연료 사용을 빨리 그만두면 둘수록 이런 결과가 더 빨리 일어난다는 걸 알 수 있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석탄과 석유에 장기간 의존하는 건 필연적으로 2040년경의 엄청난 인구붕괴로 이어진다는 말. (이탈리아 물리학자 우고 바르디는 이를 가리켜 세네카 효과라고 했음. 세나카가 증가시키는 일은 천천히 이루어지지만 파괴의 길은 가파르다고 했기 때문) 화석연료 사용량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상황을 전제한 또 다른 인구모델은 적응방식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 급격한 자연소멸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값싼 석유의 시대가 끝나면 기하급수적 성장 패턴이 더이상 유지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하급수적 성장패턴에서 더 빨리 벗어날수로 더 잘살게 된다. 셀리에는 사람들에게 화석연료응 아껴스고 저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할 것을 제언함
- 인류역사 대부분 기간동안 도시는 그 구성상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를 유지했었음. 중세 런던은 정비가 잘된 장터였음. 700에이커의 땅에 6만명을 수용. 두다리로 이동해야 하는 까닭에 도시는 아담하고 절제되어 있었음. 1800년까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세계 인구의 3%이만에 불과. 고대 도시중에는 영적 성지로 기능하는 곳도 있었고, 성벽이 잘 정비된 곳은 안보를 보장해주거나 군사력을 제공하기도 했음. 하지만 태양력과 인력으로 세상이 운영되던 시기의 도시는 나름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독립체로서, 세심하게 관리된 잉여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었음. 도시는 권력과 힘을 시골의 지역공동체와 연결했고, 지역 공동체는 도시의 수익이 어디서 오는지를 상기시켜줌. 훌륭한 도시는 시골을 존경하고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며 살았음. 그런데 산업화된 기계는 이런 균형을 깨뜨려 버림. 농업철학자 웬델 베리는 값싼 물건과 값싼 교통수단 그리고 값싼 도덕규범으로 인해 이런 균형이 깨졌다고 말했음. 로마는 노예의 노동력으로, 우리를 값싼 화석연료로 이 균형을 깨뜨렸다.
- 탄화수소를 연료로 삼는 도시와 메가시티는 의외로 생물학 법칙 몇가지를 따름. 루이스 베텐코트와 제프리 웨스트는 1000개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도시의 작동원리를 알아냄. 에너지 문제만 놓고보면 계속 몸집을 불려가는 대도시는 대형 동물과 닮았음. 코끼리는 기니피그보다 몸집이 1만배나 더 크지만 에너지는 1000배 더 사용. 대도시도 일반적으로 비슷한 스케일링 규칙을 따름. 도시의 크기가 두배로 커질 때마다 그에 필요한 거리와 주유소, 가게, 집의 수는 85%만 증가. 15%가 적어진다는 건 그만큼 밀집도가 높아지고 에너지 효율성이 올라간다는 의미. 하지만 웨스트와 베텐코트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이런 방정식에는 어두운 이면이 있음. 범죄와 교통문제, 폐질환 등 일반적인 복잡성은 똑같은 정도로 늘어남. 이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경제성장은 원치 않는 것들까지 똑같은 비중으로 늘려놓음.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메가시티는 안저엉과 반대선상에 있는 지속적인 적응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다. 다른 생물들은 몸집이 커지면 움직임이 둔해진다. 계속 몸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열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끼리가 터벅터벅 걷는 것이다. 하지만 대도시에서는 그반대 현상이 벌어짐. 도시가 커지면 모든 것들의 속도가 빨라짐. 자연상태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 쥐보다 더 빠른 코끼리를 본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 11년 캘리포니아 대 경제학자 제임스 해밀턴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겪은 경제불황을 연구하던 중 11차례의 불황 중 10번이 석유가격 상승직후 발생했다는 사실을 발견. 값싼 석유는 경제성장을 낳지만 값비싼 석유는 작물을 말라죽게 만들었음. 오일쇼크와 경기불황과의 상관관계는 너무 분명해서 절대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없음. 73년 아랍 석유금수조치가 취해지는 동안 석유의 실제 시장가격은 50억불까지 급등했고 이로인해 미국에서만 38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 경기불황기의 총생산 손실을 달러로 환산한 가치는 그 중요성 면에서 손실 에너지의 달러가치를 훨씬 상회함
- 결국 소련은 석유 때문에 벼랑끝에 몰렸다. 80년대 석유가격이 붕괴된 이후 소련의 주요 재원은 사라졌음. 부진했던 석유생산은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한 88년 정점에 도달. 그리고 3년 후 소련은 빚더미에 휩쓸려 무너짐. 석유 때문에 8000만명의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정치, 사회적 소요에 식량위기까지 더해짐. 이런 긴급상황은 현금이 없는 행정부가 차관을 얻어 기금을 막도로 만들었음. 글라스노스트와 아프간 전쟁, 레이건 독트린이 소련붕괴라는 연극에서 단역을 맡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주연은 소련이라는 기계에 연료가 떨어진 일이었음. 알래스카 대학교의 에너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중은 더그 레이놀즈는 소련 붕괴 직전 2년 동안 카자흐스탄에서 지냈음. 레이놀즈는 일련의 사건의 동인은 분명 에너지라 기록하고 있음. 소련은 89년에 첫번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으며 통화가치가 90%가량 하락. 결국 소련경제는 몰락하고, 리투아니아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소비에트 공화국 구성원들이 연방에서 탈퇴. 그러는 내내 소비에트와 후기 소비에트 일일 석유생산량은 1200만 배럴에서 약 700만 배럴로 40%나 떨어짐. 그러므로 소련 몰락의 진짜 이유는 석유파동이었음. 73년과 79년의 석유파동이후 20세기에 일어난 세번째 석유파동이 소련붕괴의 원인이었지만 이에 관해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석유자원을 민영화하고 여러 개혁적 제도를 도입. 이런 조치들로 인해 일시적으로 석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로 거두는 매년 2000억 달러가치의 수익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됨
- 과학의 지위가 급상승한 것은 1820년 이후이 일. 노예폐지론이나 대도시 건설과 마찬가지로, 집약적인 탄화수소 소비과정에서 생겨난 존재가 과학이었음. 산업혁명 이전, 자연계의 작동방식에 관한 연구는 몇몇 호기심 많은 학자와 철학자들의 전유물이었음. 태양의 힘과 인간의 힘에서 동력을 얻었던 과학은 진보와 퇴보를 반복했고 종종 침체되는 일도 있었음. 지구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놀라운 계산기가 기원전 80년에 그리스에서 등장했지만 금방 자취를 감추고 마는 식이었음. "햇빛에 의지해 살던 고대인의 지혜"에 의존하던 사회에서는 과학연구에 많은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었음. 잉여가 충분치 않아서 연구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석탄이 발견된 덕에 과학은 증기기관차처럼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음. 이 무모하고 의기양양한 현상은 앨프리드 월리스와 다윈, 퀴리 등 사회 각층의 우수한 남녀에 이해 더욱 세차게 확산됨. 이들 중 과학자로 정식교육을 받은이는 거의 없었음. 분명한 사실은 19세기 과학을 장악했던 나라가 가장 많은 석탄과 기계노예를 보유한 영국과 독일이었다는 점. 화학의 아버지 바론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문명이란 결국 최소의 동력을 들여 최대효과를 얻는 것이란 말을 했음. 동력의 놀라운 우월성이 존재하던 시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음. 리비히는 과학이 이전에 노예가 했던 일을 기계가 수행하도록 했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위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는 일을 해냈다고 적고 있음
- 현재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으로 세입의 30% 이상을 충당하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30여개에 달함. 이런 국가에서 수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고위층들은 18세기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장 소유주보다 더 부유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로마의 노예보다 못한 음식을 먹고 지냄. 석유가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보여준 몇몇 국가에서도 석유자산은 사회제도와 기본원칙을 잠식해 나갔음. 석유는 하나의 주인만을 섬긴다. 18세기 런던의 귀부인은 차에 설탕 한스푼을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유혈이 낭자하는 끔찍한 노예무역과 연관을 맺게 되었음. 마찬가지로 오늘날 휘발유를 구매하는 행위는 모든 자동차 운전자를 석유왕국과 오염된 상수도, 정치적 부패와 연계되게 만듬. 가공할 석유의 논리는 결국 다음과 같이 귀결됨. 한마디로 국민을 대변하는 유능한 주정부를 세우는 것보다 송유관을 놓는 편이 더 빠르고 쉽다.
-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은 93년 미국과 사우디 관계를 이렇게 묘사. "나는 원하면 언제든 파란눈의 노예들을 소환한다. 미국인에게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감한 군인들을 보내라고 명령한다. 내가 손뼉만 치면 미국대사라고 불리는 바보 같은 지니요정이 나타나서 시키는 대로 한다. 나를 섬기다 죽은 미국인들은 미국대사관에서 금속상자에 그 사체를 넣어 얼린 후 미국 비행기에 실어 보낸다. 마치 애초 존재한 적이 없었듯 깨끗하게 처리된다. 정말로 미국은 내가 가장 총애하는 노예이다." 이렇듯 공공연한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미국을 파산 직전으로 몰고갔음. 지리학자 로저스턴의 추정에 의하면, 76~07년 사이 미국군대는 페르시아만 석유 공급원을 방어하기 위해 연평균 2250억 달러를 사용. 이는 소련과 냉전을 치르던 기간에 사용한 비용보다 더 많은 돈임. 이 지역에 운송용 항공모함을 비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7조달러에 달했음. 이렇게 대폭적으로 군에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시장의 실패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지역 안보문제의 핵심은 석유의 시장지배력이다. 미국은 이런 식의 군사력 과시대신 국내 에너지 수요를 줄이는 정치적 해방을 공격적으로 추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석유기업의 힘을 생각하면 그런 해방전략은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지질학자 얼 쿡은 30여년 전 집필한 '인간, 지구, 사회'에서 주요 석유 생산자가 결국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음. 넋이 나간 채로 에너지 폭포를 향해 이동하는 우리가 겪게 될 가장 큰 위험은 난파선의 잔해위로 기어올라온 기회주의자 무리가 우리에게서 민주정부를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느끼게 될 충격이다. 이들 무리는 에너지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으로 우리를 통제한다.
- 여러가지 삶의 지표를 관찰한 후 스밀은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 개인의 에너지 소비량이 연 7배럴 수준을 넘어서면, 이후 에너지 소비량이 더 늘어난다 해도 행복감이 늘지 않음. 오히려 17배럴을 넘어선 다음붜는 보답으로 얻는 행복감이 급감하기 시작. 스밀의 말을 빌리면, 지금 북미 사람들이 낭비하는 에너지의 3분의 1만 있어도 낮은 유아사망률이나 건강한 식단, 높은 기대수명, 좋은 집을 얻기에 충분하다. 정치적 자유에 대해 말하자면,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1.5배럴)을 넘어서면 에너지 소비증가와 정치적 자유는 거의 상관이 없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억압이 심한 사회 중 몇몇은 오히려 에너지 소비가 다소 높거나 아주 높은 편이다.
- 카톨릭 신학자이며 중세학자인 오스트리아 이반 일리치도 74년 똑같은 결론을 내림. 이 이단적 사상가는 에너지 분야의 가장 걸출한 논문으로 꼽히는 에너지와 자본에서 에너지 과소비는 강과 산과 숲을 파괴하듯 인간관계도 약화시킨다고 주장. 일리치는 에너지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는 결국 자유와 회복력과 독립성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 반대로 저에너지 사회는 걸을 기회라는 가장 오래된 자유를 보호하며 일상생활에서 선택과 참여의 폭을 넓혀준다고 주장. 저에너지 사회는 사람을 기준으로 건물을 세우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도 보행자의 생활을 고려해 배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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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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